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9화 〉여름의 철새. (69/220)



〈 69화 〉여름의 철새.

도나르는 마차를 몰면서도 자신의 옆자리를 차지한 이를 살폈다. 그의 옆에는 살짝 허름한 옷을 입은 사내가 있었다. 겉모습만 본다면 영락없는 평민이다. 하지만 그 아래에 단련된 몸과 낡은 천으로 검집을 감싸 봇짐으로 위장된 검의 모습은 그가 결코 단순한 인물이 아니라는 걸 알려주었다. 정확히는  남자의 수행원이 되겠지. 감춘다고 감춘  같지만 같은 일을 생업으로 삼은 이들끼리는 감출 수 없는 것도 있는 법이다.


"이제 이 대로를 쭉 따라가시면 내성이 나옵니다."


도나르는 그의 안내에 따라 마차를 몰았다. 일이 이렇게  건 그 남자가 말의 주인인 아이들을 보았을 때로 돌아간다. 말의 주인을 보러 왔던 남자는 정작 아이들의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낯선 이가 온 것을 눈치챈 소녀가 벗고 있던 가면을 쓴 뒤에야 남자는 정신을 차렸다.


"그래서 말의 주인은?"
"보고 계시는 아이들입니다."


그는 고민하는 것 같으면서도 계속 소녀를 살폈다.


"파시페니아의 기사가 얼마나 뛰어난지 소문으로는 들었지."


그리고 뜬금없이 그런 말을 꺼냈다.


"예?"
"그 소문이 정말인지 궁금해서 그런데 자네들을 내성으로 초대하고 싶군."

파시페니아와 란투아는 직접적인 교류가 많지는 않았다. 누누이 이야기하듯 서로 간섭하거나 교류를 나누기엔 너무나 멀고 먼 곳이니. 때문에 그들이 란투아에 온 것이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정말 유명한 이야기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교류가 힘든 나라라면  사실을 직접 확인해 보고 싶다는  이상하다고 여길 만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  이야기를 꺼내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것이 단순한 명분이라는 걸 도나르라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의 목적은 처음부터 일관적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소녀의 손을 잡고 있었던 것부터 시작해서 소녀의 모습을 직접 보고 그들을 자신의 성으로 초대하기까지. 결정적으로 남자는 말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며 아이들이 있는 마차를 얻어탔다. 이쯤 되면 너무 명확해서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혹시 내성의 주인이라는 걸 증명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도나르는 실례를 무릅쓰고 물었다. 혹시라도 그가 성의 주인이 아닌데도 자신의 성이라 주장하며 초대하겠다고  것이라면 곤란했으니까.

"못할 것도 없지."

그 대답으로 남자는 웬만하면 소지할 수도 없는 은패를 보여주고 숨어 있던 수행원을 불러들여 안내원으로 쓰라 말하니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거짓이라고 한다면 남자에게도 너무 큰 불이익이 가는 일이었고 은패에도 성벽에 세워져 있던 깃발과 같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으니까. 도나르는 동료들에게 소식을 전하고 안내원의 안내에 따라 예정에도 없던 내성으로 향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큰 도시의 내성이라면 빼도 박도 못하잖아.'


도나르는 일이 점점  복잡해지는 것을 느끼며 아이들을 걱정했다. 별일이 없어야 할 텐데. 새로운 목적지를 향해 움직이는 동안 도나르가 걱정하는 마차의 안쪽에는 냉랭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난데없는 불청객이 갑작스레 마차에 합승한 꼴이었으니. 한쪽에는 어셔가 멀미에 어질 거리는 머리를 붙잡으면서도 소녀에게 기대어 낯선 남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정작 상대는 그 꼴이 우스운 듯 비웃었지만.

"어리광쟁이가 따로 없군."
"당신이 무슨 상관이야."

도나르의 부탁으로 아이들과 시프가 있는 마차에 함께  샬비가 남자의 눈치를 보았다. 어셔의 으르렁거리는 듯한 말에도 남자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는 모습에 그는 안도했다. 시프도 남자에게서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는지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셔는 눈앞의 남자가 불쾌했다. 도나르가 했던 말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일이 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남자에 대한 불쾌감을 떨칠 수가 없어서 어셔는 그를 경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푹 눌러쓴 로브 때문에 무슨 표정을 짓는지 알  없다는 점도 꺼림칙했지만 로브 속의 시선이 벨카에게서 떨어질 줄 모른다는 걸 그는 예민하게 알아챈 것이다. 그래서 버티기 힘든 멀미도 꾹 참고 있었다. 그래도 어셔가 남자에게 달려들지 않은  그 나름대로 눈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잘못하면 소녀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아슬아슬한 분위기 속에서 어셔와 남자가 대치하길 얼마간 곧 마차가 멈추는 것을   있었다. 누군가 도착했다는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날 법한데도 아무도 일어나지 않을 때. 먼저 문이 열리며 도나르가 도착 소식을 알린 뒤에야 남자가 먼저 일어나 마차 밖으로 나가는 것으로 대치는 끝이 났다. 도착한 내성은 과연 지금까지 어셔가 보아왔던 어떤 건물들보다 커다랗고 웅장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셔의 눈에 못마땅한 이유는 역시 지금은 도나르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남자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잠깐 기다려 주었으면 하는군. 자네들을 예정보다 일찍 초대한 탓에 준비를 급하게 해야 할 것 같아서."
"그렇습니까."


