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4화 〉마법이란. (54/220)



〈 54화 〉마법이란.

"벨카, 정말로  먹어도 돼?"
"응, 오늘은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

어셔와 벨카는 자신들이 지내던 마차로 돌아와 있었다. 어셔는 그나마 말에게 맡겨두었던 가방에서 늑대들이 주었던 비상식량 중에서 하얀 곡물 같은 것을 먹고 있었지만 벨카는 그마저도 식욕이 없다며 식사를 거절했다. 늑대들이 준 것 중에는 육포도 있었지만 오늘 그런 광경을 보았던 탓인지 아무리 그래도 육포에 손이 가지 않았다. 그래도 이 하얀 곡물 같은 것은 생으로 씹어먹어도 그럭저럭 맛있었다. 무슨 곡물인지 알 수는 없지만 달달한 맛이 나는 게 식사용보다는 간식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저기 오늘 그 토끼 말인데."


어셔는 대충 배가 찼다고 느꼈을 때. 조심스레 입을 열며 소녀의 눈치를 보았다. 그녀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책을 보고 있었지만 그는 그것이 이야기해도 상관없다는 뜻임을 알았다.

"어떻게 된 거야?"

어셔는 로기가 벨카에게 토끼를 준 것에 악의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심지어 호의가 가득한 행동이라는 것은 안 봐도 뻔했다. 남자아이들이 여자아이를 괴롭히려거든 개구리나 벌레 같은 걸 잡아서 선물하지 혼자서 잡기 까다로운 토끼를 힘들게 잡아서 선물하진 않으니까. 그래도 벨카에게 잘 보이려 하는 행동이 괘씸해서 뭐라 하려 했었지만 그녀가 슬퍼하는 모습에 어셔는 뭐라 하려던 것도 잊었던 것이다.


그는 벨카가 동물을 싫어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보통은 질색할 법한 거미나 곤충 같은 것도 스스럼없이 쓰다듬어 줄 정도로 좋아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녀가 슬퍼하는 모습에 당황했었다. 토끼의 행동도 이상하기 짝이 없었다. 로기는 소녀가 슬퍼하는 모습에 받기 싫어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토끼를 놓으려 했지만 토끼는 갑자기 날뛰어서 소녀에게 스스로 안겼다. 정작 그런 토끼를 받아주었던 벨카는 슬퍼했지만 그래서 알  있었다.


"벨카는 토끼가 죽을 거라는  알고 있었지?"

그녀가 로기가 자신에게 토끼를 건네는 순간 토끼의 죽음을 알아차렸다는걸. 하지만 그렇다면 더욱 이상했다. 소녀는 그들을 그렇게나 좋아하면서도 정작 죽음에는 무감각한 편이었다. 자연스러운 것이니 어쩔 수 없다는 듯한 체념에 가까운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이번에 토끼가 죽을 때만큼 슬퍼하지는 않았다.

"무슨 문제가 있었던 거야?"

소녀는 그의 말에 드디어 책을 덮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에게 잘못은 없어 문제가 있다면 나에게 문제가 있었어. 그뿐이야."

어셔는 그게  그녀의 문제냐고 묻고 싶었지만 깨진 유리조각처럼 미소 짓는 그녀의 모습에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오늘따라 벨카의 말이  어려웠다.

"아이고,  일을 어찌해야 하나."

도나르는 저녁을 먹지 않겠다 이야기하며 마차로 가버린 로기를 생각하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안 그래도 판과 시프의 일로 마음이 복잡한데 자신의 충고로 그런 일이 벌어졌으니 괜한 죄책감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하필이면 토끼 통구이가 저녁으로 나오는 것은 뭐람. 사람들의 사기를 위해  잡은 사냥감이 있으면 되도록 빨리 음식으로 만들어 먹고 남은 것들을 보관 처리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아까 그런 일을 겪은 이들에게 너무 부담스러운 메뉴였다. 그가 저녁도 먹지 못하고 소리 없이 아우성치고 있자 그의 친구들이 찾아왔다.


