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1화 〉여름의 철새. (71/220)



〈 71화 〉여름의 철새.

"입맛에 안 맞아?"
"그런 건 아닌데."

어셔는 벨카의 말에 고개를 저으면서도 막상 제대로 먹지는 못했다. 만찬장의 음식은 확실히 맛있었다. 숲에서 먹던 것처럼 싱겁지도 않았고 상단 사람들과 함께 먹던 음식처럼 짜지도 않은 간과 음식의 위에 솔솔 뿌려진 향내가 어딘가 낯선 음식에 대한 거부감도 줄여주었다. 이렇게 맛있는 걸  언제 먹을 수 있겠냐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럼에도 목에서 막혀 전혀 넘어가지 않는다.


"그러면 이것만 먹고 나가자."


그런 그에게 소녀가 옥수수  알이 들어있는 수프를 밀어주었다.  정도라면 부담스럽지 않게 먹을  있을  같았다. 보통은 빵을 적셔 먹는 것이 좋겠지만 지금은 그다지 당기지 않아 빠르게 수프만 먹어치우고 주변을 살폈다. 다른 사람들은 부담스러운  같으면서도 꾸역꾸역 음식을 먹고 있었고 도나르는 그 남자와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아무도 나가지 말라곤 하지 않았지만 어쩐지 나가면  될  같은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하지만 어셔는 그게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대로 앉아만 있으면 저 남자에게 휘둘리는 것 같아서 그는 옆에 있던 소녀의 손을 잡고 의자에서 내려갔다. 그리고 테이블에 가려지도록 몸을 숙이자 시프와 샬비, 오두르의 시선이 모여든다.


"쉬잇!"


그가 손가락을 들어 비밀로 해달라 요구하자 그들은 저마다 웃으며 못 본 척해 주었다. 그리고 문이 있는 쪽을 향해 살금살금 걸어나갔다. 간혹 다른 어른들과도 눈이 마주치기도 했지만 별다른 말은 없었고 그들은 남자가 도나르와 대화하는 사이 무사히 만찬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후, 이제  살 것 같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그것까지는 잘."

그냥 답답해서 나온 것이었으니까.

"일단 성 안이라도 구경하러 다닐까?"


그래도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이렇게나 커다란 성이다. 부담스러운 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호기심이 더 컸다.

"여기 정말로 크다. 무슨 복도 하나가 작은 도로 같아."

성이라는 것은 다 이렇게  것일까? 이 정도면  하나가 있을 자리에 작은 마을 하나는 들어설 수 있을  같았다. 성 자체는 그리 화려한 모습은 아니지만 이곳저곳에 허전하다 싶으면 장식된 장식품들이 그 느낌을 지워주었다. 그렇게 복도를 돌아다니며 소녀와 함께 성안을 돌아다니던 중 복도의 코너 끝에서 드문드문 끊겨서 들려오는 대화소리가 있었다.

"손님...? 예정보다 빠르...아?"
"그게 ...님께서 시찰을 나가...가 마주쳐서 겸사겸사... 데려오셨데."

꽤 먼 거리였던 탓에 자세한 내용까진 들리지 않았지만 그래도 대략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목소리의 톤을 들어보면 여성들인 것 같았는데 어셔는 점점 뚜렷해지는 그들의 목소리에 숨어야 할 것 같았다. 딱히 잘못한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찔리는 것이 없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는 벨카를 이끌어 코너의 끝자락에 바짝 붙었다.

"그래서 우리가 주방 일을 뼈빠지게 도와야 했던 거구나."
"으아! 덕분에 쉬는 시간이 생긴  좋은데. 이럴 거면 예정대로 쉬는 편이 더 좋을  같아."


그리고 더욱 선명해지는 목소리들.

"어쨌든 별개로 치는 시간이니까 방에 굴러다니는  속옷이나 똑바로 정리해 놓지?"
"네가 대신해 주라."
"내가 네걸 왜!"
"룸메이트잖아~"
"방 바꾼다!?"


어쩐지 남자보다 더 거리낌이 없는 대화 내용에 어셔는 식은땀이 흘렀다. 그가 생각하던 여인들의 대화와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다고 생각하며 그녀들의 발소리를 듣고 사각으로 지나칠 순간을 재었다. 드디어 코너의 코앞까지 발소리가 들려온 순간 어셔는 빠르게 뛰쳐나갔다.

"엇?"
"아읏?!"

그러나 그의 시도는 벨카가 세 명의 여인 중 한 여인과 부딪히면서 실패하고 말았다. 그 여인은 멀쩡했지만 그녀와 부딪힌 소녀는 보다 작았던 탓에 튕겨나가듯 주저앉았다. 왜 실패했는지는 여인들이 서있는 모습을 보고서 알 수 있었다.  명의 여인은 나란히 서서 복도를 채우는 방식으로 걷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
"처음 보는 아이들인데?"

