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7화 〉상처 자국. (57/220)



〈 57화 〉상처 자국.

로기는 흐릿하게 떠오르는 의식을 느끼며 감겨있던 눈을 뜨다가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소녀를 탐하다 지쳐 잠들어버렸던 일이 떠오른 것이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는 이곳이 자신이 마지막으로 잠들었던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어났다!"

덮지도 않았던 이불이 그의 몸에 밀려나 있었다. 자주 어울려 노는 친구들의 목소리까지 들려오는 것을 보면 이 마차는 꿈 때문에 깨어나기 전 그들과 함께 잠들었었던 마차가 분명했다. 어쩐지 장난기가 느껴지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거슬렸지만 로기는 소녀에게 그런 짓을 한 것이 들켰다는 생각에 그것을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나, 누가 여기로 데리고 왔었냐?"
"아직 잠 덜 깼냐? 너 어제 여기서 잤잖아?"
"여기서 계속 자고 있었다고?"

설마 어제 그 모든 게 꿈이었다는 걸까? 누군가 자신을 이곳에 데려온 것도, 들킨 것도 아니라면 그 모든  꿈이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차가운 밤공기와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소녀의 감촉과 몸을 섞으며 느꼈던 쾌락이 너무 생생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로기는 마른 세수를 하며 그저 꿈이 지나치게 생생했을 뿐이라 치부하려 했다. 손에서 검은 얼룩 같은 것이 묻어나지만 않았다면 계속 그 생각에 빠져있었을 지도 모른다.


"이거 설마."
"야, 들켰다! 튀어!"

아이들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소리치며 마차의 문을 열고 달아나버렸다. 그 모습에 로기는 아이들의 목소리에  장난기가 섞여 있었는지 깨달았다. 아이들이 가장 늦게 일어난 그의 얼굴에 낙서를 했던 것이다. 그래, 아이들은 가끔씩 유독 늦게 일어난 아이에게 이런 장난을 치곤했었다.

"이것들이 진짜."

말은 열받은 것처럼 해도 로기의 입가에는 웃음이 걸려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불같이 화를 내며 쫓아갔겠지만 평소와 같은 아이들의 모습에 로기는 안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젯밤의 일들은 단지 악몽이었다고 그렇게 치부하면서. 식용으로 쓰지 않는 물로 얼굴에 묻어있을 잉크를 닦아냈다. 그래도 이 허전한 마음은 어째서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땀을 흘렸던 것처럼 찝찝한 옷을 벗어 갈아입으려 했을 때였다.

마차 한구석에 놓여있는 평평한 철로 만든 전신 거울에 옷을 갈아입던 자신의 모습이 비친 것은. 팬티가 달랐다. 이곳에서 잠들기 전에 자신이 입고 있었던 팬티가 아니었다. 잠시 꿈을 꾸고 일어났을 때 갈아입었던 팬티였다.  사실을 깨달은 순간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그게 꿈이 아니었다고?

"기분 나빠."

그렇게 이야기하던 소녀의 목소리와 괴로움에 가득한 금빛이 떠올랐다. 원래 입고 있었던 팬티를 찾아보았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황급히 옷을 갈아입은 로기는 다급한 마음에 마차를 뛰어나왔다. 그가 자신들을 쫓으러 나오지 않자 살펴보려 했던 아이들이 로기가 나오자 웃으며 도망가는 모습이 보였지만 지금 로기에게 중요한  아이들을 쫓아가는  아니었다. 그가 가장 먼저 찾은 건 샬비였다.

그 일들이 진짜로 일어난 일이었다고 한다면 뜨루스 때문에 그 마차에서 자던 샬비가 소녀에게 그런 짓을 하고 잠들었던 로기를 가장 먼저 발견했을 테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샬비를 발견한 그는 그를 향해 달려갔다.

"로기? 무슨 일이냐?"


 달리다가 자신의 앞에서 멈춰 선 로기의 모습을 본 샬비는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아이들이 웃는 소리가 들려서 또 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저를 마차에 데려다준 거. 샬비 형이에요?"
"그건 또 무슨 소리냐? 데려다주다니. 그럴 일이 있었나? 너 애들이랑 같이 자러 갔지 않았냐?"

