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6화 〉여름의 철새. (66/220)



〈 66화 〉여름의 철새.

그 후에도 그들은 도시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구경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점점 더 사람들로 넘쳐나기 시작하는 거리의 모습에 어셔는 인상을 찌푸렸다. 마을에서 소녀의 손을 놓치는 바람에 일어났던 일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녀와 맞잡은 손에 좀 더 힘을 주고 긴장하며 인파를 빠져나오자 그제야 긴장의 끈을 놓았다.

"흐으, 어셔,  더 이상은."
"아, 미안!"

벨카에게는 그의 걸음이 빨랐던 것인지 지친 소녀의 모습에 쉴 곳을 찾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앉기 적당한 구조물을 발견하고 그곳에 앉아서 쉬기로 했다. 하지만 구조물이 생각보다 높았던 탓인지 소녀는 좀처럼 구조물 위로 올라가지 못해 낑낑거렸다. 그런 소녀의 모습에 어셔는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아 들어 올려주었다.


"자, 이러면 괜찮지?"
"...응."

그러자 겨우 평평한 구조물 위에 자리를 잡고 편히 앉는 소녀의 모습을 보고 어셔도 살짝 뛰어서 구조물 위로 올라갔다. 그렇게 그녀의 옆에 앉아서 보는 거리는 여전히 많은 사람과 난쟁이들로 붐비고 있었다. 가끔씩 자신들을 힐끔거리며 바라보긴 했지만 그 이상으로는 다가오지 않는 사람들. 가깝지만 멀고도 먼 거리감 속에서 어셔가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코끝을 스치는 달콤한 꽃향기와 함께 그의 어깨에 작은 무게감이 느껴졌다.

"벨카?"

소녀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것이다. 딱히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기에 그의 어깨에 기대어 있는 소녀를 바라보다 다시 앞을 보았다. 모두가 흘러가는 길목에서 자신들만이 이렇게 멈춰 서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슴속에서나 두근거리면서 가끔은 귀 옆으로 부쩍 다가오는 심장소리를 들으며.

"저 녀석 저런 걸 잘도 사잖아."


로기는 어셔와 벨카가 도시를 돌아다니는 모습을 남몰래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소녀에게 구두를 사주려는 듯한 모습에 허세를 부리는 거라 생각했지만 아무렇지 않게 철전을 내밀어 계산하는 모습에 저런 녀석보다 못하다는 사실이 화가 났다. 로기가 지금 수중에 있는 돈은 기껏해야 동화 몇  정도였기에. 그가 아직 어리다며 어른들이 제대로 된 일을 시켜본 적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과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꼬맹이가 소녀에게 구두를 사줄만한 돈이 있는 건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지금 당장이라도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할지 고민했지만 어름들에게 가봐야 애들은 놀라며 쫓아낼 것이 분명했다. 그러다 돈을 벌어서 저런 걸 사봐야 소녀는 그를 받아주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다시금 되새기고 입술을 깨물었다. 소녀와는 확실하게 끝나버렸다는 걸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납득하고 싶지 않은 이 기분은 무엇일까?


신발을 사는 모습을  뒤에도 계속해서 그들의 뒤를 쫓다가 앉기 좋은 구조물에 나란히 앉아있는 그들의 모습이 보였다. 누가 봐도 사귀는 사이라는 걸 알 수 있을 만큼 서로에게 기대어서. 가끔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로 어린 커플이라며 흐뭇하게 중얼거리는 소리들에 열이 받았지만 그는 그것을 입 밖에 쏟아낼 수 없었다. 그의 눈에 보인 소녀는 무척 행복해 보였으니까. 그저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듯.


 모습에 로기는 알 수 없는 비참함을 느끼면서도 납득하고 말았다. 그는 아무리 노력해도 소녀에게 저런 행복을 줄 수 없었다. 그리고 멍하니 어젯밤을 떠올렸다. 소녀가 흘리던 눈물을, 제대로 울어본 적이 없는 것처럼 어색하면서도 숨을 죽인 처량한 울음을.

"...돌아가자."


그는 패잔병처럼 비루하기 짝이 없는 걸음을 터덜터덜 옮겼다. 어른들은 놀고 오라고 등살을 떠밀었지만 소녀의 뒷모습만을 쫓다 아이들과는 헤어진  오래였고 놀 기분도 아니었다. 어른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정작 그는 자신의 발걸음이 어디로 향하는 지도 모르고 정처 없이 걸어갔다. 그러다 이상을 깨달은 건 길이 너무 어두워졌다는 걸 뒤늦게 인식했을 때였다.


