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7화 〉여름의 철새. (67/220)



〈 67화 〉여름의 철새.

남자는 로기가 떠난 후에도 쫓아가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그가 떠나간 곳을 보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역시 흥미로워."
"여전히 고약한 취미군."

그런 그에게 말을 거는 이가 있었으니.

"일어나 있었나? 드발린."
"방금 일어났다. 보아하니 또 손님을 내쫓은 거냐?"

서점의 안보다 조금은 더 밝은 골목으로 걸어 나오는 그 인영은 남자보다 한참이나 작았다. 그는 로기가 왔을  잠들어 있었던 초록 난쟁이였다.

"어차피 장사가 안 될 것이라는 것쯤은 예상하고 마법책 같은 걸 취급하는 서점을 차렸을 텐데."
"끙, 알고 있어. 알고 있다고. 하지만 멀쩡한 손님까지 내쫓지는 말라고."
"그건 어쩔 수 없었어. 그 녀석이 내가 사려고 했던 책을 들고 있어서 말이지."

그러면서 그가 품에서 꺼내든 것은 로기가 읽으려고 했던 책이었다. 그가 대신 마녀에 대해 알려주겠다며 잘 구슬려 넘겼지만.


"알고 싶을 만한  다 알려줬으니 문제도 없겠지만."

그러면서 남자는 책을 드발린에게 내밀었다.


"아아, 마녀에 대한 책이군. 마녀에 대해 상세하게 적힌 것이라 제법 어렵게 구했던 건데. 동화 91 전이다."
"7 전 주지."
"철전으로 말인가?"
"마녀를 곁에 두고 관찰한 이가 쓴 것만큼 정확한 것도 드물 테니까."

책의 표지와 책등에 저자를 적는 자리에는 아이올로스라는 이름이 적혀있었다. 마녀와 피를 섞는 것에 성공한 사내의 일지만큼 유용한 책이  어디에 있으랴? 남자는 책의 맨 뒷부분에서 발견했던 글자를 떠올리고 코웃음을 흘렸다. '이 책을 나의 아내에게 바친다'라.


"그나저나 방금 그 꼬마는 이번에 들어온 상단의 꼬마인가 보더군."
"상단이 들어왔었나? 별일이군."

드발린은 상단이 들어왔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지. 그런 규모로 잘도 상단이라 우기고 성벽을 통과했다 싶어."

남자는 지나가는 길에 보았던 상단의 모습을 생각했다. 그건 아무리 봐도 단순히 상단이라 부를만한  아니었다. 기사들 하나하나가 기도가 예사롭지가 않은데 그런 이들이 수십. 기사단이라 봐도 무방할 지경이다. 그리고 상행용 마차도 튼튼하게 만들어지지만 그들이 타고 온 마차는 아예 전차에 가깝다는 걸 알만한 이들이 보면 모를 수가 없었다.

"영주가 어떤 이유로 그들을 통과시켰는지는 모르겠지만 희귀한 물건이 많은  같으니 한 번쯤은 가봐야겠지."

여름에 찾아오는 첫 손님은 좋은 소식을 가져온다던가. 이곳 출신이 아닌 그가 란투아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그런 미신을 믿지는 않았지만 이번에는  맞는 말이 될 수도 있을  같았다. 로기의 반응을 본 남자는 은근한 기대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야, 고작 첫날이라서 이렇게 불티나게 팔릴 줄은 몰랐는데."

도나르는 순식간에 팔려나가는 물품들을 보면서 감탄했다. 구름 지대나 황야, 몬스터 같은 여러 이유로 타국과의 교류가 힘들기 때문에 이곳 사람들에겐 타국의 것일 물품들이 호기심을 자극해서 물품을 파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 빠르게 팔릴 줄은 몰랐던 것이다. 첫날인데도 불구하고 물품이 배정되어 있던 몇몇 마차는 벌써 문을 닫고 마차를 지키는 것으로 보였다.


이곳으로 오기 전 광산도시의 파랴르에게 도움을 받아 이곳의 시세를 알아내었었다. 대부분 멀리서 가져왔고 힘들게 구한 물건들도 섞여있는 만큼 이곳에서도 비싼 것이 대부분일 텐데도 사람들의 발걸음은 끊이지 않는다. 벌써 많은 양의 철전이 자루에 담겼다. 그렇게 도나르가 물건들이 순조롭게 팔리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을 때였다.

