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상처 자국.
시프가 잠드는 것까지 확인한 도나르는 홀가분한 발걸음으로 그녀가 있는 마차를 나섰다. 밤이 늦은 시간에 일을 치르느라 기진맥진한 몸이었지만 그동안 묵은 감정을 긁어낸 마음만큼은 가벼워 몸까지 가벼운 것 같았다. 그는 곧 자신의 잠자리를 찾아가려 했지만 아직도 타오르며 불길을 내뿜던 화로를 발견했다.
"맞다 저거 치워야 하는데."
마음 같아선 저 화로를 내버려 두고 잠을 자러 가고 싶었던 그였지만 그래도 화로는 치워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화로의 불을 일으키는 기름을 아무런 의미도 없이 전부 소모해버릴 테니. 도나르가 화로를 치우고자 다가가면.
"깜짝이야! 너 아직도 안 자고 뭐하고 있는 거냐?"
화로의 불꽃에 가려져 있던 소녀를 발견하고 그는 놀란 가슴을 가라앉혀야 했다.
"달을 보고 있었어."
도나르가 그러거나 말거나 달무리처럼 아스라이 내려앉은 소녀는 나지막이 이야기할 뿐이다. 그 말대로 소녀는 달빛과 별이 흐르는 밤 하늘을 그대로 간직한 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화로에 비치는 소녀의 붉은 머리카락은 불과 함께 있어도 자연스러울 것만 같았는데. 막상 이렇게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다. 제아무리 붉은 꽃이라 한들 불꽃에 직접 닿으면 타올라버리듯 소녀 또한 그러했다. 그와 화로를 사이에 둔 소녀의 모습은 활활 타오르는 화로에 던져진 붉은 꽃과도 같았다.
"넌 춥지도 않냐?"
스스로를 불태우고 있는 것만 같은 소녀의 모습에 신경이 쓰인 그는 소녀가 언제나처럼 검붉은 원피스 한 장만 입고 있는 것을 보고 걱정스럽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소녀는 미소 지으며.
"걱정하는 거야?"
"그렇지. 날도 추운데. 그러고 있으면 감기 걸린다고."
"괜찮아.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으니까."
그리 이야기하니 도나르는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신경 쓰이는 마음에 그는 시프에게 나눠주었던 생강차를 끓여 소녀에게 건넸다. 그에게서 컵을 받아든 소녀가 고개를 기울였다.
"이건?"
"생강차다. 몸을 따뜻하게 해줄 거야."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컵 안을 한참을 들여다보던 벨카는 고개를 저으며 그에게 다시 컵을 돌려주었다. 명백한 거절에 그가 의문을 품은 찰나.
"당신이지? 그 아이를 선물하라고 조언한 건."
잠시 소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도나르는 로기가 그녀에게 토끼를 잡아 선물하라고 했다가 선물한 토끼가 힐디스비니에게 산 채로 먹혔던 일을 떠올리고 식은땀을 흘렸다.
"그게 말이다. 로기를 너무 나쁘게 생각하진 마라. 그 녀석은 그냥 너한테 사과하고 싶었던 거니까."
"그가 안 좋은 생각으로 선물한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어."
"휴, 그러냐?"
알고 있다니 도나르는 티끌보다 못한 것 같지만 아직 로기에게 희망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그는 이 소녀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단순한 호의라 해도 살아있는 아이를 잡아 선물하는 일은 자제해 줘. 당사자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제물이 될 수 있으니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달까. 사고방식 자체가 어딘가 어긋나 있는 기분이었다. 도나르가 그녀가 무슨 뜻으로 저런 말을 했는지 생각하는 사이. 벨카는 어느새 그의 품에 안기려는 것처럼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무, 무슨?!"
코끝을 스치는 소녀의 달큼한 향기에 그가 굳어있자 소녀는 그의 갑옷을 몇 번 매만지는 듯하더니 뒤로 물러섰다. 자신의 갑옷에 대체 무슨 일을 했는지 의아한 마음에 그녀가 만졌던 곳을 몇 번 만져보던 그는 곧 자신의 건틀릿 너머로 낯선 것이 생겨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확히 왼쪽 가슴 부근, 그의 고향의 심벌이 있었던 자리에 무언가 있었다. 잠깐 투구를 벗어 가슴 부근을 확인해 보면 그 자리에 생긴 것은.
