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8화 〉간극. (78/220)



〈 78화 〉간극.

독대를 마치고 돌아온 도나르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어셔와 벨카, 시프를 불러 모았다.


"무슨 일인가요?"

그가 그들을 불러놓고도 시원하게 말을 못 하자 시프가 걱정스레 묻는다.

"후우, 그게 말이야. 아무래도 그 광산마을에서 우리끼리 느긋하게 사는 건 불가능할 것 같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어셔가 놀라서 말했다. 원래 그들은 오늘까지 성에서 머무르다 다시 밖으로 즉 난쟁이들이 모여살던 광산마을로 돌아갈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상단의 사람들은 광산마을로 갈 준비를 하고 있었고. 원래라면 그들도 그 안에 포함되어 마차에 타고 있어야 했지만.

"영주를 섬기는 기사의 가족은 성에 머무를 자격과 동시에 성에 머무를 의무를 얻는다는 게 문제야."
"그런. 도나르는 용병이 되기로 한 게 아니었나요?"
"그게 불가능하다는 거지."


시프가 의아해하자 도나르는 아이올로스와 나누었던 대화를 설명했다. 그는 원래 그럴 예정이었지만 남자는 그들이 잘못하면 적대적인 곳이나 범죄조직에 소속되면 골치 아파질 수도 있다는 우려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말도 안 돼요!"

어셔가 그런 억지가 어디 있냐며 소리쳤지만 도나르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또 말이 안 되는 게 아니라서 문제라고."

따로 섬기는 자가 없는 방랑 기사나 먹고 살길을 잃은 용병이 범죄 조직에 가담하게 되는 건 꽤 흔한 일이었다. 그러니 아이올로스가 그를 강제로 기사로 거둬들여도 할 말이 없었다. 때문에 불만이 있어도 참아야 했다.

"하지만 너희까지 그럴 의무는 없어."
"네?"
"아직 우리와 살기로 결정한 건 아니잖냐? 우리랑 같이 살면 좋긴 하지만 그러면 광산마을에서  수도 없고."


도나르의 말에 어셔는 뒤늦게 아직 함께 살자던 그와 시프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는 걸 떠올렸다. 지금까지 망설이다 그런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조차 잊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선택을 해야만 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원래와는 달라진 조건까지. 어셔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원래 살려고 했던 곳에서 살지 못한다는 건 아쉬운 일이었지만 도나르와 시프와 함께 산다면 여러 가지로 좋았다.

우선 도나르가 기사인 만큼 무력적으로 꿀리는 일은 드물 것이고 성 안에서 살게 되면서 몬스터에게 공격받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떨어져 살게 된다면 어떤가? 무력적인 부분을 어셔 혼자서 해결해야 했다. 하지만 어셔는 로기와의 대련에서 깨달았다. 자신은 어른들은커녕  또래의 아이조차 이기는 것도 힘들 정도로 약하다는걸. 그렇다면 스스로 훈련을 하면서 힘을 길러야 하는데 돈까지 벌어야 한다.

그것이 가능한가? 설령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소녀를 지킬 수 있는가? 또한 도나르 같은 전문가에게 훈련을 받는 것보다 효율적인가? 어느 것 하나 유리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 어셔는 분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신세를 지다 보면 그들에게 미움받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민폐를 끼치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어셔는 벨카를 보았다. 언제나처럼 그를 바라보던 소녀의 금빛과 마주치고 어셔는 결심했다.


"저는..."


결국 도나르가 이끄는 마차들이 성을 빠져나갔다. 그는 소녀와 손을 꼭 마주 잡고 이것이 정말 올바른 선택이었나 고민했다. 아직도 남아있는 불안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다 사라지기를 반복했지만 이미 선택한 것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흐응, 그래서. 성에 남게 되신 건가요?"

그런 그들에게 메디아가 다가와 콕콕 찌르듯이 물었다.

"보면 알잖아. 그걸 또 굳이 물어보고 있어."
"사실 좀 의외라서요. 어셔 씨와 벨카 씨가 파시페니아 출신이 아니라고 하셔서 성을 떠나실까 봐 걱정했었는데. 도나르 경이 가족으로 받아주셨다니."
"가족은 무슨 그냥 동거하는 거라고."


민폐를 끼치는 건 싫었지만 그렇다고 벨카를 지키지 못하는 것은 더욱 싫었다. 그저 그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생판 남을 정말로 걱정한다고 해도 같이 살자고 하는 분은 드물답니다?"
"...나도 안다고 그런 것쯤은."


그런 그를 핀잔하듯 말하는 메디아에 어셔는 부루퉁하게 답했다. 그런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순수하게 믿기엔 그나마 가족 같은이라 믿었던 이에게 배신 당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렇게 마차들이 전부 떠나가고 어셔는 소녀와 함께 돌아섰다.

