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여름의 철새.
"자, 이건 이렇게 하면 쉽게 잘린답니다."
메디아의 가위질에 줄기가 잘린 붉은 꽃은 그녀의 손에 들려 바구니에 들어갔다.
"벨카 씨도 한 번 해보시겠어요?"
"나는 꽃을 꺾어도 딱히 쓸 곳이 없는걸."
이어지는 권유에 소녀는 꽃을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헤에, 보통은 예쁘다는 이유로 꺾어가고 싶어 하는 분들이 대부분인데 말이죠."
"하지만 이대로 있는 편이 더 오래 살 테니까."
벨카가 그가 생각했던 것과 비슷한 말을 하니 어셔는 기분이 들떴다. 그러자 그를 가늘게 뜬 눈으로 본 메디아가 가위를 소녀에게 건넸다.
"필요하지 않은 게 문제라면 저를 도와준다 생각하시고 같이 꺾어주시면 안 될까요? 이맘때면 피는 꽃 몇 송이를 꺾어서 복도에 장식해 놓거든요."
"...응, 그런 거라면."
벨카는 그녀의 말에 납득한 듯 메디아가 했던 대로 구석에 피어난 꽃을 받치듯 조심스레 잡고 가위로 줄기를 잘랐다.
"와! 잘 하시네요! 화병에 꽂으려면 이 정도 길이가 적당하죠."
사소한 것을 과장스러울 정도로 칭찬하자 소녀가 어쩔 줄 모른다. 어셔는 들떠있던 기분이 바로 가라앉았다. 마을에서 여자들이 꽃을 꺾고 놀던 것과 그리 다르지도 않은 일인데 끼어들지도 못하고 보고만 있으니 왜 이리 석연찮은지 그도 알 수가 없었다.
"그게 무슨 대수라고. 적당한 길이로 자르면 그만이잖아."
"쯧쯧, 섬세함이 부족해요. 섬세함이."
메디아가 한심하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분명 어여쁘기 그지없는 모습인데 왜 이렇게 열이 받을까?
"그렇게 대수롭지 않으시다면 한 번 잘라 보시던가요?"
"이게 진짜! 벨카, 가위좀!"
어셔는 소녀에게서 가위를 건네받아 적당한 꽃을 찾았다. 그녀들은 외관을 해치지 않게 잘 보이지 않는 곳에 핀 꽃을 꺾었으니까. 마침 안쪽에 핀 꽃을 발견하고 그는 눈동냥으로 메디아가 잘랐던 꽃의 길이와 비슷하게 꽃을 꺾어 내밀었다.
"자! 이 정도면 됐지?"
"길이는 그럭저럭 봐줄 만하네요."
거 보아라 별로 힘들일 것도 없는 정말로 단순한 행위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그녀의 말은 달랐다.
"하지만 여길 봐요. 줄기의 마디를 따라 자르지 않으면 보기 싫은걸요?"
"별로 차이가 나지도 않는 거 같은데."
그게 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차피 꺾은 이상 거기서 거기인데 말이다.
"사실 아무런 의미도 없답니다?"
"뭐?"
"그냥 끼어들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아서?"
어셔가 할 말을 잃고 쳐다보니 메디아는 싱긋 웃으며 벨카를 데리고 계속 꽃을 꺾기 시작했다. 그는 뭐 이런 애가 다 있느냐 생각하면서 한숨을 내쉬다 불안이 생겨 물었다.
"그런데 이런 정원인데 함부로 꽃을 꺾으면 이 성의 주인이 화내지 않아?"
꽃은 세는 것이 힘들 정도로 많이 피어 있었고 정원의 미관을 해치지 않도록 눈에 잘 띄지 않는 것만을 꺾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 남자에게 꼬투리가 될까 불안했다.
"그런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죠."
그런 그가 우습다는 듯 메디아는 쿡쿡 웃으며 그를 보았다.
"그야 이 성의 주인이 제 아버님이신걸요?"
"하?"
어셔는 이제야 메디아의 머리카락과 만찬장에서 보았던 남자의 머리카락 색이 똑같다는 걸 알았다. 그럼에도 깨닫는 것이 늦은 이유는 분위기가 달라도 너무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 남자는 칼에 찔려도 피 한 방울 날 것 같지 않았는데. 그녀는 병약해 보이면서도 생동감이 넘쳐서 머리색을 제외하곤 닮은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남매가 아니라?"
무엇보다 그 남자가 상당히 젊어 보였으니까. 나이 차이가 나는 남매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머, 잘못하면 불경죄로 잡혀가니 아버님 앞에선 그런 말은 하지 않는 게 좋아요?"
"켁, 불경죄라니."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남자는 더 높은 사람인 모양이다. 그럴수록 불안감은 커져간다. 대체 왜 그가 소녀에게 관심을 보인단 말인가?
"이 정도면 충분하니 슬슬 꽃을 장식하러 가보죠."
"앗."