"십자가?"
십자가 모양의 장식이었다. 대체 이런 건 어디서 났고 어떻게 갑옷에 붙인 것일까?
"내가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거라곤 이런 것뿐이야."
"잠깐, 이게 뭐길래."
"나머지는 스스로 나아가야만 얻을 수 있는 거야."
당신은 지금까지 잘해 왔어. 그러니 자신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 소녀의 그 말을 끝으로 화로의 불꽃이 제풀에 꺼져버렸다. 그에 깜짝 놀란 도나르가 화로에 든 기름을 살폈지만 기름은 많이 남아 있었다. 바람도 강하게 불지 않았는데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그는 곧 그녀가 꺼져버린 불꽃과 함께 홀연히 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혹시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지 볼을 꼬집어보면 아팠고 가슴 부근의 십자가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거, 귀신이 곡할 노릇일세."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불꽃이 꺼진 화로를 정리했다. 갑옷의 십자가는 떼어 놓지 않았다.
"~♪"
도나르와 헤어진 벨카는 기분이 좋은 듯 달빛과 은하수가 내리는 길을 종종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소녀의 입가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그렇게 소녀가 어셔가 잠들어 있을 마차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아윽...?!"
마차에 발을 들인 그녀는 누군가에게 붙잡히듯 밀쳐져 마차의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고통에 소녀는 괴로워하며 이런 짓을 한 이를 찾았다.
"너 말이야. 정말."
그는 바로 로기였다.
벌꿀을 가득 담아 놓은 듯 달콤한 애정으로 가득한 황금빛의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오롯이 어셔라는 소년만을 바라볼 때만 나타나는 그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에 로기는 전율했다. 그래 저 눈빛이었다. 그가 갈망하는 것은 그가 갈구하는 것은. 벨카는 새하얀 나신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소녀의 입술이 그의 이름을 속삭였다. 소녀가 그를 유혹했다. 이상하게 소리가 들리지 않았는데도 소녀가 부르는 것이 자신의 이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로기는 벨카에게 다가갔다. 그 또한 옷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이었다. 소녀와 입술을 겹치고 자신의 자지를 소녀의 은밀한 균열 속에 집어넣었다. 저항은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하반신에서 느껴지는 기분 나쁜 축축함에 로기는 정신을 차렸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던 그는 멍하니 마차의 천장을 바라보다가 그 모든 것이 꿈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자신의 바지 속에서 느껴지는 차갑고 축축한 감촉은 사라지지 않는다. 로기가 인상을 찌푸리며 바지 속에 손을 넣어 살펴보니 끈적한 액체가 자신의 손에서 묻어났다.
"진짜. 꿈을 꿔도 하필이면."
사실 꿈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꿈속에서나마 소녀의 그런 눈길을 받으며 관계를 맺는 것은 정말로 황홀한 느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게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그의 손에 묻어 나온 이건 정액이었으니까. 이러면 차라리 꿈을 꾸지 않는 편이 나았다고 생각하며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했다. 친구들이나 어른들이 깨어나서 이 사실을 안다면 분명 놀림감이 될 것이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로기는 그런 자존심 상하는 일은 절대 사양이었다.
일단 재빨리 팬티를 갈아입은 로기는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냥 모른 척 숨겨둘까 싶지만 그랬다간 들킬 확률이 높았다. 누군가 발견하기라도 한다면 무척 귀찮은 일이 벌어지겠지. 그렇다면 남은 건 한 가지 방법뿐이었다. 두꺼운 옷을 찾아 위에 겹쳐 입은 로기는 자신의 팬티를 들고 마차의 문을 열고 나왔다. 자신의 팬티를 황야의 모래 밑에 묻어버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로기의 그런 시도는 뒤로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로기의 귀에 여자의 신음이 들려왔으니까.