"어디로 가시는 건가요?"
"어디로 가든 네가 무슨 상관인데?"
"그야 이곳은 제 아버님의 집인걸요? 저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한마디를 지는 일이 없는 그녀의 모습에 어셔는 혀를 찼다.


"그냥 말한테 먹이 주러 간다."

도나르가 좀 잊지 말라며 신신당부하고 갔기에 밖으로 나온  겸사겸사 먹이를 주러 가는 것이었다. 때문에 메디아의 반응을 예상치 못했다.


"네? 말이라구요? 힐디스비니가 아니라요?"
"말이 말이지. 그거 말고 또 뭐가 있어."
"혹시 저도 볼 수 있나요? 아니, 보게 해주세요!"
"그냥 따라오겠다고 할 땐 언제고. 마음대로 해."

아직 어셔는 말이 얼마나 귀한 동물인지 실감하지 못했기에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곧 공터에 덩그러니 매어진 말을 발견한 메디아가 환호했다.


"와아, 이게 말이란 거군요! 저도 말로만 들었었는데. 힐디스비니랑은 다르게 작고 털이 많네요."
-푸르릉!
"야! 너 걔 만지면!"
"네? 왜요?"


그는 말이 혹시라도 메디아를 물어버릴까. 급하게 다가갔지만 물기는커녕 얌전히 그녀의 쓰다듬을 받는 말의 모습이 보였다. 심지어 기분이 좋은 듯 꼬리까지 털레털레 흔드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이 어이가 없어 바라만 보고 있으니 메디아가 물었다.

"혹시 어셔 씨와 벨카 씨가 살던 숲에는 이런 말이 많았나요?"
"난 그런 것까지는  모르는데."

그보다는 벨카가 잘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해 그녀를 힐긋 바라보니 벨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 숲은 그런 아이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으니까."
"정말로 그런 곳이 있다니 언젠가 저도 한 번 가보고 싶은걸요."
"그건 안돼."

소녀의 단호한 말에 메디아는 물론 어셔도 놀라 그녀를 보았다.


"한 번 숲을 떠난 아이는 다시는 숲으로 돌아갈 수 없어."


벨카는 먼 곳을 바라보는 것처럼 초점이 흐려진 금빛으로 메디아를 보고 있었다. 그것도 한순간 이내 원래대로 돌아온 소녀의 금빛이었지만 그럼에도 그 목소리만큼은 뚜렷하게 남았다.


"...그리고 그곳은  이상 사람이 살만한 곳이  되는걸."
"아, 몬스터가 습격했다고 했었죠."

메디아는 어셔가 했던 말을 떠올렸는지 무안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시작된 어색한 침묵 속 어셔는 어떻게 이 상황을 해결해야 할지 고민하다 그녀가 쓰다듬고 있는 말이 보였다.


"너,  녀석 한  타볼래?"


저 녀석의 성격이 조금 마음에 걸리지만 쓰다듬어도 물지도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을 보면 괜찮을 것 같았다.

"정말요!?"


다행히 메디아는 무척이나 기뻐했다.

"성안이 아무리 넓어도 달릴 수는 없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좋아요! 힐디스비니는 너무 크고 무서워서 가까이 갈 엄두도  나는걸요."

그녀는 금방이라도 말에 타고 싶어 발을 동동 굴렀지만 말이 힐디스비니보다 작다고는 해도 그들에 비하면 큰 크기였다. 때문에 메디아가 통통 뛰어봐도 말의 털에 손이 미끄러지기만 할 뿐 올라갈 수는 없었다.

"잠깐만 기다려봐 올려줄 테니까."
"네? 그런... 앗!"

어셔는 아무런 생각 없이 벨카를 껴안아 올릴 때처럼 그녀를 말위에 올려주었다. 그러자 메디아는 몸이 굳어버린 것처럼 뻣뻣해 보였지만 곧 자신의 앞에 말의 등이 보이는 것을 확인하고  위로 옮겨갔다. 무사히 말위에 탄 그녀는 어쩐지 붉어진 얼굴로 어셔를 내려다보며.

"혹시 노리고 하신 말씀이었나요?"
"뭐가?"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가 정말로 모르는 눈치이자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부우, 어셔."

이내 벨카가 불만스럽게 볼을 부풀리고 그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기자 어셔는 뒤늦게 메디아에게 한 일이 오해할만한 것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어셔는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난감해하다 결국 소녀까지 말에 태워주었다. 그리고 말을 이끌어주기 위해 말의 앞에  어셔는 말의 얼굴을 볼  있었다.

"너 기분 좋아 보인다?"

말의 표정이 음흉하다고 한다면 믿을 수 있을까 싶지만 그저 기분 탓이라 치부하기엔 이미 그동안의 행실이 있으니 무리였다.


-히이이이이힝!


말의 비명이 성 안을 울렸다. 말에 올라타있던 메디아는 놀란 표정으로  모습을 보았지만 이내 어셔가 이끄는 대로 얌전히 걷기 시작하는 말의 모습에 감탄했다.

