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마법이란.
"도나르 아저씨한테는 왜 먼저 간 거야? 나랑 같이 갔어도 됐잖아."
어셔는 벨카가 도나르를 마음에 들어 하는 듯하여 괜한 심술이 나서 투덜거렸다. 이전에는 농담 삼아 이야기하긴 했으나 어쩐지 도나르에게 허물이 없어진 소녀의 모습을 보니 위기감이 든 것이다.
"그가 망설이는 것 같아서."
"벨카는 생각보다 오지랖이 넓구나."
"그런... 가?"
소녀가 그의 말에 갸우뚱 고개를 기울였다. 정말이지 지금도 가면을 쓰고 다닐 만큼 낯을 가리면서 그녀는 묘하게 오지랖이 넓었다.
"그런가가 아니라 그래. 어차피 그러는 거 나랑 계속 같이 다니면 좋잖아."
어셔는 자신의 말이 억지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벨카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슨 일을 당할까 봐. 걱정이 되어서 어쩔 수가 없었다. 이토록 여린 소녀는 무엇이든 알고 무엇이든 할 줄 아는 것 같으면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행동하곤 했으니까.
"어셔가 좋다면 나도 좋아."
지금도 그의 억지를 당연하다는 듯 들어주겠다 이야기하는 소녀의 모습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숲속에서 살고 있을 땐 그저 벨카가 독특한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성격과는 다른 문제라는 걸 조금이나마 깨달았던 건 아마도 맥의 일을 겪었을 때부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는 워낙 갑작스럽고 충격적인 일이었던 탓에 정신이 없었지만 판의 일로 좀 더 차분하게 생각할 시간이 생겼던 그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벨카가 가진 위화감을 좀 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위화감을 무어라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어셔는 이것이 잘못된 행동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억지를 부리고 말았다. 그렇게 그들이 서로의 손을 마주 잡고 아무 생각 없이 마차 사이를 걷고 있을 때였다. 언뜻 촉촉함을 머금은 풀 내음이 바람에 밀려온 것은. 지금까지 황야에서 맡아왔던 거칠고 쇳내 나는 모래 냄새와는 확실하게 달랐다. 숲에서 나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립게 느껴지는 풀 내음에 그 냄새의 근원을 찾아 어셔가 주변을 둘러보자.
"어셔 저기를 봐."
"어디? 어디!"
소녀가 이미 그가 찾고 있던 풀 내음의 근원을 찾은 모양인지 손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어셔가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의 끝을 따라가자 그곳에는 그들의 종아리 근처까지 풀이 자라난 초원이 있었다. 지금까지 마차를 타고 지나왔던 생명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황량한 사막과는 다른 풋풋함이 느껴지는 그 광경에 그는 기분이 좋아졌다. 맥과 마을의 진실을 알게 되고 거대한 곤충들이 마을을 습격하면서 쫓겨나듯이 숲을 나왔던 어셔지만 그에겐 역시 황야의 모래 냄새보다 식물이 주는 풀 내음이 더 익숙했다.
"벨카, 빨리 가보자!"
그가 반가운 마음에 소녀를 재촉하면 그들의 뒤에서 헛기침 소리와 함께 도나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흠! 이 녀석들, 뭔가 잊은 건 없고?"
"네? 그게 무슨."
목소리를 따라 도나르를 본 어셔는 곧 그와 함께 있는 하얀 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뭐가 그리 서러운지 왕방울만 한 눈에서 뚝뚝 눈물을 흘리는 모습으로.
"아."
그제야 그는 이 상단에 합류하기 전에 그들이 타고 온 말이 있었다는 걸 떠올릴 수 있었다. 생각해 보니 상단에 합류하고 나서 지금까지 한 번도 보러 간 적이 없었다.
-히이이잉!
그가 자신의 존재마저 잊어버렸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한껏 슬픔을 담아 우는 말의 모습이 어셔의 죄책감을 자극했다. 그러고 보니 밥을 준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내가 줬다. 힐디스비니랑 식성 자체는 엇비슷하니까 뭐."
도나르가 그의 궁금증을 해결해 주었다.
"이 녀석 잘못하면 굶어 죽을 뻔했다고. 신경 좀 써줘라. 마침 풀밭이니까. 난 힐디스비니를 먹여야 하거든."
