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 〉여름의 철새.
어쩌면 영원히 빠져나가고 싶지 않은 평온한 수마 속에서 어셔는 자신의 머리를 매만지는 작은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손길이 벨카가 자신을 깨우고자 하는 행동임을 알기에 그는 자꾸만 자신을 끌어당기는 고요한 수마도 뿌리치고 눈을 떴다.
"어셔."
그러면 언제나처럼 상냥한 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다정하게 이름을 부르는 소녀가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어셔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배시시 웃었다.
"좋은 아침. 벨카."
벨카는 그를 결코 억지로 깨우려 하지 않았다. 단지 일어나야 할 때가 되면 이렇게 그를 어루만지며 조심스레 쓰다듬어주었다. 그 상냥하고 또 상냥한 손길이 어셔는 좋았다. 그녀가 자신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그 손길에서 묻어 나오는 것 같았으니까. 잠기운이 머무르는 동안 어셔는 그녀의 손길에 머리를 비비며 마음껏 어리광을 부리고 있다가 오늘 소녀가 입고 있는 옷이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옷은 언제 갈아입었어?"
평소에는 늘 검은색이나 붉은색에 가까운 옷을 즐겨 입는 벨카이기에 그녀가 입고 있는 하얀 옷이 더 눈에 띄었다. 늘 어두운 톤의 옷을 입고 있던 그녀였기 때문일까? 별다른 특징이 없는 새하얀 옷을 그 낭창낭창한 몸에 걸친 벨카는 평소보다 더 가녀려 보였다. 동화 속 마녀 같았던 그녀가 오늘따라 청초한 소녀 같았다. 벨카의 색다른 모습에 어셔가 눈을 빛내자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아우, 이건."
"내가 갈아입혔단다."
벨카보다 먼저 대답이 들려온 목소리는 시프의 것이었다. 어쩐지 어색한 목소리에 의아해하며 그녀를 보면.
"어제 무슨 일을 했는지 몰라도 너희들이 땀을 많이 흘려서 감기에 걸릴 것 같았거든."
"아."
그녀의 말에 어셔는 어젯밤 자신과 벨카가 했던 일을 떠올리고 얼굴이 뜨거워졌다. 혹시 들킨 것일까? 눈치를 보고 있으면 그녀는 또 다른 하얀 옷들을 내밀었다.
"그, 갈아입을 옷이 없다면 이걸로 갈아입겠니?"
그녀가 내민 옷은 벨카가 입고 있는 것처럼 하얗지만 상의와 하의가 나누어진 형태였다. 만져보면 뽀송뽀송, 하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었지만 그래도 새것 같은 느낌이다. 구석에 새워진 병풍의 뒤로 돌아가 입어보니 품이 넓고 걸리는 곳도 없어서 움직이는 것이 편했다. 목욕할 때 입는 옷처럼 얇게 만들어졌는지 공기가 스쳐 들어오고 움직일 때마다 펄렁이는 것이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옷을 말을 타고 황야를 돌아다닐 때 햇빛을 피하고자 머리를 덮는 천으로 분해했던지라 반갑기도 했다.
"그런데 이건 누가 입던 옷이에요?"
어셔는 시프가 어제 그들이 한 일을 모른다는 사실에 안심하며 물었다. 벨카가 시프를 아무 말 없이 바라보다 휙 고개를 돌려버리는 모습을 보았다면 이상하다는 걸 알았겠지만 그는 시프의 말을 순수하게 믿었다. 그는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어셔는 시프에게 유독 호의적으로 굴었다. 아마도 그녀가 어셔에게 있어서 가족과도 같았던 마리와 유독 닮아있기 때문이리라. 분위기는 상당히 달랐지만 둘 다 보기 드문 금발과 에메랄드빛 눈동자였기 때문에 그의 입장에서 겹쳐 보지 않는 것이 더 이상했다.
벨카나 어셔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는 상단 사람들이나 아이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따분한 상행에서 나타난 낯선 또래 아이들에 대해 아이들이 관심이 가지 않을 리가 없었고 이제 막 이성에 대한 관심에 눈을 떴을 남자아이들이 미래가 기대되는 벨카의 모습에 관심이 가지 않을 리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들, 그중에서도 어셔의 반응이 까칠했다. 활발한 성격에 안 그럴 것 같으면서도 낯을 가린달까.
