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3화 〉여름의 철새. (73/220)



〈 73화 〉여름의 철새.

"...그래서 얘랑 싸워보라고요?"

어셔는 자신의 앞에선 소년의 모습을 노려보면서 도나르에게 물었다. 그의 제안으로 수련을 받기로 한 어셔가 도나르를 따라가니 나온 곳은 성 안에 마련되어 있던 넓은 공터였다. 그의 말을 들어보니 원래 연무장으로 사용되는 곳은 아니지만 허락을 받아서 임시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다만 주변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 아무래도 너를 봐주려면 일단 비슷한 또래랑 대련을 시켜보고 가늠하는 게 제일 좋을  같다고 생각했거든."
"그 비슷한 또래가 얘라는 거죠?"
"그렇지."


문제는 그 적당한 또래라는 것이 로기라는 것이지만 꼴에 죄책감은 있는지 그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었지만 어셔의 입장에선 그게 더 가증스러워 보였다. 사실 이건 도나르가 둘을 생각해서 결정한 일이었다. 어셔가 이런 일은 처음이니만큼 원래는   만만한 아이들을 고를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경쟁심을 부추기는 편이 효율이 좋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너는 경각심이 부족한  같아서 말이다."

그의 말을 듣고 따라온 것을 보면 아주 없는 건 아닌  같았지만 먼저 스스로 단련하지 않고 제안을 받은 뒤에야 깨달았다는 점에서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점에서 로기는 어셔에게 여러모로 좋은 상대였다. 아이들이 말은 말하지 않았지만 셋 사이에 흐르는 공기는 같이 지내다 보면 누구라도 알  있을 만큼 경직되어 있었다. 처음엔 소녀가 낯설어하거나 어셔도 경계를 하는 수준에서 그쳤기에 신경 쓰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 때문이었을까? 어느 순간부터 단순하게 아이들끼리 싸웠다고 보기엔 어려운 수준까지 악화되어 있었다. 심지어 그렇게 된 것이 판의 일이 있었을 때가 아니라 판이 황야에 버려지고 난 뒤라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그는 무언가 또 일이 있었다는 걸 알아챈 것이다. 어젯밤에는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오늘 만찬이 끝났을  로기를 붙잡고 어셔와 벨카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었다.

당연하다고 해야 할지 로기는 입을 꾹 다물고 이야기하려 하지 않았지만 계속 추궁하니 결국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알게 된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로기가 충동을 참지 못하고 다시 소녀를 범했었다는 사실을 듣고 말았으니까. 그제야 그는 모든 것을 이해할  있었다. 그는 화를 내며 혼을 내야 할지 아니면 이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을지 고민하다 차분하게 말했었다.

"네 나이 대라면 그런 거에 호기심을 가지는 것도 당연하지. 그게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 알려줄 사람도 없고 이해하기도 힘들었을 테니까. 판의 꾀임에 넘어가버렸던 것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이번 일은...."

그러나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죄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충동적으로 그리고 강제로 그런 일을 한 것은 비슷한 일을 겪은 약혼자가 있는 입장에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는 마지막으로 같은 나라 출신이자 정이 많이 들었던 아이를 대함에 있어서 어른으로서 마지막 훈계를 해야만 했다. 그것이 정말 올바른 방법인지는 도나르도 알 수 없었지만.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는 없겠다. 우선 자리는 마련할 테니까. 그 후에는 네가 알아서 해라. 사과를 하던 두드려 맞던 어떻게 하던 상관하지 않을 테니."

그리하여 이렇게 된 것이다. 이대로라면 칼부림이라도 날것 같아서 해결할 방법을 고민했고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싸우는 것이 당연한 상황이라면 아예 판을 깔아주자고. 차라리 대련이란 이름 하에 중재하는 것이 혹시라도 일어날 사고를 방지할 수 있다고 여겼다. 일단 싸우고 나면 서로에게 남은 앙금이 조금은 풀릴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그의 동료들이 연무장으로 사용하는 곳과는 별개로 이 공터를 빌린 것이다. 둘이서 마음껏 싸울 수 있도록.


