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상처 자국.
신호를 받은 마차들은 속도를 줄이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멈춰 섰다.
-쿠륵, 쿠륵
혹사당한 힐디스비니들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마부들은 제가 맡은 마차의 상태를 보고 사상자가 없는지 확인하고 모여들었다.
"상황은 어때?"
도나르가 묻자. 마부들은 하나둘씩 입을 열었다.
"바퀴가 좀 나갔어. 우박에 부딪힌 모양이야."
"이쪽은 창문이 박살 났는데. 사람들이 유리조각에 다쳤어. 다행히 심하게 다치진 않았다는데."
"일단 마차는 전부 수리해야겠더라 완전 곰보가 됐다 야."
그런 식으로 손상된 마차나 물품, 사상자가 없는지 확인한 결과. 우박에 대한 피해는 상당했지만 사망자는 없었다. 구름 지대에 들어갔다가 돌아오지 못하거나 절반 이상의 사람들이 죽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본다면 천운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었다. 그렇게 모든 확인이 끝나고 침묵하던 마부들은 이내 누군가의 웃음소리를 흘림과 동시에 전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푸흡! 너희 머리에 그게 뭐냐?!"
"아하하! 누가 할 소린데!"
가끔 우박을 잘못 맞아서 투구에 주먹만 한 우박이 콕콕 박혀 있는 마부들의 모습 때문이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얻어맞고 혹이라도 난 듯한 모습에 그들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구름 지대를 무사히 빠져나왔기 때문인지 다들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그런데 우박도 얼음인데 비싼 거 아니냐?"
"비싸지. 가장 하급품이라도 보통은 마법사가 만들어주지 않으면 꿈도 못 꾸는 건데."
누군가 그런 말을 주고받는 순간. 그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이곳저곳을 우박에 잔뜩 두들겨 맞아 우그러져 곰보가 된 자신들의 갑옷과 마차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누가 본다면 전쟁이라도 치르고 온 것이냐고 물어볼만한 모습이다.
"뭐 하고 있어!? 녹기 전에 빨리 빈 마차에 몰아넣어!"
그들은 손상된 마차나 갑옷을 고치기 위해서라도 돈이 필요했다. 우박 때문에 손해가 생겼으니 우박을 팔아 손해를 줄이자는 것 같다. 잠시나마 웃음거리를 주었던 투구에 박힌 우박들까지 가리지 않고 들고 가는 마부들의 모습을 도나르가 못 말리겠다는 듯 지켜보고 있으니 그와 함께 마차를 몰았던 기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수고했다. 이거나 마셔."
그가 내민 것은 철로 된 물병이었다. 안쪽이 가죽으로 만들어진 것을 보면 꽤 비싼 물건이다. 이런 건 차가운 물을 담을 때 좋은 물건이라 차가운 물이라고 생각하며 뚜껑을 열었더니 알딸딸하면서도 달달한 냄새가 났다.
"이거 와인이잖아? 이 귀한 게 어디서 난 거냐?"
안에 있던 건 물이 아닌 와인이었다. 와인이라는 것은 비싼 과일을 발효시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비쌌다. 운이 좋으면 아끼고 아껴서 하급품 하나 정도는 구할 수 있겠지만 보통은 고위층이나 마시는 물건인데. 하급품이라도 보통 기사들의 삯으로 반 년 이상은 무리하게 허리띠를 졸라매야 살 수 있다. 당연히 이것을 담고 있는 물병보다 더 비싼 몸이다.
"켁, 와인인 줄 알았다면 몰래 한 모금 마셔보는 건데!"
"이거 네 거 아니었어?"
"내가 그런 비싼 물건을 어떻게 들고 있겠냐? 어느 아리따운 아가씨께서 전해주라 더라."
그러면서 기트는 자신의 뒤를 가리켰다. 그가 가리키는 곳에 있는 여인의 모습을 발견한 도나르는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시프."
그는 어차피 투구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뜨겁게 달아오르는 얼굴에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러자 기트는 실실 웃는 기색으로.