"여긴 또 어디야."

길이라도 잃은 것일까? 너무 정신없이 걸었던 탓인지 그는 어둑한 골목에 흘러들어와 있었다.


"이거 좀 위험한 거 아닌가."

위험한 곳에는 가지 말라던 어른들의 말이 떠올랐다. 혹시 이 근처에 깡패라도 있지는 않을까? 골목 안을 훑어보았지만 생각 외로 벽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거나 땅에 쭈구려 앉은 건달 같은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에 괜히 안도하다가 그는 이상한 글자가 쓰여있는 문패를 발견했다. 꼬부랑거리는 지렁이가 기어가는 듯한 글씨였지만 그래도 아주  알아볼 수준은 아니었다.


"드발린의 마법서점?"

로기는 마법이라는 단어에 판이 떠올랐다. 소녀를 범하고 그를 끌어들였던 최악의 사내. 때문에 기분이 나빠졌지만 어젯밤 몰래 엿들어 버렸던 소녀의 혼잣말이 떠올랐다.


"...만들어졌다고 했었지?"

사람은 정상적으로 라면 태어났다고 하지 만들어졌다고 하지는 않는다. 혹시나 정말로 혹시나 하는 생각이었지만 어쩌면 벨카라는 소녀는 마법에 의해 태어난 것이 아닐까? 그녀를 포기해야 하는 건 스스로도 너무 잘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지만 로기가 소녀에 대한 미련을 저버리기엔 아직 풀리지 않는 의문이 너무도 많았다. 그래서 그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골목의 낡은 문을 열었다.

"계세요? 윽! 먼지 냄새."


열린 문의 너머는 그늘진 골목만큼이나 어둑했고 문을 연 탓에 피어오른 먼지의 냄새가 그의 코를 턱턱 막아버렸다. 그나마 곰팡이 냄새가 나지 않는 것을 다행이라 여겨야  정도였다. 혹시 이름만 남은 망한 가게가 아닌가 싶었으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가게의 안에는 약한 빛을 내는 등불이 켜져 있었다. 그리고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의자에 앉아 곯아떨어진 누군가의 모습을 발견했다.

"저기, 책을 보러..."


하지만 그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허락을 구하려 다가갔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멀리서는 볼 수 없었던 그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었으니까. 일단 키는 아직 어린 그보다도 적었다. 직접 비교할 수는 없지만 소녀의 사랑을 독차지한 그 녀석만큼이나 작은  같았다. 그뿐이었다면 그냥 난쟁이겠거니 했겠지만 못생겨도 너무 못생겼다는 것이 문제였다.


얼굴의  이상을 차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커다란 매부리코,  벌어진 입술 사이에는 날카로운 송곳니와 삐뚤빼뚤한 이빨들이 보였다. 등은 곱추처럼 굽어 있었고 어딘가 기분 나쁜 냄새도 나는 것 같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희미한 등불 때문에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울긋불긋하면서도 기름기가 번들거리는 피부가 초록색으로 보였다는 것이다. 그에 충격을 받았지만 로기는 겨우 난쟁이들에 대한 상식을 떠올렸다.

"초록 난쟁이?"


난쟁이는 대표적으로 두 종류로 나뉜다.  번째는 키만 작을 뿐 사람과 별다른 차이를 찾아보기 힘든 회색 난쟁이. 로기는 왜 그들을 회색 난쟁이라 부르는지 알지는 못했다. 그들에겐 아무리 찾아봐도 회색 같은 게 보이지 않았으니까. 파시페니아에는 난쟁이가 살지 않았던 건지 그의 고향에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지만 이곳에 와서는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사람의 반 이상이 회색 난쟁이들이었다.

하지만 초록 난쟁이는 어디에 있는지 전혀 보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회색 난쟁이에 비하면 초록 난쟁이는 딱 봐도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피부가 초록색이었던 것이다. 그 사람과 비슷하면서도 거부감을 주는 이질감에 로기는 그를 깨우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웬만하면 참으려고 했지만.


"이건 너무 심하잖아."

제대로 마주 보고 대화할 자신이 없어서 로기는 그를 깨우지 못했다.  회색 난쟁이들이 초록 난쟁이와 비교하면 길길이 날뛴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정도였다. 초록 난쟁이는 본인의 커다란 매부리코만큼이나 커다란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코를 골고 있었다. 그는 나중에 깨어나면 인사하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가 깨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조용히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가게의 안은 미약한 등불을 제외하면 불을 밝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어두웠지만 생각보다 제대로 된 서점이었다.