이건 어셔의 싸움 실력이나 신체능력을 보기 위함도 있었지만 어느 쪽이 이겨도 조금은 이익이 있었다. 만약 어셔가 이긴다면 로기의 죄책감을 덜어낼 수 있겠지만 로기가 이긴다면 어셔는 경각심을 가지고 필사적으로 단련할 테니까. 하지만 도나르는 내심 로기가 이길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어셔는 힘이 좀 강한 시골 소년이었지만 로기는 파시페니아에서 전문적으로 훈련을 받은 유망주였던 소년이니까.

그는 어셔에게 사이즈가 맞을 법한 보호구를 가져와 입혔다. 주로 기사가 사용하는 플레이트 메일은 비용과 효율의 문제로 주문 제작하지 않는 이상에야 건장한 성인용 밖에 없지만 가죽 보호대는 기사를 꿈꾸는 아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꽤 있었으니까. 로기 또한 동일한 조건이었다. 무기는 둘의 신체에 걸맞은 크기의 가검이다.


"...."


어셔는 아무  없이 로기를 노려보았다. 처음에는 벨카의 말도 있었고 그나마 실수라 생각할 수 있었기에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소녀가 울 것 같은 얼굴로 로기와 있었던 사실을 말해왔을 때. 어떤 기분이었던가? 지금까지 맥과 판의 일을 겪어오면서도 상황이 따라주지 않아 억눌려 있던 감정이 그 원인 중 하나와 마주하고 있으니 부글부글 끓다 못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최소한의 인내심을 가지고 도나르의 말을 기다렸다.


"그럼 시작해라."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신호가 떨어진 이상 참을 이유는 없었다. 그는 곧바로 가검을 들어 로기의 머리를 치려 했지만 녀석이 검을 가로로 들어 머리를 막았다. 물이 흐르듯 자연스러운 모습이 제법 그럴싸해 보였다. 힘 자체는 비등비등한 것 같아 힘으로 눌러보려 해보지만 가검이 흔들리기만 할 뿐 움직이지는 않았고 이내 로기가 가검을 가볍게 비틀자 그것만으로도 어셔는 머리에 가검을 맞았다.

미리 쓰고 있던 보호구가 아니었다면 무척 아팠을 것이라는 건 보호구에 전해진 충격만으로도 충분했다. 첫 번째 승부는 그렇게 어이없이 끝나고 말았다.  대라도  때렸다면 억울하지는 않았을 텐데. 힘으로 눌러보려 했던 그의 가검은 크로스 가드에 막혀 있는 것만  수 있었다.

"그렇게 힘으로 찍어누르려고만 하니 당연히 휘둘리지.  더 생각해서 검을 움직여봐."


도나르는 그런 어셔를 냉정하게 지적하며 다시 승부할 것을 지시했다. 기본적인 훈련도 없이 왜 대련을 하라는 건지 의문도 들었지만 지금은 로기를 때려눕히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는 이번엔 검을 빠르게 휘둘러서 막을 수 없게 해보려 했다. 하지만 검이 맞닿았을 때 로기의 목검이 그의 가검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검을 다시 휘두르려 해보았지만 아차 하는 사이 허리를 맞았다.

"아무렇게나 휘두르면 그게 몽둥이지 검이냐? 다시."

 후에도 여러 번 시도해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노력해도 어셔는 로기에게 가검의 끄트머리 하나 스치지 못했다. 마치 몽둥이로 빈틈없는 방패를 계속 때리는 기분이었다. 서로 같은 가검이었는데도 말이다.

"하, 진짜  이렇게."

그래도 체력이 되는  도나르의 지시가 없어도 계속해서 로기에게 목검을 휘둘러 보았지만 아무런 소득도 없이 어셔가 먼저 지쳐 쓰러지고 말았다. 온몸이 저리고 아무리 보호구를 차고 있었다지만 가검을 맞은 이곳저곳이 아팠다. 생각은 이미 녀석을 흠씬 두들겨 팬 후였는데 정작 현실은  꼴이었다. 그는 점점 더 크기를 더해가는 억울함을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결국 눈물이 찔끔 흘러나왔다.

잘못하면 쏟아져 나올 것 같았지만 녀석 앞에서 울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이를 꽉 물고 눈을 부릅떴다.

"네가 지는  이상한 건 아니다. 이 녀석은 지금보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너보다 먼저 수련을 해왔으니까."

그런 어셔를 지켜보던 도나르의 말이었다.

"여행을 하고 싶으면 적어도 네 또래 애들은 이겨야 하지 않겠냐?"