"아응!"
사람들이 모두 잠든 밤의 황야는 조용했고 덕분에 그 소리는 확실하게 들려왔다. 그 소리에 이끌려 걸어간 로기는 그 소리가 어디에서 들려오는지 알 수 있었다. 절로 생겨나는 긴장감에 숨을 죽이고 소리가 들려오는 마차에 다가갔다. 문을 살짝 열어 엿보고 싶었지만 그러면 차가운 공기가 들어가 들킬 것이 뻔했다. 창문이 너무 높아서 엿보지도 못하는 로기는 마차의 앞에서 발만 동동 구르며 신음을 엿들었다. 그러다 언뜻 두 사람의 제대로 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프 누나랑 도나르 아저씨?"
도나르도 아저씨라기보다 형이라 부르는 것이 옳은 나이였지만 아이들 사이에선 아저씨라 불렸다. 누가 시작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이유에는 역시 시프와의 관계에 있었다. 시프는 상단에서도 제일 가는 미녀였다. 또한 친절한 성격의 그녀는 인기가 많았고 어른들이나 아이들 중에서도 시프를 짝사랑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누군가 그를 아저씨라 부르기 시작했고 그게 질투와 장난, 친근함으로 누구나 그렇게 부르게 된 건.
때문에 시프와 묘한 분위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벌써 저런 일을 하는 관계였던가? 로기는 두 사람이 관계를 맺는 모습을 상상했지만 잘 연상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저 둘이 섹스라는 걸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안 로기는 도나르가 부러웠다. 시프는 로기의 눈에도 아름다운 여자였고 이미 그 일이 어떤 느낌을 주는지 아는 로기에게 그건 참을 수 없는 유혹이었다. 로기는 아쉬운 마음에 자신의 물건을 만지작거리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마부석에는 마차의 안을 엿볼 수 있을 만한 작은 창문이 있었다.
마부석은 높고 올라가기 힘들 정도로 높았지만 막 성년에 들어선 로기에겐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주로 그의 고국인 파시페니아에서 견습 기사로 훈련을 받던 그에게 오히려 쉬운 일이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올라가는 것 자체가 아니었다.
-끼이익
마부석에 발을 딛는 도중 낡은 쇠가 무게를 받아 살짝 휘어지는 소리가 울리는 것에 혹시 마차 안에서 관계를 맺고 있을 이들에게 들켰을까. 숨을 죽이고 잠시 움직이는 것을 멈추었다.
"아으응!"
다행히 여지없이 들려오는 관능적인 신음에 안심하면서 슬그머니 마차를 기어오르는 것을 계속했다. 이윽고 도착한 마부석. 어른들은 위험하다고 보호자가 없으면 잘 올려주지도 않는 마부석이었다. 지금 그곳에 혼자 올라왔다는 미묘한 만족감과 쾌감도 지금 그가 엿보고자 하는 광경에 비하면 그다지 크게 와닿지는 않았다. 혹시라도 창문을 통해 자신의 그림자가 들킬세라 좁은 마부석에서 더욱 작게 몸을 수그리고 얼굴에서 한쪽 눈만이라도 창문의 안쪽을 볼 수 있게 최대한 달라붙었다.
그러자 한쪽 눈으로나마 겨우 마차 안의 광경이 그에게 비쳐들어왔다. 먼저 촛불의 빛이 잠깐 그의 시야를 가렸지만 빛은 곧바로 사그라들고 온전히 마차 안의 광경을 드러냈다. 마차의 안에는 아니나 다를까 시프가 그 성숙한 여체를 드러내고 도나르에게 안겨 있었다. 잠깐 경험해 보았던 소녀의 여린 곡선과는 다른 여인의 곡선이 쾌락에 휘어지고 그 몸에 그녀의 금발이 달라붙어 일부나마 가리고 있었지만 발갛게 달뜬 피부와 그 뜨거운 신음은 숨길 수가 없었다.
"으읏! 아! 도나르!"
