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상처 자국.
깐깐한 난쟁이가 심사를 끝내고 돌아간 뒤.
"이야, 이게 얼마 만에 땅에서 먹는 점심이냐."
"그러고 보니까 점심은 잘 안 먹었던 것 같네요."
어셔는 멀미를 하느라 점심을 생각할 정신도 없었지만 말이다. 마차를 탈 때마다 겪는 멀미는 벨카 덕분에 아무리 약해져도 친해질 수가 없는 것이었다.
"마차를 타고 다닐 때는 점심은 제대로 못 챙겨 먹지. 황야에서는 점심때 마차를 세울 수도 없으니까. 너는 멀미하면서 밥을 먹을 수 있겠냐?"
"그러네요."
멀미를 할 때는 아무리 좋은 향기라도 어지럽게 느껴지는데 밥이라도 먹었다간 그대로 토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셔의 안색은 창백해졌다.
"지금은 한낮인데 밖에 있어도 아무렇지 않네요?"
"구름 지대 근처라서 그래. 바로 아래는 지옥 같은 곳이지만."
때마침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어셔의 잔 머리카락을 들었다 놓으며 간지럽혔다. 거친 황야와는 다른 촉촉한 푸른 초원의 향기가 코에 닿는다.
"그런데 왜 넘어오기 전에 있던 곳에서는 사람이 안 사는 거예요?"
하지만 이런 초원은 구름 지대를 넘어가기 전에도 있었다. 부드러운 솜털 같은 작은 토끼들이 뛰어놀던 모습과 푸른 초원을 떠올려보면 그곳에서도 사람이 못 살지는 않을 것이다.
"생물이 살 수 있다고 무조건 사람이 살 수 있는 건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만요."
사람들을 노리고 달려드는 생물들은 어디를 가든 많다. 많은 사람이 모여 뭉치지 않으면 시도 때도 없이 그런 생물들이 달려들어서 버티지 못한다는 말에 어셔는 질릴 것 같았다. 계획적으로 토대를 쌓으면 새롭게 사람들이 살 수 있게 되겠지만 그렇게 사람이 살 곳을 만드는 것은 무척 어렵다. 결국 기존에 만들어진 마을이나 도시에 합류하는 것이 더 큰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이 모이고 그것이 반복되면 란투아 같은 국가가 생긴다.
란투아 같은 국가는 아주 오래전에 만들어져서 지금까지 유지해온 곳이라 대체할 곳도 없다고 한다.
"그보다 그 회색 난쟁이가 좋게 봐줬으면 좋겠는데."
"회색 난쟁이요? 다 같은 난쟁이가 아니에요?"
어셔는 그의 말에 의아하게 물었다. 난쟁이면 난쟁이지 회색은 또 무엇인가? 그보다 그 난쟁이에게 회색이 있었던가? 그가 모르는 눈치를 보이자 도나르는 끙 앓는 소리를 내었다.
"생각보다 모르는 게 너무 많은데."
그는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다가 말했다.
"난쟁이라고 다 똑같은 난쟁이는 아니지. 만약 네가 난쟁이들 앞에서 그런 소리를 했으면 길길이 날뛰었을 거다."
"왜요?"
"왜긴 왜야. 난쟁이들은 서로 비교하는 걸 엄청나게 싫어하거든."
도나르는 난쟁이들은 대체로 회색 난쟁이와 초록 난쟁이, 두 종류로 나뉜다고 설명했다.
"무슨 기준이라도 있어요?"
"일단 회색 난쟁이는 키가 작은 것만 제외한다면 사람과 다를 게 없는데. 문제는 초록 난쟁이지."
회색 난쟁이는 키만 작다 뿐이지 사람과 다를 게 없지만 초록 난쟁이의 경우 키 자체는 회색 난쟁이보다 크지만 등이 굽어 있고 피부도 초록빛에 가깝다고 한다.
"게다가 못생겼지."
"못생겼다니."
"뭐라 할 말은 많은데. 그렇게 밖에 말을 못 하겠다."