"웬일이냐? 니가 먹을 거에 손도 안 대고."
"같이 먹는 애들은 어디로 갔어?"


샬비와 오두르, 그리고 뜨루스였다.

"무,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뜨루스의 경우 환자들의 상태를 보기 위해 간간이 저녁을 거르는 일이 많았는데.  둘과 함께  것을 보면  사람들이 닦달했던 모양이다. 그런 일이 있었으니 사람들의 신경이 곤두서는 것도 어쩔 수 없다는  알고 있지만 굳이 교도관 출신의  둘을 붙여 놓다니 의심하고 있다고 대놓고 이야기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상행 중에 술이 엄금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오늘따라 술이 마시고 싶어지는 도나르였다.

"그게 말이야."


도나르는 자신의 근처에 둘러앉은 그들에게 로기와 아이들 사이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자신이 로기에게 했던 충고와 힐디스비니가 토끼를 산 채로 오독오독 씹어먹은 일까지 생생하게.

"가, 갑자기 속이 안 좋아졌어."


뜨루스는 입을 틀어막았고 오두르는 말없이 먹고 있던 토끼 통구이를 내려놓았다. 샬비의 경우.


"남 먹을 때 그런 얘기 하지 마! 새끼야!"
"그렇다고 쇠꼬챙이로 찌르냐!"
"갑옷 입고 있어서 상관없잖아!"

먹고 있던 토끼 고기를 뱉으며 토끼 통구이를 익힐 때 쓰던 꼬챙이로 그를 찔렀다.

"끄응,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  같냐?"

어쨌든 그들에게 로기의 사랑을 이뤄주지는 못하더라도 완만하게 끝낼 수 있을 정도로 도와줄 수 있을지 의견을 물었던 도나르였지만.


"어떻게 한다고 될 일이 아닌 거 같은데."
"그 정도면 이미 끝난 거 아니냐."
"아,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인데."


역시나 좋은 대답이라곤 전혀 돌아오지 않았다.

"그 정도만 해도 충분히 미움받아도  말이 없는데. 로기 녀석은 그 여자애랑 안 좋은 일도 있었잖아. 가망이 없어."

로기와 벨카 사이에 있었던 일을 알고 있는 얼마 안 되는 인물 중 한 명인 오두르가 말하니 샬비도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이미 사귀는 애도 있잖아? 사이가 안 좋은 것도 아니고 서로 아끼는  그렇게 티가 나는데 끼어드는 건 무리지."

하긴 도나르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들이라고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리가. 결국 확인사살을 한 꼴이 된 것을 깨닫고 나니 그들 사이에 남아 있는 것은 타버릴  같아서 불길에서 꺼내 놓았던 바짝 익은 토끼 통구이들뿐이었다.

"그래서 이제 이건 어떻게 하지."
"""...."""

꼬르륵 소리가 그들 사이에 울려 퍼졌지만 결국 누구도 토끼 통구이에 손을 대지 못했다. 결국 식사 담당에게 찾아간 그들은 이전에 잡아두었던 생선으로 바꿔주기를 부탁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귀엽다는  그들을 쳐다보는 이들의 시선은 참으로 난감했다. 그 시선들을 무시하며 그들의 자리로 돌아가려던 순간.

"도나르 씨, 할 말이 있어요."


마차에서 나오지 않았으리라 생각했던 시프가 그의 곁을 지나가며 그런 말을 속삭였다. 도나르는 역시 남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저녁 식사가 끝이 나고 사람들은 저마다 내일을 기약하며 마차에 들어가거나 천막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도나르, 너는  들어가는 거냐?"
"아아, 그냥 좀 바람이나  쐬고 싶어서."
"그럼 우린 먼저 들어간다."

화로는 다 사용하고 나면 꼭 치우라며 이야기하는 친구들을 배웅한 도나르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이미 모두 화로를 정리하고 돌아간 뒤였지만 화로에 사용된 기름의 퀴퀴한 냄새와 토끼 고기의 냄새, 사람들의 떠들썩한 소리가 남아 들려오는 것 같았다. 이미 저 하늘에 남아있던 노을의 주홍빛도 밤하늘의 어둠에 밀려나고 작은 별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제는 마차에 들어간 사람들도 잠이 들었을 시간.