그 사이 꽃을 다 땄는지 일어선 메디아가 벨카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향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지내온 친구처럼 그 자연스러운 행동을 멍하니 바라보길 잠시.
"야! 벨카는 왜 데리고 가는데?!"
소녀가 그녀에게 이끌려 가면서 구해달라는 듯 어셔를 돌아보는 모습에 그는 그녀들을 쫓아 달려갔다.
"이번 일은 너무 성급하셨습니다."
한편 그 모습을 지켜보는 시선이 있었다. 창가에 서있던 은발의 남자는 자신을 타박하는 깐깐한 난쟁이를 힐끔 바라보고 다시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이미 꽃을 따고 놀던 아이들은 떠나가고 없었지만 정원에 가득한 선홍빛의 꽃들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히스, 메디아가 웃는 게 얼마 만이지?"
히스라 불린 난쟁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는 딱히 대답을 바란 것이 아니었는지 말을 잇는다.
"그래, 알고 있어. 하지만 보고 있으니 도저히 진정할 수가 없더군. 그녀를 다시 만난 거 같아서."
아마 그의 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저 노을을 닮은 머리카락부터 풍겨오는 향기마저 그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닮아있었기에.
"그런데 너는 왜 일일이 꽃을 장식하러 다녀?"
벨카도 체력이 좋은 편은 아니고 메디아도 딱히 좋아 보이진 않았기에 어셔는 가볍게 그녀들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는 햇빛이 잘 드는 창가에 배치된 화병에 꽃을 한 송이씩 넣어 장식하는 메디아를 지켜보다 물었다.
"장식은 원래 보기 좋으라고 하는 일이잖아요? 그보다 대체 언제까지 따라올 셈이죠?"
"네가 벨카를 놓아줘야 나도 안 따라오지!"
이쯤 되면 잡고 있는 손을 놓을 법한데도 그녀는 벨카의 손을 잡고 성을 돌아다녔다.
"에잇! 끈질긴 남자는 인기 없어요!"
"인기 없어도 됐거든!"
그렇게 투닥거리면서 성을 돌아다니던 중이었다.
"찾았다! 얘들아!"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목소리에 돌아보니 아까 전 벨카와 부딪혔던 성의 하녀가 있었다. 손에는 소녀가 떨어트린 가면이 쥐어져 있어서 그녀가 다가오기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무슨 일이죠? 아냐?"
"아, 아가씨?"
뒤늦게 메디아를 발견한 그녀가 놀라서 대답했다. 어셔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차가운 목소리의 메디아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보여줬던 생동감 넘치는 모습이 거짓말 같았다.
"아이들이 가면을 떨어트리는 바람에 가져다주러 왔습니다."
"가면?"
메디아가 그 말을 확인하듯 벨카를 바라보고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면은 주세요. 그리고 아무리 급해도 복도에선 목소리를 높이지 마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녀는 벨카에게 가면을 건네주고는 감사 인사를 할 새도 없이 잰 걸음으로 이곳에서 멀어졌다.
"왜 그렇게 보시죠?"
"아니, 확실히 가족이 맞는 거 같아서."
"당연한 말씀을."
어셔는 지금까지 그녀가 짓궂게 굴었던 것이 오히려 한참 봐주었던 것임을 깨닫고 조금은 몸을 사리자고 생각하는 것도 잠시.
"야! 이 문 열지 못해!"
그는 굳게 닫힌 문을 쿵쿵! 두드리며 씩씩거렸다.
"하지만 여성의 방에 남성을 함부로 들일 수는 없잖아요?"
이곳은 메디아의 방이었다. 그녀의 말은 확실히 납득이 가는 말이었지만 문제는 그녀가 벨카를 데리고 같이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럼 벨카는 내보내라고!"
"지금은 저랑 놀 거니까 싫어요."
"아오! 정말!"
결국 그는 아무리 두드려도 문을 열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닫고 문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대체 어떻게 해야 소녀를 데리고 나올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으면 이쪽으로 다가오는 도나르의 모습이 보였다.
"아저씨? 식사는 다 하고 오신 거예요?"
"너희들이 놀러 다니는 사이에 끝났지. 그런데 넌 왜 그렇게 처량맞게 앉아있냐?"
"아니, 제 말 좀 들어봐요!"
어셔가 억울한 마음에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털어놓았다.
"아가씨가 같은 나이 대의 친구가 그리웠나 보지. 계속 있을 것도 아니고 가끔은 끼리끼리 놀 동성친구도 필요할 텐데."
"끙, 그건."
그런 것과는 뭔가 다르다고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그것을 말로 표현하기엔 너무 애매하기에 그는 어쩔 수 없이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 너에게 볼일이 있었는데 마침 잘 됐지."
"네? 저는 왜요?"
"너, 기사 수련해보지 않겠냐?"
"기사 수련을요?"
기사라는 건 어셔가 알기로 전투를 생업으로 하는 군인들이었다. 나라나 마을을 습격하는 몬스터들은 많았고 그들로부터 사람들이나 재산을 지켜주는 이들을 일컫는 말인데.