"책도 제대로 된 게 있으면 좋을 텐데."

로기는 중얼거리며 낡고 어두운 서점의 책장을 뒤졌다. 대충 하나를 골라 꺼내보면.


"이건 어렸을 때 봤던 거잖아."


언제부터였는지는 몰라도 지역을 불문하고 널리 퍼져있는 너덜너덜한 마법책이 가장 먼저 보였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책을 펼쳐보지만.

"역시."

책 속에는   없는 글이 빼곡히 적힌 페이지와 함께 손을 움직이는 그림과 커다랗게 그려진 문자가 있었다. 이건 정말 어딜 가나  수 있을 만큼 흔했다. 우스갯소리로 어렸을 때 누구나 안 읽어본 사람이 없다고 할 만큼 말이다. 그래도 이왕 펼친 김에 다른 점이 있나 끝까지 훑어보았지만 역시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같은 책이었다. 한숨을 내쉬며 제자리에 꽂아두고 이번에는 신중하게 책을 고르기로 했다.

희미한 등불의 빛에 의지해 잘 보이지 않는 책들의 제목을 살피던 중이었다.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을 하나 발견한 건.

"마녀에 대하여?"

그 책의 제목에 로기가 가장 먼저 떠올린  다름 아닌 벨카였다. 그것이 조금 미안하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소녀는 마녀라는 말이 그토록 어울릴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신비로운 느낌이었으니까. 그는 곧바로 책을 펼쳐  내용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빠져들듯이 그 책에 집중했다.


"마녀란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마법을 사용할  있는 몇 안 되는 존재 중에 하나다..."

때문에 로기는 알지 못했다. 그가 책을 읽던  서점의 낡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는 것과 그의 뒤로 스멀스멀 다가오는 어두운 형체를.


"마법에 대해 관심이 있나 보구나. 꼬마야."
"으아악!!"


로기는 자신의 바로 뒤쪽에서 들려오는 남자의 낮고 음산한 목소리에 기겁하며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는 어두 칙칙한 로브를 뒤집어쓴 괴한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 그렇게 놀랄 필요는 없다. 나도 이곳의 손님일 뿐이니."

정체 모를 남자는 진정하라는 듯 말했지만 로기는 도저히 그럴  없었다. 그야 저 모습을 보고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곳에 있는 책의 대부분은 그리 쓸모는 없지만 가끔씩 숨어있는 보물이 있기 마련이지."

남자는 낡은 서점의 어둠과 동화된 듯한 거뭇거뭇 한 로브로 온몸을 가리고 있었다. 깊이 눌러쓴 후드의 아래에는 칠흑으로 가득해 얼굴이 보이지 않았고 로브의 넓은 소매의 아래로는 붕대 같은 것으로 둘둘 말려 피부 하나 드러내지 않은 손이 있었다. 그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무서웠지만 더  문제는 남자의 목소리였다.


"호오, 이건."


남자는 허리를 숙여 그의 앞에 떨어진 책을 주웠다. 방금 전까지 로기가 읽고 있었던 책이다. 그는 그 책을 흥미롭다는 듯이 바라보고는 그대로 펼쳐 페이지를 좌르륵 펼쳐 훑어보았다. 어떻게 그리 빨리 읽는지 그 뚜거운 책의 페이지가 순식간에 끝에 다다르고 이내 덮였다.

"마녀, 마녀라. 아주 흥미로운 이들이지. 너는 마녀가 어떤 이들인지 궁금한 모양이구나."

남자의 목소리는 분명 젊은 사내의 것이었으나 다른 이들과는 다른 위압감이 있었다. 들을 때마다 사람을 누르는 듯한 소름 끼치는 저음. 그 위압감이 너무도 생생하여 두렵기까지 했다.


"워, 원하는 게 뭐예요?"
"두려워하지 말아라 꼬마야.  정도 나이까지 마법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어리석은 이들은 드문지라 호기심이 생겼을 뿐이다."

대놓고 그를 어리석다 말하는 남자였지만 로기는 아무런 말도  수 없었다. 정말로 혹시나 하는 생각이었으나 어쩌면 이 남자는 마법사일지도 모르니까. 이 남자가 마법사라는 아무런 증거도 없었지만 이런 남자가 마법사가 아니라면 어느 누가 마법사에 어울리겠는가?