그가 아직도 화로를 꺼트리지 않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을 때. 드디어 사박사박 모래를 밟는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도나르는 구태여 뒤돌아 보지 않았다.

"이제 오는 거냐? 이야기를 나누기엔 너무 늦은 시간 같은데."
"미안해요. 조금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어요."

도나르의 말에 되돌아오는 것은 그가 그토록 기다리던 시프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이곳으로 오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 그와 화로를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앉는 그녀는 추운 밤 날씨 때문인지 두터운 담요로 자신의 몸을 덮고 있었다. 그 모습에 그는 혀를 차며.

"거봐. 날도 추워지는데. 나야 상관없지만 좀 일찍 나오지 그랬어."
"후후, 그러네요. 그런 의미에서 그때 마셨던 그 생강차, 다시 마셔볼 수 있을까요?"
"그걸 노린 거였나? 조금만 기다려 봐."

다행히 바로 앞이 노인의 마차였던 덕분에 그는 빠르게 마부석에 있던 생강과 컵, 주전자들을 가져왔다. 아직 꺼트리지 않은 화로가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 바로 주전자의 물을 끓였다. 그러자 아직도 머무르며 공기를 들뜨게 만들던 식사시간의 흔적들이 맵싸하고 진한 생강 향에 묻혀버리고 들떠있던 공기를 차분히 가라앉혔다. 그동안 이런저런 일로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기엔 좋은 분위기였다. 그는 시프가 입을 열기를 기다리기보다 먼저 입을 열기로 했다.


"언제부터였냐? 그런 일을 당하기 시작한 건."


그는 돌려 말할 줄을 몰랐다. 그는 언제나 솔직하게 행동했고 상당히 직설적이었다. 때문에 눈치가 없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 그의 목소리는 자신이 듣기에도 놀랍도록 메마르고 갈라져 있었다. 감정을 추스른다고 했던 것이 역효과를 낸  같았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1년이었다.


뜨루스를 도와 환자를 돕는 일이 많았던 시프는 판에게 좋은 표적이었다. 판은 뜨루스의 약을 이용해서 얼마 동안은 잠들어 있던 그녀를 간 보다가 그녀의 몸이 익숙해졌다 싶을 때. 일부러 그녀가 깨어날 때까지 범했다. 그녀가 저항할  없도록.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마법으로 몸을 통제 당해 치욕과 굴욕으로 가득한 행위들을 강요당했다고 한다. 도나르는 시프의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차라리 귀를 막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다. 그건 시프가 수치와 두려움, 자괴감을 무릅쓰고 토해내는 슬픔이었으며 도나르의 책임이었으니까.

"재판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했었지만 저는 아직도 모르겠어요."

그동안 저를 범한 건 뜨루스의 얼굴이었고 그가 내킬 때마다 장난감처럼 다뤄졌어요. 아직도 그 얼굴이 꿈에서 나와 저를 괴롭혀요. 잠을 자는 것도 힘들어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  몸을 손댈까 봐 잠을 설치고 일어날 때마다 구석구석 몸을 확인하기를 반복해요. 뜨루스를 보기만 해도 소름이 돋고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만 같아서 몸을 씻고 싶어. 하지만 물은 귀하니까 씻는 것조차 마음대로   없어서 미쳐버릴 것만 같아.  기억이 맞기는 한 거겠죠? 정말 판이 범인은 맞나요? 그 무엇보다.

"제가 제정신이긴 한 건가요?"


시프의 하소연은 끊어지는 일도 없이 이어져 끝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으로 끝이 났다. 도나르는 그녀에게 어떤 말로 위로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이럴  말재주가 없는 자신이 원망스럽다. 애초에 그에게 그녀를 위로할 자격은 있는가?