도나르를 애타게 부르며 여인의 몸이 또다시 휘었다. 그녀의 둔덕이 도나르의 몸 위에 내려앉으며 물건을 삼키고 그것만으로 모자라다는 듯 다리로 그의 하체를 붙잡고 팔로 그의 목을 부둥켜안았다. 남자의 몸에 일그러지는 풍만하고 부드러운 여체의 모습이 지독할 만큼 자극적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물건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올라 자신도 저 여인의 속을 탐하고 싶다고 주장할 정도로. 그러다 떠오른 것은 붉은 소녀의 모습이었다.
"...하아."
그리고 한숨. 그도 그녀와 저런 관계가 되고 싶었다. 거리낌 없이 몸을 섞는 저 모습도 좋지만 무언가 보다 함께하고 싶은 그런 마음을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소녀에겐 어셔라는 짝이 있었고 그 틈에 자신이 끼어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야 벨카가 어셔를 볼 때마다 어떤 눈을 하는지 보았으니까. 게다가 그녀가 잠들어 있었을 때 그런 일까지 했었다.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다시 범하려 하지 않았던가? 호감을 사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사실만을 다시 되새긴 꼴이었다.
그러다 마차에서 들려오던 쾌락 어린 신음이 멎었다는 걸 깨달았다. 자세한 내용까지 들리지는 않았지만 다음을 기약하는 목소리가 달려와 로기는 마차의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더욱 숨을 죽였다. 그러기 무섭게 문을 열고 나오는 도나르. 잘못하면 들킨다는 생각에 쿵쿵 귓가를 울리는 심장소리를 부여잡고 도나르를 관찰했다. 시프와 관계를 끝내고 나온 그는 어딘가 홀가분해 보이는 모습이다. 로기는 그런 그가 부럽고 셈이 났다.
누구는 그의 조언 때문에 더 미움 받을 처지인데. 로기는 괜히 그가 원망스러웠다. 마차 밖으로 나온 도나르가 아직까지 타오르는 화로를 발견하고 끄려고 다가가는 모습이 보이자. 그는 이 틈에 도나르와 시프의 정사를 엿보느라 깜박했던 자신의 팬티를 처리하고자 마부석에서 내려왔다. 그때였다. 도나르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온 건.
"쟤가 왜 저기에?"
도나르가 있는 곳을 본 로기는 팬티를 땅에 묻는 것조차 잊고 그곳을 보았다. 그곳에 그 소녀가 있었다. 꿈속에서도 갈망하던 소녀, 벨카가. 이 늦은 시간에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몰라도 로기는 소녀와 도나르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대체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일까? 대화 소리가 드문드문 들려오지만 거리가 멀어서 제대로 된 말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야기를 듣자고 마차의 그림자를 벗어나면 그가 팬티를 처리하려고 나온 것이 들킬 수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할 때.
로기는 보았다. 소녀가 도나르의 품에 안기는 모습을. 머리가 뜨겁다 못해 어지러웠다. 어째서? 왜 하필이면 도나르란 말인가? 소녀가 좋아하는 것이 도나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머리가 하얘졌다. 좀 더 생각해보면 그것이 얼마나 얕은 생각인지 알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미 소녀가 도나르에게 안기는 듯한 모습을 보는 순간 그의 머리는 이미 분노와 배신감에 뒤범벅되어 있었다. 그에겐 시프가 있으면서!
이제는 도나르가 자신에게 해주었던 조언이 노리고 한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가 시프만으로도 모자라 소녀까지 독차지하려고 말이다. 자신이 소녀를 좋아한다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로기가 확 돌아간 것처럼 느껴진 시야를 바로잡았을 때. 도나르와 소녀는 이미 서로의 마차로 돌아가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대로라면 도나르에게 소녀를 빼앗기고 말 것이다. 소녀의 걸음걸이마저 도나르에게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소녀가 도나르의 밑에서 헐떡일 것이라 생각했을 때. 로기는 이미 도망치는 먹잇감을 쫓는 맹수처럼 소녀에게 달려가고 있었다. 이윽고 소녀가 마차의 문을 열어 발을 들이는 순간 로기는 그녀를 낚아채고 있었다.
