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마법이란.
뜨루스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의 모습을 한 자가 판이라는 것과 그것이 마법을 이용한 것이며 그 마법을 이용해 이런 짓을 하고 있다는 것도 전부. 믿고 싶지 않았지만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화끈한 통증이 현실이라 말하고 있었다.
"어, 어떻게 마법을!"
"그야 당연하잖아? 내가 마법에게 선택받았으니까."
판은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말했다. 마법을 사용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으면서 태연자약한 태도였다. 하지만 그런 게 문제가 아니었다. 친구로서 조금 서운할지라도 마법을 사용할 줄 안다는 사실을 숨긴 것쯤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의 고향에서 마법사는 대우가 그리 좋지 않은 편이었으니까. 그를 분노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신중하게 사용해야 할 약물을 악용하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동경하는 마법까지 악용해서 그가 지켜야 할 환자를 유린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네,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는 한 거야?!"
뜨루스는 이럴 때에도 더듬거리는 자신의 목소리가 짜증 났다. 머리를 다쳤을 때 대체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아니면 그의 동료라고 생각했던 이들이 치료 중에 무슨 일을 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단순히 말하는 것조차 괴롭다.
"그럼 모르고 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의 질책 어린 말에도 판은 당당하게 말했다. 오히려 그런 말을 하는 그를 한심하게 바라보면서. 자신이 범하던 여인을 그에게 보란 듯이 들어서 뜨루스에게 얼굴을 보이게 만들었다.
"재미있는 거 하나 알려줄까?"
"그, 그만둬!"
이어지는 판의 행동에 뜨루스가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그를 때려눕혀서라도 멈추고자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허리의 통증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허리를 부여잡으니 뜨거운 피가 그의 옷을 푹 적시다 못해 흘러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판이 무슨 마법을 사용했는지 알 수는 없어도 전력을 다해 그를 찔렀던 단검이 자신을 찔렀다는 것은 확실했다.
"끄으윽!"
판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눌러 참고 있는 뜨루스를 기다려주지 않고 자신을 물건을 다시 여인의 음부에 집어넣어 버렸다. 여인의 그곳은 아무런 저항 없이 판의 물건을 받아들였고 그녀의 몸은 축 늘어져서 잠꼬대처럼 인상을 찌푸릴 뿐 미동조차하지 않는다. 다시 한번 약을 썼다는 것을 확신하며 그를 노려보았다.
"너는 아무것도 모르고 치료해 준 것 같은데. 이 여자가 뒤에서 너를 뭐라 하고 다녔는지 알면 그런 마음 싹 사라질걸?"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고 싶었지만 허리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너무 컸다. 그런 뜨루스를 비웃으며 판이 말을 이었다.
"네 험담을 어찌나 많이 하던지. 머리가 모자라다느니 의사 자격이 있기는 하느냐느니. 상단에 퍼졌던 네 안 좋은 소문의 대부분이 이 여자가 원인이라고."
그의 말에 뜨루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뜨루스는 바보처럼 보일지 몰라도 바보는 아니었다. 상단 내에서 그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이 퍼져있었다는 것쯤은 그도 알고 있었다. 다행히 도나르와 에르미스 씨의 도움으로 악의적인 소문들은 사실이 아니라 밝힐 수 있었지만 그 소문의 원인이 저 여자였었다니 원망스러웠다.
"그러니까 너도 이 년이 잠들어 있는 사이에 해봐. 끝내주게 기분 좋다고."
그는 여인에게서 스르륵 자신의 물건을 뺐다. 이미 몇 번이나 한 직후였는지 진득하게 젖어있는 물건과 여인의 음부가 한눈에 들어왔다. 여인의 그 모습은 남성의 성욕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심지어 판의 말이 사실이라면 거리낌도 적겠지. 그가 망설이는 것이라 생각했는지 판은 여인의 음문을 손으로 벌리며 그를 충동질했다.
"자, 이것 봐봐. 너 이런 거 한 번도 해본 적 없다며?"
그의 말대로였다. 뜨루스는 지금까지 여자와 관계 한 번 맺어본 적이 없는 몸이다. 그래서 저 유혹이 더 효과적인 걸지도 모르겠다. 그는 피가 흐르는 옆구리를 부여잡으며 일어섰다. 드디어 그가 여인의 앞에 섰을 때. 판이 기분 나쁘게 웃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그의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왜냐하면 여인의 앞에선 뜨루스가 한 일은 그에게 주먹을 날리는 것이었으니까.
