소설리스트

〈 80화 〉간극. (80/220)



〈 80화 〉간극.

메디아는 계속 제자리를 오가며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소녀를 히스가 데려가는 것을 지켜보았던 그녀는 벨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만 있었다.

"대체 왜 부르신 걸까요."


그녀의 아버지가 소녀를 부를 이유라고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가 어머니와 닮았다는 점밖에 없기 때문에 메디아는 진정할 수가 없었다.  우려하는 상황이 일어날 것이라는 보장은 없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드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게 불안에 떨던 중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메디아는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벨카 씨!"
"악!"


그녀가 열어젖힌 문에 무언가가 부딪히는 느낌과 동시에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메디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앞에는 그녀의 아버지에게 불려갔었던 벨카가 놀란 눈으로 밑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 끝에는 코를 부여잡고 주저앉은 어셔가 있었다.

"이제는 조금 괜찮아?"
"끙, 아직도 좀 아파."


메디아는 소파를 차지하고 소녀의 무릎에 누워 간호를 받는 어셔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고작 문에 코를 부딪혔을 뿐인데 뭐가 그리 엄살이 심하냐고 불평하고 싶은 마음이 없던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별다른 말도 없이 문을 강하게 연 것은 그녀였으니 말이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실수였지만 초조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해버린 일이었다. 때문에 원래는 들일 생각도 없던 그를 그녀의 방에 들이게  것이다.

"정말이지 그렇게까지 해서  방에 들어오고 싶었나요?"
"네가 벨카를 데려가지만 않아도 볼일 없거든!"

그녀가 마음에도 없는 소리로 투덜거리자 어셔가 발끈했다. 메디아는 어쩐지 그건 그것대로 열이 받는다고 생각하면서도 물었다.

"그래서 벨카 씨는 저와 주무시니까 그렇다 쳐도 어셔 씨는 무슨 일로 찾아오셨나요?"
"벨카가 네 아빠한테 불려갔다고 해서 기다리다가 여기까지 데려다주러 온 거라고."

그의 말에 메디아는 잠깐 잊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아 참! 벨카 씨! 아버님께서 무슨 일로 부르셨던 건가요?"

그녀가 급하게 묻자 소녀는 오히려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사례를 줄 테니까 네 대화 상대가 되어달라던걸."
"제 대화 상대... 라구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에 메디아는 잠깐 잊고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지금까지 메디아에게 친구라 부를만한 이들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아버지는 대화 상대 혹은 시녀라는 명목으로 그녀 또래의 아이를 돈을 주고 고용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 아이들이 하는 일은 간단했다. 메디아와 놀아주고 대화하는 친구로서 행동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는  좋지 못했지만. 결국 메디아는 지금까지 혼자였으니까.

그러다 그녀는 식사를 함께 하다 아버지에게서 벨카와 어셔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대화 상대라도 괜찮을  같다는 말을 했던 것을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고용했던 아이와 최악의 형태로 헤어진  그녀의 아버지는 메디아에게 별다른 대화 상대를 붙여준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동안 잊고 지내왔던 것인데.

"...쭉 신경 쓰고 계셨던 걸까요."
"?"

메디아가 작게 중얼거리자 의아하게 바라보는 벨카의 모습에 그녀는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벨카 씨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대화 상대라는 거."


메디아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싶었지만 말끝이 떨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야 그런 식으로 고용되었던 아이들은 언제나 비슷했으니까. 처음에는 그녀와 친하게 지내는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부터는 그녀를 시기하며 괴롭히다 다른 사람에게 들켜서 떠나버리곤 했다. 소녀가 그럴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어쩌면 반대로 처음부터 그녀와 친구가 되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그랬다. 모두 메디아의 신분과 아버지만을 보고 다가올 뿐 아무도 그녀를 생각하는 아이는 없었고 조금이나마 친해졌다고 생각했던 아이에게 배신당하는 것도 익숙한 일이었으니까. 그러니 거부당해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하며 메디아가 눈을 꼭 감고 벨카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을 때였다. 그녀의 볼을 살며시 어루만지는 손길이 느껴진 건. 눈을 뜨자 보기만 해도 달큼한 금빛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서워하지 않아도 괜찮아. 너는 충분히 사랑스러운 아이니까. 오히려 나야말로 묻고 싶어. 내가 너의 친구가 되어도 괜찮을까?"