"왜 동화를 안 받냐고!?"


어디선가 그런 소리가 들려온 것은. 잔뜩 화가 난듯한 남자의 목소리에 도나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잘나가다가도 가끔 저런 일이 있다. 그의 일은 저런 무뢰배들을 상대하는 것이었기에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갔다가 인상을 썼다. 왜냐하면 남자가 소리치고 있는 상대가 시프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대화를 더 들어봤지만 남자는 단순히 동화로 계산이  된다는 이유로 화를 내고 있던 모양이다.

"어이."
"아!   뭐!"
"장사 방해할 거면 꺼져."
"컥?!"

도나르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남자를 내동댕이쳤다.  남자가 딱히 약한 것은 아니었다. 우락부락한 체격을 보아하니 제법 단련된 듯 보이지만 싸움에 익숙하지는 않은 듯했다. 어렴풋이 나는 흙내나 허리춤의 농기구를 보면 농부로 보였다. 애초에 드래곤을 상대하던 그의 입장에선 참으로 귀여운 상대였다. 생긴  차라리 드래곤이 귀엽겠다 싶지만.


"이게  하는 짓이야! 경비대 불러?!"

센척하고 싶어서 오기를 부리는 건지 아니면 이곳 사람들이 자신의 편을 들어줄 거라 생각하는 건지. 그에게 내동댕이쳐졌던 남자는 고래고래 목소리를 높였다. 주변에서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스스로 끌려가고 싶다면 그러시던지. 그리고 우리도 너 같은 자식을 손님으로 취급하고 싶지는 않거든. 그리고 상황 파악은 하고 삽시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보는지 신경도  쓰고 사나?"
"...이런 씨!"

남자는 주변에서 모두 그를 쳐다보고 있는 것을 알고 마지막까지 욕을 지껄이며 물러났다.

"괜찮냐? 시프?"
"네, 딱히 손찌검을 당하지는 않았는걸요."
"하여간 가끔가다 꼭 저런 녀석들이 나온단 말이야."


드물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장사를 해본 경험이 있는 동료의 말을 들어보면 저런 진상은 생각보다 많이 있는 편이라는 모양이다. 특히 시프처럼 힘이 없는 여인이라면 특히  시비가 많이 걸린다던가.

"하아, 저런 사람들이 상당히 많네요. 이번이 몇 번 째인지."
"이번이 한 번이 아니었냐?"

도와줄 곳이  많아서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는데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단 말인가?

"네, 다른 분들이 와서 도와주셨지만 자꾸 저런 이유로 이러니 동화도 받아야 될까 봐요."
"그건 저런 녀석들이 무식해서 그러는 거지 너무 신경 쓰지는 마."

아마 저들이 시비를 건 명분은 철전이 보통 아껴두는 화폐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화폐가  나라나 지역의 상황에 따라 값이 낮아지거나 높아지는 일이 잦은 반면에 철전은 대부분  시세가 일정하다. 철전이 말 그대로 철로 제작되기 때문이었다. 철은 어딜 가나 사용처가 많고 여차하면 나라에서 사용하거나 회수하기도 용이한 것이 철전이라 더욱 그러했다.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철전을 아끼려는 성향이 있었다.


하지만 저들이 무식해서 그러는지는 몰라도 보통 다른 나라의 상단이 들어오면 철전으로 거래하는 것이 당연한 상식이고 예의였다. 동화나 은화, 금화는 그 나라의 상황이나 정책에 따라 함유되는 금속의 양이 다르기 때문에 무역용으로는 그리 적합하지 않았다. 반면 철전은 순수하게 철로만 만들어져서 무게만 재어 그 가치를 재보면 그만이기에 타국의 사람들과 거래에서 자주 쓰이는 것이다.


"그러니 몰상식한 인간이라 보고 똥 밟았다는 생각으로 대충 상대하면 돼."
"하지만 그러면 물건을 파는데 지장이 있지 않나요?"
"걱정 마. 다른 사람들이라고 저런 게 무식해 보이지 않는 건 아니거든. 그리고 저런 인간들은 심사가 배배꼬여서 작은 트집만 있다면 시비를 걸 인간들이라서."