그런 어셔가 벨카를 제외한다면 시프와 도나르에게 가장 살가운 모습을 보인다는 건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단의 사람들도 쉽게 알 수 있을 정도다. 그나마 도나르의 친구인 샬비 같은 이들이나 그들과 스스럼없이 대화할 수 있을 정도다. 그걸 시프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녀는 그녀대로 어셔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남들에겐 모두 까칠하게 구는 아이가 유독 자신에게 살갑게 군다면 호감이 가지 않을 수도 없겠지만 그와는 별개로 시프는 자신만 바라보면 반짝이며 호감을 드러내는 어셔가 좋았다.
벨카가 그녀를 상냥하게 감싸 안듯이 위로해 주었다면 어셔는 저 순수한 호의로 가득한 맑은 눈동자로 위로해 주었으니까. 본인은 스스로의 행동이 그녀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었을지 모르겠지만.
"따로 누가 입던 건 아니고 환자들용으로 만들어져 있던 거야."
상처 따위가 옷과 엮여 딱지가 굳으면 치료가 정말로 성가시기 때문에 이렇게 갈아입힐 옷은 지금까지 몇 장 정도 쌓여있을 정도로 남아있었다. 이런 옷도 입지 못할 만큼 손쓸 틈도 없이 죽은 이들이 꽤 있었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말이다. 시프는 기분 탓인지 몰라도 이 아이들과 만난 뒤 위험한 생물들을 만났던 일이 적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도나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시프, 아이들은... 오, 일어났냐. 안 그래도 아침 먹고 출발할 참이었거든."
그러고 보니 오늘은 물건을 팔러 가야 하는 날이었다. 이곳이 정말로 마음에 들었는데. 어셔가 아쉬운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
"안 돌아올 것도 아니니까 너무 아쉬워하지 마라. 일단 정착하려면 이곳의 돈이 있어야 하잖아?"
다행히 이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람들이 많은 도시가 있는 덕분에 멀리까지 갈 필요는 없다는 모양이다. 실제로 이 광산 마을의 난쟁이들도 물건이나 특산품을 판매하기 위해 가까운 도시와 교류하는 일이 많아서 지도를 주며 길도 가르쳐주더랜다. 대신 안정이 필요한 환자들과 의사인 뜨루스를 포함함 몇몇 인원은 마을에 남을 예정이라고. 물건을 팔아 돈만 모으면 이곳에 돌아와 머무를 이들은 이곳에 머무르거나 다른 곳으로 흩어진다고 한다.
"그렇다는 건."
"상단이 해체된다는 거지."
어셔는 그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물건을 전부 팔아 사람들이 정착할 자금을 마련하면 그들 또한 정착할 예정이니 그때까지 그들과 함께 살 것을 생각해보라는 것이었다. 어제 잠시 잊었던 고민이 다시 떠올랐다.
"벌써 출발 준비여? 아침 일찍 부지런하기도 하구먼."
도나르는 파랴르란 난쟁이가 아쉽다는 듯이 하는 말에 당신들이야말로 참 부지런하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분명 어제 술을 죽어라 마셔라 했던지라 마부들은 숙취에 살짝 어질 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있는 이들이 제법 많았는데 말이다. 그들에게 이 정도 숙취로 마차를 모는 것도 문제는 아니었지만 혹시 모르니 숙취해소를 위해 조금 쉬었다가 오전 중에 출발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난쟁이들은 숙취도 없는지 멀쩡한 얼굴로 새벽에 일어니 저마다의 장비를 챙기고 일을 하러 가는 모양새였다.
어제 신나게 술을 퍼마시던 이들이 전부 다른 사람이라 주장하는 것처럼 일에는 아무런 지장도 없다는 듯이 버릇처럼 일을 하러 가는 난쟁이들의 모습에 그들은 고향에서 나름 기사로 살던 몸이었음에도 질리는 것 같았다. 어제는 파티라고 했지만 어쩌면 그들은 저녁마다 그런 파티를 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게다가 다음으로 발견한 광경에 도나르는 정말로 제 눈을 의심했다. 먼저 구경하던 것으로 보이는 기트의 어깨를 잡으며 물었다.
"어이, 기트, 지금 내가 헛것을 보는 게 아니지?"
"나도 그런 생각을 하긴 했는데 네 눈에도 보이는 걸 보니까 헛것은 아닌가 보다."