도나르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마차로 가버렸다. 이제 보니 여러 마부들은 저마다 힐디스비니를 데리고 초원의 풀을 먹이고 있었다. 그보다 도나르가 사라지니 그의 뒤에 숨어있던 로기의 모습이 드러나자 어셔는 인상을 팍 찌푸렸다. 비록 미수로 그쳤지만 소녀에게 몹쓸 짓을 하려고 했었던 녀석이었으니까.
"너는 왜 온 건데?"
"윽, 나는 그냥 토끼 잡으러 온 거거든!"
그가 잔뜩 못마땅한 기색으로 묻자 로기는 화를 내듯 변명했다.
"토끼? 토끼가 여기서도 살아?"
"어? 어. 그 녀석들은 아무 데서나 다 살아."
다행스럽게도 그의 변명은 어셔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숲에서도 토끼라는 생물은 제법 보기 쉬운 생물이었으니까 그는 반가움이 컸다. 말도 배를 채워줄 겸 토끼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떠있던 어셔는 말을 데리고 가려고 했지만 말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어? 갑자기 어디로 간..."
-히이힝!
이내 들려오는 말의 울음소리에 돌아보면 바로 발견할 수 있었다. 말이 마치 어리광을 부리듯 벨카에게 머리를 들이밀고 있는 광경을.
"신경 써주지 못해서 미안해. 저 그런데 거리가 너무 가까운 게 아닐까?"
소녀가 그런 말의 행동에 어찌하지 못하고 곤란해하고 있었다. 어셔는 잠시 잊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저 말이 겉보기에는 암만 멋진 말이라고 해도 여자를 밝히는 호색한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히이이...히?
그는 감히 벨카에게 어리광을 부리려던 말의 주둥이를 두 손으로 콱 붙들어 쥐었다. 말은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뒤룩뒤룩 굴리면서 애써 순진한 척 모르는 척했지만 이미 어셔는 모든 걸 지켜본 뒤였다.
"내가 벨카한테 찝쩍거리지 말라고 했었던 것 같은데."
그가 말과 직접 눈을 마주치면서 이야기하자 말의 식은땀은 점점 더 늘어만 갔다.
-히이이이이잉!!!
애처로운 말의 비명이 초원을 울리고 그 소리에 힐디스비니들의 시선이 잠시 모여들었다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풀을 뜯었다. 잠시 후.
"얌전히 배나 채우고 돌아가버려."
초원에 들어온 어셔는 말을 노려보면서 말했고 기분 탓인지 얼굴에 멍이 든 것처럼 보이는 말은 얌전히 풀을 뜯고 있었다. 로기는 그런 그를 질린 표정으로 보았다.
"말을 원래 저렇게 다루던가."
그는 적어도 말을 주먹다짐으로 길들인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가능한 이야기인가 싶지만 실제로 저런 모습을 보니 할 말이 없었다. 로기는 그러면서도 힐긋힐긋 벨카를 살피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소녀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모습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시선을 따라가면 구름 지대를 보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런데 너는 토끼 안 잡으러 가냐?"
"윽, 지금 잡으러 가잖아!"
로기는 시종일관 자신을 경계하는 어셔의 모습에 괜히 찔려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소녀를 살피고 토끼를 잡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벨카, 뭘 보고 있어?"
어셔는 말이 풀을 뜯는 모습을 감시하면서 벨카에게 다가가 물었다.
"구름."
"그러고 보니 더 커진 거 같네."
저 멀리서 보았던 구름의 거벽은 생각보다 더 커다란 크기였는지 낮 동안 그렇게 달렸는데. 이제야 구름 지대의 바로 앞에 있었다. 이쯤 되니 층층이 쌓여있는 구름 장벽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문득 소녀가 중얼거렸다.
"언제까지 저렇게 붙들려 있어야만 하는 걸까."
"응? 뭐라고 했어?"
"아무것도."
그녀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그가 되물었지만 벨카는 굳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러다 어셔는 근처의 풀들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아래에서 작은 생물들이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혹시 무슨 이상한 생물이라도 튀어나올까 긴장했던 그는 곧 풀숲에서 튀어나오는 생물들의 모습을 보고 놀랐다.
"토끼... 인가?"
그것들은 모두 작은 토끼였다. 하지만 어셔가 알던 숲 토끼와는 다르게 덩치도 작고 생김새도 다르다.
"내가 아는 토끼는 더 험상궂게 생겼었는데."
