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간극.
"파시페니아의 기사분들은 정말로 대단하시네요!"
"그렇게 대단한가?"
기사들의 대련이 끝이 나고 남은 시간. 메디아는 자연스럽게 어셔와 벨카에게 다가와 감탄을 터뜨렸다. 정작 어셔는 제대로 실감할 수 없었는데 말이다.
"어셔 씨는 같은 곳에서 오셔서 잘 모르실지 모르겠지만 정말로 대단한 거라구요!"
그녀의 말에 의하면 도나르를 비롯한 이들이 상대한 건 이 영지를 지키는 기사들 중에서도 정예들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이들을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승리했다는 건 정말로 보통 실력이 아니라는 뜻이란 모양이다.
"역시 드래곤도 상대할 수 있다는 말은 허언이 아니었어요!"
어셔는 여전히 감탄하며 호들갑을 떠는 메디아의 모습을 바라보다 그녀의 착각을 하나 고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건 상관없는데 나랑 벨카는 딱히 파시페니아에서 온건 아닌데."
그러자 놀란 토끼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메디아.
"네? 그럼 어디서..."
"어디라고 콕 짚어서 말하기는 힘들고 사방이 거대한 숲으로 둘러싸인 구석진 시골이었어."
어셔는 그녀가 멋대로 착각한 것인데 이걸 굳이 말해야 하는가 싶긴 했지만 알고도 놔두는 건 속이는 것 같아서 말했다. 별것 아닌 시골에서 왔다는 걸 알면 무시하지 않을까? 걱정하긴 했지만 그런 걸로 상대가 무시한다면 차라리 그대로 관계를 끊는 편이 더 좋을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숲,으로 둘러싸인 시골이라고요?"
아니나 다를까 굳어지는 그녀의 표정에 실망을 느꼈을 때였다.
"숲이라면 나무가 엄청나게 많은 곳을 말하는 거죠?"
"어, 어? 그런데."
생각했던 것과는 어딘가 다른 반응에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거짓말하는 거 아니죠? 진짜로 그런 곳이 있다고요?!"
"그렇다니까."
그는 메디아가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숲이 그냥 숲이지 또 뭐가 있단 말인가?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는 시골이었던지라 더욱 그랬다.
"벨카 씨! 어셔 씨의 말이 정말 사실인가요?""
"응."
그의 말을 믿지 못하는지 소녀의 대답까지 들은 그녀는 놀라워했다.
"정말, 그런 곳이 현재에도 남아있다니 신기해요."
"뭐? 숲이?"
어셔는 메디아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고작해야 숲이었다. 그는 숲을 당연하게 여기며 나무를 베는 어른들을 도우며 살아왔었고 그곳에서 나무란 넘쳐나는 것이었으니까. 그중에 특별하다고 여겼던 건 벨카와 만났던 느티나무뿐이었는데 말이다. 지금은 사라져버렸지만.
"어셔 씨가 세상 물정을 모르는 건 그런 곳에서 살았기 때문이었나 보네요."
"아! 진짜! 그게 뭐!"
"이거 봐요."
"뭐가!?"
삐끗하면 그를 놀리는 듯한 메디아의 말에 화를 내고 있으니 그녀가 웃는다.
"아무튼 숲이라는 건 어셔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귀하고 보기 힘든 곳이랍니다?"
그녀가 알려주는 숲에 대한 이야기는 어셔는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였다. 수많은 나무로 이루어진 울창한 숲은 전설이나 고대에서나 전해져 내려오는 낙원 같은 곳이라고 말이다.
"낙원...?"
어셔가 메디아의 낙원이라는 말에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곳을 낙원이라고 말한다면 이곳은 천국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은데. 그의 표정을 본 메디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 거짓말은 아니었나 보군요! 거기도 썩 좋은 곳은 아니었나 봐요?"
"좋은 곳이긴 했어.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면 그곳에서 평생 살았어도 좋았을 거야."
그래도 생명이 흘러넘치던 거대한 숲에 한해서라면 그곳만큼 살기 좋은 곳을 없었을 것이라고 어셔는 자신할 수 있었다. 파릇파릇한 풀 내음과 농익은 열매들의 향기,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의 파도 소리와 비가 오는 날이면 바닥에 스며들던 흙 내음은 떨쳐내기엔 너무나 그리운 향기들이다.
"문제요?"
하지만 메디아의 물음과 동시에 떠오르는 악몽과도 같은 광경이 떠오른다. 마스카피르의 뒤엉키는 살색과 마을 사람들의 아이를 대신해 희생되었던 마리 누나, 마을 사람들의 욕구를 해소하는 도구로 살아가던 릴리, 그 마을 사람들의 끔찍한 전통까지. 그 외에도 너무 많은 것들이 떠올라 토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걸 그녀에게 전부 말해주는 건 무리였다. 그것들을 차마 입에 담고 싶지도 않았기에.
"몬스터들이 마을을 습격했거든."
