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4화 〉간극. 쏴아아, (74/220)

 



〈 74화 〉간극.

쏴아아, 하늘에 뿌리내린 나뭇가지에 자라난 나뭇잎들이 바람에 흔들려 소리를 내었다. 비록 푸른 하늘을 나뭇가지와 나뭇잎이 뒤덮고 있었지만  사이로 햇빛이 비쳐들어오며 볼을 어루만진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아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새 소녀의 금빛과 마주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고 그만을 바라봐 주는 더없이 사랑스러운 빛에 무심코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소녀의 뒤편에 있던 하늘에 뿌리내린 나뭇가지들과 나뭇잎들이 아무런 전조도 없이 붉은색의 액체가 되어 녹아내린 것은. 그들을 향해 쏟아지는 그 액체 때문에 눈을 감았지만 피가 그를 덮치는 듯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다시 눈을 떴을  들어온 광경은 조금 전까지 평화로웠던 느티나무의 아랫목이 맞는지 의문스러운 곳이었다. 주변을 둘러싼 숲과 커다란 느티나무, 소녀마저 사라진 피처럼 붉은 세계.


"벨카! 벨카!! 어디 있어?"

소녀를 찾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려 했지만 곧 움직일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언가 무거운 것에 단단히 붙잡혀 있는 듯한 감각에 아래를 본 순간 그는 볼 수 있었다.


"이, 이게 뭐야?"

무릎까지 올라오는 붉은 호수는 단순히 붉은색의 물이 아니었다. 진하고 끈적거리는 그 섬뜩한 느낌은 확실한 피였다. 그는  호수에서 발을 빼내려 했으나 역시 무언가에 붙잡혀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만을 알 수 있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이대로 있으면  된다는 불안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며 발버둥 치던 그때. 첨벙! 하고 무언가 빠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지평선 너머까지 붉은 피와 붉은 하늘로 가득한 일색의 세계. 피로 이루어진 호수는 여전히 고요했다. 아니 고요한 것처럼 보였다. 첨벙, 첨벙, 어디선가 그런 소리가 계속 들리는 듯하더니. 첨벙첨벙첨벙첨벙첨벙첨벙첨벙첨벙첨벙첨벙첨벙첨벙첨벙첨벙첨벙첨벙첨벙첨벙첨벙첨벙첨벙 사방에서 그런 소리가 쏟아지듯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고요한 피의 호수가 보여 이곳에서 발을 빼어내야 한다고 생각했던  순간이었다.


"어...?"

그는 곧 핏물에서 뻗어 나와 그의 손목을 붙잡은 하얀 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분명 핏물 속에서 뻗어 나온 손이건만 어느  하나 붉게 물든 구석이 없는 새하얗고 섬뜩한 흰 손. 나머지 한 손까지 핏물 속에서 그를 붙잡아 당기는 듯하더니 곧 그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렇게나 붉고 붉은 세상에서도 물빛으로 반짝이는 머리카락, 하얀 피부,  세상과 같은 색으로 그를 바라보는 나신의 여인. 그 모습을 어셔는 기억하고 있었다.

"포하...티?"

그의 중얼거림이 정답이라 말하듯 싱긋 웃은 포하티는 그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아니, 그것을 다가왔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녀는 엄청나게 커다랗게 변해있었다. 그를 한입에 삼킬 수 있을 정도로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그녀가 입을 쩌억 벌린다. 그와 동시에 분홍색으로 꿈틀거리는 육벽이 눈앞에 가득 차오르고 이내 통째로 삼켜졌다.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지 파악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잠시 까맣게 물든 시야  빛이 보였다. 다시 시야를 되찾았을 즘 그는 어딘지 모를 공간에 누워 있었다. 일어나려고 했지만 몸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수많은 포하티들이 그를 깔아뭉개듯 붙잡고 있었으니까. 그녀들의 소름 끼치는 붉은 눈동자들이 그를 바라보고 음탕하게 웃는다. 아니 심지어 몇몇은 그의 몸으로 자위를 하듯 자신의 음부에 그의 신체를 이용해 쾌락을 채우고 있었고 그의 물건 또한  다른 포하티에 의해 삼켜져 있었다.

""기분 좋아?""

하나의 말을 같으면서도 다른 여러 목소리가 겹치며 울린다. 기분이 좋은가?   없었다. 그의 물건을 삼키고 그의 온몸을 점령한 그녀들이 너무도 무겁다.


""계속, 계속, 우리랑 같이 있는 거야.""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끼고 있었지만 어째선지 의문을 말할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상할 정도로 고요하게 그녀들에게 몸을 맡기며 음욕과 신음 속에 잠겨있었을 때.

"으긋!!"