이 성의 하녀들인지 검은색과 하얀색을 기조로 하는 똑같은 옷을 입은 그녀들이 의아한  그들을 보았다.

"손님분들의 애들일까?"
"그렇겠지. 일단 다친 곳은 없니?"


벨카와 부딪혔던 연한 갈색 머리카락의 여인이 무릎을 꿇고 자신과 부딪힌 소녀를 살폈다. 그때 그녀의 얼굴을 본 여인이 흠칫 몸을 떨었다.

"...마님?"


마치 믿지 못할 것을 본듯한 목소리였지만 어셔는 그 틈을 노려서 벨카를 데리고 달렸다. 뒤에서 자신들을 부른  같았지만 뒤돌아 보지는 않았다. 그리고 멀리 떨어졌다 싶었을 때 숨을 고르다 소녀의 가면이 사라진 것을 깨달았다.

"벨카? 가면은?"
"하아하아, 방금 부딪혔을 때. 흐으, 떨어트린 것 같아."

결국 가면을 돌려받으려면 그녀들을 다시 만나야 한다는 소리인데. 그는 그렇게 도망쳐놓고 뻔뻔하게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지친 소녀를 쉬게 할 곳을 찾아보지만 이런 곳에 앉을만한 곳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아 보였지만 창밖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는 선홍빛의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난 정원이 있었다. 그 모습에 따로 생각할 것도 없이 그는 벨카를 데리고 그곳으로 향했다.

"여기는."


성의 뒤편인 듯 시야를 막아선 커다란 성벽과 그들이 나온 성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그럼에도 웬만한 마당만큼이나 넓은 이곳에는 크고 작은 식물들이 가득했는데.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건 이곳으로 나오기 전에도 보였던 선홍빛의 꽃무리였다. 동백꽃은 아니었다. 봄이 오기도 이른 늦겨울에 피어나 초봄에 지는 동백꽃은 지금 피어날 시기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시선을 뗄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소녀의 색과 닮아있었음이라.

"카네이션이구나. 숲도 아닌 이런 곳에 아직까지 남아있었을 줄은 몰랐어."
"카네이션?"


어셔는 그녀가 말하는 꽃의 이름에 다시 한번 꽃을 바라보았다. 이제 보니 조금 다른 색 같기도 하다. 그저 소녀가 꽃을 닮아있을 뿐이었던가. 예쁜 꽃이었지만 따로 꺾어갈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대로 두는 편이 꽃은 더 오래  것이고 더 오래 볼 수 있을 테니까. 바람에 실려오는 향긋한 향기에 취한 듯 정원으로 내려오는 계단에 앉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누구시죠?"

끊어질  끊어지지 않는 조심스러우며 이유 모를 두려움이 섞인 여린 목소리였다. 뒤를 돌아보자 보이는  내리쬐는 햇살에 비치는 하얀색이었다. 이어서 마주친 자수정 같은 눈동자는 두려움과 동시에 호기심을 품고 빛이 났다. 그곳에 있던  그와 비슷한 또래의 어여쁜 여자아이였다. 제대로 된 도구 하나 잡아본 적 없을 듯한 새하얀 손에는 가벼운 바구니와 가위가 들려 있다.


그와 잠깐 눈을 마주쳤던 그녀는 이어서 벨카에게 시선을 돌렸고 이내 인형처럼 커다란 눈을 더욱 크게 뜨며 작게 입을 벌렸다. 그 모습이 이곳으로 오기 전에 마주쳤던 여인의 것과 비슷하여 의문을 품고 있노라면 힘이 풀린  그녀가 놓친 바구니가 툭툭 계단을 구른다. 얼떨결에 그에게 굴러온 바구니를 잡아채어 보니 안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그에 의아해하고 있으면 여자아이가 이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제는 다음 순간 벌어졌다.


소녀와 눈을 마주친  그녀만 바라보며 다가오던 여자아이가 발을 헛디딘 것이다. 평지라면 그저 넘어지는 것으로 끝났을 텐데 하필이면 이곳은 계단이었다. 잘못하면 크게 다칠 수도 있기에 어셔는 급하게 다가갔다.

"야!  위험하게!?"


다행히 굴러떨어지기 전에 어셔가 붙잡을  있었지만 그녀가 기절했음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무슨 애가 넘어진 거 가지고."

가끔씩은 나무를 타다가 떨어져 본 적도 있는 어셔는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가 황당함에 중얼거리고 있으면 소녀가 말했다.

"이곳은 좁으니까. 저기로 데려가자."


그러면서 벨카가 가리킨 곳은 정원의 구석에 심어진 나무의 아랫목이었다. 그곳에 그녀와 함께 기대어 있으면 그 숲만큼은 아니었지만 물씬 풍겨오는  내음이 이제는 사라진 느티나무의 품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이 상황이 꽤 불만스러웠다.

"...그런데 꼭 그럴 필요가 있는 거야?"