그래도 그가 알던 것보다 귀여운 생김새에 밀색 털이 보송보송한 토끼들은 거부감이 적었다. 많은 토끼들이 벨카의 근처로 몰려와 앙증맞은 코를 실룩이는 모습이 꼬집어주고 싶을 정도였다. 숲 토끼는 마을 사람들이 잡아와 구워 먹거나 탕으로 해먹어도 괜찮았는데. 이곳의 토끼들은 그렇게 했다간 마음이 아플 것 같다. 벨카도 자신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토끼들이 마음에 들었는지 희미하게 웃으며 토끼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토끼들이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고 다가오는 모습이 놀랍기는 하지만 어셔에겐 익숙한 광경이었다. 소녀와 지내다 보면 숲에 사는 동물들이 이따금 다가와 애교를 부리는 일이 종종 있었으니까. 그녀와 함께 있는 어셔는 덩달아 동물들의 애교를 받아서 행복했다. 지금처럼 한 마리를 들어 품에 안아도 발버둥 치기는커녕 토끼는 그 작고 복슬복슬한 몸으로 얌전히 손길을 받아들였다. 그의 감시 하에 풀을 뜯던 말이 억울한 눈으로 그들을 보건 말건 모여든 토끼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때였다.
"야, 토끼 잡아왔, 는데."
땅을 구르기라도 했는지 흙투성이의 로기가 토끼 한 마리를 들고 다가온 것은.
"이게 다 뭐야."
로기는 허탈하게 눈앞의 광경을 보았다. 토끼는 작지만 그만큼 날쌘 동물이었다. 그런 토끼를 잡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했는데. 정작 돌아오니 어셔와 벨카가 아무렇지 않게 도망치지 않는 토끼들과 놀고 있는 모습을 보니 그 모든 노력이 허무해진 것이다.
"뭐야, 정말로 잡았네."
로기는 왜 돌아왔냐는 듯이 묻는 어셔를 때려주고 싶었지만 그가 찔리는 일이 워낙 커서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싸워서 이길 자신도 없었으니까. 로기는 토끼들을 밟지 않도록 발을 디디며 벨카에게 다가갔다.
"자, 이거."
그리고 잡아온 토끼를 내밀었다. 주변에 이렇게 토끼가 많은데 주는 의미가 있겠냐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로기에게 중요한 건 그녀에게 사과할 기회였다. 자신이 저질렀던 행동이 떠오를 때마다 끔찍해서 찾아오는 자괴감을 버틸 수가 없어서. 줄곧 어셔의 경계를 피해서 사과할 틈을 찾고 있었고 이건 그 핑계였다. 하지만 그는 곧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던 소녀가 그가 자신에게 토끼를 건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그대로 얼어버렸으니까.
로기는 죄를 뒤집어쓴 뜨루스의 처벌을 듣고 자신이 잠들어있던 소녀에게 했던 일이 얼마나 끔찍한 일이었는지 자각했다. 판이 그에게 그런 일을 시켰을 때는 그저 잘못된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만 들었다. 뜨루스가 죄를 뒤집어쓰고 형벌을 받는다는 이야기는 형벌을 받기 전이었기 때문에 현실감이 없었고 충동적으로 소녀에게 또 그런 짓을 저지르려 했다. 뒤늦게 사과를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참을 수 없는 죄책감에 어른들에게 뜨루스가 아닌 판이 범인이라는 것을 알렸다.
그러나 죄책감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아니, 판이 처벌을 받는 모습을 보고 오히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져버렸다. 벨카에게는 제대로 사과하고 싶었지만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아 그 주변만을 맴돌고 있었다.
"언제까지 쟤네 뒤꽁무니만 쫓고 있을래?"
"아저씨?!"
도나르의 목소리에 로기는 화들짝 놀라 멀어졌다. 어른들 중에서도 친근한 편이었던 도나르였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의 앞에서 고개를 드는 것이 더욱 힘들었다. 그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그때는 별다른 이야기 없이 넘어갔지만 이번에야말로 혼나는 것이라 생각했다.
"혼내는 거 아니니까. 그렇게 쫄지 마라."
"그러면 왜."
평소 로기가 장난을 치면 그를 혼내는 일이 많던 도나르가 혼내지 않는다고 하니 의아해하고 있으면.
"저 여자애한테 사과하고 싶은 거 아니냐?"
"그건!"