그보다 내가 너를 데려다줄만한 일은 없을  같은데. 힘도 가장 센 녀석이. 그렇게 말하는 샬비는 그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도저히 짐작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에 로기는 어쩌면 다른 사람이 자신을 먼저 발견하고 데려다 놓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그 애, 벨카한테. 무슨 일이 있지는 않았어요?"

그렇다면 벨카가 또 그런 일을 당했다는 사실만큼은 그가 알고 있어야 했다. 그의 기억대로라면 자신은 일을 치르고 난 뒤 뒤처리도 하지 못하고 잠들었었으니까. 그러자 샬비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서 그는 분명 흔적이 남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건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악몽이라도 꾼 거냐?"
"네?"
"판이 범인이었다는 건 네가 알려 줬잖아. 녀석이 아무리 대단한 마법사라도 그렇게 손가락도 꽁꽁 묶어놓고 왔으니  수 없다고. 불안한  알겠는데.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걱정하지 마."
"아무 일도 없었다고요?"

로기는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다고? 그렇다면 어제의 그 일들이 모두 꿈이었다는 소리다. 하지만 자신의 팬티는 왜 꿈속에서 바꿔 입었던 그대로란 말인가? 머리가 아팠다.


"너 안색이 안 좋은데."


괜찮으냐 묻는 그의 말에도 로기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 애 지금, 어디에 있어요?"
"그 아이라면 어셔랑 먼저 아침 먹으러 갔는데."


 말을 듣기 무섭게 그는 아침 식사가 이뤄지고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저 녀석 아픈 거 같은데. 뜨루스한테 좀 봐달라고 해야 하나."

샬비는 뜨루스가 환자들을 모두 살필 때까지 기다리는 중이라 식사를 좀 늦게  예정이었다. 뜨루스가 환자들을 보는 사이 잠시 바람을 쐬러 나왔던 그에게 이상한 소리만 하는 로기의 모습과 창백한 안색은 걱정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는 나중에 말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로기의 말들을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다.

"허억허억."

로기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아침 식사가 이뤄지고 있는 곳에 도착해. 붉은색을 찾았다. 지금도 악몽이라 치부하기엔 현실 같은  일들이, 자신의 달라진 팬티가 그저 착각이라고 모두 꿈이었다고 이야기해 주길 바라면서. 그리고 식사 중인 사람들의 사이에서 드디어 소녀의 붉은색을 찾아냈다.

"저기! 잠깐만."


자신을 부르는 것이라는 걸 알았는지 붉은 소녀가 그를 돌아보았다. 옆에서 어셔가 그를 보며 성가시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지금 로기는 소녀의 대답을 들어야만 했다. 그 모든 일들이 꿈이었다고 말해주길 기대하면서.

"너,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지?"


벨카는 그의 물음에 고개를 기울이더니 입을 열었다.


"질문이 너무 광범위해."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답하는 소녀는 다행스럽게도 그가 기억하는 어젯밤 사이의 일들이 모두 꿈이라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그, 그래?"
"...하지만 어젯밤의 일이라면 기억하고 있어."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다음으로 이어진 소녀의 말에 그의 심장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해가 떠올라 따뜻해진 날씨에도 불구하고 한기가 등을 훑어내리는 것 같았다. 그 말에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면 소녀의 금빛이 품은 서글픈 원망을 로기는 발견할  있었다. 고작 시선에 불과했다. 둔감한 사람은 어쩌면 기분 탓으로 넘길 수도 있는 그런 시선. 하지만  시선이 로기에겐 심장을 찌르는 서슬 퍼런 비수와도 같았다.

그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같았지만 여기서 끝내면 안 됐다. 좀 더 좀  소녀에게 무어라 말해야 했다. 이대로 끝내기엔 너무나 아프고 괴로워서 그녀가 잠시라도 더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으면 좋을 거 같았다.


"그러면..., 그러면 왜 사람들이 전부 그 일을 모르는 건데?"

