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마법이란.
판은 마차들이 떠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도저히 풀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밧줄에 이를 갈았다. 그가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건 정말로 우연이었다. 이 행렬의 사람들은 상단의 구색이라도 맞추고자 나름대로 귀한 물건들이나 다른 나라에서 비싸게 사들일 만한 것들을 최대한 많이 모아두었고 판은 그중 하나에 눈독을 들이다가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이다.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매개체를 말이다.
판이 그것을 손에 넣고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동안 마법을 갈망하며 연구하다 죽어간 수많은 학자들에 대한 한심함을 느꼈다. 사람들에게 알려진 마법에 대한 사실들은 대부분 그 학자들이 연구하고 밝혀진 사실에 의해 퍼져나간 것이었는데. 그 학자들은 마법에 대해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머저리라는 사실을 함께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고작 진실에 근접한 것이라곤 마법책에 나온 마법들을 배우고 사용하고 싶다고 해도 사용할 수 없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왜 마법사들이 마법에 대해 그런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퍼져나가도록 두었으며 마법에 선택받은 이유를 자신조차 모른다고 한 것까지 말이다. 그건 이 사실을 알린다는 것 자체가 무시무시한 금기라는 걸 매개체를 손에 넣는 순간부터 깨닫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심하고 멍청하기 짝이 없는 것들!'
누구나 원하는 마법사를 고작 그런 일들을 저질렀다고 이렇게 만들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판이라고 해서 처음 마법을 손에 넣었을 때 그런 일들에 마법을 사용할 생각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저 기뻤다. 어쩔 수 없는 금기는 묻어둔다 치더라도 이 힘이라면 평생 대우받으며 살 수 있었으니까. 그보다 기뻤던 사실이 있었다면 이 힘이 있다면 어쩌면 고국으로 돌아가 그토록 염원하던 일을 모두 이룰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원래 그들의 고국, 파시페니아는 그들의 국민이었던 기사들이 피와 땀을 흘려가면서 매번 나라를 습격하는 드래곤들과 맞서 싸워 이겨내왔던 곳이었다. 어떤 위기가 찾아와도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그들은 지켜야만 한다는 일념 하에 스스로를 불살라왔고 그건 판 또한 마찬가지였다. 기사라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몬스터들의 왕이라 불리는 드래곤과 맞서 싸우는 일인 만큼 희생자나 부상자가 없는 것이 더 이상한, 고되고 또 고된 일이었으니까.
그렇다 해도 기사라는 건 자신의 나라를 그리고 가족을 지키기 위한 명예로운 일이었다. 비록 파시페니아의 국민이라면 의무적으로 복무해야만 하는 귀찮은 일일지라도 사람들은 그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일상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을 우대했고 그들은 명예로울 수 있었다. 가끔씩 말썽을 일으키는 놈들이 있어도 까짓것 다시는 그런 짓을 못할 큰 벌을 주면 그만이었다.
어린 소년들이 눈을 반짝이며 자신들도 그들과 같은 멋있는, 강한 기사가 되겠다는 말이 여차하면 나오고 동경 받는 그런 일이었기에 그들은 죽음을 영광이라 부를 수 있었다. 그렇기에 기꺼이 제 몸을 불사를 수 있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였을까? 어느 날부터 그들의 삶이 달라진 건. 드래곤들의 습격이 점차 줄어들고 그로 인해 나라는 더욱 활기를 더해가는 나날들. 처음에는 그런 평화와 계속되는 발전이 판은 달가웠다.
그 평화가 그와 동료들의 희생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기사들은 드래곤에 대한 경계를 완전히 멈출 수는 없었지만 평화로운 나날이 지속될수록 그들은 조금씩 경계를 허물고 수시로 취소되는 것이 일상이었던 휴가를 끝까지 보내면서 평화를 즐기던 나날. 그러나 그 평화는 어느 순간 깨지고 말았다. 시작은 기사들이 관리하던 화약고가 갑작스럽게 폭발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뿐이었다면 화약고를 관리하던 이들만 처벌하면 끝날 일이었다. 문제는 그 화약고의 폭발에 민간인, 그것도 아이들이 휘말렸다는 것이었다. 불행히도 그 아이들은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처참했고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아이들은 죽었다. 어쩌면 그저 불행한 사고였을지도 모른다. 기사들은 평화에 취해있었고 간만의 여유에 낮잠이라도 즐기고 싶었겠지. 그리고 모험심 넘치는 아이들은 기사들이 지키던 곳에 무엇이 있는지 보고 싶었을 뿐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자신들의 마지막 모험이 될 것이라는 걸 알지 못하고.