그녀를 다독여주는 그 따스한 빛에 녹아내린 마음이 울컥 쏟아질 것만 같아서 메디아는 웃었다. 그것이 눈물이 되어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네!"

그녀가 그 달콤한 제안을 거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모습을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있는 이가 있었다는 건 미처 깨닫지 못했다.


"벨카."
"읏!?"

소녀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던 어셔가 돌연 자리에서 일어나 이름을 부르자 돌아보는 벨카에게 쪽 소리가 나도록 가볍게 키스했다. 키스를 받은 벨카나  모습을 보고 있던 메디아라고 할  없이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만 보고 있자 자신이 해놓고도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해 붉어진 얼굴로 어셔가 외쳤다.

"말해두겠는데! 벨카는 내 거니까!"

그런 말을 남기고 어셔는 도망치듯 방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그리고 흐르는 침묵 속에서 소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메디아는 이내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하하!"


한동안 그녀의 방에선 웃음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저녁이 지나 지평선 너머로 저물어가던 태양이 결국 모습을 감추고 창밖으로 어둠이 내려앉아 잠들 시간이 찾아왔다. 메디아는 자신의 옆에 누워있는 벨카를 바라보며 헤실헤실 웃었다.

"우후후, 그렇게 사랑받고 계시다니. 정말로 부럽네요."
"우으, 놀리지 말아 줘."

아직까지 끄지 않아 은은하게 빛나는 촛불에 소녀가 몸을 웅크리는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다. 벨카의 모습이 어머니와 너무나 닮아있었던 탓에 어제는 아무 생각 없이 자버렸었지만 메디아는 누군가와 이렇게 한 침대에서 잠드는 것이 얼마 만인지 생각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는 단 한 명을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다. 그 한 명마저 아버지가 아니었고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상대였지만. 그녀는 언제나처럼 침대의 위쪽에 놓여있던 곰인형 하나를 품에 안았다.


"왜 그러시나요?"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금빛에 메디아가 물었다.


"그건 누구에게서?"
"아, 이건."


그제야 메디아는 벨카의 시선 끝에 그녀가 끌어안은 곰인형이 있는 것을 알았다. 항상은 아니지만 머리맡에 두고 있다 가끔씩 품에 안고 자고는 했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머님께 받았던 걸로 기억해요."


곰인형을 손으로 쓸어보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만큼 부드럽다기보다는 조금은 거친 털들의 감촉이 느껴졌다. 솔직히 이후로 선물 받았던 다른 인형들에 비하면 여러모로 낡고 헤져 거칠기까지 했다. 가끔씩 터져버린 부분을 꿰매어서 볼품없고 상처투성이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안고 자는 인형은 이것 하나뿐이다. 그러다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벨카 씨. 혹시 벨카 씨를 안고 자도 될까요?"

 인형이 싫은 건 아니었지만 솔직히 거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이제 그녀에겐 너무 작은 크기이기도 했고.


"그건."
"안 될, 까요?"

소녀가 그의 말에 망설이는 듯 시선을 이리저리 피하다 메디아의 집요한 시선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헤헤."

그러기가 무섭게 품으로 파고드는 그녀의 모습에 벨카는 어쩔 수 없다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메디아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녀가 소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노라면 비가 온 뒤의 정원처럼 싱그러우면서도 풋풋한 향기가 풍겼다. 규칙적으로 등을 두드리는 느낌이 따스하게 그녀를 품어준다.

"있잖아요. 벨카. 편하게 불러도 될까요?"
"응."


메디아는 잠기운의 힘을 빌려 얻어낸 성과가 기뻤다. 오늘은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수마에 몸을 맡겼다. 어느덧 자신의 품에서 잠이 든 그녀를 내려다보던 벨카는 그녀들 사이에 끼인 곰인형을 바라보았다.

"이 아이를 지켜주고 있었구나."

곰 인형의 목에 매인 리본에는 독특한 모양의 자수가 새겨져 있었다. 대각선으로 그여 평행선을 그리는 작은   개와 원래라면 만나지 못했을 작은 두 선을 이어주는 긴 선 하나가.

"어셔도 이런  좋아해 줄까?"