왜냐하면 그와 함께 나무에 기대어 앉은 소녀의 무릎에는 방금 기절한 여자아이가 누워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대로 내버려 둘 수도 없는걸."
"그건 그렇지만."


평소 그녀의 무릎을 베는 것을 좋아하는 어셔는 자신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 여자아이가 괘씸했다. 악몽을 꾸는 듯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벨카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상냥하게 쓸어줄 때마다 풀어지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불만이 쌓였다. 강제로 깨울 수도 없으니 그저 바람과 함께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을 때였다. 드디어 여자아이가 깨어날 기색이 보이며 눈꺼풀이 흔들렸다.


눈을  여자아이는 꿈에 빠진 듯 몽롱한 자수정 빛 눈으로 가장 먼저 소녀를 눈에 담았다. 벨카는 여전히 여자아이의 하얀 머리카락을 쓸어주고 있었다. 그 손길에 편안함을 느낀 듯 여자아이는 입을 열었다.

"어머님...?"


잠결에 소녀를 어머니라 착각한 것일까? 여자아이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그런 말이었다.


"누구 마음대로 벨카를 엄마라고 부르는 건데?"


그것이 더 못마땅해 어셔가 퉁명스럽게 말하자 여자아이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다시 소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무시당한 것일까? 그가 어이를 잃은 사이 그녀는 또렷해진 눈으로 벨카를 보고 볼을 붉혔다.

"벨카, 라고 하시는군요. 이름이 정말 예뻐요!"
"하?"

여자아이는 방금 전까지 기절해 있었던 것이 거짓말이라 이야기하듯 벌떡 일어나 벨카의 손을 양손으로 붙잡고 눈을 반짝였다.

"아우, 그, 너무 가까운걸."
"앗, 죄송해요! 최근에 제 또래의 아이는 처음 보거든요!"


벨카가 너무나 적극적인 그녀의 모습에 머뭇거리자 여자아이는 소녀에게 들이밀다시피하던 얼굴을 뒤로 뺐다.


"너, 내가 보이긴 하는 거지?"

어셔는 이쯤 되니 혹시  여자아이가 아픈  아닐지 생각했다. 주로 시각적으로.

"저기, 너를 붙잡아 준  어셔니까."
"그럼 그분은 어디에 계시나요?"
"...여기 있다."

딱 봐도  이름의 주인이 이곳에 있는데 모르는 척하는 그녀가 어처구니없었지만 무시당하는 것이 더 짜증  어셔는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정말로 의외의 사실을 들은 것처럼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대는 여자아이.

"네? 당신이? 정말로요?"
"그래서 뭐 불만 있어?"
"아니요. 불만이 있다기보다는..."

믿기지 않는 사실을 들은 것처럼 놀라는 그녀의 반응과 일부러 놀리는  노골적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는 시선에 욱하고 속에서부터 올라왔다. 화낼까 고민하던 것도 잠시 여자아이의 지나치게 하얀 피부와 꾹 쥐면 부러질 듯한 팔목을 발견한 그는 한숨을 내쉬며 터질 것처럼 치솟아 올랐던 압력을 풀어버렸다.

"흐응, 조금 의외네요."
"뭐가."

 놀리는가 싶어 뚱하니 대답한 그에게 여자아이는 일어서서 치맛자락의 양옆을 잡곤 살짝 들어 보이며 무릎을 굽혔다. 한두 번 해본 행동이 아닌 것처럼 자연스럽고 우아한 모습에 시선을 빼앗겼다.

"어찌 되었든 저를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어셔 씨.  이름은 메디아랍니다?"

그러면서 웃는 모습은 확실히 귀여워서 잠깐이나마 얼굴을 붉힐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우으, 어셔는 저런 취향이구나."


소녀가 그의 소매를 붙잡고 늘어트리며 불만스레 물었다.


"뭣! 그, 그런 게 아니라!"
"어머, 안타깝지만 그쪽은 딱히 제 취향이 아니랍니다?"
"야! 누가 너를 좋아한대?!"
"그럼 아닌가요?"
"내가 좋아하는  벨카...!"


그러나 그는  말을 함과 동시에 벨카와 눈을 마주치고 서로 얼굴을 붉혔다. 정말,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평소에도 가끔하던 말이었지만 새삼스럽게  이리 부끄러운지 어셔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볼을 부풀린 메디아가 손뼉을 치며 분위기를 끊어버렸다.

"참! 벨카 씨! 꽃은 좋아하시나요? 마침 꽃을 따러 가는 길이었거든요."
"읏, 싫어하지는 않지만."

이내 벨카의 손을 끌고 걸어가는 메디아가 그렇게도 얄미울 수가 없었다. 특히 소녀가 넘쳐나는 호의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 잠깐 뒤돌아보고는 작게 혀를 내미는 모습이란.

'이 녀석 짜증 난다!'


딱 그런 느낌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