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간극.
은발의 남자가 복도를 걷고 있다.
"훌륭하군."
그가 그의 휘하에 있던 기사들과 도나르들의 대련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사실 가재가 불완전한 상태였다고 가정해도 가재를 죽이고 그 껍데기를 전리품으로 가져왔다는 점에서 이미 그들의 능력은 증명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란투아에서도 가재를 잡은 전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보다 열악한 상황에서 보다 온전하게 껍데기를 입수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럼에도 그들을 대련시켰던 건 그들의 실력을 직접 그의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지나치게 훌륭하다는 게 문제입니다."
그의 옆을 걷던 히스가 덧붙이듯 말했다. 그의 보좌관의 말대로였다. 훌륭해도 적당히라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파시페니아의 위명을 너무 얕봤던 것일까? 설마 정예라 자부하던 근위대가 단 한 명도 승리하지 못할 줄은 예상치 못했다. 그냥 진 것이라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어땠나? 그레고리?"
그는 그의 함께 걷던 또 다른 이에게 물었다. 그는 자신의 시찰을 함께한 수행원이기도 했고 방금 전 도나르와 승부를 겨룬 기사이기도 했다.
"단순히 훌륭하다는 말로도 부족합니다. 보통 방법으로는 이길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와 히스도 나름 안목이 있었지만 아무렴 당사자가 저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의미가 남달랐기에 히스가 표정을 굳혔다.
"저들을 정말 받아들이실 생각이십니까?"
기사의 작위를 준다는 건 적어도 땅을 다스리는 영주나 왕의 입장에선 가신으로 삼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단순한 용병을 고용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들의 무력을 사는 대신 그들의 가족이나 실생활을 책임져 주어야 하는데 그것이 가족을 반쯤 담보로 삼는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나름 공정한 거래라고 할 수 있었다. 무력으로 배신할 우려가 적으니까.
"그들에게 가족이 있는 자는 소수였습니다."
저만한 실력의 기사들을 고용하는 건 좋다. 영지민을 지킬 수 있는 무력은 강하면 강할수록 나쁠 것이 없으니까. 그러나 문제는 저들에게 가족을 가졌다고 할만한 이들이 너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 말은 즉 그 무력을 통제할 고삐가 없다는 말과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히스는 그들이 탐탁지 않았다.
"통제할 수 없는 힘은 없느니만 못합니다."
"그레고리의 의견은 어떻지?"
그는 히스의 말을 듣다 이어서 그레고리에게 물었다.
"저는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유는?"
"그들을 지켜본 바. 반기를 들만한 자들은 아니었습니다."
"사람은 언젠가 바뀌기 마련이다. 그리고 고작 이틀 동안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어떠한 자들인지 판단을 내리기엔 이르다 생각한다만."
남자가 인상을 찌푸리자 그레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것만이 이유는 아닙니다. 그들의 실력은 기사로서 더할 나위 없이 뛰어나죠. 그들의 노하우를 공유하거나 겨루다 보면 기사들의 평균도 올라가게 될 겁니다."
"계속해라."
"또한 아무런 조치 없이 그들을 내버려 둔다면 필시 다른 자들의 눈에 들 겁니다. 그 정도의 실력은 감춘다고 감출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특기를 살려서 용병이 된다면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을 눈여겨보게 될 자들 중에는 타 영지의 인간도 있을지도 모르고 최악의 경우 영지 내에 자리하고 있을 범죄조직에 가담하는 것이었다. 그레고리는 그것을 가장 우려했다.
"그러니까 차라리 손안에 두고 지켜보자는 겁니까? 그레고리 경."
"예, 그렇습니다."
히스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이유라면 그들도 납득할 수 있었다. 그렇게 결론이 내려진 듯했을 때였다. 복도의 모퉁이에서 튀어나온 작은 인영이 그와 부딪힌 것은.
"읏!"
남자에겐 무언가 부딪혔다는 것을 간신히 알 수 있을 정도의 가벼운 충격이었지만 상대는 그렇지 못한 듯 튕겨져 나가는 모습과 동시에 붉은빛의 실들이 흩날리는 모습에 남자는 생각하기도 전에 손을 뻗어 넘어질 뻔한 상대를 잡고 있었다. 그와 부딪힌 상대는 이번에 상단과 함께 온 소녀였다. 그의 손에 잡힌 소녀의 허리가 너무나 가늘어 꼭 바스러질 것만 같았다. 넘어질 것이라 생각하고 눈을 꼭 감고 있던 소녀가 의아하게 눈을 뜬다.