"마녀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나?"
"저, 저는 그 책만 읽으면 그만인데요."
"이 책이라면 나도 읽었다. 하지만 누락되거나 왜곡된 부분이 상당히 많지. 글을 쓰는 놈들도 결국은 인간인지라 쓰는 이들의 생각이 묻어 나올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이 책은 마녀에 대해 너무  좋은 시선으로만 보고 있다고 이래서는 이 책을 읽는 사람도 마녀를  좋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며 그는 혀를 찼다.


"그러니 내가 알려주려는 거다. 마녀에 대해서."
"하지만 당신이 그럴 이유가..."
"흐흐, 요즘에는 진리를 탐구하고자 하는 맹랑한 녀석들이 좀처럼 없어서 말이다. 원래라면 나도 내 연구를 하느라 바쁘겠지만 오랜만에 만나는 입문자가 반가워진 것 같구나."

그는 사소한 변덕일 뿐이라며 기분 나쁘게 웃었다. 하지만 로기는 이것이 그리 나쁘지 않은 상황이라는 걸 알았다. 좀 수상하기는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정보에 대해 신뢰할  있을 것 같았다. 그는 긴장감에 침을 꼴깍 삼키며 그에게 물었다.


"아저씨는 마녀에 대해  알고 계세요?"
"글쎄 나도 마녀는 아닌지라 자세하게 안다고 할 수는 없겠구나 그녀들은 부끄러움이 많아서 최소한의 교류조차 하지 않는 이들이 대부분이지."


그럼 결국 모른다는 말이 아닌가? 로기가 속았다는 생각에 돌아가려 했지만 그전에 남자의 말이 들려오는 것이 먼저였다.


"하지만 같은 마법을 사용하는 자로서 너 같은 녀석보다는 잘 안다고 할 수 있겠구나."
"헉!"

다시 돌아본 남자의 손 위에는 빛이 나는 구체가 둥둥 떠올라 어두운 서점 안을 밝히고 있었다. 그렇게 밝은 빛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지간한 촛불보다도 밝은 빛 덩어리의 모습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분명 촛불은 아니었다. 촛불이라고 하기엔 남자의  위에 올려진 것의 형태는 완벽한 구체에 가까웠고 물체라고 하기엔 그것은 남자의  위에 단순히 올려져 있는 게 아니라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모습이었다.

"마, 만져봐도 되나요?"

그건 로기가 제대로 생각하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만질 수 있다면 말이지."

뒤늦게 아차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남자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듯했다. 로기는 떨리는 손으로 남자의 허공에 떠오른 빛의 구체를 만져보았다.

"어?"

그러나 그는 그 구체를 만질 수 없었다. 분명히 만졌다고 생각했는데 손은 이미  구체를 통과해버렸고 빛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뭔가 싶어 계속 만지려 해보았지만 결국 로기는 구체를 만질 수 없었다.

"아무리 해도 소용없을 거다. 이건 단순한 빛일 뿐이니까.  빛을 만질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보다는 이야기를 계속하자며 그는 어디선가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그럼에도 그를 내려다볼 만큼 큰 남자가 부담스러웠지만 로기는 얌전히 그의 앞에 앉았다.

"그래 이제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된 것 같군."

그는 만족스럽게 웃고는 붕대에 감긴 손가락을 끝만 마주 붙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람들은 마녀를 단순히 사악한 마법사라고 생각하지만 알고 보면 외롭고 쓸쓸한 여자들이지."


아무리 같은 마법을 사용하는 이들이라고 해도 만나보기 힘든 것이 마녀다. 그녀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마법을 사용해왔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이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들을 고대 인류의 후손이라고 보는 녀석들도 있지."

그야 아주 오랜 옛날에는 인간이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 당연했던 시절이 있었으니 말이다. 어쩌면 그들 중 마법을 잃지 않은 이들이 남아 있었고 그들의 후예가 마녀라는 것이다.


"신빙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굉장히 미흡한 주장이다."
"어째서요?"
"너는 왜 여자만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지 설명할 수 있나?"

로기는 그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하긴 남자도 같은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면 마녀와 마법사를 구분하는 의미도 없었으리라. 둘은 같은 것 같아 보여도 사용하는 마법이 다르기 때문에 구분하는 것이었다. 소환 마법과 혈계 마법은 그 규모와 용도에서 많은 차이를 보였으니까.

"그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없으니 넘어갈 수밖에 없겠구나.


그러나 확실한 건 그녀들도 자신들과 다르지 않은 인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마녀들 중에서도 특별한 이들은 있지."