"윽, 여, 역시 이렇게 되는 건가."
단지 판의 알 수 없는 마법 때문에 뜨루스에게 피해가 왔지만 말이다.
"어이, 지금 이게 무슨 뜻인지 물어봐도 되냐?"
정작 그에게 피해는 없었지만 뜨루스가 주먹을 날렸다는 것에 화가 났는지 판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피, 필요 없다는 뜻이야."
아무리 여인이 자신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을 퍼트렸다고 해도 그녀는 환자였고 뜨루스는 의사였다. 원망스러운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런 식으로 풀어선 안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말이 기폭제가 된 것일까? 판은 분노를 드러냈다.
"이 멍청한 자식이!"
"으윽!"
그가 여인을 침대에 팽개치고 뜨루스의 멱살을 쥐었다.
"적당히 친하게 지내주니까 날 친구라고 여겼나 본데! 애초부터 나는 너같이 하찮은 걸 친구라 생각한 적 없어!"
판의 말들은 그의 마음에 상처를 되새기게 만들었다. 친구라 생각했던 이들에게 배신당한 것이 얼마나 되었다고 친구라 여긴 이에게 또 이런 꼴이라니 비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네가 아직도 마법책을 들고 다니는 멍청이라 다행이다. 안 그래도 기억나지 않는 마법이 많아서 쓰는데 고생하고 있었는데."
"쿨럭! 끄으."
판이 멱살을 쥐면서 딱 달라붙는 옷이 옆구리의 상처를 자극해 더욱 고통스러웠다.
"덕분에 쓸 수 있는 마법도 많아졌고. 죽이지는 않을 테니 고맙게 생각해라?"
그 이후로 그는 계속해서 뜨루스의 마차로 찾아와 그의 행세를 하며 그의 약을 악용해 환자들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다. 그는 그에게 저항해 그를 붙잡고 늘어지거나 도나르에게 도움을 요청하려 했지만 그럴 때마다 매번 판에게 마법으로 몸을 통제 당했다. 결국 그는 꼼짝도 못 하고 환자들이 그에게 유린당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그 일이 반복될수록 뜨루스는 한계에 몰렸다. 1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뼛속 깊이 새겨진 마법에 대한 두려움과 친구에 대한 트라우마가 그를 진짜 겁쟁이로 만들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허리가 완치되었음에도 찾아오는 환상 통을 겪게 되면서 항상 붕대를 감고 다니게 되었다. 허리는 얼마 되지 않았다 치더라도 더 예전에 다쳤던 머리와 다리는 붕대를 꼼꼼하게 감아 놓지 않으면 계속해서 방금 다친 듯한 통증이 그를 괴롭혔고 불면증에도 시달렸다. 의사로서의 자존심 또한 그 시간 동안 철저하게 박살 나 더 이상 되찾을 수 없을 것이라 여기며 일분일초가 지옥과도 같은 삶을 살고 있을 때였다. 처음 보는 아이들이 찾아온 것은.
판은 그 아이들 중에서 벨카라는 소녀에게 큰 관심을 보였다. 확실히 뜨루스가 보아도 그녀는 그저 어린 소녀라 보기엔 매력적인 소녀였다. 판이 관심을 가지지 않는 편이 더 이상했다. 결국 아이들이 찾아온 첫날에 그 소녀도 판의 희생양이 되었다. 그러다 판은 그에게 자신의 죄를 덮어쓰라는 명령을 내렸다. 물론 예전의 그였다면 강하게 반발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기에 뜨루스는 이미 너무 지쳐있었다.
자신의 환자들 중 조금 예쁘다 싶은 여인들은 대부분 그의 장난감이 되는 모습을 그저 지켜보기만 해야 했고 이렇게 살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처음으로 판의 말을 순순히 따랐다.
"기왕 마지막인데 한 판 해보는 게 어때?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하고 죄를 뒤집어쓰는 건 억울하지 않아?"
그러자 기분이 좋아진 것일까? 판은 제 딴에 관대함을 베푸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래, 어차피 죄를 뒤집어쓰고 즉을 것 이 소녀와 한 번쯤 해보고 죽는 것이 덜 억울할 것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꽤 오래전에 산산조각 났다고 생각했던 의사로서의 자존심이 이번에도 그의 행동을 붙잡았다. 결국 그는 소녀에게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다. 그저 판의 죄를 뒤집어써도 할 말이 없을 만큼 맨몸으로 나신의 소녀 위에 몸을 뉘고 잠을 청했다.