아이들의 가족은 눈물을 흘렸고 떨리는 손으로 아이들의 시체를 부여잡았다. 그리고 그 눈물은 홍수가 되어 그들을 덮쳤다. 그들은 아주 작은 휴식일지라도 기사들의 태만을 욕했고 사소한 행위 하나하나를 벼르고 보았다. 신문들은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사소한 일도 부풀려 기사들을 욕하는 내용을 싣기 일쑤였다. 더 이상 기사라는 건 그들을 명예롭게 하지 않았다. 길을 걸으면 사람들은 그들을 공포스럽게 여겼고 끝내 길을 걷는 것마저 제한 당했다.
드래곤의 습격이 사라진 상태에서 그들의 고국은 날이 갈수록 부유하고 강대해져갔으나 그 사이에서 강인한 기사들의 존재는 그저 많은 혜택을 받는 위협적인 무력집단일 뿐이었다. 사람들은 곧 기사들이 나라에 바치는 충성을 당연시하였으며 그들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그들은 더 이상 죽음을 영광이라 여길 수 없었다. 그렇게 십여 년이 흘렀을까? 결국 기사들의 불만은 폭발했다. 그들은 몇몇 이들을 중심으로 반란군을 모았고 많은 이들이 동참했다.
그러나 그건 또 다른 지옥의 시작이었다. 정작 그들이 목표로 했던 수뇌부와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나 먼, 한때 동료였던 자들을 자기 손으로 베고 쓰러트리는 나날. 그중에 자신의 친구가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는 무너지고 말았다.
"...우리는 저 빌어먹을 윗대가리를 끌어내리기 위해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우리는 우리와 같은 기사를 베고 있어야만 하는 겁니까?"
"그들에겐 자신의 의견보다 위에서 내리는 명령이 먼저이기 때문이겠지. 그걸 과연 충성심이라 불러야 될지는 알 수는 없지만."
그는 결국 정신적인 문제를 이유로 상단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그래도 이 상단을 호위하는 것이 딱히 불만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고국에서 외면받은 이들이 모여서 피난을 가는 이 상단을 지킨다는 건 그가 원하던 명예로운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그 생각은 어느 날 듣게 된 여자들의 뒷담으로 전부 사라지고 말았다.
"언제까지 이런 생활을 해야 하지?"
"이제 좀 깨끗한 물로 씻고 싶어."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오랜 방랑생활은 고되었으며 남자들도 힘든데 여자라고 해서 힘들지 않을 수 없었을 테니까.
"그러게 찝찝해서 못 살겠어. 남자들은 어떻게 이런 상황을 버틸 수 있는 거지?"
"몰라 평소에도 잘 안 씻었나 보지 대부분 항상 갑옷만 입고 다니잖아. 그럴 거면 자기들 마실 물이라도 아껴서 우리들 목욕이나 하게 해주지."
"아하하! 그거 좋네!"
그 이야기에 그는 당장이라도 저 여자들의 머리통을 깨부수고 싶은 마음을 눌러 참았다. 그리고 의구심이 생겼다. 우리들은 대체 무엇을 위해 희생해온 거지? 기사들의 권리와 혜택을 빼앗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민간인마저 수탈하는 수뇌부의 만행에 그들은 무고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 검을 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반란이 실패할 것을 직감했고 보다 많은 이들을 지키기 위해 피난민을 수용할 상단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뜨루스 그 새끼도 말이야. 의사 자격도 없는 주제에 의사로 따라붙은 놈."
"그 얼뜨기?"
"그 녀석이 의료용이라며 가져가는 물만 더 줄였어도 됐을 텐데 말이야."
"그러네 지가 뭘 안다고."