"좋은 방법이 있는데 알려주랴?"
로기는 도나르의 말에 혹했다. 그는 소년에게 믿을 수 있는 어른이었고 그가 하는 말은 제법 믿을만했으니까. 그가 알려주기를 지금 그들이 도착한 구름 지대의 근처는 그나마 식물이 자랄만한 환경이라 넓은 초원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초원에는 여러 가지 동물이 살고 있는데. 그중에는 토끼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토끼라면."
"작고 귀여워서 애완용으로도 많이 기르잖아?"
토끼는 번식력도 환경에 대한 적응력도 뛰어나서 가장 흔한 생물 중에 하나였다. 종류도 다양했고 애완용으로든 식용으로든 인기가 많다. 그 귀여운 외모 덕분에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한 번쯤 길러봤다는 말이 심심치 않게 나올 정도였다. 그제야 로기는 그의 의도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토끼를 잡아서 선물하라는 거죠?"
"그렇지."
토끼는 이런 초원에도 많이 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심하면 몇몇은 황야에서도 살아가는 녀석들이 있을 정도였으니.
"되도록이면 혼자서 잡아 봐. 정 안되겠으면 부탁해도 상관은 없는데. 그런 건 직접 잡아서 선물해야지 효과가 좋다?"
"그깟 토끼 정도는 쉽게 잡을 수 있다고요!"
자존심을 자극하는 도나르의 말에 발끈하기도 했지만 로기는 도나르의 충고대로 조금 힘이 들더라도 자신이 직접 토끼를 사냥하기로 했다. 이곳의 토끼는 그가 알던 것보다 더 작고 색도 다른 것 같아도 결국 토끼였다. 요리조리 잽싸게 도망치는 작은 토끼는 생각보다 더 잡기 어려웠지만 몸을 던져서 땅을 구르듯이 하는 것으로 덮쳐서 소녀에게 선물할 토끼 한 마리를 붙잡을 수 있었다. 소녀에게 사과의 뜻으로 건네주기 위해.
그래, 사과하기 위해서였는데. 로기는 얼어붙어버린 소녀의 모습이 당황스러웠다. 혹시 토끼를 싫어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주변에는 토끼가 이렇게 많이 있었고 그녀는 그 토끼들을 내쫓지 않고 쓰다듬어 주기까지 했다. 토끼를 싫어하는 것이라 보기엔 이상한 행동이다. 그는 여러 가지 장난을 치다 보면 여자아이들이 싫어할 때 어떤 반응을 하는지 알고 있는 만큼 소녀가 토끼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건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도 안타까울까? 소녀는 그가 건네는 토끼의 모습을 바라보며 덜덜 떨리는 손을 천천히 내밀었다. 정말로 받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내미는 것처럼. 그런 소녀의 모습에 로기가 토끼를 건네주는 걸 그만두려고 했을 때였다.
"악! 이게 풀어주려는 것도 모르고!"
로기의 손에서 갑자기 격렬하게 몸을 비틀어 움직인 토끼가 그의 손을 뒷다리로 차버리고 우연인지 의도한 것인지 손을 뻗고 있던 벨카의 품으로 쏙 들어가 버린 건. 그러자 그녀는 뻗었던 손을 반사적으로 되돌리며 제 품으로 들어온 토끼를 다치지 않도록 안아주었다. 토끼가 뛰어들면서 소녀가 쓰고 있던 가면이 툭 떨어지고 그녀의 맨얼굴이 드러났다. 금빛에 슬픔을 한가득 채워 넣는 것만으로 모자라 금방이라도 넘쳐흐를 것 같으면서도 결국 흘러넘치지 않는 금빛으로 소녀는 제 품으로 뛰어든 토끼를 내려다보았다.
"안돼. 너는 조금 더 오래 살 수 있었어. 그런데 어째서?"
벨카의 중얼거림은 무척이나 작았지만 알아들을 수 없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걸까? 마치 동물에게 이야기하는 것 같으면서도 그 내용은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그녀의 성격이 독특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동물과 말이 통할 거라 생각하고 말을 거는 모습이 귀엽게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소녀의 말에 답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품 안에서 몸을 세우고 그녀의 볼에 뽀뽀를 하듯 코와 입을 가져다 대는 토끼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로 말이 통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읏, 간지러워."