"그래서 우리 상단의 최고 미인이랑 언제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된 거냐?"
"아니, 그게 말이다."
그는 어떻게든 그의 질문을 회피하고 싶었지만 차마 시프와의 관계를 부인할 수 없어서 어쩔 줄 몰랐다.
"그 우박에 부딪힌 건 괜찮냐? 정통으로 부딪힌 거 같았는데."
"말 돌리는 거냐?"
"아 좀!"
"키킥, 머리에 요란하게 부딪힌 거치고는 아무렇지도 않았어."
기트는 다 알고 있다며 웃고 있으면서도 봐준다는 듯이 그가 말에 넘어가 주었다. 그게 더 사람을 열받게 한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모습이다. 이걸 한 대 때리는 수도 없고. 하지만 이어서 들려온 그의 말은 도나르를 어색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혼자서 마차 모느라 고생 많았다."
"혼자서라니. 너도 같이 몰았잖냐?"
마치 공을 전부 그에게 돌리는 듯한 기트의 말에 도나르는 그도 같이 마차를 몰았던 것을 떠올리며 말했다.
"우박 정도야 좀 막아줬지. 그런데 다른 사람들 말을 들어보니까. 내가 기절한 사이에 가재도 습격했었다며?"
"뭐?"
도나르는 그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기절했었다니. 너 나랑 같이 가재를 봤었잖아?"
"너도 어지간히 정신이 없기는 했나 보네. 헛것이라도 본 거냐? 나는 첫 번째 우박이 내렸을 때. 우박 하나 잘못 맞아서 기절했었다고."
두 번째로 우박이 내렸을 때야 다시 우박을 맞은 충격으로 일어났다는 그의 말에 도나르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자신이 발리스타를 조립하러 간 사이에 그에게 고삐를 넘겨주기도 했었는데. 그가 단순히 자신을 놀리려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 생각하기에는 그에게 장난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도 네 덕분에 살았다. 시프랑 잘해보라고."
기트는 그렇게 말하며 그의 어깨를 두드리고 가버렸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일일까?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가 잠시 고삐를 넘겨주었던 자는 누구란 말인가? 우박과 가재 때문에 정신이 없던 그가 정말로 헛것을 보기라고 했던 걸까? 구름 지대 밑에서 겪었던 일들이 기트의 말을 듣고 나니 이상한 꿈처럼 느껴졌다. 도나르가 그렇게 긴가민가 하는 그에게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 아저씨!"
이제는 익숙해진 목소리에 내려다보니 그들과 동행 중인 아이들의 모습이 보인다. 키는 작은 편이지만 그래도 사내아이의 티가 나는 금발의 소년과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적발의 소녀는 어디를 가든 눈에 띄었다. 그중 가면 속의 금빛과 마주쳤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는 어젯밤 소녀와의 일이 떠올랐다. 자신의 가슴팍에는 여전히 그때의 십자가가 있었다.
"네가 도와준 거냐?"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어째선지 구름 지대를 무사히 통과한 것이 이 소녀 덕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나르의 두서없는 질문에 당황할 법도 하건만 소녀는 그가 하고 싶은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러니 해준 것도 없어. 당신을 구한 건 저 아이니까. 감사 인사를 하려면 저 아이에게 해줘."
그러면서 소녀가 가리킨 것은 도나르가 모는 마차를 이끌던 힐디스비니였다. 로기가 소녀에게 선물했던 토끼를 산 채로 먹어치우는 바람에 그도 조금 껄끄러워 하고 있던 녀석을 가리키는 모습에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고맙다."
"어째서 나에게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소녀가 부끄러운 듯 시선을 피했다.
"아저씨."
"아, 맞다. 어셔."
"말을 건건 전데 왜 벨카에게 말해요?"
"아니, 오해다! 날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마!"
그리고 도나르는 자신을 수상하다는 듯 째려보며 벨카를 뒤로 숨기는 어셔를 마주해야 했다. 그런 그의 오해를 푸느라 시간을 허비한 도나르가 그들을 데리고 도착한 곳은 그가 몰던 마차의 지붕 위였다.