시프가 비교적 만만한 여인이기 때문에 그러는 것도 있겠지만 그냥 저런 인간들의 성격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강한 척 센 척하면 상대가 겁을 먹고 뭐든지 해줄 거라 생각하고 그러는 것이다. 뭐, 그의 고향에서는 엄두도  낼 행동이지만 시프가 유독 온화한 성격이라 그렇지 그의 고국의 여자들은...


"어우, 상상만 해도 끔찍하네."

그래서 유독 시프에게 시비가 많이 걸린 것 같기도 했다.


"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안 좋은 일이 생각나서."


그것도 너무  좋아서 트라우마가 될 정도다. 그렇게 그는 하루 장사가 마감될 동안 되도록 시프의 곁을 지켰고 그 이후로 그녀에게 시비를 거는 이들은 없었다. 저녁이 되어 날이 어둑해졌을 즘 장사는 끝이 났다. 그리고 하루 동안 번 금액을 정산하는 시간.


"생각보다 물품이 더 많이 팔렸잖아?"
"그러니까 말이야."
"계산하는 데 시간이  갔어."

도나르는 상단주인 에르미스에게 보고할 기록을 살피다 당초 예상보다 훨씬 더 빠르게 팔려나간 물품들을 세보면서 추가로 기록했다. 구름 지대에서 얻었던 우박도 뜻밖의 부수입이 되었고 입소문을 탔는지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앞다투어 물건을 사갔던 것이다. 여러 이유로 타국과의 거래가 워낙 힘든 환경이니만큼 사람들의 호기심을 사기엔 충분했던 것이리라.


"이 정도라면 내일 바로 경매를 시작해도 문제는 없겠는데."
"벌써?"
"이 정도면 오히려 내일 경매를 안 하면 문제가  정도야."

적어도 3일은 사람을 모아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타국의 물건이라는 매력이 생각보다 더 컸던 듯했다. 그러면서 도나르는 힐긋  멀리 보이는 거대한 구름의 장벽을 바라보았다.  구름의 장벽은 근처에 사람과 생물이 살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 주는 아주 고마운 역할을 하지만 역으로 사람과 생물이 지나갈 길을 막는 야속한 존재이기도 했다. 그래서 국가 간의 거래가 특히 어려운 것이다.


한참을 지나야 하는 황야는 우회하거나 건너라면 못 건널 것도 아니지만 구름 지대의 아래를 지나가는 건 말 그대로 도박에 가까운 행위였으니까. 그들의 경우는 운이 좋았다고 밖에 말할 길이 없었다. 그러다 도나르는 그의 시야에 보이는 반가운 아이들의 모습에 손을 흔들었다.

"얘들아! 이제 오냐?"

어셔가 벨카를 업고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던 것이다.

로기는 상단으로 돌아온 뒤 답답한 마음에 계속 한숨만 나왔다. 벨카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평범한 소녀는 아닐 것이라 생각했지만 설마 마녀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남자의 말을 들어 보면 소녀가 그중에서도 특별한 존재라는 걸 어렵지 않게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마법사인 판을 확실하게 제압하지 못했을 테니까. 마법사가 공격 마법을 쓰는 모습을 본 적은 없었지만 대신 마법이 얼마나 강하고 위험한 건지 알고 있었다.

적어도 파시페니아의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다. 그들은 불과 십 년 전까지만 해도 괴물들의 왕이라 불리는 드래곤들의 습격을 항상 주의해야 했으니까. 드래곤들은 한 번 습격해올 때마다 떼거지로 달려들어 저마다 특기로 하는 마법으로 사람들을 괴롭혔다. 닿으면 철은 물론 사람까지 녹여버리는 액체, 뼛속까지 얼어붙게 만드는 숨결, 물을 뿌려도 꺼지기는커녕 오히려 격하게 타오르는 불은 지옥불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방식도 과정도 다르지만 그 마법들의 공통점은 사람들의 집과 재산, 목숨을 가리지 않고 공평하게 앗아간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마법을 무력화 시킬 수 있는 게 벨카였다. 그가 상처를 주고만 소녀였다.