게다가 단순히 뽀뽀를 하는 것도 아니고 친밀하게 핥아주기까지 하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그녀의 금빛에 가득한 것은 기쁨이 아닌 슬픔이었다. 로기는 이쯤 되면 소녀가 대체 무슨 이유로 슬퍼하는지 묻고 싶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토끼가 벨카에게 작별을 고하며 슬퍼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듯한 행동과 그 행동을 받아들이는 그녀를 방해할 수 없어 기다리고 있을 때. 토끼는 로기의 손에서 벗어날 때처럼 갑작스럽게 그녀의 품에서 뛰어내렸다.
"아!"
벨카는 품에서 벗어나려는 토끼를 붙잡으려는 듯이 손을 뻗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손은 허공을 휘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로기나 어셔가 붙잡아주기에도 갑작스러운 일이라 붙잡을 타이밍을 놓쳐버린 사이 그 토끼는 주변에 몰려 있던 동족들의 틈을 가로질러 도망쳤다. 토끼가 도망치는 방향에는 풀을 뜯던 힐디스비니와 도나르가 있었고 어셔가 도나르에게 그 토끼를 붙잡아달라 이야기하려고 했다.
"도나르 아저씨!"
"왜? 무슨 일이라도...?"
"거기 토끼가...!"
그러나 다음 순간 벌어진 일에 도나르와 어셔는 동시에 말을 멈추고 말았다. 차라리 토끼가 그대로 도망칠 수 있었다면 다행이었을 지도 모른다. 토끼가 힐디스비니의 근처를 지나갈 때쯤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평화롭게 풀을 뜯던 힐디스비니가 머리를 빠르게 움직여 도망치던 토끼를 낚아채듯 물어서 허공으로 내던진 것은. 하늘 높이 내던져진 작은 토끼의 모습이 그 자리에 있던 모두의 눈에 천천히 새겨졌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도 허공에 내던져졌던 토끼가 떨어지는 모습이 무척이나 느리게 느껴졌다. 어찌나 느린지 토끼의 등허리에 붉은 선혈이 흐르는 이빨자국이 선명하게 보일 정도였다. 이윽고 토끼가 세 갈래로 벌어진 입속에 들어가는 광경마저도 그들의 눈에 새겨졌다.
-오도독오도독
풀을 뜯느라 머리를 숙이고 있던 힐디스비니가 어느새 머리를 들고 무언가 단단한 것을 씹는 소리가 그들 사이에 울려 퍼졌다. 상쾌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운데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그건 분명 황야에서 맡았던 건조한 모래 사이에 섞여 있던 애매한 쇳내가 아닌 붉은 핏빛의 향기였다. 모두가 멍하니 힐디스비니를 바라보는 가운데. 그것은 꿀꺽하고 목울대를 넘기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하듯 초원의 풀을 뜯었다.
한순간에 노련한 사냥꾼으로 돌변했던 힐디스비니는 그만큼 빠르게 온순한 초식동물로 돌아와 있었다. 숨 막히는 침묵이 계속되는 가운데. 어셔가 가장 먼저 벨카를 돌아보고 모두의 시선은 그녀를 향했다. 소녀는 안 그래도 피부 때문에 하얀 얼굴을 창백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타닥타닥
다시 찾아온 저녁시간. 화로의 불꽃이 불똥을 튀기는 가운데 도나르와 로기는 멍하니 화롯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나르의 옆에는 주로 어셔와 벨카가 앉기 때문에 그들이 함께 앉을 일이 없었지만 지금 그들은 식사를 하러 나오지 않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도나르였다.
"그, 미안하다. 일이 그렇게 될 줄은 몰랐어."
힐디스비니가 육식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보통은 먹어도 시체 같은 걸 주워 먹지 적극적으로 사냥하는 경우는 없었다. 도나르는 단언컨대 그런 일은 처음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아니라면 밤에는 힐디스비니가 무엇을 하는지 본 적이 없으니 밤에만 방금 전처럼 작은 생물을 적극적으로 사냥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원래 그런 면이 있었다고 해도 로기가 소녀에게 선물한 토끼가 도망칠 때 그러한 면을 드러냈다는 것이 문제였다. 도나르는 로기를 위로하고자 횡설수설 말을 붙여보았지만 저녁 식사가 또 문제였다.
"저도 오늘 저녁은 됐어요."
저녁으로 나온 것은 생전의 모습이 얼핏 엿보이는 토끼 통구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