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5화 〉간극. (75/220)



〈 75화 〉간극.

어셔는 눈꺼풀을 간질이는 햇빛에 자신이 잠들어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침대에 누워 있다는 사실도. 그러다 생각해낸 건 그가 소녀와 함께 밤하늘을 구경했던 어젯밤의 일이다. 퍼뜩 끼어드는 위화감에 놀라 어셔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야 그는 소녀와 밤하늘을 구경하던 것까지는 기억하지만 그 이후 그의 방으로 돌아온 기억은 없었던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어제 그가 껄끄러움을 참고 로기와 함께 잠들었던  방이었다.

"그것도 꿈이었나?"

창밖에서 비쳐 들어오는 따스한 햇빛과 그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 지저귀는 새의 노랫소리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아서 그는 눈을 깜박였다. 그런 것치고는 지나치게 생생한 감각들이었는데. 소녀와 함께 바라보았던 밤하늘이 너무도 아름다워서 꿈이라는 걸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튼 잠에서 깨어난 그는 먼저 옆자리를 살폈다. 그곳에 잠들어 있었을 소년은 먼저 잠에서 깨어난 듯 이불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그 모습에 혀를 차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보다 이른 아침부터 도나르가 그를 훈련시키기 위해 부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꽤 늦은 오전까지 푹 잠들었던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다 그 남자가 도나르들의 실력을 확인하기로 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게 오늘이라 생각하니 그를 깨우지 않은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도 구경이라도 하고자 하는 생각에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을 때였다.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온 건.


"혹시 걔가 쟤 아니야?"
"아! 맞는 거 같은데?"

힐긋 바라보니 어제와는 다른 하녀들이 소곤거리며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하듯 귓속말을 나누고 있었다. 마침 잘 되었다 싶어서 그녀들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요."
"앗!? 왜, 왜 그러니?"

그가 딱히 놀라게 한 것 같지도 않은데 당황하는 그녀들의 모습이 이상하긴 했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고 도나르의 위치를 물었다.

"혹시 도나르 아저씨가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


벨카를 먼저 만나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꿈속이었다곤 해도 강해질 것이라 다짐했으니까.

"이름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타국에서 온 기사님들이라면 아직 식사 중이실 거야."


친절하게 대답해  그녀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그는 만찬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오늘따라 지나가는 하녀들마다 그를 마주칠 때마다 속삭이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 뭔가 찝찝한 느낌을 받으면서도 만찬장에 도착하니 아니나 다를까 식사 중인 상단의 사람들이 보였다. 그중에 시프의 옆에서 대화를 나누는 도나르에게 다가갔다.

"저는  안 깨운 거예요?"


그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지만 그럼에도 그를 두고 먼저 밥을 먹으러 온 그가 서운했다.

"오, 일어났냐? 늦게 일어나면 늦게 일어나는 대로 식사를 가져다줬을 텐데."
"켁, 그냥 더 자고 올 걸 그랬네요."
"이미 일어났으니까 먹고 가라."

좀 더 늦게 일어났으면 아침을 더 편하게 먹을  있었다고 생각하니 괜히 손해를 본 느낌이다. 그렇게 그의 옆에 앉아서 식사를 시작하려는 찰나. 타다닷 그의 곁으로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있었다. 그 소리에 돌아보면 그곳에는 역시나 벨카가 있다.


"어셔, 좋은 아침."
"벨카도 잘 잤어?"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것만으로도 낯선 이곳이 편안해지는 기분에 수프로 컬컬한 목을 먼저 적시고 있으면 그녀가 그에게 근처에 있던 샐러드를 접시에 담아 밀어주었다.


"응, 이것도."


그 외에 이것저것 눈에 띈다 싶은 것이 있으면 밀어주는 벨카에 어셔는 곤란함을 느끼면서도 먹지 못할 양은 아니었던지라 주는 대로 받아먹었다. 소녀는 그에게 뭐든지 챙겨주려 했으니까. 그래도 어쩐지 그녀가 먹는 양은 언제나 적은  같아 근처에 있던 샐러드를 포크로 찍어 벨카에게 내밀었다.

"자, 벨카도. 아까부터 나만 먹고 있잖아."

소녀가 식사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에 비하면 양이 정말로 적은 편이라 걱정이 되었다. 원래 적게 먹는다는 걸 알고 있어도 좀 더 먹어주었으면 했다. 그래도 이렇게 내밀어 주면 별다른 거부감 없이 먹어준다는 것이 다행이다. 그녀가 샐러드를 받아먹으며 오물거리는 것을 확인하고 그가 제 몫의 음식을 먹고 있었을 때였다.


"역시  분은 사귀는 사이신 거죠?"
"푸컥!"