그런데 저 여자들은 뭔가? 저 여자들이 고국의 수뇌부와 다를 게 뭐란 말인가? 판은 자신이 지금껏 저들을 지키며 뿌듯해했던 자신이 혐오스러워졌다. 동시에 우리들의 노력을 비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저 여자들의 존재가 끔찍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저도 모르게 억눌러 왔던 것들이 터져 나와 더 이상 그것을 막을 고삐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때문에 마법을 그런 짓에 이용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저 은혜도 모르는 것들을, 사실을 알고도 용서하는 물러터진 녀석들을 대신해서 제 손으로 모두 처벌하겠다고.
어차피 여자는 모두 똑같았다. 치료받고자 찾아온 그녀들을 약물을 이용해 범해 왔다. 뜨루스의 모습으로 범하는 것도 좋지만 역시 자신의 모습으로 범하는 편이 더욱 큰 희열을 가져다주었다. 어차피 자고 있으니 그의 모습을 볼 수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배신을 해!?'
뜨루스는 나름 친구라고 생각을 하긴 했었다. 진실을 알았음에도 동조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 열이 받았다. 몇 번이나 자신과 같이 행동하는 것을 거부하고 한참이나 멀어진 고국의 규율에 아직도 순응하는 그가 한심하고 경멸스러웠다. 그저 그랬던 것뿐이었다. 그가 이 밧줄만 풀어내면 끝까지 쫓아가겠다며 다짐했을 때.
-크르르르.
어디선가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판은 자신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설마, 아니야! 아니야!!'
그는 속으로 부정했지만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황야는 인간에게 결코 친절한 곳이 아니었음에. 판의 눈에 비친 그것은 늑대나 도마뱀과 비슷한 형상을 하고 있었으나 털도 비늘도 존재하지 않으며 피처럼 붉고 밋밋한 피부가 불쾌감을 주는 이형의 생물이었다. 그는 그것이 어떤 생물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이 무엇을 노리고 그에게 다가왔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것이 길쭉한 주둥이를 벌리며 날카로운 이빨들로 가득한 입속을 드러내며 군침을 흘리고 있었기에.
아무도 없는 황야에 누구도 듣지 못할 비명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남은 것은 난도질 된 옷 조각뿐. 그마저도 모래바람에 뒤덮여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마차의 행렬은 어떤 방해도 없이 순조롭게 황야를 나아갔다. 오랫동안 사람이 오가며 희미하게나마 남은 포장된 도로를 따라서 달리다 보면 어느새 길은 사라지고 거대한 구름 장벽의 코앞에 와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금만 더 앞으로 가면 구름 장벽의 바로 밑이었다. 선두에서 마차를 이끌던 도나르는 원래 마차를 멈추는 시간보다 일찍 깃발을 들어 정지 신호를 보냈다. 선두의 신호를 받은 마부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뒤를 따르는 마차에 같은 신호를 보냈다.
원을 그리며 멈춘 마차들에서 내린 마부들은 주변을 살피다 평소보다 일찍 정지 신호를 보낸 선두의 마부, 도나르에게 모여들었다.
"도나르, 무슨 문제라도 생겼어?"
샬비와 교대하여 마부 역할을 하고 있던 오두르의 말이었다. 그들이 아직 내리라는 신호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을 제외하면 마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내리지 않은 상태다. 그렇게 모여든 마부들은 도나르를 중심에 두고 서있었다. 현재 그들의 중심에 선 도나르는 나침반을 들고 지도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이거 아무래도 방향을 조금 잘못 잡았을 수도 있겠다."
도나르의 말에 마부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어났지만 그는 일단 진정시켰다.
"일단 양옆으로 한 명씩 힐디스비니를 데리고 부표를 탐색해. 너무 멀리 가지 말고 안전거리 유지하면서."
도나르의 말에 따라서 뽑힌 마부 두 명이 마차에 메어진 힐디스비니를 한 마리씩 타고 각각 양옆으로 향했다. 도나르가 다시 자신의 마부석 위로 올라가 그들이 점점 더 멀어지며 안전거리의 한계선에 가까워지는 모습을 보며 초조함을 느꼈을 때. 오른쪽에서 깃발을 들어 올리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 또한 깃발을 들어 올려 반대쪽으로 간 마부에게 신호를 보내며 그들이 돌아올 때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돌아온 이들은 힐디스비니들을 원래 있던 마차에 매어주었고 신호를 보냈던 마부는 잔뜩 녹이 쓸어있는 사슬 조각 하나를 건넸다.