뭐라도 더 말해서 시간을 끌어야 한다는 생각에 급하게 말했지만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어젯밤의 일이 모두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말이었다. 아니, 꿈이어야만 한다고 그렇게 말해달라고 비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때문이었을까? 그를 바라보는 소녀의 금빛에는  이상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한 줌의 원망마저도.

"제물에 대한 대가는 모두 치렀어. 그것이 네가 의도한 것이었던 의도한 것이 아니던 계약은 이루어졌고 끝이 난 거야."

소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로기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제물이 무엇이며 대가와 계약이라는 들어본 적도 없는 그런 이야기. 하지만 단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소녀와의 관계는 이미 돌이킬 수 없다는걸.


"벨카, 어제 그 녀석이랑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로기가 벨카의 말을 듣고 혼이 빠진 것처럼 터덜터덜 휘청이며 위태로운 발걸음으로 돌아간 후. 어셔는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는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로기에게 딱히 호감이 있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짜증이 나기까지 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금방이라도 죽을 사람처럼 얼굴을 거무죽죽하게 물들이는 모습을 보면 없던 동정심도 생겼다. 좋아하는 상대에게 거부 당한다면 얼마나 슬플지 어셔도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다만 벨카와 로기의 대화를 듣고 어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셔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소녀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나중에, 나중에 이야기해 줄게. 이곳은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
"어, 응."

그렇게 잠시나마 의문을 뒤로 미루고 어셔는 내려놓았던 그릇을 들었다. 아침 식사는 어제 잡은 토끼 고기를 이용한 죽이었다. 소녀가 그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때 그들이 앉아 있는 곳에 합석하는 이들이 있었다. 도나르와 시프였다.


"그래서 아저씨랑 누나는 뭘 하다 오신 거예요?"


원래는 도나르와 함께 식사를 하러 왔던 그들이지만 도나르는 중간에 시프에게 불려갔다가 이제야 함께 돌아온 것이다.


"아,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둘이서 볼 일이 있었거든."
"그, 그래! 도나르에게 부탁할 게 생겨서 말이야."


무엇을 하다 왔는지는 몰라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는 게 저렇게 당황할 일이었던가? 어셔는 두 사람의 모습이 수상했다. 그러다 그는 벨카가 시프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모습을 발견할  있었다. 혹시 무언가 눈치챈 것이 있는지 물어보면.


"왜 그래?"
"두 사람이 섞여 있어."

소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적어도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녀의 말에 시프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고 도나르는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어셔만이 그녀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수 없었다.


아침 식사가 끝나고 도나르를 비롯한 마부들이 모여들었다. 이제 곧 멀고도 멀었던 여정의 끝이 보이고 있었기에 살짝 들떠있는 모습이었지만 아직 가장 큰 장애물이 남아있기 때문에 차분하게 회의를 열기 위해서였다.

"나사가 빠졌다거나 바퀴에 문제가 있는 곳은 없지?"
"바퀴는 문제가 없는데. 마차 벽에 작은 구멍이 뚫렸어. 용접할  필요한데."
"대장간이라면 몰라도 그런 작업을 여기서 어떻게 하냐? 그냥 철판 하나 갖다  테니까 덧대 놔."

구름 지대를 지나가기 위해선 보다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다. 지금 이곳에서 누가 죽거나 사라져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마차의 상태나 마차를 끄는 힐디스비니의 상태를 보고받고 문제 될 것이 없는지 꼼꼼하게 확인했다.

"신호는 깃발 대신 휘슬로 하기로 하고. 구름 지대의 상태는 어땠냐?"
"일단 안쪽까지 들어가서 살펴봤지만 보이는 곳까지는 별거 없었어."


마침 힐디스비니를 타고 정찰을 하고 온 마부에게 이야기를 들으며 도나르는 고민했다. 정작 중요한 구름 지대의 중심부를 직접 살펴볼 수가 없으니 정찰은 하나마나였지만 안 하는 것보다는 나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정찰을 구름 지대의 안쪽까지 보내버리면 마부와 힐디스비니의 안전도 장담할 수 없었다. 돌아오지 못할 경우 아까운 인력과 가축을 잃게 되어 주객전도가 되어버리고 돌아온다고 해도 중심부와의 거리를 생각하면 시간이 지나치게 오래 걸린다. 돌아오는 사이에 날씨가 바뀔 확률이 너무 높다.