분명 그는 자신보다도 작은 소녀의 위에서 잠을 청했을 텐데 어머니의 품에 안긴 듯한 포근한 기분이었다. 콧속을 솔솔 간지럽히는 이름 모를 달큼한 꽃향기 때문이었을까? 그는 잠시나마 불면증에서 벗어나 편안히 잠들 수 있었다. 뜨루스의 이야기를 전부 듣게 된 사람들은 쉽사리 입을 열 수 없었다. 몇몇 여성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일을 당했다고 생각하며 질겁했고 다른 사람들은 판이 마법을 이용해 그런 짓을 벌이고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은 듯했다.
"하! 저놈 이야기가 진짜일 거라는 보장은 있어?! 지어내고 나를 모함했을 가능성은 생각하지도 않는 거냐?"
그때 묶여 있던 판이 소리쳤다. 물고 있던 재갈은 잘근잘근 씹어 풀어낸 후였다. 문제는 그의 입을 다시 막기에는 그것이 다른 이들이 듣기엔 꼭 틀린 말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젯밤 자네가 소녀를 강간하려 한 것은 사실일세."
"뜨루스를 범인으로 만들기 싫어서 날 모함하는 건 아니고?"
노인의 말에도 판은 오히려 그가 자신을 범인으로 몰아넣으려는 것이라 아득바득 주장했다. 그러다 판은 무엇을 발견했는지 웃어 보였다. 그 웃음을 본 사람들이 기분 나빠할 때. 그와 직접 눈이 마주친 듯 혼자서 몸을 떠는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 시프."
금발의 여인, 시프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몰려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노인은 가만히 있던 시프를 끌어들이는 판의 행동에 눈살을 찌푸렸다. 사람들도 그녀가 이 사건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몰라 웅성이는 모습에 판은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 뭐야, 말하지도 않았던 거냐?"
재판을 지켜보던 어셔는 이제 그가 웃는 행동에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대체 뭐가 그리 우스운지 시종일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그가 이상했다. 재판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이 상황을 장난처럼 생각하는지 아니면 이곳에 있는 사람들을 자신과 같은 사람이라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아서 더욱 기분이 나빴다. 그러니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했을 때였다.
"너 지금까지 계속 뜨루스한테 강간당했었잖아?"
이어지는 판의 말이 사람들을 혼란 속으로 밀어 넣었다. 어셔도 놀란 얼굴로 시프를 보았다.
"그 말이 사실인가? 시프."
"...네."
노인이 묻자 잠시 대답하길 망설이던 시프가 답하자 사람들이 웅성이는 소리도 커졌다.
"왜 말하지 않았냐,고 묻지는 않겠네."
"감사, 합니다."
시프는 노인에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웃기고 자빠졌네. 이야기도 듣지 않고 판단하겠다는 거야 뭐야? 그냥 대놓고 날 범인이라고 하고 싶다고 하지 그러슈? 노인장."
판의 비아냥에 노인이 뭐라 하려는 찰나 시프가 먼저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노려 보았다.
"그 입 닥쳐! 뜨루스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에게 그런 짓을 해온 게 당신이라는 말이 되니까."
"어이쿠 무서워라. 그걸 증명할 방법은 있고?"
시프가 뭐라 하든 판은 비아냥거렸다. 또 증거가 문제였다. 뜨루스 때도 확실하지 않은 증거 때문에 문제였는데. 지금이라고 없는 증거나 나올 리는 없었다. 하지만 시프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당신이 말했지? 내가 그런 일을 당한 걸 왜 말하지 않은 거냐고."
"그래! 하여간에 여자들이란 뭐가 그렇게 무섭다고 다 똑같이..."
"그 말대로 나는 그 일을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어. 그런데 당신은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지?"
판의 말은 시프의 말에 끊어지고 그가 처음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그런 일을 당했다는 걸 말하지 않은 건 사람들에게 알리기 싫었고 굳이 그러지 않아도 뜨루스가 강한 처벌을 받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재판은 어느새 둘의 대화만으로 이어지고 있었지만 중재해야 할 노인은 일단 지켜보고 있는 모습이다.