그들의 눈에 보인 광경은 정말로 놀라운 것이었다. 어제 난쟁이들에게 끌려갔던 뜨루스의 옆에 갓 성인이 된 것 같은 여인 하나가 뜨루스의 앞에서 즐거운 듯 재잘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키가 어린아이들처럼 작기는 했지만 풍기는 분위기나 체형 때문에 확실히 성인이라는 걸 알 수 있는 모습이 딱 난쟁이다. 뜨루스도 얼떨떨한지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고 여인에게 붙잡혀 있다가 그들에게 도움을 구하는 표정을 했다.
"야, 오늘 아침밥 뭐냐?"
"콩나물국이라는 것 같은데."
뜨루스의 배신자를 보는 듯한 표정은 그냥 무시했다. 뜨루스에게도 봄날이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상대가 좀 많이 작긴 하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겨우 마차를 끄는 일이 줄어들 거라 기대했는데 다시 마차를 몰아야 한다니 도나르는 괜히 허리가 아픈 것 같았다. 원인은 마차가 아니라 시프 때문인 거 같지만 기트에게 말했다.
"기트, 나중에 쿠션이나 빌려주라 나 마차 몰 때 허리 아프다고."
"안돼! 새꺄! 그게 어떤 쿠션인데!"
역시나 기트는 농담으로라도 쿠션을 빌려주지 않았다. 하긴 그도 별다른 기대는 하지 않았다.
"조금만."
"꺼져!"
난쟁이들이 일을 하러 떠나고 해가 중천에 떠올랐을 즘 상단의 사람들은 분주해졌다. 다만 남겨진 환자들 때문에 그들을 돌봐야 하는 뜨루스는 어떤 여인에게 붙잡혀 도움을 구하는 표정으로 떠나가는 그들을 바라보기는 했지만 정작 그 시선을 받은 마부들과 도나르는 외면했다.
"음, 좋을 때다."
위험한 구름 지대는 이미 지나왔고 오늘은 당번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옆을 지켰던 기트는 지금 옆자리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구불거리며 반복되는 길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구름 지대도 지나왔는데 하필이면 이런 길이 있을 때. 당번이냐."
마차는 한 번에 내려가지 않고 구불구불 몇 번이나 구부러져 있는지 모를 길을 따라 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직선으로 만들었다면 진작에 내려갔을 길을 여러 번 돌아서 가고 있으니 참으로 지루했다. 덕분에 마부들 사이에서 악명 높은 길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이런 산길을 그냥 직선으로 만들었다간 큰일이 일어나니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할 노릇이다. 그래도 확실히 도시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는지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도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가 지나온 거대한 성벽만 두 개나 되었음에도 도시를 구분하는 데 또 성벽을 세운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었지만 어쨌든 이곳에서 별개로 검문을 하는 듯하여 신호를 보내어 마차를 멈춰세웠다.
"무슨 일로 오셨소?"
어쩐지 그들의 모습을 보고 바짝 긴장하고 있는 보초들의 모습에 신병 시절이 떠오른다면 실례일까? 그가 선두인 만큼 회색 난쟁이에게 발급받아 품에 넣어두었던 상행 허가서와 패를 내밀어 보여주었다.
"...허가서? 다른 영지에서 선전포고라도 하러 온 줄 알았는데?"
보초의 중얼거림에 그는 어째서 그들이 그렇게 긴장한 모습이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들이 끄는 마차는 단순한 상행 용이라 보기엔 너무 크고 무거웠다. 마치 전쟁에나 사용할 법한 전차처럼. 그리고 왜 처음 회색 난쟁이가 그들을 그렇게 미심쩍은 눈으로 보았는지도 깨달았다. 뭐랄까. 까놓고 말해서 그들을 단순한 상단이라 말하기엔 그들의 전력이 너무 과했다. 게다가 특정 상황에서는 드래곤 보다 까다롭다는 가재를 상대 가능한 기사들이 마차마다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배치되어 있었으니.
'쫓겨나지 않은 게 용하구만!'
그들의 기준에선 분명 작은 규모였지만 파시페니아나 란투아 같은 거대 국가나 성지 같은 예외가 아닌 이상에야 그들의 전력은 과장 좀 보태서 웬만한 도시 국가에 필적하는 전력이었다.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식은땀을 흘리고 있으니 곧 얼떨떨한 얼굴로 승인 도장이 찍힌 허가서를 들고 오는 보초의 모습에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곧 열리기 시작하는 성문의 모습을 보다가 그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러면 그 난쟁이는 대체 우리의 뭘 보고 허가를 해준 거지?'