도나르는 도나르대로  일을 걱정하느라 바빴다. 처음에는 단순히 마음에 드는 소녀를 초대하기 위한 명분이라 생각했는데 그렇게 단순한 명분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그는 상대가 이성적인 편이라는 것에 조금은 안심했다. 그가 아는 권력자들 중에는 권력을 믿고 휘두르기만 할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이들은 수두룩했으니까. 그와 수행인이 먼저 내성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그는 가장 먼저 샬비를 만났다.

"그래서 어땠냐?"
"어땠긴 아주 죽는 줄 알았다."


샬비는 어셔가 그에게 덤벼들기라도 할까  전전긍긍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긴장하느라 진이 빠졌다고.


"그래도 골치 아픈 건 마찬가지야. 애한테서 시선이 안 떨어지던데?"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막막하구만."

언젠가 그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이렇게 빨리 벌어질 것이라 생각지는 못했다. 마녀라는 점을 제외하더라도 소녀가 지나치게 아름다운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그나마 상대가 이성적인 편인 것 같지만 그게  골치 아플 수 있었다. 게다가 그가 왜 그들을 초대하려 했는지도 알아야 하니 도나르는 결국 이 일을 에르미스에게 상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걸세."
"하지만 어르신."
"우리는 딱히 꿀리는 게 없네. 오히려 권력을 제멋대로 휘두르는 자였다면 일은 커질지 몰라도 상대하기  수월했을 지도 모르지."

도나르는 그의 말을 이해할  없었다. 꿀리는 게 없다니. 그들의 고국에서라면 몰라도 일단 권력이라든지 여러 면에서 그들이 불리한 입장이 아니던가?

"보통이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도나르, 그리고 자네들은 파시페니아의 기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고 있네."
"...그냥 버려진 개가 아닙니까? 저희들은 그곳에 있어서 아무런 의미가 없는 소모품이었습니다."


적어도 10년 전이었다면 은연중에 호구 취급 당했을지는 몰라도 명예 정도는 남길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런 의미도 보이지 않는다. 그의 말에 에르미스는 안타까운 표정을 금치 못했다.

"그래, 자네들이 그동안 짓눌려 살아왔다는 걸 고려하지 못한 충고였던 것 같군."

그는 잠깐 입을 다물어 말을 고르고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이야기해보지. 드래곤을 상대할 수 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가재를 잡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자네들은 잘 모르고 있어."

이후로 노인은 앞으로는 그들이 깨닫는 게 먼저라며 도나르를 쫓아내듯 마차를 밖으로 내보냈다. 심지어 그 남자와 대표로 이야기를 하는  어찌할 거냐 물어도.


"앞으로는 이런 뒷방 늙은이에게 의지하지 말고 자신감을 갖고 살아가게. 이 상단의 리더는 애초부터 내가 아니라 자네였으니."


이럴 때 그는 자신의 둔한 눈치가 이토록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저는 못 알아듣습니다. 어르신."

도나르가 에르미스와의 상담을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고 있노라면 다가오는 이들이 있었다.


"궁상맞게 왜 그러고 계세요?"
"너희들이냐."

어셔와 벨카였다. 마치 병아리들이 줄지어 걸어 다니는 것처럼 서로 손을 잡고 다니며 아닌척하면서도 그를 쫄쫄 따라온 모습을 보고 있으니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도나르는 그들이 아이 취급을 할만한 나이가 아니라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아직은 아이들이라 생각했다. 그 이유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단지 그보다 어리기 때문인지 아니면 간혹 드러나는 아이 같은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건 조금 이상한 느낌이었다.

"그보다 시프 누나한테 가보지 그래요? 찾는  같던데."
"그래?"


어셔가 부러 퉁명스러운  말하지만  속에 섞인 걱정을 그는 눈치챘다. 도나르는 괜히 웃음이 나와 그의 머리를 헤집듯 쓰다듬어 주었다.


"악!  하는 짓이에요!"
"어쭈, 피하기냐? 이건 어떠냐!"


그의 손길을 피하는 어셔의 모습에 오기가 생겨 양손으로 머리를 헤집으니  이상 쓰다듬는 것도 아니게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어우, 진짜, 머리가  엉망이 됐잖아."


그리 머리카락을 신경 쓰고 살지는 않았지만 헝클어지니 거슬려서 어셔는 엉킨 머리카락을 되돌리려 애썼다. 도나르는 그의 머리카락을 잔뜩 헝클어 놓고 도망친 후였다. 그런 그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으니.


"...쓰다듬는 거. 기분 좋아?"
"어?"

어느새 두 손으로 가면을 살짝 내려 빼꼼히 얼굴을 드러낸 소녀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금빛이 평소보다 유난히 반짝이는  같다면 착각일까? 어셔는 무심코 자신의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에 얹었다. 그는 스스로가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것도  박자 늦게 알아차리고 손을 내리려 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으응."


벨카가 가만히 눈을 감고 그의 손에 제 머리를 비비고 있었으니까. 새삼스럽지만 그렇게 만져보는 소녀의 머리카락은 정말로 부드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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