두 난쟁이는 그런 외모부터 성격까지 안 맞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서로 상종하는 것도 꺼려 하는 일이 많다고. 덕분에 난쟁이들끼리 비교하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는 모양이다.
"아무튼 들어가면 조심하는 게 좋아."
"네."
점심 식사는 그렇게 끝이 났고 어셔는 벨카와 함께 가볍게 마차 사이를 걷고 있었다.
"숲 밖은 정말로 위험하고 이상한 거 투성이네."
조심하지 않으면 위험한 일이 너무 많았다. 잘못하면 말라죽을 수 있는 황야와 사람을 잡아먹는 위험한 생물들, 구름 지대의 아래는 상단 사람들과 합류하지 않고 그들끼리 통과할 엄두도 나지 않았을 것이다.
"벨카, 우리끼리 여기까지 오는 건 역시 무리가 아니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힐디스비니가 아닌 말을 타고 그들끼리 이런 곳까지 오는 것은 무리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물어보았다.
"아마 그럴지도."
그리고 벨카 또한 그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면 왜 반대로 나와야 했던 거야?"
밖이 이렇게나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소녀는 정해진 길로 나가고자 하지 않고 반대로 나왔던 것일까? 먼저 마을을 나서기로 한 것은 어셔였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목적지를 알 수 없다는 벨카의 말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짜증을 내고 말았다. 대체 왜 목적지를 가르쳐주지 않느냐고 그러나 상단의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알 수 있었다. 도나르를 비롯한 사람들은 가르쳐주려고 하지 않았지만 어셔는 이 상단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단순하게 물건을 팔아 돈을 얻으려면 멀리 가지 않아도 괜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도나르는 1년을 넘는 시간 동안 상단을 유지해왔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건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어셔가 살던 곳이 시골이긴 해도 길 잃은 여행자나 떠돌이 상단이 찾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보통 상단은 나라 간의 무역을 위해서 만들어지지만 상단이 지나치게 멀리까지 가는 경우는 그곳에서 잘 만들어지지 않거나 희귀한 물건, 기술을 팔아 정착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여행에 흥미가 깊었던 그는 그 이야기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자세한 사정을 알 수는 없지만 이 상단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고향을 떠나왔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래서였다. 목적지를 알 수 없다는 벨카의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건. 그녀는 목적지가 있기 때문에 숲을 나가고자 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숲을 벗어나야만 했기 때문에 숲을 나온 것이었다는 걸 말이다. 그리고 그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 소녀가 말했다.
"원래 그곳은 사람이 살만한 곳이 되지 못하니까."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잘 살고 있었잖아."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만들었다니."
문득 마을에서 전해져 내려오던 나무꾼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대충 그럴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혹시 벨카가..."
그 이야기 속의 괴물이냐고 물어보려고 했을 때였다.
"너희 너무 멀리 갔잖아! 얼른 돌아와라!"
도나르가 그들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덕분에 걷다 보니 그들이 마차의 행렬에서 꽤 떨어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보니 도나르가 이곳으로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머지않아 그들의 곁에 도착한 그는.
"심사 결과가 나왔어."
"네? 벌써요?"
"나도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그 회색 난쟁이가 잘 봐준 모양이다."
난쟁이는 분명 반나절쯤은 걸릴 것이라 이야기하고 돌아가지 않았던가? 그가 잘못 들은 건 아닐까 생각했지만 성벽의 철문이 그들이 들어갈 수 있도록 열린 모습을 보면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곧 출발할 수도 있다는 말에 뜨루스의 마차로 돌아갔다가 로기를 발견했다.
"잠깐! 네가 왜 여기 있는데!"
"그, 그게 놀다가 다쳤다는데."
어셔의 말에 로기는 뚱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고 대신 대답한 것은 뜨루스였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그는 바지 한 쪽을 걷고 무릎이 까진 곳을 드러내고 있었다. 연고를 발라 두었는지 상처와 그 근처의 피부가 불투명한 것이 흐릿하게 보였다. 소녀가 사용하는 약초처럼 바로 치료해 주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때 마차 문을 열고 샬비가 들어왔다.