"와, 이게 뭐라고요?"
"발리스타라는 거다."
어셔가 그를 왜 불렀나 했더니 마차 위에 못 보던 것이 갑자기 생긴 것이 궁금해서 그에게 물어보러 온 것이었다. 아이들 입장에서는 궁금할 만도 했다.
"그나저나 해체하지도 않고 다시 마차를 몰았더니 엉망이구만."
마차에 설치되는 발리스타는 보관을 위해 평소에는 해체해두었다가 조립하는 방식인데. 급한 상황 속에서 다시 해체할 여유가 없었던 탓에 그대로 두고 마부석에 내려갔더니 쏟아지는 우박을 맞고 이곳저곳이 전부 망가져 있었다. 가재에게 쏘기 위해 창까지 장전해둔 상태였는데.
"이래서야 해체도 못하겠네."
"왜요?"
"잘 봐. 이미 장전도 해놨는데 해체한다고 어디 하나 잘못 건드리면 그대로 발사될 거다."
발리스타는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놓아두어야 했다. 그 대신 발리스타를 보관하던 문을 열어 놓았던 덕에 마차의 위에는 우박이 잔뜩 쌓여있었다. 또 우박을 팔아서 수리비를 메꾸면 되는 건가. 하지만 앞으로는 발리스타를 사용할 일도 없을 것 같기도 하니 어디 적당한 곳에 쏘고 회수해서 대장간에 팔면 되겠지.
"이제 내려가자."
"에, 더 구경하고 싶은데."
"안되는 건 안되는 거다. 그냥 같이 있어도 위험한 물건을 너희랑 내버려 두라는 거냐?"
"네에."
그렇게 도나르가 마부석에서 꺼낸 바구니에 우박을 쓸어 담고 마차 아래로 먼저 내려가 내려올 아이들을 받아주고자 했을 때였다.
-푸우우우웅!!
힐디스비니가 경고하는 소리가 들려온 건. 평소의 울음소리와는 다른 나팔을 부는 것 같은 울음소리에 그가 얼굴을 굳혔다.
"너희, 일단 거기 있어야겠다."
"언제는 빨리 내려오라면서요."
"잔말 말고 숨어 있어!"
어셔의 투덜거림에 신경질적으로 대답한 도나르는 급하게 제 무기를 들고 힐디스비니의 울음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달려갔다. 힐디스비니가 저런 울음소리를 내는 경우는 딱 두 가지뿐이었다. 동족이나 인간에게 도와달라는 구원 요청이거나 천적이 다가온다는 신호였다. 오랫동안 힐디스비니를 몰고 다녔던 그였기에 그가 잘못 들었을 리가 없었다. 도나르가 대피하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 소리가 들려온 곳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많은 마부들이 모여있었다.
"저거 아까 그놈 맞지?"
샬비의 말에 그들이 바라보는 곳을 보면 구름 지대의 밑에서 따돌렸다고 생각했던 가재가 이쪽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직도 쫓아오고 있었던 거냐!"
"사납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저 정도였던 건가."
누군가 질린다는 듯이 말하자 그 또한 동감했다. 설마하니 제 영역인 구름 지대를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끈질기게 따라올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사냥감을 끈질기게 쫓는다는 이야기는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악명이 자자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쯧, 탄을 계속 맞혀 봤는데. 제대로 타격이 들어간 것 같지도 않아."
슬링을 든 마부들이 탄환을 쏴 가재를 저격해 보지만 그새 껍데기가 좀 말랐는지 조금 부서지는 선에서 끝이 난다. 제대로 된 손상을 주려면 지금처럼 장거리에서 계속 저격을 해야 할 텐데 가재와의 거리는 대화를 하는 사이에 이미 200m 안쪽이다. 구름 지대에서는 전속력으로 움직이는 힐디스비니와 비슷하게 움직이더니 살던 곳을 빠져나오면서 속도가 줄어든 모습이다. 그럼에도 빠르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아서 얼마 지나지 않아 부딪칠 것 같았다. 하지만 더 큰 문제가 보였다.