허가해 준 것은 분명 좋은 일이지만 그 이름 없는 호의가 어딘가 찝찝하게 느껴졌다.
"우와."
도시는 어셔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활기찬 곳이었다. 내리쬐는 햇볕 속에서 널따란 길목을 가득 채운 인파. 시골의 사람들이 아무리 많이 모여 봐야 이보다 좁은 길목을 간신히 채우는 것을 아는 그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신기했다. 무엇보다 사람들 사이에서 심심치 않게 보이는 난쟁이들의 모습은 지금까지 어셔가 보아왔던 광경과는 특히 다른 모습이라 그들에게서 쉽게 눈을 떼지 못했다.
어셔와 벨카는 아직 그 광산 마을에 머무르기엔 여건이 부족하다 생각했고 낯선 이들이 많은 곳보단 그래도 비교적 익숙한 그들을 따라 이동하는 편이 좋을 거라 생각했기에 아쉬워하면서도 그들을 따라왔다. 하지만 그런 아쉬움도 잠시 도시의 화려한 모습에 어셔는 금방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광산 마을의 건물들이 커다란 조형물 같은 멋이 있었다면 이 도시는 빽빽하게 들어선 건물과 이곳저곳에 흥정하는 장사꾼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신기하면 좀 놀다 오지 그러냐?"
그 모습이 영락없는 촌뜨기라 도나르가 웃으며 그에게 권유했다.
"안 도와드려도 괜찮아요?"
"됐다 인마. 다른 애들은 이미 다 놀러 갔다고 너희들도 가서 놀다 와."
"하지만."
어셔는 망설였지만 도나르는 짐짓 화가 난 듯 말했다.
"어허, 괜히 너희들이 도와줘도 다른 사람들이 나보고 부려먹는다고 욕한다고. 얼른 갔다 와. 위험한 데는 가지 말고."
어셔는 발이 쉽게 떨어지진 않았지만 그의 엄포에 소녀의 손을 잡고 길을 걸었다. 상단이 왔다는 소식 때문일까? 안 그래도 사람들로 붐볐던 거리는 그들이 온 이후로 더욱 붐볐다. 이전에는 그나마 마차가 지나다닐 길이라도 있었는데 지금은 호기심에 눈을 빛내는 사람들이 한가득이다. 도시에 도착한 뒤에도 오랫동안 달리다 넓은 곳이 나와서야 멈추더니 이런 이유 때문이었나 보다.
그렇게 도시를 구경하다 눈에 띈 곳은 많은 가게들 중에서 여러 가지 가죽 조각들을 서랍장에 쌓아둔 유난히 작은 단칸 가게였다. 그 앞에는 건물에 부착된 천막으로 햇빛을 가리고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노인이 있었다.
"벨카, 저기는 뭐 하는 곳인지 알아?"
그러자 소녀의 시선이 그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으로 향했다. 여전히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것인지 벨카는 좀처럼 가면을 벗지 않았지만 그녀가 어딜 보는지는 알 수 있었다. 소녀는 잠시 노인과 그 뒤편에 쌓인 가죽 조각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응, 신발을 만드는 것 같아."
"가죽으로? 약하지 않을까?"
"그건 아닌 것 같아."
어셔가 있던 곳에서 신발 같은 경우 보통은 짚을 엮어 만들거나 나무로 만들었기에 저런 모습도 신기했다. 도시의 사람들이라고 해서 전부다 가죽신을 신고 다니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은 가죽신을 신고 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하나 살까?"
생각해보면 그와 벨카는 나무로 된 밑창에 구멍을 뚫어 짚으로 엮은 신발을 신고 있었다. 사실 소녀는 아예 맨발로 다녔던 탓에 옛날에 그가 선물해 준 것이었지만 저걸 보니 더 좋은 걸 주고 싶었다.
"안 돼. 우린 아직 머무를 곳도 구하지 못했는걸."
"아, 맞다."
하지만 소녀에게서 돌아온 건 작은 타박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들이 가장 먼저 준비해야 하는 것은 머무를 곳이었다. 이곳에서 짧은 시간 동안 머무른다면 여관 같은 곳에 머무르면 될 테지만 구름 지대를 생각해보면 또 어디 상단에 합류하는 식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곳의 시세도 생각해서 돈을 써야 할 테니까. 잘못하면 모자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고민했지만.