"으읏."
벽에 부딪힌 탓에 소녀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이슬이 맺힌 금빛으로 로기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꿈에서 보았던 그 눈빛이 아니었다. 어셔를 바라보는 그 눈빛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젠 상관없었다. 소녀는 이미 벽과 그의 품 사이에 가둬져 있었으니까. 그녀가 도망칠 곳은 없었다. 마차의 문은 닫혔고 의무실로 사용하는 이곳에서 잠든 사람들은 수면향 때문에 작정하고 깨우지 않으면 깨어나지 않으니까.
"너는 말이야. 정말로 사람을 미치게 만들어."
로기는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작은 소녀의 귓가에 속삭이는 자신의 목소리가 낯설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망치지 말라며 경고하는 사람보다는 차라리 으르렁거리는 듯한 짐승의 것을 닮은 목소리. 코끝을 스치는 소녀의 체향도 붉은 머리카락도 하얀 피부도 자신의 품에 쏙 들어오는 작은 체구와 불안하게 떨리는 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는 소녀의 행동마저도 그 모든 것이 그를 미쳐버리게 만들었다. 그가 나쁜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나 사랑스러운 소녀가 자신을 이렇게 만들었다.
"그만, 안돼. 더는... 읏!?"
벨카가 그를 말리는 목소리를 로기는 위협하듯 그녀의 목덜미를 이빨로 살짝 깨무는 것으로 멈춰버렸다. 소녀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듣는다면 그는 이 일을 멈춰버리고 말 테니까. 어셔라는 꼬맹이에게도 도나르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이 소녀를 자신의 것만으로 만들고 싶었다. 자신의 아래에서 헐떡이게 하고 싶었다. 로기는 한 손으로 소녀의 가슴을 붙잡았다. 원피스 너머로도 봉긋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이 손에서 놓아주고 싶지 않을 정도로. 그녀의 가슴을 쥐어짜듯 붙잡고 주물럭거리자 괴로운 듯 신음을 내뱉는 소녀.
"으으윽."
벨카의 목에 묻었던 머리를 들고 그녀를 내려다보면 소녀의 눈가에 맺혀있던 이슬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너는 더 이상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구나."
결국 소녀는 지그시 눈을 감아 금빛을 감추었다. 그렇게 서서히 사라지는 소녀의 금빛 속에는 짙은 체념과 원망이 담겨있었다. 이제 로기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눈을 감아버린 소녀의 무방비한 몸은 이제 그가 어떻게 하든 혼을 잃은 인형과도 같았다. 가슴을 만지던 손을 소녀의 아래로 움직였다. 뱀이 기어가듯 스산한 손길에 소녀의 몸은 굳어지고 이내 뱀의 머리는 소녀의 속옷을 들추고 들어가 버렸다.
"아읏!"
손가락으로 소녀의 은밀한 계곡을 문지르며 간을 보다가 틈새로 독니를 찔러 넣자 소녀가 괴로운 신음을 흘린다. 따뜻하고 축축한 살점들이 자신의 중지를 감싸오는 것을 느낀 로기는 희열했다. 지금 그가 가장 바라고 있는 감촉이었다. 로기는 소녀의 그곳에 집어넣은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여 그녀의 안을 만끽했다.
"하, 흐읏."
소녀를 벽에 몰아세운 채 얼마나 그녀의 속살을 자극했을까? 눈을 감은 소녀는 여전히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었지만 입에서는 옅은 쾌락이 섞인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이미 로기의 손은 소녀의 야한 틈새에서 새어 나온 꿀물로 잔뜩 젖어있었다. 그녀의 팬티마저 적셔버릴 정도로 잔뜩 나온 꿀물은 소녀의 몸이 그의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녀의 의지와는 별개일지라도. 이내 로기는 바지 속에 갇힌 자신의 욕구을 꺼내들었다.