"말은 때리면서 길들이는 건가 보군요!"
-푸릉?!

말은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듯했지만 안타깝게도 메디아는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이미 그녀는 말의 등위에 올라타서 보는 광경에 빠져 있었으니까.

"정말, 조금만  높은 곳에 올라왔을 뿐인데 느낌이 전혀 다르네요. 어른들은 모두 이런 느낌으로 사는 걸까요?"


메디아가 물었지만 어셔라고 해서 그런 걸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도 딱히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는지 조용히 말위에 타서 달라진 것 같은 경치를 즐겼다. 달가닥 거리는 말의 발굽 소리와 말의 부드럽다 못해 미끄럽기까지 한 털 아래에서 느껴지는 생명의 고동과 그 위에서 느끼는 바람에 메디아는 중독될 것 같았다. 그러다 그녀의  뒤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에 웃었다. 그녀가 떨어질까 걱정스러운 듯 붙잡는 손길이 있었던 것이다.

"떨어지면 위험하니까. 조심하는 게 좋아."


그리고 들려오는 조곤조곤한 목소리. 메디아는  상냥한 소녀의 말에 다시 한번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워낙 어렸을 때 돌아가신 터라 제대로 기억나는 추억은 몇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나는 것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어째서일까? 어쩐지 의자에 앉아있던 어머니의 무릎에 앉아 등을 기대는 것처럼 포근하고 따스한 감각이 가슴을 채웠다.

"벨카 씨. 혹시 아시나요?"
"?"

소녀는 답하지 않았지만 왜 부르냐는 듯 의아해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이렇게 벨카 씨와 있으면 어쩐지 어머님과 함께 있는 기분이 들어요."


사실은 메디아도 알고 있었다. 아무리 소녀가 그리운 모습을 하고 있다 해도 벨카가 그녀의 어머니일 수는 없다는 건 알고 있음에도.

"그럴 리가 없는데 말이에요."


자꾸만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져서 메디아는 혼란스러웠다. 함께하면 할수록 약해지는 듯한 마음이 두려우면서도 그 치명적일 정도로 달콤한 감각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래서 오늘도 그들이 성을 떠나지 않기를 바라며 노심초사하며 몰래 어셔와 벨카를 지켜보지 않았던가? 그래서 그들이 성에 남는다는 걸 알았을 때. 그 이유가 이곳에 고용된 도나르 경이 그들을 가족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라는  알았을 때 메디아는 환호하며 매달릴 뻔한 것을 꾹 참아야 했었다.

그 뒤로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그저 메디아의 뒤에 있던 벨카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었을 뿐. 그것이 소녀의 어설픈 위로라는  눈치챈 메디아는 쓰게 웃었다. 그래, 이 감각이 혀끝이 아릴만큼 너무나 달콤했다. 벨카를 좋아하고 걱정하는 어셔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말을 타고 성을 조금 돌아다녔다고 생각했는데. 어느덧 저물어가는 하늘을 발견한 그들은 말을 원래 있던 곳에 묶어두었다.


말이 애처롭게 부르는 것 같았지만 아직 마구간은 만들지도 않았고 예정도 없었기에 말에게 주어진  여러 장의 모포와 여물 뿐이다. 힐디스비니의 마구간은 말에겐 너무 크고 괴롭힘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따로 두기로 한 것이다. 내일까지는 말을 위해 마구간을 만들어달라 부탁하기로 하고 그들은 성으로 돌아왔다.


"후아아, 그냥 말을 타고 살짝 돌아다녔을 뿐인데도 피곤하네요."


덩치가 작은 말만 타고 다녀도 이렇게 피곤한데 기사들은 어떻게 그렇게  힐디스비니를 타고 다니는지 모르겠다며 메디아는 새삼 기사들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현재 그녀는 벨카와 함께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있었다.


"야!  또 벨카 데리고 들어갔지!"


어셔의 경우 밖에서 쿵쿵 거리고 있었지만 말이다.

"어차피 방도 따로 쓰시면서 뭘 그러시나요?"

이후에는 벨카와 어셔가 도나르의 가족으로 취급되는 만큼 남녀가 나누어진 손님 방이 아닌 가신들이 머무르는 방을 배정받겠지만 적어도 지금 배정된 건 아니었기에 오늘까지는 방을 따로 써야 했다.

"그리고 저희끼리 씻고 식사를 하러 갈 생각이니까. 어셔 씨도 씻고 오시던가 먼저 가 있으시지 그러세요?"
"아오! 진짜!"

밖에서 쿵쿵 거리며 멀어지는 어셔의 목소리를 들으며 메디아는 쿡쿡 웃었다.


"어셔를 너무 놀리진 말아 줘."
"후후, 하지만 너무 재미있는걸요."


개인적인 마음이 없다고는   없었지만 어셔의 반응이 워낙 재미있어서 자꾸만 놀리게 되는 메디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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