"저기, 할아버지!"
그는 벨카를 이끌고 노인에게 다가가며 소리쳤다.
"어셔...?!"
소녀가 당황스러운 듯 그를 불렀지만 꾸벅꾸벅 졸던 노인은 그가 외치는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는 그런 노인의 앞에 서서.
"구두 하나 얼마예요?"
"험, 뒤에 있는 처자한테 줄 생각인가?"
노인은 동그란 안경알 너머에서 눈을 가늘게 뜨고 그와 소녀를 번갈아보며 물었다.
"네."
"우으, 어셔."
어셔가 망설임 없이 대답하자 벨카가 투정을 부리듯 그의 옷자락을 붙잡아 늘어트렸지만 그는 애써 무시했다. 어떻게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 이건 그의 고집이었으니까. 그런 그들을 한동안 생각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지켜보던 노인은 서랍 하나에서 가죽 판을 꺼냈다. 그것은 새것처럼 깔끔하지만 이미 여러 번 사용했는지 가위질로 너덜너덜해서 가죽 조각이라 불러야 마땅했을 지도 모른다. 노인은 그것을 제 앞에 있던 작은 작업대 위에 올려놓았다.
"처자, 발을 한 번 대보게나."
"자, 벨카, 빨리."
소녀가 불만스럽게 그를 바라보는 것이 가면 너머로도 느껴졌지만 어셔는 식은땀을 감추며 태연하게 그녀를 재촉했다. 그러자 어쩔 수 없다는 듯 가죽 판위에 발을 올려놓는 벨카.
"처자가 발이 예쁘구먼."
노인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며 굳은살이 가득해 나무줄기의 껍데기처럼 잔뜩 갈라지고 돌처럼 딱딱한 손으로 잉크 펜을 들고 소녀의 발 주변을 따라 본을 떴다. 본을 전부 뜨자 그는 가죽 판을 들어보고 말했다.
"이 정도면 동화 156 전쯤 들겠군."
"어? 동화요?"
동화라니 이곳은 철전을 쓰지 않는 걸까? 게다가 백 단위라니 혹시 정말 비싼 걸 사려고 했던 것은 아닐지 곤란한 마음에 어셔는 되물었다.
"혹시 철전은 따로 취급을 안 해요?"
그러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노인은 그를 홉뜬 눈으로 바라보며.
"철전이라면."
그는 잠깐 나무 구슬 같은 것이 여러 개 매달린 판 같은 것을 손으로 튕겨 오락가락하게 만들더니 그에게 물었다.
"혹시 철전을 하나 보여줄 수 있겠나? 들고 있는 것들과 완전히 똑같은 놈으로."
"아, 네."
어셔는 그 말에 미리 들고 왔던 철전 중 하나를 그에게 내밀었다. 완전히 똑같은지 알 수는 없지만 마을에서 모아온 철전은 눈대중으로는 딱히 차이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똑같았으니까. 노인은 그에게서 철전을 하나 받아들고 저울을 하나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 저울의 한쪽에 철전을 올려두고 반대편에 크고 작은 추 같은 것을 하나씩 올렸다가 내려놓기를 반복하더니.
"1온스... 가 좀 안 되는군."
그러면서 그는 몇 번 더 나무 판의 나무 구슬을 튕기다 말했다.
"자네가 들고 있는 철전이 다 비슷한 정도라면. 철전 열두 전이면 충분하네."
"아, 그럼 드릴게요!"
"흐음, 만드는데 하루 정도 시간이 걸리니 선금으로 여섯 전만 두고 가게. 나머지는 다음에 오면 받을 테니."
그런 이유로 그들은 일단 빈손으로 돌아가야 했다.
"꼭 필요한 것도 아니었는데. 왜 그런데다 돈을 쓴 거야."
벨카가 불만스럽게 바라보는 모습은 오로지 어셔의 몫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소녀의 따가운 시선에 그는 눈을 피하면서도 어쩔 수가 없다고 변명했다.
"하지만 벨카한테는 언제나 더 좋은 걸 주고 싶으니까."
눈을 딱 감고 말하면 소녀에게서 들려오던 잔소리가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우..."
벨카는 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가면이 있음에도 붉어진 얼굴을 숨기려는 듯 그를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