"...그래서 파시페니아 분들과 함께?"
어셔의 말에 안타까우면서도 실수한 것 같은 표정을 짓는 메디아의 모습을 보니 그는 입안이 씁쓸해졌다. 그런 마을이 괴멸된 건 안타까워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렇게 침묵이 감돌던 때. 저 멀리서 도나르가 그를 부르며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아직 점심 전까지 시간이 남았으니 훈련을 할 생각인 것 같았다. 어셔는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났다.
"그럼 난 훈련하러 가볼게."
그렇게 도착한 곳에는 역시 도나르와 로기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가 훈련을 하는 동안은 쭉 이 인원으로 고정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도나르가 주는 가검을 쥐었다.
"우선 너에게 가장 중요한 건 자세를 외우는 거다."
"자세요?"
도나르는 로기에게도 가검을 주며 말을 잇는다.
"그래, 자세. 검술의 기본은 모두 자세에서 시작하거든."
원래는 체력부터 훈련시킬 생각이었지만 체력은 딱히 문제가 되어 보이진 않고 훈련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늘 것이라고 한다.
"자, 로기, 맞춰 줄 테니까 나와 대련을 해보자. 기사와 할 때랑은 다르게 느린 템포로 보여줄 테니까. 어셔는 어떻게 하는지 잘 봐라."
로기와 도나르가 가검을 들고 서로를 겨눈다. 검을 품에 안은 것 같기도 한 같은 자세였다. 칼끝을 서로에게 겨누는 모습은 연습이라 해도 달라지지 않는 것일까? 여전히 위험천만한 모습이다. 이어서 두 사람의 검이 맞붙는다. 하지만 이전 기사와의 대련 때와는 다르게 그 움직임은 확연히 느려 보였다. 그래도 덩치의 차이가 있어서 도나르가 금방 이길 것이라 생각했는데 로기는 생각보다 오래 버텼다.
심지어 아무리 날이 없는 가검이라지만 검날을 손으로 잡고 도나르의 검을 버티는 모습을 보면 기가 질릴 정도였다. 그것도 도나르가 봐준 것이기 때문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로기가 시원하게 졌으면 했던 어셔는 못마땅했다. 어쨌든 대련은 로기의 검을 도나르가 잡아채 빼앗는 것으로 끝이 났다.
"자, 이번에는 확실하게 보였지? 어땠냐?"
"검을 막 휘두르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네요."
"그리고 또."
"음..., 생각보다 몸을 많이 쓰는 것 같아요."
그는 어셔에게 더 느낀 것은 없느냐 물었지만 지금 어셔가 느낀 것이라곤 저 두 가지가 전부였다.
"아무래도 자세부터 가르쳐 주는 게 더 좋았나?"
그러자 도나르는 이상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정말 그가 가르쳐주는 걸 믿어도 되는지 어셔는 고민이 되었다.
"어쩔 수 없지. 로기가 자세를 보여줄 테니 그대로 따라 해봐."
왜 하필이면 그 녀석을 따라 하라는 건지 불만이었지만 어셔는 군소리 없이 녀석을 따라 했다. 이해하기 힘들고 검을 아래로 내리는 자세도 있었지만 로기가 취하는 자세들은 전부 어셔가 그와 대련했을 때 취하던 자세들과 같았다.
"검은 휘두르는 것보다는 자세에서 자세로 바꾸는 것만으로도 상대의 공격을 방어하는 것과 동시에 공격하는 것이 가능해. 멋스럽게 휘두르기만 한다면 그건 몽둥이를 쓰는 것과도 다름이 없지."
검술의 원리와 다루는 자세만 대충 알고 있어도 길거리에 나도는 시정잡배 정도는 이길 수 있을 것이라며 도나르는 말했다.
"예를 들어 어제 너와 로기의 대련처럼 말이다. 그런 녀석들도 로기와 싸운다면 그런 결과밖에 안 나올 거다."
그럼 그가 시정잡배와 다를 것이 없다는 소리란 말인가? 어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기분은 나빴지만 싸우는 방법을 배워본 적이 없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특히 검을 휘둘러서 상대를 치고 곧바로 뒤로 빼면서 마구 휘두르는 건 정말로 길거리 싸움 정도나 해본 녀석이다. 그게 얼마나 불리한 행위인지 어제 느꼈지?"
그건 그랬다. 검을 휘두른 다음 막힌 것을 알고 바로 빼려고 했지만 곧바로 그의 검에 달라붙듯 뒤쫓는 로기의 검에 얼마나 당황했던가? 접착제 같은 것이라도 붙여놓은 듯 끈덕지게 달라붙어서 그의 검을 중심으로 돌아 뒷날로 그를 후려치던 검에 어안이 벙벙했었다.
"검은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빈틈은 많아지고 오히려 검의 무게에 휘둘리기 마련이다. 그건 즉 적에게 목숨을 내어주는 꼴이라고."
