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0화 〉여름의 철새. (70/220)



〈 70화 〉여름의 철새.

그러던  드디어 내성의 문이 쿠르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렸다. 남자가 내성으로 들어갈 때는 이렇게 큰 소리가 나지 않았는데 성문의 구석에 있던 쪽문을 이용했기 때문이었다. 혼자서 사용할 때는 이렇게 큰 문을 전부 이용하지는 않는 것 같다. 지금은 마차를 들여야 하기 때문에 사용하는 것 같지만.  모습을  도나르를 비롯한 마부들은 밖으로 나와있던 이들을 마차로 불러들였다.

"이런 성에서 살다니.  하는 사람일까?  사람."

소녀에게 잠깐 정신이 팔렸던 어셔도 그녀를 데리고 마차로 돌아왔지만 그는 창문에  붙어서 내성의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커다란 성을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다.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과는 관계가 없는 일일 것이라 생각해왔었는데.  안에 들어가고 있으니 마치 몸에 안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하고 부담스럽다.

"아마도 영주가 아닐까."

그의 중얼거림에 벨카가 답했다.

"영주?"
"이 땅을 다스리는 사람이야. 그보다 좀 더 높은 사람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사람이 왜...?"

어셔는 무언가  것 같은 기분에 커다란 성의 모습만 노려보았다. 그래, 알고는 있었다. 원래라면 발을 들이는 것조차 꿈꿀 수 없는 이런 성에 발을 들이게 된 건 자신들과 동행하고 있는 이들이 상단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라는걸.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벨카를 바라보던 남자의 기색이 이상했다. 복잡 미묘한 기분으로 성의 안쪽을 구경하던 어셔는 곧 어떤 난쟁이가 마차를 안내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처음 성벽에서 보았던 그 난쟁이잖아?"

그들의 입국을 심사했던 깐깐한 난쟁이였다. 난쟁이는 마차가 갈 곳을 유도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런 난쟁이와 그가 눈을 마주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보았지만 깐깐한 난쟁이는 자신의 할 일을 계속하고 있을 뿐이었다. 착각이라고 생각하고 싶은데 기분은 더 이상해졌다. 내성은 작은 마을 하나는 들어갈 정도로 상당히 넓었다.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 데다가 마흔 대가 넘는 마차들을 전부 다 수용할 수 있을 만한 공간이 있었으니까.

그만큼 내성은 크고 넓어서 이곳이 주인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려주는 것 같았다. 보통이라면 이 거대한 성의 모습에 먼저 감탄하겠지만 어셔는 그 모습이 자신을 압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난쟁이의 안내에 따라 내성의 구석에 마차들은 세워지고 그들은 마차에서 내려 상단의 사람들과 함께 난쟁이를 따라갔다. 그리고 내성의 정면으로 돌아와 볼 수 있었던 건 100명 가까이 되는 기사들이 양옆으로 늘어서 있는 모습이다. 엄숙한 느낌마저 드는 모습에 어셔가 긴장하고 있으면 마부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끙, 저거 힘들었는데."
"기트, 너 근위대였냐?"
"저건 굳이 근위대가 아니더라도 땜방할 때 부르는 경우가 많잖아. 무게만 잡으면 되니까."


도나르가 부르르 떠는 기트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그 외에도 비슷한 행동을 보이는 이들이 저마다 그들에게 동정의 시선을 던진다. 정작 그들의 시선을 받는 기사들은 오히려 그들이 왜 그렇게 보는지 몰라 의아한 눈치였지만. 어셔도 그런 행동을 하는 그들이 이상해 물었다.


"아저씨들은 왜 그렇게 떨어요?"
"아니, 트라우마가 떠올라서."

도나르는 이야기하면 한두 마디로 끝날 것 같지가 않아 대충 얼버무렸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기사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엄격한 군기가 기본 사항이었다. 툭하면 드래곤들이 습격하는 일이 많으니 이해는 하지만 그건 그거고 힘든 건 힘든 것이었으니까. 심지어 내부에서 공공연하게 일어나는 비리는 덤이었다. 그중에서도 정예군에 속하는 근위대는 더더욱 강한 군기로 유명했으니 같은 기사로서 어찌 동정하지 않을  있을까?


그러한 사정을 모르는 어셔가 보기엔 유난을 떤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리고 들어선 성안은 역시 성의 크기만큼이나 화려했다. 깔끔하게 깎여 잔잔한 호수의 표면처럼 빛나는 대리석 바닥과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깔린 붉은 카펫. 화려하지는 않지만 고급스러운 느낌의 장식들까지. 상단의 사람들도 부담을 느끼는지 조용히 난쟁이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성문보다는 아니지만 커다란 문의 앞이었다.