마녀들 중에선 가끔씩 특별한 이들이 태어난다고 한다. 마녀들의 혈계 마법은 그리 특출난 위력을 보이진 않지만  특별한 마녀들만큼은 예외였다.


"그녀들에겐 마법사의 마법을 취소시킬  있는 힘이 있다."

그의 말에 로기는 벌을 이유로 황야에 내버려 두고 왔던 판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분명 마법사라고 했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무력화시킬 수 있었던 것일까? 뒤늦게 든 의문이 곧바로 해결되자 그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소녀는, 벨카는 마녀였다.


"그렇게 마법사마저 두려워할 힘을 타고나지만 약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

그녀들을 만난 자들에겐 한 사람당 딱 한 번 제물을 바칠 기회가 주어진다.

"제물... 이요?"

문득 떠오르는 것은 소녀의 말이다.


"제물에 대한 대가는 모두 치렀어. 그것이 네가 의도한 것이었던 의도한 것이 아니던 계약은 이루어졌고 끝이 난 거야."

그리고 그녀에게 주었던 토끼가 떠올랐다.

"그래, 그녀들은 다른 마녀들보다 강한 힘을 타고난 대가로 타인이 바치는 제물을 받아야만 하는 규칙이 있다."

심지어 그것은 본인이나 타인이 건 제약도 아닌 타고난 마법에 의해 강제되는 규칙이기에 그녀들은 반드시 그 규칙을 지켜야만 한다고.


"제물의 조건은 간단하다 살아있는 생물일 것."


그렇게 바치는 제물의 가치에 따라서 그녀들에게  수 있는 소원은 커진다. 바쳐지는 제물의 가치만큼 그녀가 행사할  있는 마법이 강대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제물을 바칠 땐 되도록 귀한 생물을 바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어떤 제물을 바치던 그녀들에게 완전한 예속을 바랄 수는 없겠지만 그녀들은 좋든 싫든 제물을 바친 자의 소원을 한 번 들어줄 의무가 있지. 부귀영화를 누릴 수도, 권력을 얻을 수도, 진리를 얻을 수도 있겠지만 많은 이들이 마녀의 아이를 원할 거다. 마녀의 핏줄을 가진다는 건 아주 귀중한 기회니까."


그의 말에 로기는 어떤 말도  수 없었다. 어쩌면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소녀에게 생각 이상으로 잔인한 일을 저지른 것이 아니었을까? 로기가 충격적인 사실에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남자가 앉아 있던 자리에서 스르륵 일어난 것은.


"하지만 이상하군. 이상해."
"뭐, 뭐가요?"
"네 표정."


남자가 순식간에 다가와 그의 어깨를 쥐었다. 손힘이 어찌나 강한지 그에게 잡힌 어깨가 떨어질 듯 아팠지만 코앞까지 다가온 로브 속의 어둠에 로기는 헛숨을 들이키며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

"크흣! 크흐흐흐! 너, 마녀를 만났구나? 그것도 아주 특별한 마녀를!"


어디선가 딱딱 단단한 것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로기는 그것이 자신의 이빨이 부딪히는 소리라는 걸 겨우 알아챘다.

"대체 어떻게 그녀를 만났지? 언제? 어디서? 그녀는 어떻게 생겼지? 머리카락의 색과 길이는? 눈동자의 색은? 피부는 어떻지? 입고 있는 옷은? 키는? 팔 다리의 길이는? 귀의 형태는? 이빨의 개수는? 손가락은 어떻지? 모두 달려있나? 손톱은 긴가? 짧은가? 가슴은 큰가? 발이 꺾이진 않았나? 얼굴은 어떻지? 성격은? 목소리는?"


이건 공포였다. 발아래에서부터 그의 머리끝까지 올라와 핥는 공포. 로기는 간신히 남자의 손을 뿌리치고 황급히 서점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채앵!
"악! 이건 뭐야!"


그의 발치에 채여 요란한 소리를 내는 무언가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뭔가 싶어 바라보면 그곳에는 어린아이 정도는 들어갈 수 있을 법한 커다란 철창이 있었다. 안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지만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이런 건 없었는데.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서점의 안쪽에서 뚜벅뚜벅 다가오는 발소리에 바로 일어나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골목을 빠져나가기 직전 그 남자가 방금 그가 넘어트린 철창을 들고 그를 보는 모습이 보였다.

남자의 얼굴은 여전히  눌러  로브의 어둠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어쩐지 웃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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