그의 앞에서 들려온 말에 사레가 들렸다. 때문에 컥컥거리며 물을 찾으니 소녀가 컵에 물을 담아 건넨다. 그 물을 받아 마시며 겨우 진정하니 언젠가부터 맞은편에서 턱을 괴고 그들을 지켜보던 메디아가 보였다.


"너, 너! 네가  여기 있어?!"
"어머, 제가 여기 있으면 안 될 이유라도?"
"네 자리는 저 앞이었잖아!"


그녀는 태연하게 말하지만 그녀는 적어도 저 앞에 있는 상석에 앉아있어야 했다. 덕분에 방해받지 않고 벨카와 식사하던 것이었는데.


"저는 벨카 씨가 당신에게 올 때부터 같이 와있었답니다? 그런데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셨다니 무시당한  알았다구요?"

정작 그렇게 말하는 메디아의 얼굴은 싱글벙글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 흔히 말해서 이런 걸 두고 너만 보인다고 하는 거죠? 그쵸?"


다 알고 있으면서 방금 생각났다는 듯이 말하는 그녀의 모습이 참으로 가증스러웠다.

"그리고 탓할 거면 아침 식사에 늦은 당신을 탓하세요. 저는 이미  먹었지만 벨카 씨는 당신이 올 때까지 한 입도 먹지 않고 기다렸으니까요."

그건 또 몰랐던 일이다. 소녀가 다가왔을 때 막 온 줄 알았는데.

"그래서 두 분은 사귀시는 거죠?"
"윽!  그 이야기냐."

집요하게 물어보는 메디아가 성가셨지만 딱히 감출 생각도 이유도 없었기에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넌 그걸 어떻게 아는 건데?"


그는 만난  얼마나 되었다고 그런 걸 눈치채고 물어보는 그녀가 신기했다. 그러자 메디아는 오히려 놀랍다는 듯.


"혹시 비밀이었나요? 그렇게 티가 났는데?"
"윽, 비밀은 아니지만 대체 어떻게 안 건데?"
"그런  말하지 않아도  보면 척 이죠. 두 분이 사귄다는 건 이미 누구나 다 알고 있을걸요?"


그 말에 반사적으로 주변을 돌아보면 누구라고 할 것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아침 식사를 하기엔 제법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들은 얼마 없었지만 이쪽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들이  그러니 더 부끄럽다. 딱히 숨길 생각은 없었지만 다 알고 있었다니.


"게다가 아무리 둔감한 사람이라도 오늘 아침에 두 분의 모습을 보았다면 알 수밖에 없다구요?"
"오늘 아침? 오늘 아침이라면 난 방에서..."
"아이참! 중앙 복도에서 두 분이서 나란히 기대어서 잠들어 있었던 걸 누가 모르나요?"
"...꿈이 아니었어?"

어셔는 뒤늦게 상황을 파악했다. 어제는 너무 정신이 없어서 그 모든 걸 꿈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 충격이 뒤통수를 때리는 것 같았다.

"잠깐만! 그럼 난 왜 내 방에서 깨어난 건데?"
"그대로 있다간 감기가 걸릴 것 같아서. 내가 데려다줬었는데."


그의 의문을 해결해  건 도나르였다.

"후후, 아마 이 성 전체에 두 분이 사귄다는 소식이 쫙 퍼져있을 거예요."

그렇다면 지금까지 느끼고 있었던 모든 찝찝한 느낌이 이해가 되었다. 자신이 방으로 돌아간 기억이 없는 것도 하녀들이 자신을 보고 소곤거렸던 것도. 뒤늦게 소녀와 자신을 바라보는 뜨뜻미지근한 시선들의 정체를 알게 되니 이보다 부끄러울 순 없었다. 그렇게 아침 식사가 끝나고 아직은 서늘한 공기가 머무는 오전. 사람들은  나 할 것 없이 넓은 연무장에 몰려들었다.


"이제 다 모인 것 같습니다."

그곳에는 은발의 남자가 의자에 앉아 연무장을 보고 있었다. 그의 옆에 있던 깐깐한 난쟁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리자 남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군말할 필요 없이 시작하도록 하지. 무기는 검을 위주로. 기사 시험을 기준으로 1:1의 대련으로 간단하게 맞춘다. 다른 것도 시험해 보고 싶지 않은 건 아니지만 시간이 남지 않는군."

남자가 제시한 조건은 말 그대로 간단한 것이었다. 도나르를 비롯한 상단의 마부들이 남자의 기사들과 겨루어 이기면 된다는 정도의 이야기였으니까. 가장 먼저 도나르가 상대편으로 나서는 기사와 대치하는 모습에 어셔는 꿀꺽 침을 삼켰다. 원래 그는 혼자서라도 훈련을 하기 위해 이 시합을 참관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도나르가 상급자의 대련을 보면서 배울 수 있는 것도 있다고 들었기에 소녀와 함께 참관하게  것이다.