"안으로 드시죠."


또다. 어셔는 또 그 난쟁이와 눈이 마주쳤다. 착각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여러  마주치면 착각이라 생각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어셔는 왜 몇 번이나 착각이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알아챘다. 난쟁이는 정확히 그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옆에 있던 벨카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대체 어째서인지 의문을 해결할 틈도 없이 난쟁이는 문을 두드렸고 허락의 말이 들려오자마자 문을 열었다.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온갖 음식들이 늘어선 화려한 만찬장이었다.


"준비가 늦어서 미안하군. 어서들 앉게."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는 아까 보았던 남자의 것이다. 그 목소리를 따라가 보면 만찬장의 한 가운데 그 남자로 보이는 이가 앉아 있있다. 하지만 로브로 전신을 뒤집어쓴 기분 나쁜 모습은 아니었다. 그곳에는 동일 인물이 맞는지 의심스러운 은발의 남자가 앉아있었다. 앞머리는 깔끔하게 뒤로 넘겨 머리카락 하나 흐트러져 보이지 않았고 투명하고 네모난 안경을 쓰고 있지만 그렇다고 날카로운 눈매가 전부 사라지지 않는다. 안경알 너머 회색 눈동자가 언뜻 소녀를 스쳤다.


"음식은 마음에 드나?"
"예."

도나르는 긴장감으로 딱딱하게 대답했다. 상단의 대표로서 그의 근처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지만 제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면 뭐 하는가? 그는 지금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평범한 영주라면 이 정도로 긴장하지는 않았을 텐데. 도나르는 이 영주가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걸 알아챘다. 호리호리해 보이는 체형이면서도 다부진 몸이 엿보인다. 덕분에 각이 잘 잡힌 제복과 인지하지 못했던 낮은 목소리까지.

여유로움이 넘치는 그의 식사 예절은 상대하는 입장에서 숨이 막힐 정도다. 도나르도 기본 소양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그뿐이다. 이대로 그냥 식사를 끝내면 좋겠지만 그는 그럴 수 없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아까 보았던 수행원은 생각보다 신뢰받는 입장인 듯 말없이 남자의 뒤를 지키고 서있었다.

"저희를 초대한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만."


음식은 확실히 맛있었다. 지역이 달라서 그런지 처음 보는 것들이 상당했지만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부담이 너무 심해서 맛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지만. 차라리 먼저 용무를 꺼내 해결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말을 꺼냈다.


"흐음, 그렇군. 간단하게 말해서 나는 자네들을 고용하고 싶네."

도나르는 예상치 못했던 그의 말에 당황했다. 소녀 때문이 아니었던 것일까?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태연히 말을 이었다.

"파시페니아는 훌륭한 기사들로 유명하지. 드래곤과도 맞선다는 그 무예를 영주로서 어찌 무시하겠나."

그건 도나르도 납득할 수 있는 이유였다. 몬스터는 어디를 가나 사람들의 그리고 나라들의 골칫거리다. 그런 몬스터들 중에서 가장 강하다고 할 수 있는 드래곤과 맞서 싸울  있는 무력을 가진 기사들이 영지에 들어오고자 한다면 필연적으로 영주의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도나르는 그런 쪽으로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속으로 혀를 찼다. 소녀에게 관심을 가지건 말건 그들이 영주에게 불려오는 건 정해진 일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단지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는 것이 목적이었던 터라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다.


"어째서 그런 무예를 가진 자들이 고국에서부터 멀리 떠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도나르는 그가 자신들을 수상하게 여기고 있다는  직감했다. 하기야 수상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 도 이상하리라. 실력이 뛰어난 기사들이라면 어느 곳이라도 마땅히 대우받을 것이 분명한데 나라를 떠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단을 이끌어 왔으니.

"어차피 머나먼 곳에서 벌어진 일. 내가 알바는 아니지."


그것을 단순히 눈감아주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이는 없었다. 저건 그들에게 있어서 빚이나 다름없다. 그러면서 그는 곧 양피지 하나를 꺼내들어 그에게 건넨다.

"이건?"
"간단한 계약서다. 자세한 내용은 개인마다 정리해야겠지만 각각 그와 동등한 조건을 약속하지."

처음에 도나르는 그의 제안을 거절하고자 했다. 아무리 기사로서 드래곤을 상대하는 일이 익숙하다지만 그를 비롯한 동료들은 대부분 기사의 일에 질릴 대로 질려서 일을 그만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약서의 내용을 보고 생각을 조금 고쳤다.