"그런데 저거 멈출 생각이 안 보여!"
"보니까 완전히 회까닥 돌았어! 그대로 들이받을 생각인 거 같다!"
다른 생물이었다면 튼튼한 마차에 들어가 숨어 있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가재는 이야기가 다르다. 놈의 단단한 갑각과 힘은 마차 정도는 우습게 우그러트린다. 그런 놈이 저런 덩치와 속도로 마차에 부딪힌다면 결과는 뻔했다. 우선 마부들 중에서 가장 발이 빠른 이들을 떠올렸다.
"샬비랑 오두르는 사람들한테 마차 안에서 나오라고 전해! 잘못하면 마차 안에서 죽을 수도 있어!"
"알았어!"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힐디스비니의 경고음이 들리면 일단 마차 안으로 피신하는 사람들의 습관이 이번에는 좋지 않게 작용했다. 가재는 이미 그들의 지척을 앞두고 있었다.
"가재는 어떻게 하게?!"
힐디스비니들은 이미 구름 지대 밑에서 전속력으로 달리느라 모든 기력을 소진하고 지쳐있는 상태다. 그런 녀석들을 재촉해 마차를 몰아 가재를 피하려고 해도 힘들고 그럴 시기도 늦었다. 결국 남아있는 방법은.
"어떻게든 막아! 다리 위주로 타격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저 크기에 저 속도로 달려오는 걸 막겠다고? 기병이 돌진하는 걸 몸으로 막겠다는 거랑 뭐가 달라!?"
"어쩔 수 없잖아!"
그도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쯤은 안다. 심지어 가재의 덩치와 달려오는 속도를 봤을 때 기병이 돌진하는 것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덜 할 것 같지도 않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래도 그들은 해야만 했다.
"이렇게라도 안 하면 모두 끝이야!"
그들은 각자 메이스 같은 둔기와 방패를 챙겨 들었다. 방패는 우박을 막느라 성한 것이 없었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차라리 가재가 그들을 경계하며 신중하게 사냥하려 했다면 차근차근 껍데기를 때려 부수면서 반대로 사냥할 수도 있었다. 결국에는 한 마리였으니까. 문제는 놈이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들이받으려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더 생각할 틈도 없었다. 결국 거대한 가재가 그들의 코앞까지 들이닥쳤으니까.
"섣불리 막으려 하지 말고 다리를 노려! 조금이라도 속도가 줄어들 거야!"
다행히 놈의 껍데기는 완전히 마르지 않았다. 메이스질 한 번에 비교적 얇은 다리 한 짝이 부서져 가재의 몸이 옆으로 기울었다.
"집게 발 휘두른다! 떨어져!"
"끄억!"
놈이 가만히 맞고만 있지는 않겠다는 듯 휘두른 집게 발에 마부 한 명이 막아들었던 방패 째로 허공을 날았다. 놈은 그래도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아서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다리를 반 이상 깨부쉈다.
"이거 멈출 생각이 전혀 없잖아!"
그럼에도 놈이 달려오던 속도가 있었던 탓에 그들은 가재를 놓쳐버렸다. 놈의 뒤를 쫓아가 보지만 어림도 없었다. 그때 가재가 돌진하고 있는 방향의 끝에서 도나르는 있어선 안 될 이를 보았다. 보고 말았다.
"시프!!"
그와 결혼을 약속한 여인이 있었다. 하필이면 사람들이 마차에서 나와야 한다는 말에 나오고 있었던 중이었을까.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쪽을 보았던 그녀는 이내 가재의 모습을 발견하고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이 가재는 하필이면 그곳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그는 턱 끝까지 차오른 숨도 참으며 전력을 다해 달렸지만 그의 달리기 속도로는 가재를 붙잡을 수 없었다. 시프는 코앞까지 들이닥친 가재의 모습에 얼어붙은 듯 굳어버린 모습이다. 이대로라면 그녀를 잃고 만다. 하지만 도나르가 가재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