"다행히 길이 크게 어긋나지는 않았네. 부표가 있던 곳에서 찾았어."
그제야 마부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건 도나르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녹슨 사슬 조각을 받아들며.
"그래, 이쯤이면 꽤 오래전에 부표를 발견했어야 하는데 안 보여서 방향을 잘못 잡은 줄 알았지."
혹시 모르니 부표가 있던 곳에 마차를 다시 세우자며 마부석으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달리지 않고 천천히 마차를 몰아 부표의 근처에서 마차를 세운 그들은 주변의 안전을 확인하고 부표가 있던 곳으로 모였다. 그리고 발견한 모습에 저마다 혀를 찼다.
"쯧, 이거 란투아에서 관리 안 한지 오래된 것 같은데?"
"이거 여분의 사슬도 안 보여."
땅에 구멍을 뚫어 놓고 그 구멍이 매워지지 않도록 철로 만들어진 커다란 쐐기는 부표의 흔적만을 간신히 남겨 놓았을 뿐 쐐기 안쪽에는 여분의 사슬도 없이 뜯겨나가 흩어진 사슬 조각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나뒹구는 모습이었다.
"그보다 쐐기는 그렇다 쳐도 부표는 어디로 갔대냐? 그 커다란 부유석 덩어리를 누가 들고 갔을 리도 없고."
도나르가 머리를 긁적이고 있자 누군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오두르? 왜 그러냐?"
"저거 아니야?"
그가 돌아보자 오두르가 하늘을 보며 말하는 모습에 도나르도 그 시선을 따라가 하늘을 보면 코딱지만 하게 보이는 점, 부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다른 마부들도 둘의 모습에 따라서 고개를 들다가 모두 부표를 발견했다.
"...야, 저거 원래 저렇게 작았냐?"
"멀어져서 작게 보이는 거겠지."
"그래서 저건 어떻게 끌어내리는데?"
"...."
누군가의 말을 끝으로 마부들 사이에선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냥 란투아에 부표가 끊어졌다고 소식이나 전해주자고."
"그러게 누가 허술하게 관리하래."
그들은 그냥 모른 척하기로 했다. 사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그물을 활용하면 부표를 못 끌어내릴 것도 없었지만 그렇게 하면 생선을 잡을 그물이 찢어지는 것을 감수해야 했다. 그리고 가장 우려하는 것은 호의로 부표를 끌어내려서 란투아에 가져다준다고 해도 란투아에서 그들이 오면서 끊어버린 것은 아니냐며 의심하는 상황이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란투아에서 부표의 수리 비용까지 청구 받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마차는 지금 여기서 세울 거냐?"
"그래야겠지. 잘못하면 구름 지대 아래에서 잠을 자야 할걸."
"그거 누구 하나는 반드시 죽겠네."
구름 지대는 사람들이 살아갈 환경을 제공해 주는 고마운 존재이긴 했으나 정작 그 아래에 집을 짓거나 살아가는 이들은 적었다. 구름 지대 아래는 낮이 찾아오지 않는 어둠의 땅이었으니까.
"가장 큰 문제는 날씨지."
구름 지대 아래의 날씨는 종잡을 수가 없다. 어두컴컴한 가운데 비와 바람이 쏟아지는데도 앞을 제대로 볼 수 없으며 재수 없으면 우박을 맞을 수도 있다. 보이지도 않는 봉변을 당하는 셈이다. 그나마 구름 속에서 치는 번개가 빛을 내는데. 그 불규칙하고 순간적인 빛만으로 나아가야 하는 셈이다. 마침 구름 지대의 근처라 시간이 멀었음에도 적당한 기온이었다.
"사람들한테 나와도 좋다고 해. 오늘은 여기서 머문다."
그렇게 도나르는 우두커니 서서 마부들이 전하는 소식을 듣고 마차에서 빠져나오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바로 아까 붙잡지 못했던 시프를 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빠져나올만한 사람들은 이미 모두 빠져나왔는데도 시프의 금발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마차에서 나오지도 않은 건가."