어디에선가 이질적인 신음이 들려왔다. 그녀들의 음탕하고 만족스러운 느낌과는 다른 괴롭고 아픔이 가득한 소리.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슬픔으로 물든 금빛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가 누군가에게 범해지며 신음하고 있었다. 몽롱했던 정신이 번개에 지져진 것처럼 퍼뜩 들었다. 가야 했다. 소녀에게 가야만 했다. 하지만 그의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디를 가려는 거야? 우리와 함께하기로 했잖아? 너는 이곳에서 영원히 빠져나갈 수 없어.""


포하티들이 그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그는 미동도 하지 않는 몸을 필사적으로 움직이려 노력하며 범해지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뒤편 괴로워하는 소녀를 범하는 파렴치한 자를 확인하기 위해. 그리고 그 정체를 확인한 순간 그는 경악했다. 그곳에는 살갗이 까져 내장을 드러내고 남아 있는 피부마저 너덜너덜하고 멍으로 가득한 맥이 소녀의 가녀린 몸을 부숴버릴 듯 붙잡고 있었다.


"우윽! 아아...!"

소녀가 비명과도 같은 신음을 내뱉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물기가 가득한 금빛이 그에게 도움을 바라고 있었다. 그녀의 가녀린 몸이 남자의 움직임에 따라 갈수록 거세게 격렬하게 흔들린다. 소녀의 음문이 그의 것이 아닌 남성의 것을 강제로 받아들이는 모습이 생생하게 눈앞으로 다가온 듯했다. 가야 한다. 소녀를 구하러 가야만 한다고 더더욱 발버둥 쳐 보았으나 그럴수록 움직이지 않는 몸이 절망을 주었다.

""안돼. 너는 우리의 것이니까.""

그리고 맥이 씨익 웃었다고 생각한 순간 그것은 다른 이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뒤바뀐 모습은 황야에 버려두고 온 판이었다. 그가 소녀를 범하고 있다. 아니, 자세히 보니 판이 아니었다. 계속해서 흔들리는 시야. 흐릿한 느낌 속에서 형체를 되찾은 그는 분명 로기였다. 로기가 소녀를 붙잡고 제 물건으로 그녀의 안에 새하얀 정액을 쏟아내고 있었다. 역시 아무리 움직여도 그의 몸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악을 쓰며 비명을 질렀지만 비명조차 침묵 속에 삼켜져 소리 하나 내지 못했다. 그 끔찍한 세상 속에서 그는 눈앞에 드리우는 그림자를 발견했다. 그녀는 자신의 음문을 한껏 벌리고 그의 얼굴에 들이미는 포하티였다. 그 안쪽으로 드러난 입안과 같은 육벽이 꿈틀거리는 모습을 본 순간 그는 그곳에 삼켜져 버리고 말았다.


"크하악!!"

그가 드디어 비명을 토해냈을 때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후였다.


"허억! 여, 여기는?"

익숙하지 않은 방이었다. 고급스럽지는 않지만 깔끔하고 기본적인 가구들로 채워진 이곳이 그가 배정받았던 성의 손님방 중 하나라는 것을 알  있었다. 창문을 바라보면 아직 아침조차 찾아오지 않았다. 달빛조차 들지 않아 어두운 새벽이었다. 문득 어두컴컴한 공간에 공포가 밀려와 꺼져있던 촛불을 땀투성이가 된 손으로 간신히 켜보면 맞은편에 누워 곤히 잠든 로기의 모습이 보였다. 곧 분노가 밀려와 방금 막 켠 촛불로 내려치려다 정신을 되찾았다.

"악몽, 이었나."


그것을 단순한 꿈이라 말하기엔 형언할 수 없는 괴로운 감각이었다. 심장이 아플 정도로 두근거렸고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불쾌했다. 꿈이라 생각할  없을 만큼 생생한  광경들이 떠오를 때마다. 으슬으슬 몸이 떨린다. 이대로는 답답한 나머지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아서 어셔는 방을 빠져나왔다. 복도는 어둠으로 가득해 제대로 보이지 않아 그는 촛불을 들고 복도로 나왔다.

"으으, 추워."


싸늘하게 식은 공기에 덜덜 몸이 떨려왔지만 그런 공기가  막혀버린 숨을 상쾌하게 뚫어주었기에 그는 그대로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복도에는 드문드문 촛불이 켜져 있어 그나마 밝은 편이었다.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더 시원한 공기를 들이켜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창문의 밖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뿐이다. 그런 곳에 얼굴을 내밀었다간 그대로 무언가에게 끌어당겨져 암흑 속에 빠져버릴 것만 같아서 차마 고개를 내밀  없었다.