"그런 걸 왜 저한테?"
어셔는 딱히 기사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싸우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았고 특별히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 만큼 애착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애초에 이곳은 처음이고.
"기사가 되라는 건 아니고 수련만 해보자고."
그는 이게 또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애초에 기사 밑에서 훈련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견습 기사로 취급되지 않던가?
"뭐, 그렇긴 한데. 기사 수련을 받았다고 무조건 기사가 되는 건 아니다? 주최되는 시험에 합격하거나 작위를 받으면 몰라도."
도나르의 말로는 수련만 받고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도 많다는 모양이다. 주로 돈을 보고 용병으로 전향하는 것이 대부분이라는 것 같지만.
"여행을 다닌다면서 최소한 싸우는 법이라도 모르면 큰일 난다? 너는 지켜야 할 사람도 있잖냐."
"아."
생각해보니 그랬다. 그는 자신과 함께 다닐 소녀를 위해서라도 싸우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었다. 맥과 판, 로기의 일로 얼마나 무력감에 시달렸던가? 그 사실을 떠올리고 결심은 빨랐다. 우선은 아직도 굳게 닫혀 있는 문으로 다가갔다.
"벨카! 나중에 데리러 올게! 그리고 너! 벨카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어 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일단 같은 여자니까 딱히 문제가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목소리가 들릴 것이라는 걸 알기에 도나르를 따라갔다.
"드디어 가버렸네요."
메디아는 더 이상 쿵쿵거리며 흔들리지 않는 문과 그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고 방안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곳에는 그녀의 권유대로 앉아있던 벨카가 있었다.
"어셔는?"
"나중에 데리러 온다는 모양이에요. 그러니까 그동안 저희는 신나게 놀죠!"
"저기, 미안해. 다른 아이들과는 놀아본 적이 없어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소녀의 자신 없는 말이 의외라 메디아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머, 그러면 원래 있던 곳에서는 어떻게?"
"그, 잠을 잔다던가. 바람소리나 빗소리를 듣는다던가. 어셔가 찾아오면 이야기를 나누는 정도...일까?"
벨카는 무얼 하며 생활했는지 곰곰이 떠올려보는 듯했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곤 고작 몇 가지가 전부였다.
"세상에! 저보다 더 재미없게 사는 사람이 있었다니. 혹시 벨카 씨도 어딘가의 영애였나요?"
"그런 건 아니야. 단지 사람이 없는 곳에서 혼자 살았던 것뿐이니까."
"...외롭지 않았어요?"
"잘 모르겠어. 나는 처음부터 혼자였는걸."
메디아가 할 말을 잃은 눈으로 바라보자 벨카는 고개를 기울였다.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자각조차 느껴지지 않는 모습에 메디아는 애써 다른 화제를 떠올렸다.
"그럼 어셔 씨는 어떻게 만났나요?"
"7년 전이었던 걸로 기억해. 어셔가 내가 있던 곳을 찾아온 게."
처음 그를 마주쳤을 땐 들켜버렸다는 생각뿐이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들켰,다고요?"
"응, 나는 사람들의 눈에 띄면 안 된다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니까. 처음에는 무서워서 계속 숨어버렸는데..."
자꾸만 찾아오는 그를 막을 수가 없어서 막고 싶지 않아서 결국 익숙해져 버려서.
"더 이상 혼자 있고 싶지 않았어."
그렇게 말하는 소녀는 세상 모든 값진 보석을 다 얻기라도 한 것처럼 미소 짓고 있었다. 소녀의 얼굴에 드러난 진심 어린 감정에 그녀는 잠시 넋을 잃었다.
"그래서 반한 거군요?"
"그, 그건."
겨우 정신을 차린 그녀의 질문에 발갛게 물드는 소녀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메디아는 제 볼마저 붉어지는 기분이었다. 서로 범상치 않은 관계라는 것은 감추려는 기색도 보이지 않아서 쉽게 알 수 있었지만 서로를 보듬는 듯한 그들의 애정은 마치 그녀가 동경하던 것과 같으면서도 어딘가 그리운 것과 닮아있어서. 더욱 그래서.
"역시 부럽네요."
메디아는 벨카가 듣지 못하도록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어렴풋하게나마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의아하게 그녀를 바라보는 소녀의 모습에 얼버무리듯 더 밝게 웃었다.
"그래서 사귀시는 거죠?"
"아으."
"진도는 어디까지 갔나요? 역시 그렇고 그런?"
"히끅!"
부끄러움이 많은 소녀는 반응이 지나치게 솔직했다.
"서, 설마 벌써 그런 일까지?"
"우으읏."
"어떤 느낌이었나요?!"
"읏, 그런 건 묻지 말아 줘."
메디아는 흥분해서 두 볼을 감싸 쥐고 그녀의 경험담을 캐물었지만 아쉽게도 원하는 대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