도나르는 자신에 대한 한심함에 한숨만 푹 내쉬었다. 그녀에게 의지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시프가 그런 일을 당하는 것조차 미리 알아차리지 못했다니. 비록 그런 일을 저질렀던 판은 제 죗값을 치르기 위해 황야에 버려졌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갈 데 없는 분노가 그의 가슴을 새카맣게 태우고 있었다. 적어도 놈을 제 손으로 죽였다면 이 답답한 마음도 줄었을까?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뭐, 뭐야."
노리기라도 한 듯 그 순간에 들려오는 소녀의 미성에 그는 놀라며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보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역시나 한 떨기 꽃처럼 붉은 소녀가 꽃술에 담긴 꿀처럼 영롱한 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번에 그들의 상단에 합류한 두 아이들 중에 한 명, 벨카였다.
"자신에게 내고 있는 화를 남에게 풀어 봐야 더 나아지는 건 없어."
"아."
소녀의 말에 도나르는 뒤늦게 자신이 화를 내고 있던 대상이 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그는 그냥 화풀이가 하고 싶었던 것뿐이다. 소중한 사람을 지키지 못한 자신에 대한 한심함이 너무 커서. 그분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자신에게 실망해서. 스스로에게 화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이 할 일은 그런 게 아니야."
"너는 대체 어떻게..."
"벨카!!"
그는 소녀가 어떻게 자신도 알지 못한 마음을 보았는지 그 또한 마녀의 마법으로 가능한 것인지 묻고 싶었지만 이내 들려오는 어셔의 목소리로 인해서 그의 말은 끊어지고 말았다.
"내가 멀미하는 사이에 먼저 나가버리다니 너무하잖아!"
앞에 도나르가 있음에도 알아차리지 못한 듯 빠르게 달려와 벨카를 데리고 가는 어셔의 모습에 그는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쥐도 새도 모르게 다가온 소녀는 그에게 몇 마디를 던지고 그가 질문한 틈도 주지 않고서 멀어져 가고 있었다.
"설마 이렇게 될 거란 것도 이미 알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벨카에겐 미안한 이야기였지만 도나르는 그녀가 어느 누구보다 마녀라는 이름에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모습은 인간이라기보단 차라리 꽃을 따다 한 땀 한 땀 빗어낸 것처럼 지나치게 아름답고 매혹적이었으며 소녀의 금빛은 어떻게 그런 사랑스러운 감정들을 숨기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깊고 투명했다. 덥거나 춥지도 않은지 늘 같은 검붉은 원피스 위에 하얀 소복을 걸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소녀가 정말 자신들과 같은 세상에 발을 딛고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그러다 주변의 눈치를 보면서 어셔와 벨카의 뒤를 쫓는 한 소년의 모습을 발견한 그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음에도 무척이나 향취가 강해 쌉싸름한 풀을 입에 머금은 듯 씁쓸한 맛이 입안을 맴도는 것을 느꼈다.
"그나저나 로기 녀석도 참 힘든 사랑이 되겠어."
이전에 이미 이런 말을 했던 것 같지만 설마 일이 이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지도 못했다.
"판, 그 자식도 일을 어지간히 많이 저질러 놓았구나."
뒤질 거면 자기 혼자 뒤질 것이지 피해를 본 사람이 너무 많았다. 피해를 본 이들은 어셔와 벨카, 시프, 그리고 많은 여인들이 있었지만 그중에는 한 소년도 있었다. 그 소년이 뜨루스의 무죄를 밝히고 판이 범인이라는 것을 알리는 증언을 한 덕분에 판을 붙잡을 수 있었지만 그 사실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그야 소년이 증언에는 지금 사람들이 듣기엔 예민한 이야기까지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어쩌면 사람들의 칼끝이 소년에게까지 향할 수 있기 때문에 노인은 그 사실을 알리고자 하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더럽혀진 소년의 순정은 어떻게 되돌릴 수 있단 말인가? 죄책감에 찌든 눈으로 자신의 죄를 고하던 소년의 눈물을 떠올린 그는 착잡함에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