소녀의 안을 탐할 생각에 바지 속에 있을 때부터 부풀어 올라 투명한 군침을 뚝뚝 흘리는 물건은 소녀의 몸을 원하고 있었다. 로기가 소녀의 은밀한 구멍을 막고 있던 손가락을 빼내자 꿀물이 흘러내렸다. 그것을 손에 모아 잔뜩 흥분해 있는 자신의 물건에 바른다.
"흑!"
소녀의 것으로 진득하게 젖어버린 물건을 그녀의 사타구니에 끼워 넣었다. 뜨뜻한 꿀물이 흘러내리는 소녀의 보지가 그의 물건 바로 위에서 느껴졌다. 소녀의 꿀물에 젖은 보드라운 허벅지가 그의 자지를 감싸고 있는 것도 기분이 좋았지만 소녀의 키가 그보다 작으니 역시 불편했다. 그녀의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어 가볍게 껴안아 올리니 그제야 소녀의 작은 구멍과 그의 자지 끄트머리가 딱 맞아떨어졌다.
"읏, 아아아."
"하아."
그에 소녀의 몸을 천천히 내리자 진득하게 젖어있던 소녀의 꽃잎이 그의 자지를 물고 천천히 삼키기 시작했다. 그의 힘도 자랑할 만큼 센 편이지만 소녀가 워낙 가벼운 덕분에 서있는 상태로도 무리는 아니었다. 결국 소녀의 몸은 그의 물건을 모두 삼켜버리고 말았다. 소녀와 하나로 이어져 그녀의 맥박과 따스한 체온이 전부 느껴지는 이 행동은 무서울 만큼 기분이 좋았다. 이대로 평생 소녀와 이어져 있고 싶었다.
"아으!"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는 로기는 허리를 움직였다. 서있는 상태로 반쯤 몸이 허공에 떠있는 소녀를 상대로 하는 일은 힘들었지만 그의 물건에 꼬챙이처럼 꿰여 이전보다 그의 물건을 더 깊게 받아들이는 소녀의 몸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소녀의 안에서 결국 아찔한 쾌감의 끝에 다다른 그의 자지는 그녀의 안에 꾸덕꾸덕 씨물을 주입했다. 그렇게 소녀의 몸을 만끽하던 로기는 문득 소녀가 눈을 뜨고 그를 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가녀린 손을 뻗어 그의 뺨을 힘없이 쓸어내리면서. 한마디.
"기분 나빠."
작게 입을 연 소녀의 금빛 속에는 괴로움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 말에 머리에 열이 오른 그는 더욱 거세게 허리를 흔들었다. 질척한 음액과 정액이 뒤섞여 피부가 부딪히는 소리가 귓가를 채웠다. 쾌락이 아픔이 되기까지 스스로 헤아릴 틈도 없이 몇 번이고 소녀를 범하고 탐했다. 시간이 흘러 로기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소녀는 엉망진창이 되어 마차 바닥에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쓰러져 있었고 그는 더 이상 물건을 세우고 싶어도 세울 수 없는 상태였다.
로기는 멍하니 바닥에 쓰러져있는 소녀를 보았다. 미동도 하지 않는 소녀의 모습이 시체 같다.
"대체 뭐야."
자신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머리가 지나치게 열을 받아서 앞뒤도 가리지 않고 저질러 버렸다. 조금만 더 냉정하게 생각해 본다면 괜찮았을 텐데. 소녀가 그만두라고 했음에도 그녀의 힘이 약하다는 것을 알고 강제로 일을 치르고 말았다. 이런 자신이 판과 다를 게 무엇인가?
"착각하지 마 이제 너도 공범이라고? 누구한테 말하면 너도 끝인 거야."
판이 이 자리는커녕 이 행렬에 없다는 걸 알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그가 로기의 귀에 직접 속삭이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있었다. 이러려던 것이 아니었다. 이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이런 감정이 아니었다. 그가 소녀에게 느꼈던 건 이런 게 아니라 보다 더 따스한 것이었는데. 그 일 이후로 자꾸만 섞여들었던 질척하고 음습한 감정이 이렇게 만들고 말았다. 소녀를 이렇게 만들어 버린 자신이 괴물처럼 느껴졌다. 소녀는 결국 일어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