"결국 운에 맡기는 수밖에 없나."
"그렇지."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자 한숨만 나왔다. 방비는 빈틈없이 되어있지만 아무리 제대로 준비해도 사상자가 나오거나 전멸할 수도 있다니. 최악이다. 구름 지대를 통과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구름 지대마다 크기와 규모는 제각각이지만 일부를 제외하면 대기가 무척 불안정하기 때문에 그 밑으로 통과한다는 것은 위험한 모험이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위험한 생물들도 제법 많이 살고 있었으니까. 나름대로 대책이나 대비는 해놓았지만 이제 그들이 할  있는 일은 각오를 다지고 구름 지대를 통과하는 것뿐이다.


"흠, 잠깐 이야기할 시간이 되겠는가?"
"어르신."

그때 마부들 사이로 노인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노인의 목소리에 마부들이 정중하게 물러서자 들어서는 그.

"무슨 문제라도."
"그런 건 아닐세. 단지 자네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있다네."


도나르가 대표로 묻자 노인은 웃으며 부정했다.

"자네들이 없었다면 이 상단은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걸세. 모두 자네들 덕분이야."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말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주어지는 일들은 모두 당연히 해결해야 될 일들이었고 설령 일을 해결하고도 모진 소리를 들을지언정 실패해서는 안 되는 삶을 살아왔다. 이 상단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 주어진 일이었고 이 상단에 있는 사람들조차 몇몇을 제외하면 그들이 마차를 이끌고 위험한 생물을 처리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러니 실패한다고 해도 너무 괘념치 말게. 자네들은 충분히 잘해주었어."


그런 그들에게 있어서 노인의 말은 하나의 위로이자 격려였다. 노인이 그런 말을 남기고 돌아가자 회의를 주도하던 도나르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이런 회의 질질 끌어봐야 소용도 없을 테고. 이제 출발하자."


사실 그들은 망설이고 있었다. 구름 지대를 통과하지 못하면 오랜 여정이 물거품이 되게 때문이었다. 만일 운이 좋지 않아 마차가 전복되거나 누군가 죽게 된다면 어떻게 될지 지레 겁을 먹고 있었다. 그러나 노인의 말은 그들의 망설임을 없애주기에 충분했다. 결국 그들은 무의식중에 질질 끌고 있었던 무의미한 회의를 끝내고 각자의 마부석에 올랐다.

만일을 대비해 당번이 아닌 마부들도 마부석에 함께 오른다. 그들은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서 마차를 모는 마부를 보호하거나 유사시에 대체할 예비 인력이었다. 평소라면 마부 혼자서 마차를 몰아도 문제가 없었지만 구름 지대는 특히 위험하기 때문에 마차를 모는 마부를 호위하고 대체할 인력이 필요했다.


"부디 가재 떼가 나오지 않기를 빌자고."
"불안한 이야기하지 마. 그것들과 마주치면 이미 끝장이라고."

도나르도 자신과 함께 마차에 오르는 마부의 짓궂은 농담에 질색했다. 구름 지대의 아래가 위험한 이유는 날씨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안 그래도 어두운 판국에 위험한 생물들도 여럿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말하는 가재란 구름 지대의 밑에서 살아가는 거대한 생물로 단단한 갑각을 가지고 있는 데다가 단체로 몰려다니는 습성이 있어서 드래곤만큼은 아니지만 상대하기 까다로운 생물이었다.


놈들의 집이나 마찬가지인 어두운 구름 지대 아래에서 놈들과 마주치면 드래곤보다 더 답이 없다. 심지어 잡식성에 대식가들이라 마차 같은 경우 마주치는 순간 끝이라고 봐도 좋다. 오죽하면  많고 많은 위험 생물들 중에서도 여행자들의 천적이라 불리겠는가? 그놈들을 피하려면 놈들이 지내고 있는 곳을 지나지 않거나 때때로 대규모로 이동할 때 이동하는 경로가 겹치지 않는 것뿐이었다.