"흑, 미안해요. 이렇게  하고 싶은 말만 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분을 뵐 면목이 없었다. 그녀를 지켜주겠다고 했던 맹세가 허무하게 무너져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녀가 이렇게 괴로워하고 있었는데 자신은 대체 무엇을 했지? 가슴이 아프다. 그녀의 눈물  방울 한 방울이 그의 가슴을 찌르는 비수였다. 도나르는 망설임 끝에 위로의 말을 꺼내려 했지만 시프의 말이 빨랐다.


"제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마워요."


그와 선을 긋는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말아 달라는  말하는 그녀.


"마지막으로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요."


시프의 마지막이라 하는 말이 마치 이별을 말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도나르는 시프가 내미는 손을 잡고 그녀가 이끄는 대로 걸어갔다. 화로를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도나르는 그녀의 손을 놓칠 수 없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텅 비어 있는 마차였다. 작은 짚단 정도만이 남아 있는 이곳은 식량창고로 이용하다가 또 뜨루스가 갇혀있던 곳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없다.


창문으로 새어들어오는 달빛만이 마차 안을 비추는 가운데 그녀가 왜 이런 곳으로 데려왔는지 도나르가 의문을 품었을 때. 시프는 지금까지 덮고 있던 담요를 풀어헤쳤다. 그리고 드러나는 모습에 도나르는 당황하고 말았다.


"너, 너 설마 지금까지 계속 그러고 있었던 거냐?"

담요 아래 시프의 차림새는 고작 하얀 천으로 이루어진 속옷뿐이었다. 거의 알몸이나 마찬가지인 상태로 담요  장만을 덮고 그와 밖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것이 아닌가? 걱정도 잠시 남자의 본능은 슬픈 것이라 그의 시선은 달빛을 흐릿하게 반사하는 그녀의 피부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리고 그 피부에 새겨진 상처들이 그가 한 눈을 팔수도 없게 만들어버렸다. 판이 그녀에게 여태껏 무슨 짓을 해왔는지 모른 척하고 싶어도 모를 수 없을 만큼 그녀의 몸은 긁힌 자국과  자국으로 가득했다.

그중에서 강제로 관계를 맺으며 생겨났을 상처들 보다 눈에 띄는 것은 상처가 채 아물기 전에 다시 상처를 냈는지 여러  겹쳐진 듯한 흉터였다. 그 피학적인 상흔들이 그녀가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고개를 드는 성욕이 괘씸하고 괴로워 그가 고개를 돌리고 말았을 때.

"쳐다보기 힘들 만큼 흉하죠?"

씁쓰레하게 읊조리는 그녀의 말이 그의 머리를 붙잡았다.


"임신만 안 했다 뿐이지 이미 제 몸은 닳고 닳은 창녀의 것과 다를 것이 없어요."

시프는 자조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모른다.  말이 그녀 자신에게만 상처를, 흉터를 새기는 일이 아니라는걸.

"그 자에게 범해지면서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저와 그런 일을 하고 있는 게 그 자가 아니라 당신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어요."


그게 어리석은 소원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닳고 닳아서 곪아 터진 상처 같은 시프의 고백에 그의 가슴이 미어졌다. 시프는 모른다. 언제나 그의 얼굴을 가리고 보호하고 숨기며 믿음직한 기사로 만들어주는 이 투구 안에 가려진 그의 표정을. 그럼에도 그 자신만큼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눈물을 말이다.

"하지만 역시 바보 같은 소원이었죠?"

그는 더 이상 그녀의 말을 가만히 들어줄  없었다. 이미 이루어질 수 없다고 단정 짓는 그녀의 슬피 웃는 말을 그는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그는 두 손으로 자신의 투구를 붙잡았다. 이놈의 투구는 고향의 규칙 때문에 성인이 되고 나서 제대로 벗어본 적이 없었다. 그의 고향 파시페니아는 쓸데없이 실생활에서도 편히 입을 수 있는 갑옷을 잘 만들어서 자신이 갑옷을 입고 있는지 벗고 있는지조차 제대로  수 없게 해버려서 밥을 먹을 때도 투구의 바이저만 열고 닫으면 끝이었으니까.