"...마녀인가."


이제 그만 그녀를 잊고자 하는데 미련을 버리고자 그녀에 대한 사실을 좀 더 알려고 했을 뿐인데 어째서 미련은 줄지 않고 늘어날 생각만 하는지 로기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의 부모님이 마법에 의해 정확히는 드래곤에 의해 돌아가셨으니 그럴지도 모른다. 로기에겐 어렸을 적의 일이었지만 그 광경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드래곤이 날뛰면서 뻥하니 뚫려 무너져 내린 그의 집과 부서져내리던 추억들.


그 밑에서 시큼하고 역한 냄새를 풍기며 녹아가던 그의 부모님을.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잊을 수 없는 건 그의 부모님을 그대로 짓밟아 죽일 수 있었음에도 가만히 지켜보던 파충류의 눈동자였다. 그는 딱히 동물의 감정을 알  있을 만한 특기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알 수 있었다.  수밖에 없었다. 드래곤은 분명 그의 부모님이 고통스러워하며 죽어가는 모습을 즐거워하고 있었노라고 그 어떤 사실보다 그것이 제일 두려웠다.

그런 부모님과 드래곤을 눈앞에 두고 그는 도망치고 말았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저 살고 싶다는 그런 마음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덕분에 그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대신 남은 것은 부모님을 버리고 도망쳤다는 죄책감과 아이들의 겁쟁이라는 말과 따돌림이었다. 그는 혼자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아이들보다 몇 배는 더 훈련하며 악착같이 기사가 되고자 노력했다. 훌륭한 기사가 되어 아무도 그를 겁쟁이라 부를 수 없게.

다시는 그런 일을 겪지 않으려 했다. 그건 어느 정도 성공하나 싶었다. 그는 또래 중 누구보다 강해졌으니까. 하지만 지금 그는 어떤가?

"하, 제발!"

로기는 자꾸만 떠오르는 소녀의 생각에 앓는 소리를 내며 마른 세수를 했다. 그는 감히 좋아한다고 말할  있는 소녀를, 지켜주고 싶은 소녀에게 제 손으로 상처를 주었다. 정말로 잊고 싶었다. 그러는 것이 지금 그가 소녀의 행복을 빌어줄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그러다 도나르가 누군가를 반기는 소리에 돌아보면 어셔가 벨카를 업고 돌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등에 업혀 있는 소녀는 무척이나 편안해 보인다.

그녀가 어셔의 등에 자신의 얼굴을 부비는 모습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아 그만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잊어야 한다. 잊어야 한다. 자꾸 되뇌지만 아까 서점에서 만난 수상한 남자로부터 들은 이야기에 자꾸만 다른 생각이 드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그가 그 방법을 미리 알고 있었고 소녀가 그런 마녀라는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말이다.


욕망에 잡아먹힌 그 찰나의 순간이 너무나 황홀하고 또 달콤해서 로기는 미련을 놓을 수 없었다. 차라리 미쳐버리고 싶을 만큼  순간과 그 남자가 들려준 방법이 떠올라 만약을 생각하게 되어버렸으니까. 그날 밤, 그는  생각에 미쳐 도저히 잠들 수가 없었다.

"제발 그만해."

그는 누구에게 말하는 지도 모르고 부탁했다. 복잡한 마음을 다잡으려  산책을 나왔지만 도저히 진정되지가 않는다. 그러다 조금 먼 곳에서 철컥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로기는 놀라 바로 옆에 있던 마차로 숨었다.

"여기도 별 이상은 없지?"
"그래도 오늘 밤은 다른 녀석들이랑 교대하면서 계속 순찰해야 돼."

그러자 얼마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샬비와 오두르의 것이었다.


"이곳 사람들이 꼭 그런다는 보장은 없지만 혹시 나쁜 마음을 먹은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르잖아."
"하긴 그렇겠지."


그리고 지나가는 그들의 소리에 로기는 저도 모르게 죽였던 숨을 내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문을 꼭 잠그고 자라던 게 저런 이유였던 모양이다. 그러다 이 마차는 왜 문이 잠겨 있지 않냐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어딘가 익숙한 향기가 난다는 걸 깨달았을 때 그는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망가진 잠금쇠의 모습도 익숙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숨소리들이 들려오는 곳을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는 어셔와 함께 잠든 벨카가 있었다.