-삐이이이이이이이익!!!

구름 지대로 들어서기  깃발로 신호를 주고받으며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것을 확인한 도나르는 마지막으로 휘슬을 불어 출발 신호를 보냈다. 어둠 속에서는 이 소리를 듣고 방향을 잡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그는 구름 지대를 향해 마차를 이끌었다. 외곽은 그나마 햇빛이 들지만 조금만 깊이 들어서면 햇빛 하나 들지 않는 어둠으로 가득하다. 구름 지대의 밑에 들어서자 이제는 그들이 어둠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지 어둠이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지 구분할 수도 없다.


도나르는 원초적인 공포를 자극하는 어둠에 물러나고 싶은 마음을 시프와의 약속을 떠올리며 다잡았다. 그는 이곳을 통과해야만 했다. 상행 중에 만난 붉은 소녀가 그의 왼쪽 가슴팍에서 떨어진 고향의 심벌 대신 달아주었던 십자가가 그에게 용기를 주는  같았다. 무슨 의미로 달아주었는지  수 없었지만 대충 응원의 의미라고 받아들이면 될 것 같았다.

"정말로 어두워졌네."


마차가 움직이자 시작되는 멀미에 벨카의 무릎에 머리를 베고 누워있던 어셔는 창문에 햇빛이 사라지고 새까만 어둠이 몰려드는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두꺼운 구름에 뒤덮여 달과 별조차 존재하지 않아 밤보다 지독히 어두운 하늘은 이상한 곤충들에게 습격당했던 날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괜찮아.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지켜줄 테니까."


어셔의 불안한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벨카의 상냥한 금빛이 그를 향하고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말에도 어셔는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맥이 그를 죽이려 했을 때에도, 판이 그를 위협할 때도 소녀가 그를 지키기 위해서 쓰는 것만으로도 괴로워하는 마법을 사용하던 모습이 떠올라버렸으니까.


"그건 싫어. 벨카는  나를 위해서 희생할 생각이잖아."


그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던 모습에. 어셔는 자신이었다면 과연 어떤 망설임도 없이 그런 행동을 할  있었을까? 고민했었다. 그렇게나 무섭고 두려웠는데. 그는 확신할 수 없었다. 어쩌면 벨카를 두고 도망쳐 버릴 수도 있었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소녀가 그런 자신을 용서할 것을 알기에 어셔는 더욱 괴로웠다.

"나는 벨카가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어셔는 벨카를 혼자 두는 것이 무서웠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디선가 상처받지는 않을까?  그녀를 위해서 아무렇지 않게 자기 자신을 희생하고 괜찮다고 말하지는 않을까? 그는 차라리 벨카가 조금이라도 더 이기적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그녀는 조금이라도 덜 다치고  아플 테니까. 그의 말을 듣는 소녀의 금빛이 따스함을 품고 빛났다. 그 바라만 보고 있어도 느껴지는 다정함이 특별한 주문처럼 그를 안심시켜주었다.

"고마워. 어셔."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이 그의 이마에 살짝 붙었다 떨어지자 따스하고 몽글몽글한 감각이 폭신폭신한 빵이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가슴속에 가득했다. 어두운 밖에서 비바람이 불어와 마차에 강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마차 안에서 울려 퍼졌지만 걱정스럽지는 않았다. 그저 이렇게 둘이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모든 일이 해결될 것 같았다.


"부럽다."


같은 마차의 안에 타고 있어서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지 않으면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는 그들의 애정행각을 지켜보던 뜨루스는 무심코 그런 말을 중얼거리는 자신을 발견하고 고개를 휘휘 저어 잡생각을 떨쳐 보내려 했다. 하지만 이미 환자들의 상태를 전부 살펴보았던 그에게는 집중할 거리조차 없었기 때문에 자꾸만 그들에게 시선이 가버리고 말았다. 애써 무시하려고 해도 벨카라는 소녀에겐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는 마력 같은 게 있어서 더욱 문제였다. 그들과 같은 공간에 있음에도 다른 공간에 있는 것처럼 외롭게 느껴지는 뜨루스는  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