샤워를 할 때가 아니면 제대로 벗어본 적이 없었다. 이 갑옷은 그들을 국가를 위해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를 위하는 믿음직한 군인이자 기사로 만들어주는 족쇄이며 감옥이었다. 이윽고 그는 붙잡은 투구를 그대로 벗어 뒤로 던져버렸다. 튕그르르르, 텅 비어있는 그의 투구가 마차의 벽에 부딪혔다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마차 안에 울려 퍼지자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는 시프의 모습이 보였다.


쓰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투구를 벗으니 아무리 갑옷을 편하게 만들었어도 벗고 있는 것만큼은 못하다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상쾌한 공기가 그의 얼굴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도나르... 씨?"


시프는 투구를 벗은 그의 얼굴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그가 지금까지 벗는 일이 없었던 투구를 벗어던지자 만들어진 듯 무표정하고 무뚝뚝하며 믿음직한 기사의 모습은 사라졌다. 대신 그곳에 남은 건 몸에도 맞지 않는 갑옷을 입고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흘리며 칠칠치 못하게 울고 있는 사내였다. 분명 밥을 먹을  몇 번씩은 보았을 얼굴인데. 이토록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어째서일까? 하지만 그 낯선 감각이 그녀는 싫지 않았다.

오히려 기쁘게 느껴졌다고 한다면 그가 자신을 이상하게 바라보지는 않을까? 시프가 울고 있는 도나르의 모습에 말을 잇지 못할 때. 그는 그녀에게 말없이 다가왔다. 어딘가 낯선 그의 얼굴에 정신이 팔려 조금 늦게 반응했던 시프가 깨달았을 때는 이미 그의 품 안에 안겨있었다. 그는 투구만을 벗어던졌을 뿐이기에 그녀의 맨살은 그의 갑옷에 닿았다. 그가 입고 있던 갑옷은 지독하게 차가워서 얼음으로 만들어진 갑옷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이렇게나 차가운 갑옷을 입고 살아왔구나.


"미안하다. 난 네가 그런 끔찍한 일을 겪고 있었을 줄은 몰랐어. 정말로 나는... 그분께 너를 지켜주기로 약속했었는데."


시프가 언제나 믿음직하다고 생각했던 기사님의 갑옷 아래에는 감당할 수 없는 책임감에 이토록 괴로워하는 남자가 있었다.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멋진 남자가 아니야. 아무리 노력해도 이렇게 좋아하는 사람 하나 지키지 못하는데."

울고 있는 그에게서 흘러나온 고백에 시프는 두근거리는 심장과 함께 눈을 크게 떴다. 어쩔 수 없는 감옥이자 갑옷 안에서 나약한 자신을 숨기고 그녀에게 멋진 기사님이 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해왔던 도나르가. 그가 지금 그 감옥을 일부분이나마 풀어내고 그녀의 앞에 나약한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언제나 그가 멋진 기사님이길 바라고 있었다는 걸 시프는 이제야 깨달을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그녀의 존재는  하나의 감옥이었던 것이다.


"나는 대체 그분을, 그리고 너를 어떤 얼굴로 봐야 하는 거냐?"

그는 언제나 믿음직한 기사님 같은 게 아니었다. 그저 무거운 책임감에 얽매여 감옥과도 다름없는 갑옷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던 가엾은 사람이었다. 이렇게나 홀로 괴로워하고 있던 남자에게 그녀는 어리광을 부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제야 시프는 도나르에게서 자신의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처럼 그의 시선 끝에는 항상 그녀가 있었다는 걸 자각했다. 그 또한 그녀와 같은 마음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항상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으면서도 서로의 마음을 외면하고 있었던 거다. 이미 자신이 안고 있던 상처가 너무 커서 누군가의 상처까지 함께 감당하기엔 너무나 아프고 두려웠으니까. 그 균형을 시프가 깨트리자 도나르 또한 벽을 무너트리게 된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안고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우는 그를 함께 안아주었다. 고된 삶을 살아왔을 그를 위해서 그가 마음껏 울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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