그렇게 꿈과 현실의 경계를 헤매며 가시지 않은 공포에 얼마나 몸을 떨고 있었을까?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그는 중앙의 홀에 와있었다. 이 앞으로 조금만 더 가면 여자들이 배정된 방이었던가. 소녀를 보러 가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밤을 새워 경비를 서는 이들이 보였다. 저들에게 괜한 오해를 사서 잡히면 메디아에게 놀림을 당할 거 같아서 그가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을 때였다. 어둠 속에 숨어있던 달빛이 창을 비추었다.

"어셔?"
"벨카."

그와 동시에 그는 창문 앞에 서있던 소녀를 발견하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비틀비틀 스스로가 생각해도 제정신이라 하기 힘든 상태로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모습을 보면 꺼려질 법한데도 소녀는 비틀거리는 그를 안아주었다. 달큼한 향기가 꿈속에서 느꼈던 비릿하고 불쾌한 냄새를 날려주었다. 어셔가 아무 말도 없이 그녀에게 안긴지 오랜 시간이 지났건만 벨카는 자신의 품에 안긴 그의 등을 가볍게 토닥여주었다.


"악몽이라도 꾼 거야?"
"응, 정말... 정말로 무서워서."

이토록 따스한 그녀를 지켜주지도 손을 뻗지도 못한 채 그의 모든 것이 삼켜져 잃어버리는 끔찍한 악몽이었다. 지금 이렇게 소녀의 품에 안겨 그녀의 모습을 확인하지 못했다면 밤새 불안에 몸을 떨었을지도 모른다. 조금씩 흘러내린 눈물을 애써 감추고 소녀에게 물었다.

"그런데 벨카는? 왜 여기에 있어?"

아직 사람들이 깨어나기엔 한참은 이른 시간이었다. 게다가 메디아가 같이 자겠다며 데리고 갔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왜 소녀는 이곳에 혼자 있었던 것일까? 그러자 벨카는 움찔 몸을 떠는가 싶더니.


"그게, 어셔가 없으니까... 외로워서."


그녀의 목소리는 갈수록 작아지다 끝에 이르러선 희미해졌지만 사방이 조용한 지금 그의 귀에 확실하게 들려왔다.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방금 전까지는 너무나 무섭고 괴로웠는데. 소녀를 만나고 나니 방금 꾸었던 악몽이 달아난 것 같다.


"우우, 비웃지 말아 줘."
"비웃는 게 아니라. 그냥, 기뻐서 그래."
"기뻐?"

그래, 그녀가 이렇게 자신의 곁에 있는데 기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어셔가 기쁘다면. 나도 기뻐."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소녀가 미소 지었다. 그 모습을 마주한 어셔는 그만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얼굴을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입술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 살짝 닿았다 떨어진 입술 때문이었을까? 소녀가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 이내  하고 달아오른다.


"아으으, 어셔...!"

원망스러운 듯하지만 밉지 않게 바라보는 소녀의 금빛. 어셔는 토라진 벨카를 달래고 나란히 서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진 바라보는 것조차 두려웠던 창밖은 환한 달빛에 비쳐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달빛이 너무 밝은 탓인지 별은 얼마 보이지 않았지만 커다란 달을 중심으로 희미하지만 커다랗고 둥그런 무지개가 빛나고 있었다. 그 모습이 하늘의 저편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는 무언가의 거대한 눈동자처럼 보였다.

"예쁘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어셔는 중얼거렸다. 그동안 밤하늘의 여러 모습을 보아왔지만 손에 꼽을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럼 조금만 더 구경하다가 들어갈까?"

그런 소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서있는 것에 지쳐 나란히 복도에 앉아 서로에게 기대었다. 그러면서도 눈은 달과 달이 두른 무지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악몽의 내용이 다시금 떠오른다. 그에게 도움을 바라던 금빛이 떠올랐다. 스스로를 지킬만한 힘이 없기에 강제로 범해지던 소녀의 금빛에 가득한 아픔을.  모습을 바라만 봐야 했던 고통을.

"벨카."
"왜?"


그의 부름에 소녀는 어김없이 대답해 주었다.


"나, 강해질게. 강해져서 반드시 지켜줄 테니까."

다시는 그 고통을 겪고 싶지 않았다. 다시는 소녀를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로기와의 대련에서 뼈저리게 느낀  무력감과 두려움을 기억하고 꿈과 함께 되새겼다. 아무도 감히 그녀에게 손을 댈 수 없도록. 강해져서  누구도 넘볼  없게. 그는 다짐했다.

"...응."

그의 다짐에 소녀는 더없이 기쁘다는 듯 웃어주었다. 두려움과 공포, 불쾌함으로 점철되어 있던 밤이 점차 상냥함에 물들어 추억이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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