이윽고 소녀의  또한 스르르 감겼다. 그리고 얼마쯤 지났을까? 소리 없이 방문이 열리고 누군가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숨어들었다. 감히 어떤 자가 소녀들이 잠든 방안에 숨어들었는가 하니 메디아의 아버지, 아이올로스였다. 방에 숨어들었다면 무언가 목적이 있을 텐데도 그는 그저 의자 하나를 끌어와 앉아 잠이  소녀들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정확히는 벨카를 보며 그녀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메디아와 대화 상대가 되어주었으면 한다. 사례는 충분히 하지."

보면 볼수록 소녀에게서 겹치듯 떠오르는 아내의 모습을 필사적으로 외면하며 제 딸을 위한 선택을 했다. 이러면 조금이나마 그녀를  성에 더 묶어둘 수 있을까? 이게 정말로 딸을 위한 것인가? 그런 고민을 하면서도.


"대화 상대라는 건...?"
"말 그대로다. 메디아의 상대를 해주면 된다. 더 간단하게 말하자면 친구 노릇을 해주었으면 하는 거다."


그의 딸은 그에게 불평하거나 어리광 부리는 일이 없는 기특한 아이였지만 그것이 자신이 딸에겐 너무 불편한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에게 따뜻한 표정 같은  그녀를 잃은 뒤로 다시는 지을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항상 무표정에 딱딱하게 굳어있는 아비를 어떤 자식이 좋아할  있을까? 때문에 그는 딸에게 다가가기보다 멀리서 지켜보며 원하는 일을 해주는 것으로 만족했다. 아니, 이것도 변명이었다.


 딸에게서 아내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그녀를 잃은 날이 떠올라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으니까. 안 그래도 아내를 닮아 몸이 약한 딸이다. 혹시라도 그녀처럼 그를 두고 먼저 떠난다면? 그는 그것이 두려웠다. 어느 날부터 제 딸이 외로워한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친구를 만들어주려 했다. 애처롭게 그를 바라보는 딸의 시선을 외면한 채. 하지만 그 결과는 좋지 않았다. 매번 멍청한 아이들은  딸에게 상처만을 주었고 마지막 아이는 그가 생각해도 최악이었다.

그는 어설프게 메디아에게 친구를 만들어 주려는 일도 그만두게 되었다. 결국 아무런 수도 쓰지 못하고 병든 꽃처럼 시들어가는 딸을 지켜만 보던 나날이었다. 히스에게서 상단이 찾아왔다는 소식과 함께 아내를 닮은 소녀를 발견했다는 보고를 듣게 된 것은. 이렇게 직접 눈으로 본 소녀는 죽은 아내가 돌아왔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그녀와 닮아있다. 그런 소녀가 딸을 웃게 만들었다. 그래서 소녀에 대한 복잡한 마음도 뒤로하고 그런 제안을 했던 것인데.

"돈이라면 필요해. 하지만 그 아이의 친구가 된다는 이유로 돈을 받고 싶지는 않아."


돈이라면 일을 하면서 벌고 싶다며 소녀는 밖으로 나갔다. 그가 그녀를 붙잡을 틈조차 주지 않고.


"후우, 사샤. 나는 어쩌면 좋을까."


그는 아직도 그녀를 잊지 못하는데 책임져야 할 것도 해야만 하는 일도 너무 많았다. 외롭고 지쳐서 차라리 쓰러지고 싶은데 쓰러질 수도 없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다 이러고 있는 것조차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일어섰다. 그리고 서로를 껴안고 잠들어 있는 아이들을 보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사이좋게 잠든 모습이 친구보다는 모녀를 떠올리게 만드는 건 소녀에게서 아내를 비춰보고 있는 그의 문제이리라. 그렇게 방을 빠져나가려 했을 때였다.


"...아빠."


그를 부르는 작은 목소리에 방을 나서려던 걸음을 멈춰세웠다. 혹시 잠을 깨운 것인지 확인해 보면 여전히 잠들어 있는 아이들이 보였다.

"잠꼬대였나."


하긴 메디아가 그를 아버님이 아니라 친근하게 아빠라 부른 적은 정말 어렸을 적을 제외하곤 없었다. 이제 와서 그렇게 부를 리가. 오늘도 내일도 해야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이럴 시간에 모자란 잠을 보충하는 것이 효율적이었다. 그렇지 않는다면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 돼버릴 테니. 그는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레 메디아의 이마 부근을 쓸어주고 발걸음을 돌렸다. 그녀가 없는 이 세상이 하루하루 살아가기에도 벅찬 끔찍한 곳일지라도 그에겐 아직 미쳐선   이유가 남아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