"이 계약서의 내용이 사실입니까?"
"그래, 나의 기사가 되고자 한다면 나는 기꺼이 이곳에서도 유효한 작위를 줄 것이고 그대들의 가족 또한 가장 안전한 곳에서 보호할 것이다. 물론 그만한 실력이 받쳐 준다면 말이겠지만."

그의 말에서 의심스러운 것과는 별개로 그들이 상당한 기대를 받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동료들과 상의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모레까지 결정했으면 좋겠군 여독을 풀 시간도 필요할 것이고 내일은 그대들의 실력을 보았으면 하니까."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야  일이 있어서 나는 먼저 일어나지. 식사가 끝나면 히스를 부르게. 머무를 곳을 안내해 줄 거야."


그가 수행원과 만찬장을 떠나고 도나르는 제 동료들을 불러 모았다.

"야, 이야기는 다 들었지?"

아무리 만찬이라 해도 사람들은 조용히 식사만 했기에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난 마음에 안 들어. 우리가 뭐 때문에 파시페니아를 떠나왔는데?"

가장 먼저 볼멘소리를 낸 것은 기트였다. 그의 말에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마음을 도나르도 이해했다. 완전히 같지는 않겠지만 비슷한 꼴을 겪어왔는데 공감이 되지 않을 리가. 하지만 그건 계약서의 내용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바로 기트의 면전에 예시로 작성된 계약서를 들이밀었다.

"일단 읽어보고 생각해."
"기사가 어딜 가나 거기서 거기지.  또  게 있...?"

뻔하다는  말하던 그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기트의 말소리가 점점 줄어들더니 이내 끊어졌다.


"이거 내 눈이 잘못된  아니지?"

그리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이어진 말에 다른 동료들도 궁금증이 생긴듯 더 가까이 몰려들어 계약서를 보고자 하니 기트가 벌떡 일어났다.


"사내새끼들이 징그럽게 달라붙지 말고 상 위에 올려 둘 테니까 한 명씩 읽어 봐!"

계약서의 내용에는  많은 내용이 적혀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남자가 말했던 그대로였다.

첫째로 란투아에서도 유효한 기사 작위. 기사라는 건 사실상 전문 군인 같은 느낌이고 파시페니아에선 떨어질 대로 떨어진 이름값이지만 그렇다고 없는 것보다는 편리했다. 그래도 최소한으로 필요한 부분에선 배려를 받을 수 있었으니까.

둘째는 그들 본인과 가족에 한정해서 평상시에도 내성에 머무를  있게 한다는 것이다. 몬스터들의 습격이 많은 것을 생각해 본다면 이건 상당한 이점이다. 게다가 그들 중에는 이런 혜택조차 없어서 가족을 잃었던 이도 있었고.


셋째는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게 한 달마다 지급되는 봉급이었다.

"130 전..., 이라고?"
"동화가 아니고 철전이라는데?"
"이거 우리가 이상한 거냐? 아니면 여기가 대우가 좋은 거냐?"

참고로 그들이 파시페니아에서 받던 한 달 봉급은 철전 15전이었다. 그것도 나름 존중을 받던 시절부터. 그렇게 웅성이는 것도 잠시.


"내일 실력을 보겠다고 했지?"
"대련인가?"
"몬스터 사냥일 수도 있잖아."
"그건 생포하는 게 더 힘드니까 대련이겠지."


누가 정하지도 않았는데  말을 끝으로 그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결정이 났다는  알 수 있었다.

"칼  갈고 온다."
"난 메이스 좀!"
"슬링줄을 확인해야겠어!"


각자 과장스럽게 준비를 하겠다며 흩어지는 동료들. 그 남자가 나간 뒤에야 간신히 여유를 가지고 식사하던 대장장이들이 동료들에게 끌려나가며 울부짖는 모습을 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괜한 대장장이들만 부려먹히겠네."


그런 동료들의 모습을 혼자 여유롭게 지켜보던 도나르에게 시프가 다가왔다.


"당신은 딱히 생각이 없나 봐요?"
"나야  질린 것도 있지만."

그라고 해서 저 조건에 혹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좀 더 다른 조건이 아니면 차라리 몬스터를 사냥하는 용병으로 사는 편이 더 나을 것이라 생각했다.

"우리는 이미 정해둔 곳이 있잖아."
"아, 그 마을이었죠?"

아무래도 내성과 떨어지는 편이 아이들을 보호하기에 좋다고 생각했다. 생각보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 같지만 사람의 일이란 어떻게 될지 모를 노릇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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