"로기, 여기 있었구나. 자, 이거 받아라."
그러면서 그가 로기에게 내민 것은 조금 두께가 있는 긴 사각형 모양의 넓적한 철 조각 같은 것이었다. 동그란 철전과는 다르게 좀 더 두껍고 컸다. 그 철편의 평평한 면에는 이름이 음각 되어 있었고 끝에는 구멍이 뚫려 주황색 끈이 묶여있었다. 어셔가 그 투박한 철 조각이 무엇인지 궁금해하고 있으니 로기가 물었다.
"이게 뭔데요?"
"그러고 보니 너는 처음 받았지? 패라고 하는 거다. 란투아에서 발행해 주는 거니까 혹시라도 절대 잃어버리면 안 된다."
잘못하면 누군가 그 패를 들고 죄를 저질러서 대신 잡히게 될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는 말을 하며 그는 뜨루스에게도 패를 건넸다. 뜨루스의 패에는 초록색 끈이 매달려 있었다.
"그런데 패 위에 달려있는 끈 색이 전부 다르네요?"
샬비는 이미 패를 허리춤에 달아 놓았는데. 그의 패에 달린 끈은 빨간색이었다. 그 모습을 신기하게 지켜보다가 그가 더 이상 패를 나눠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상한 마음에 물어보니.
"저희 건요?"
"너희들 거는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 같은데? 제출한 명단의 순서대로 나오는 거 같으니까."
"명단이라면."
"왜? 그때 단주님이 내민 양피지에 너희들 이름을 적었잖아."
그들이 상단에 합류하기로 했을 때. 노인이 내밀었던 이름과 생일로 보이는 숫자가 가득한 양피지가 떠올랐다. 가운데에 줄이 그어진 글자들이 많았는데.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물어보려다가 벨카가 말리는 바람에 묻지 못했었다.
"그러면 저희 언제 출발해요?"
"잘 모르겠는데. 지금 계속 만들고 있다니까 시간이 꽤 걸리지 않을까?"
"지금 만들고 있다고요?"
패가 생긴 것을 보면 이름 같은 걸 새기는 단순한 것이었지만 그것을 하나하나 새기고 나눠준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시간이 더 걸릴 것은 확실했다. 결국 패가 전부 만들어지기 전까지 그들은 이곳에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패는 정말로 명단의 순서대로 만들어졌는지 어셔와 벨카가 패를 받았을 때는 이미 마차가 출발하기 시작한 후였다.
"으, 이 멀미라는 건 왜 이렇게 적응이 안 되는 거야."
그는 다시 찾아온 멀미에 울상을 지었다. 소녀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누워 있으면 조금 약해진다고 해도 멀미라는 것은 겪게 되는 것만으로도 그에게 스트레스를 주었다. 벨카는 그런 어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런 건 억지로 익숙해지려 하지 않아도 괜찮아."
사르륵 이마의 머리카락이 그녀의 손길에 넘어가는 것을 느끼며 어셔는 나른함과 함께 졸음이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뒷머리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말랑말랑한 허벅지가 기분이 좋았다.
"흐아암, 벨카."
멀미마저 가시는 기분에 어셔는 엎드려서 그녀의 허벅지에 얼굴을 파묻어버렸다. 동백꽃처럼 달콤하고 향긋한 소녀의 향기가 그는 너무나 좋았다.
"읏, 잠깐만 어셔."
그가 얼굴을 자신의 허벅지에 깊이 파묻는 행동에 벨카는 얼굴을 붉혔지만 정작 어셔는 멀미 때문에 몽롱한 상태라 눈치채지 못했다. 이윽고 멀미를 버티지 못했는지 잠들어버린 그의 모습을 보며 벨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지켜보는 시선이 있었다. 그 시선의 주인은 바로 다리가 다쳤다는 이유로 이곳에 있던 로기였다. 그는 소녀에게 마음껏 어리광 부리는 어셔가 부러웠다.