"...?"
그리고 마주치는 금빛에 남자는 잠깐 숨을 멈추었다. 역시나 닮아도 너무나 닮아있었다. 애써 무시하고 있었던 사실이건만 이렇게 가까이서 마주하면 무시하고 싶어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가 그녀를 너무 오래 잡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건 소녀가 부담스러운 듯 시선을 피하며 꼼지락거리다 그의 손에서 벗어나면서였다. 이내 소녀는 말없이 고개를 숙여 그에게 감사를 표하고는 그와 부딪히면서 떨어진 작은 병을 주워들고 타다닷 도망치듯 사라져버렸다.
그는 차마 미련을 놓지 못하고 멀어지는 소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디론가 급하게 달려가는 소녀의 뒷모습이 어릴 적 그와 술래잡기를 하고 놀았던 그녀의 뒷모습과 겹쳐 보였다. 어찌하여 간신히 외면하고 있던 그녀와의 추억을 이렇게 떠올리게 만드는가? 소녀에게 잘못이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단지 닮았을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소녀에게서 풍겨오는 추억의 향기를 놓지 못했다.
"하녀들이 하는 이야기는 들어 보았습니다만, 정말로 마님과 많이 닮았군요."
"...그래."
또한 그것이 그만의 생각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럴지도 모른다. 그녀를 기억하는 모두가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기에 더욱 미련을 놓을 수가 없는 것이다. 소녀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던 그는 이내 그리운 향기를 맡았다. 마치 다른 풀 내음과도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더 쌉싸름하고 건조한 풀잎의 향기. 최근에는 단 한 번도 맡아본 적이 없던 그 향기에 그는 소녀가 잠시나마 머물렀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초록빛 가루가 조금 쏟아져 있었다. 그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한 줌도 되지 않는 초록빛 가루를 그러모아 쥐었다. 정말, 이게 정말로 그가 아는 그것이라면...
"그레고리, 손가락 끝에 상처를 내어라. 피만 살짝 배어 나오는 수준이면 된다."
"예."
그의 명령에 그레고리는 곧바로 건틀릿을 벗고 본인의 손가락 끝에 단검을 찔렀다. 얕게 피가 배어 나오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방금 주워든 초록빛 가루를 그의 상처에 뿌렸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빠르게 사라지는 상처. 얕게 베인 것이었다지만 확실하게 그곳에 존재했던 상처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상처가?"
"이건 설마 마님의?"
그레고리가 놀라고 그것을 본 히스가 짐작되는 것이 있는 듯 그를 보았다.
"그래, 무미야다."
이 약의 존재를 아는 이들은 정말로 얼마 없으리라. 어지간히 마녀의 호의를 받지 않는 이상에야 구경할 수도 없는 물건일 테니까. 아마 그녀가 아니었더라면 그도 평생 모르고 살았을 물건이리라.
"그렇다는 건 그 소녀도..."
"그만, 아직 확신하기엔 이르다."
그는 히스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것을 직접 말하기라도 한다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테니까. 정작 그렇게 말하는 그 또한 이미 확신하고 있었기에 야속한 일이었다. 그는 떨리는 손을 꽉 쥐었다.
"사샤의 방에 다녀오지."
그는 자신의 생각이 틀렸기를 바라면서도 맞으면 좋겠다는 모순적인 감정에 스스로가 신물이 났다. 곧 오찬이 시작될 시간이다.
"...."
사샤의 방에서 그의 생각을 확신시켜줄 혹은 부정해 줄 물건을 찾아들어 히스에게 전해준 그는 만찬장에 들어섰다. 그는 어렵지 않게 소녀가 있는 곳을 찾아낼 수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은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었으니까. 하물며 그와 같은 은발이 그 옆에 있다면 모르는 척하는 것이 더 힘들었다.
"즐거워 보이는군."
그의 딸은 소녀와 그 옆의 소년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있었다. 그건 정말로 드문 모습이었기에 그는 시선을 어떤 의미로든 그곳에 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그가 왔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는 메디아를 보았다.
"그 아이들이 마음에 드느냐?"
메디아는 그의 물음이 의외인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 의연하게 말했다.
"네, 저런 아이들이라면 대화 상대로 괜찮을 것 같아요."
"그런가."