그가 말하지 않아도 어셔는 비참할 만큼 잘 느끼고 있었다. 지금 상태로 여행을 계속하다가 무슨 일을 겪을지. 벨카를 강제로 범했던 이들 중에서 가장 약한 또래의 소년조차 이기지 못했다. 그렇다는 건 이대로 여행을 계속한다면 결과는 뻔했다. 소녀가 아름답다는 건 따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녀를 두고 흑심을 품을 이들이 고작 셋으로 끝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쯤은 금방 알 수 있다.

지금도 벨카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가 또 나타나지 않았던가? 어셔는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온몸이 땀에 젖은 것을 느꼈지만 그런 건 도저히 신경 쓰이지 않았다. 싸움이 처음이었다는 건 변명이 되지 않는다. 패배는 최악의 결과를 낳는다. 오로지 강해져야만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소녀를 위해서라도. 저 자식을 두들겨 패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오늘 하루 로기와의 대련은 어셔가 일방적으로 패배하면서 끝이 났다.


그날 저녁. 그들은 상단의 사람들끼리 저녁을 해먹을 생각이었지만 성의 하녀로부터 그들의 저녁이 이미 준비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부담스러움을 참고 만찬장으로 향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셔!?"

다만 도나르가 고려하지 못했던  벨카였다. 메디아에게 이끌려 먼저 만찬장에 와있던 그녀는 땀투성이가 된 몸만을 겨우 씻고  어셔를 발견하고 놀라서 다가왔다. 어찌나 지극한지 그의 얼굴을 붙잡고 이리저리 살펴보며 울상을 짓는다. 아무리 보호구를 차고 있었어도 일단 맞다 보니 생긴 상처는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다 이렇게?"
"어, 이건 그냥 훈련을 하느라."

어셔는 얼버무렸지만 눈이 도나르를 힐긋 바라보는 것까지는 어쩔  없었다.


'컥! 나를 죽일 생각이냐?'

그것을 알아차린 벨카의 원망스러운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니 도나르는 속으로 펄쩍 뛰었다. 어쩐 일인지 소녀는 가면을 하고 있지 않았고 그만큼 많은 이들의 시선을 모았다. 덕분에 시선에 물리적인 힘이 있다면 진작에 꿰뚫려 죽었을 만큼의 시선을 받은 그는 그날 저녁에 결국 체하고 말았다. 정작 어셔를 그렇게 만든 로기는 사람들의 틈에서 딱 붙어있는 벨카와 어셔를 바라보다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식사를 하다 만찬장을 떠났다.


"그런데 벨카, 가면은?"
"그건..."
"제가 들고 있답니다."

소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어느새 다가온 메디아가 즐겁게 말했다.

"야, 그걸 네가 왜 들고 있는데?"


그가 황당하게 바라보니 그녀는 쿡쿡 웃는다.


"하지만 이렇게 예쁜 얼굴을 가리고 사는 건 아깝잖아요? 그래서 성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가면을 벗어달라고 했죠."

어셔의 저녁 식사도 그리 편하지는 않았다. 너무 배가 고파서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신경조차 쓰지 않고 먹어치웠으니. 그러나 진짜 문제는 잠을 자는 시간이었다. 어셔는 벨카와 함께 잠을  생각이었지만.

"뭐? 여자방과 남자방이 따로라고?"
"점심 즘에 히스가 안내해 줬다는 것 같은데 듣지 못했나 봐요?"

메디아는 어셔의 말에 어깨를 으쓱이며.


"성내에서 갑자기 인구가 늘면 곤란하니까요. 무엇보다 그런 일을 하면 옆방에도 들리니까. 민폐랍니다?"

그는 결국 소녀와 다른 방을 사용하는 걸 납득해야 했다. 이곳에서 그런 일을 할 생각은 없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알고 있다고 말하는 듯한 메디아의 눈빛을 그들은 견디지 못했다.


"후후, 그럼 저희는 같이 잘까요?"
"저게 진짜!"


메디아에게 이끌려 가는 벨카의 모습을 보면서 어셔는 짜증만  뿐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견딜 수 없었던 건.

""....""

그와 로기가 같은 방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낮의 일이 떠올라 이를 갈았다. 누군가 일부러 의도한 것이라면 악의적이고 우연일 뿐이라면 참으로 얄궂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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