그는 과연 알고는 있을까? 소녀가 저렇게 선명한 감정을 보이는 것은 그뿐이라는 걸. 그들이 이 상단에 합류하고 며칠이 지난 지금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가끔씩 운 좋게 소녀의 맨얼굴을 본 사람들은 감탄하지만 그마저도 무기질적인 모습을 보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만큼 어셔가 없을 때와 있을 때의 벨카는 차이가 심했다. 어셔가 그녀의 앞에 서는 순간 생기가 없어 인형으로만 보이던 소녀는 생명을 얻은 것처럼 생기가 돌았다.
그 어떤 것도 품지 않을 것 같았던 금빛에는 꿀처럼 달콤하게 아롱이며 깃든 애정이 고운 별빛처럼 반짝였다. 그렇게나 선명한 애정이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로기는 절망스러웠다. 그래, 지금도 이렇게 그녀를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사무치도록 괴로웠다. 그래도 로기는 작은 희망이라도 붙잡고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자신의 무릎에서 잠든 어셔를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던 소녀는 로기를 바라보더니 이내 짓고 있던 미소를 지워버렸다. 남아있는 것은 그저 빈 껍데기 같은 시선. 그를 바라보는 소녀의 금빛은 지독할 정도로 어떤 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그에 로기의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뭐라도 말해 줘..."
소녀는 그를 무기질적인 금빛으로 바라보기만 할 뿐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뭐라고 말해보라고!!!"
로기는 쿵쿵 마차 바닥을 신경질적으로 밟으며 벨카에게 다가갔다. 샬비는 볼 일이 있어 같은 마차에 타지 않았고 뜨루스의 경우 피곤한 기색으로 꾸벅꾸벅 졸다가 곯아떨어져 버렸기에 지금 로기를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위협이라도 하듯 소녀에게 다가갔지만 그녀의 무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그 모습에 그는 울분이 치솟아 이를 갈았다. 로기는 방해되는 어셔를 치우며 그대로 소녀를 밀어 눕혀버렸다.
그러자 소녀의 얼굴에 당황스러운 기색이 떠오르자 그제야 조금 만족스러웠지만 이어지는 벨카의 말에 바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어셔..."
그녀는 로기 때문이 아닌 밀쳐진 어셔 때문에 그런 표정을 지었던 것이다. 어셔는 벨카의 무릎에서 떨어져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어차피 침대의 위라 멀쩡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안심하는 소녀가 보였다. 그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것을 깨달은 로기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왜!? 대체 왜? 왜 나를 봐주지 않는 거야? 왜!"
그에게 밀쳐져 누워버린 벨카의 모습이 흐릿해졌다 맑아지기를 반복했다. 그가 팔로 침대를 지탱하며 벌어진 거리를 타고 그의 눈물이 흘렀다. 그의 눈물이 떨어져 소녀의 얼굴에 닿아 마치 소녀가 눈물을 흘리듯 다시 흘렀다.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멈추지 않을까? 벨카가 자신의 말에 답해주기를 바라며 덮치려 했지만 자꾸만 흐르는 눈물이 그를 방해했다. 그는 결국 자신의 몸을 지탱하던 팔마저 굽혀 힘없이 누워있는 소녀를 껴안았다.
밀착한 소녀의 숨결마저 달콤해 그것이 더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로기는 저항하지 않는 소녀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미안해."
사실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잘못이라는걸. 소녀에게 잘못은 없다는 걸. 그저 추잡한 질투심과 욕망 때문에 소녀의 애원조차 듣지 않고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건 그였으니까. 그때 소녀의 손이 떠올랐다. 망설이는 듯 가늘게 떨리다 울고 있는 그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주었다. 그러면서도 끝내 목소리는 들려주지 않았다. 그 손길에 로기는 눈물로 그녀의 가슴께를 적셨다. 그렇게 철없는 소년의 첫사랑은 끝이 났다. 더럽혀진 순정의 조각만을 남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