되도록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려는 것이 보였지만 이 바닥에서 몇 년을 살았던가. 혹시라도 어울리지 말라 이야기할까 안절부절하는 제 딸의 모습은 공들이지 않아도 쉽게 눈에 들어왔다. 온갖 능구렁이와 늙은 너구리들을 상대해왔던 그에게 메디아의 행동은 정말로 귀여운 것이었다. 그와는 별개로 제 아비에게조차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모습은 그를 씁쓸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지만 그는 뭐라 할 수 없었다.
스스로가 생각해봐도 그는 메디아에게 썩 좋은 아비가 아니었으니까. 그의 보좌관, 히스에게 그녀의 생활 전반을 보고받고 되도록 그녀가 알아챌 수 없는 먼 곳에서 지켜보는 것만이 전부였다. 함께 저녁 식사를 할 때도 의무적으로 하루가 어땠는지 물어보는 정도가 부녀간의 대화의 전부였으니. 그 와중에도 그는 메디아와 눈을 마주치는 일이 없었다. 아내보다는 그를 더 많이 닮은 제 딸이었으나 그 자수정 같은 눈동자만큼은 제 아내와 닮은 것이었기 때문에.
그 이후로 그는 메디아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더 말해봐야 불안하게 만들 뿐이라고 생각했기에. 역시나 메디아는 그의 눈치를 보다가 안심한 듯 한숨을 내쉰다. 그 한숨에 섞인 아쉬운 감정을 그는 모른척했다. 어쩌면 제 딸의 친구가 될지도 모를 소녀에게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는데 이제 와서 잘 해보고자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는 아직도 아내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때 만찬장의 문이 열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히스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잠시 몰려들었지만 이내 관심을 잃고 식사에 집중하는 그들. 하지만 그만큼은 히스와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마침 히스가 그에게 오는 경로에 소녀와 소년이 식사를 하는 곳이 있었다. 히스는 여느 때와 같은 무표정으로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지만 장갑을 낀 그의 손에는 투명한 보석이 박힌 펜던트가 들려있었다. 그것을 다른 이가 볼 수 없게 교묘하게 쥐고서 그에게 다가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가 식사를 하던 손은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느려져 있었다. 모든 신경이 히스가 들고 있는 펜던트에 집중되었다. 히스의 걸음걸이가 느린 편도 아니었건만 세상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처럼 모든 것이 느려 보인다. 이윽고 히스가 소녀가 있는 곳을 스쳐 지나간 순간이었다. 펜던트의 보석은 그녀와 같은 색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손에 힘이 풀려 포크를 떨어트릴 뻔했다.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소녀는 마녀였다.
이 무슨 얄궂은 운명이란 말인가? 그는 더 이상 소녀와 그녀를 구분할 수 없을 것이라는 걸 직감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오찬이 끝난 후 도나르는 남자와 따로 대면하는 중이었다. 그의 뒤에는 수행원이 있었지만 거의 독대라 봐도 좋았다. 그 이유는 그들의 고용에 대한 것 때문이었다. 사실 처음부터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남자는 그들을 고용하기로 결정했다. 성과에 따라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수도 있지만 반대의 경우 불이익을 볼 수 있다는 건 당연한 것이니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도나르의 경우였다.
그는 이곳에 남아 기사가 되기보다는 용병으로 살아가길 원했는데. 남자가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간단한 이야기다. 자네들 같은 인재들을 놓지고 싶지 않은 것도 있지만 영지에 내버려 두기엔 어떻게 행동할지 알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그건!"
"또한 자네가 그들의 리더라는 것이 더 문제지. 다른 이들이라면 그나마 선처해 줄 수 있지만 자네가 빠지면 다른 이들의 통제와 통솔은 어떻게 하라는 거지?"
도나르는 남자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면 순조롭게 성벽을 통과한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었다. 어쩌면 그대로 문전박대를 당해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그들을 통솔해온 그가 쏙 빠지는 것도 남자는 있어선 곤란한 일이라 생각했겠지. 그 이상을 바라는 건 과할 수 있었다.
"그래도 이곳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성과에 따라 따로 영지를 하사할 수도 있다. 몇 년이 걸릴지 알 수 없지만 마음에 드는 곳이 있다면 미리 말하는 게 좋을 거다."
결국 그는 남자의 말에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제안을 무시하고 용병이 된다고 해도 이곳은 그의 앞마당. 무슨 방법을 쓸지 알 수가 없었다. 또한 그가 계약을 지켜주기만 한다면 이만큼 안정적인 일도 드물 테니까.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하지. 도나르 경."
도나르는 그의 가신으로서 예의를 차려 답했다.
"...저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이올로스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