그의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어제의 자신이 로기와의 대련에서 얼마나 바보 같은 행동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특히 장검은 말이야. 몬스터의 갑피는커녕 인간이 만든 철갑조차 베지 못해. 철로 된 검으로 견고한 철갑을 벤다는 건 동화 속의 이야기일 뿐이다."
"하아, 그럼 왜 쓰는 건데요?"
"장검의 특징을 잘 봐. 끝이 날카롭고 얇잖아?"
"...그러네요?"
비록 가검이지만 검의 특징은 그대로였다.
"장검은 그런 점을 이용해 몬스터의 갑피 틈 아니면 상대의 투구 사이나 갑옷의 틈, 이음매를 노려 쑤시는 거다."
오늘 대련에서 도나르가 상대 투구의 틈을 노려서 이긴 것도 그런 것이었나 보다.
"아니면 이렇게. 거꾸로 들어서 칼자루의 끝, 퍼멀이나 크로스 가드로 타격하는 거다."
도나르가 검을 거꾸로 쥐어 검의 날부분을 잡는 모습에 어셔는 경악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손을 베이지 않아요?"
지금 들고 있는 건 가검이었지만 실전에서는 진검을 쓸 텐데 진검을 들고 저런 짓을 해도 된단 말인가?
"요령이 없으면 그렇지 하지만 그것도 가죽 장갑 정도만 끼면 문제가 없다고. 사실 이럴 바엔 메이스를 드는 편이 더 효율적이긴 하지만 기습에는 효과적이지."
그는 어셔를 놀리기라도 하듯 검을 잡고 휘휘 돌렸다.
"그리고 아까 내가 로기랑 싸울 때. 로기가 한 손으로 검신을 잡는 것도 봤을 거다."
"그냥 힘이 부쳐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것도 엄연한 기술이다. 오히려 힘 싸움을 벌이면 단순히 검자루를 쥐고 있는 것보다 훨씬 수월하게 상대의 검을 밀어낼 수 있다?"
그러고 보면 로기는 딱히 힘 싸움으로는 도나르에게 밀리지 않았다. 기이하게도 말이다.
"검술이란 건 단순한 힘 싸움이 아니야. 오히려 힘은 비중이 작아도 한참 작아. 중요한 건 기술과 숙련도, 센스다."
그는 곧 로기가 자세를 취하는 걸 멈추게 했다.
"마무리는 대련이지. 아직 한참 모자라겠지만 오늘 배운 걸 활용해 보라고?"
"잠깐만요! 벌써?"
"나도 웬만하면 곱게 가르치고 싶은데. 검술이란 게 결국 실전 경험과 요령이 필요하니 어쩔 수가 없다 야."
맞기 싫어서라도 요령을 알 게 될 테니 잘해보라는 도나르의 말에 어셔는 치를 떨며 로기와 대련을 했다. 물론 결과는 뻔하게도 어셔의 패배였다. 그래도 어제보다는 오래 버텼지만 어렸을 때부터 검술을 배웠을 로기에게 이제 막 검을 배우기 시작한 어셔가 이기는 건 무리였다.
"진짜, 더럽게 짜증 나네."
알고 있었다. 도나르가 직접 상대해 주지 않는 것만으로도 어셔를 한참 봐주고 있다는 건. 하지만 차라리 그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 그는 이 상황이 짜증 났다. 소중한 소녀에게 상처를 준 상대에게 쪽도 못 쓰고 당하는 건 덜 아프다고 해도 너무나 굴욕적이었다. 그렇게 어셔가 드러누워 언젠가는 반드시 이기겠다며 이를 갈고 있었을 때였다. 무언가 어셔의 볼을 쿡쿡 찌른다.
"...뭐 하냐?"
그것의 정체는 이곳을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메디아가 나뭇가지로 그를 찌르는 느낌이었다.
"죽었나 안 죽었나 확인하고 있는데요?"
"말하고 있는 거 보면 몰라?!"
"어머, 너무 너덜너덜해서 착각한 줄 알았죠."
그녀의 장난에 화를 내고 있으니 메디아와 함께 있었을 소녀가 떠올랐다.
"그런데 벨카는?"
"약을 가지고 오신다던데요?"
그 말에 어셔는 어쩐지 불안해졌다.
"혹시 내가 대련하는 거 봤어?"
이미 정답을 알 것 같았지만 그것을 부정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에 물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그런 친절을 바라는 것은 무리였을까?
"당신이 실컷 깨지는 모습은 아주 잘 봐두었답니다~"
즐겁다는 듯이 그의 볼을 나뭇가지로 쿡쿡 누르는 메디아의 모습이 야속하기 그지없었다. 벨카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어셔는 수치스러운 마음에 소녀가 약을 들고 오기 전까지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메디아에게 나뭇가지로 쪼여야 했다. 왠지 까마귀에게 쪼이는 시체의 기분을 알 것 같은 감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