도나르가 이기리란 보장은 없었지만 그래도 이곳까지 오면서 한솥밥을 먹으며 친근해진 만큼 그가 이기기를 바라며 대련이 시작되길 기다렸다. 먼저 깐깐한 난쟁이의 신호에 따라 검을 뽑은 도나르와 상대 기사는 각자 준비 자세를 취했다. 도나르는  발을 넓게 벌리고 검 끝을 상대방을 향한 채 검을 제 품에 껴안는 듯한 자세였고 상대 기사는 검을 어깨 위로 들어 올린 상태로 도나르에게  끝을 향하는 자세다.


 다 날카로운 검 끝을 서로에게 향하는 위험하고도 아슬아슬한 상태. 그나마 대련용으로 만들어진 날이 없는 가검이라곤 하지만 그래도 철로 만들어진 것이고 둘의 자세에서 풍겨져 나오는 경험의 무게가 그것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마치 전쟁터에서 마주친 기사들이 이러한 모습일까? 긴장이 고조되는 사이 깐깐한 난쟁이의 시작 신호가 떨어지고 검들이 번쩍였다. 그건 그렇게밖에 부를 수 없을 만큼 빨라서 속도를 눈으로 좇을 수가 없었다.

검들이 부딪혔다 싶으면 떨어지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의 검에 접착제라도 붙여놓은 것처럼 검들은 떨어지지 않고 검신을 따라 마찰했다. 어셔는 그 모습에서 어렴풋이 어제 상대했던 로기의 모습을 보았다. 하지만 속도나 반응이 다르다  녀석의 검은 눈으로 좇을  있을 정도로 정형화된 움직임으로 느릿하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는데. 둘의 움직임은 잠깐 스쳐 지나가는 정도라 무슨 자세 같은 걸 취했는지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결국 어셔가 검의 움직임을 놓쳐버린 순간 승부는 이미 정해져있었다. 도나르의 검 끝이 상대의 투구의 틈새 앞에서 멈춰 서있었고 상대의 검은 크로스 가드에 가로막힌 모습이었다.  10초도 안 되는 긴박한 전투의 승자는 도나르였다. 중간 과정은 전혀 보이지 않았는데 결과만큼은 어셔가 로기에게 패배했던  모습과 닮아있었다. 시종일관 냉정한 모습의 남자가 놀란 모습을 보인 것도 그것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알 것 같냐?"
"너무 빨라서 뭐가 뭔지 보이지도 않았는데요."


대련을 마치고 돌아온 그에게 부루퉁하게 답했다. 뭐가 제대로 보였어야 감상을 늘어놓던가 하지 둘의 대련은 너무나 빠르고 순식간에 끝이 나서 뭔가를 알아차릴 새도 없었다.


"어, 일부러 장검을 잡았던 건데 아무것도  봤다고?"
"네, 아무것도."
"전혀?"
"전혀요."

어셔의 단호한 대답 때문일까? 도나르는 머리를 긁적이며 곤란해했다. 그리곤 한숨을 내쉬며.


"내가 가르치는 건 처음이라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모르겠다. 기본적인 자세는 가르쳐 줄 텐데. 나머지는 감각으로 익혀야 해서 말이다."


로기와 꾸준히 대련하는 것밖에 답이 없다는 그의 말에 어셔는 일그러지는 표정을 막을 수 없었다.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검술이라는  생각했던 것만큼 화려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수수하면서 생각 이상으로 복잡하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런 검술을 익히려면 경험을 쌓아야 한다는 소리인데 그렇다는 건 경험이 쌓이기 전까지 로기에게 맞아야 한다는 소리였으니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그럼 아저씨는 어떻게 배웠는데요?"
"...추천하지는 않는데. 일단 두들겨 맞다 보면 맞고 싶지 않아서라도 필사적으로 자세랑 감각을 익히게 되더라."
"...."

어셔는 얌전히 그가 가르치는 대로 배우기로 했다. 강해지고 싶은 건 사실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도나르가 몸을  만큼 두려워하는 훈련법으로 훈련하고 싶지는 않았다. 맞는 건 같지만 적어도 로기의 움직임은 읽을 수라도 있지 않은가? 그 후로 이어지는 다른 기사들의 대련도 다 도나르의 경우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신기한 것은 시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승자들이 공통적으로 도나르와 같은 일행이었다는 것이다.

그 일방적인 결과가 어찌나 놀라웠는지 상대로 나왔던 기사들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며 수군거리고 있었고 남자마저 놀라워하며 말했다.


"파시페니아의 기사들이 뛰어나다는 이야기는 허명이 아니라는 건 이쯤 되니 인정할 수밖에 없겠군. 우선은 마치고 오찬에서 다시 보도록 하지."

실력을 본다고 했던 것이 무색하게 대련은 대부분 짧으면 5초, 길어도 30초를 넘지 않아서 오전 중에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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