아무도 없는 이 공간에 둘만이 조용히 잠들어있는 모습에 그는 역시 아픈 가슴을 억누를 수 없었다. 벨카는 어셔의 머리를 팔로 감싸 제 품에 안고 있었고 어셔 또한 익숙한  그녀의 품에 편히 안겨있었다. 그 모습에 어찌 속이 끓지 않을 수 있으랴. 그는 어셔에게서 소녀를 떼어 놓으려 그녀의 어깨를 잡고 바르게 눕혔다.

"헉!"


벨카가 그에 의해 강제로 바르게 누우며 잠결에 불편한 기색을 내었지만 그의 눈을 사로잡은  흐트러진 원피스 사이로 보이는 소녀의 가슴이었다. 얼핏 보이는 분홍빛 과실이 그렇게 탐스러울 수가 없었다. 무척이나 부드러웠던 그 감촉까지 떠오르는 듯하여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어차피 갈 때까지 갔으니  한다고 이상할 것 없지 않느냐는 생각에 그녀의 몸에 손을 대려 했지만 그를 바라보던 소녀의 눈빛이 떠올랐다.

그나마 남아 있던 작은 원망마저 사라진 채 그를 바라보던 그녀의 무기질적인 눈을. 그는 또 이런 짓을 하고 소녀의 그런 눈빛을 감당할 수 있는가? 로기는 이를 꽉 물고 벨카의 몸에 손을 대는 대신 그녀의 옷을 추슬러 주었다. 그런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한 그는 바로 옆에 있던 침대에  터 앉아 잠이 든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저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설마 로기냐?"

그러다 들려오는 목소리에 로기는 몸을 움츠렸다. 지금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도 괜히 겁을 먹고 뒤를 돌아보면 도나르가 그가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다는 듯 서있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와 어셔, 벨카를 바라보다 그에게 손짓했다.

"잠이 안 오면 같이 순찰이나 돌자고."


로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부하면 이상할 것이라 생각했기에. 도나르는 그가 나오자 들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손잡이가 달린 울퉁불퉁한 쇠막대기 같은 것은 보통 진압용으로 쓰이는 철편이었다.

"어떻게 다루는지는 알지?"

모를 리가 없었다. 기사는 폭동을 일으키거나 범죄자를 제압할 때도 있기 때문에 기사가 되고 싶다면 가장 먼저 배워야 하는 것 중에 하나가 철편을 다루는 것이다. 드래곤 같은 것에겐 장난감 수준도 안 되겠지만 같은 사람에게는 제법 위협적인 무기니까. 하지만 이걸 건네면 그의 무기는 어떻게 하는가?


"아저씨는요?"
"걱정 마라. 적어도 너보단 다칠 일이 없으니까."

하긴 기사의 무기는 한두 개가 아니다. 특기로 하는 무기는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세 가지 이상 다룰 줄은 알아야 정식 기사가 될  있고 설령 맨몸이라 해도 전신 갑옷을 입은 그가 쉽게 당할 일은 없다. 그렇게 순찰을 돈다는 이유로 둘은 마차 사이를 걸었다. 다음 교대 시간이 올 때까지 그들 사이에선 어떤 말도 오가지 않았다. 적당히 머리를 식혔다 싶어 이제라도 자라며 로기를 원래 있었을 마차로 돌려보낸 도나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뭐라 해줄 수 있는  없구만."

살다 보면 아무리 가슴 아프고 괴로운 일이라도 마음속에 담아 가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건드리면 건드릴수록 오히려 그게 더 아플 때가 있는 그런. 그럴 땐 시간이 해결해주십사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시간조차 해결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면 단지 뼈아픈 교훈으로 두고 살아갈 뿐이다. 다시는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고자.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면   하나를 선택하면 된다. 너덜너덜한 양심을 버리고 겉모습만 그럴듯한 새것을 끼우던가 그래도 너덜너덜한 양심을 부여잡고 살아가던가. 그래도 그는 울면서 자신의 죄를 고하고 진짜 범인을 고백하던 소년을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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