"내가 그 모습을 직접 봤으니까. 기억하잖아? 내가 부상을 입고 뜨루스의 병실에 머물렀을 때."
그의 변명에 시프가 그를 비웃었다.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을 비웃듯이 행동하던 판처럼 똑같이.
"그런 일을 목격했으면서도 단주님께 말하지 않았다고?"
"그건."
"뜨루스가 협박했다는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할 생각이라면 집어치워!"
시프가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뜨루스가 불편한 몸으로 당신을 협박했다고? 실력만큼은 도나르만큼이나 뛰어난 당신이? 아니면 그가 마법사라고 할 생각이야? 지금까지 뜨루스에게 했던 당신의 행동들을 생각해 봐. 그게 사람을 무서워하는 태도야? 그녀는 지금까지 쌓여있던 케케묵은 감정을 토해내는 것처럼 속사포로 쏘아붙였다. 판도 그녀의 기세에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할 정도였다.
"설령 협박 당해서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해도 당신은 대체 어디에서 그 일을 목격했지?"
"그야 자고 있을 때 어렴풋하게."
"왜 이제야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을까. 내가 그런 일을 당할 때마다 당신이 누워 있던 자리는 항상 비어있었다는걸."
아니면 내가 그런 일을 당하는 사이에 중간에 매번 일어나서 들키지 않고 화장실이라도 갔었다고 말할 생각이야? 착각한 거 아니냐고 말하고 싶다면 관둬.
"나는 몇 번이고 환자들을 돌본 적이 있어. 네 자리를 기억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 무엇보다 당신이 끼고 다니던 그 반지, 내가 알기로는 뜨루스가 끼고 있었어. 그런데 어떻게 매번 뜨루스와 번갈아가면서 낄 수가 있지?"
"도나르, 뜨루스와 판의 손을 살펴보게!"
도나르는 노인의 말에 곧 모두가 볼 수 있게 판을 뒤돌게 만들고 뜨루스의 손을 들게 만들었다. 모두가 뜨루스의 손가락을 보았지만 반지 같은 액세서리는 전혀 끼고 있지 않았다. 오랫동안 끼고 있었다면 그 흔적이라도 남을 텐데 그런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반면 판의 경우 확실하게 반지를 끼고 있었고 끼고 다닌 흔적마저 선명했다.
"역시 그 반지야. 내가 볼 때마다 뜨루스는 그 반지를 끼고 있었어."
"뜨루스는 치료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반지 같은 건 낀 적이 전혀 없는데..."
그런 시프와 도나르의 말이 결정적이었다. 마법 중에는 원하는 상대의 모습을 훔치는 마법이 있다는 건 한 번쯤은 마법사를 꿈꿔봤던 이들은 알법한 사실이었으니까. 뜨루스는 죄가 없다는 것이 밝혀졌고 판은 뜨루스가 받을 뻔했던 형벌이 내려졌다. 그렇게 재판은 마차가 출발해야 하는 아슬아슬한 시간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편해진 것은 아니었다. 재판이 끝난 뒤 시프는 판을 몰아붙이던 모습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시프 누나, 괜찮아요?"
"미안해. 조금 혼자 있고 싶어서."
어찌나 서글프게 우는지 어셔가 다가가 물어보았지만 시프는 눈물을 멈추지 못하고 어디론가 걸어가버렸다. 그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을 때. 도나르가 걸어왔다.
"시프는?"
"그게, 저기로."
시프가 향한 곳을 알려주자 도나르는 곧장 그녀를 찾아가려는 듯했지만 그를 말린 것은 뒤따라온 샬비였다.
"지금은 혼자 있게 해줘."
"하지만."
"그놈의 마법 때문에 지금까지 범인이 쭉 뜨루스라고 생각했을 텐데.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거야."
샬비는 적어도 저녁에 시프를 만나라며 도나르를 설득했고 도나르는 결국 그녀를 따라가지 못하고 곧 출발할 마차의 선두를 이끌기 위해 돌아가야만 했다. 재판은 무사히 끝났지만 뒷맛은 씁쓸했다. 범인이 밝혀져도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고 피해자가 벨카와 시프만이 아니었다는 사실까지 알려지면서 많은 이들이 충격에 빠졌다.
"정말로 저렇게 두고 가네요."
마차에 탄 어셔는 빈 침대 위에 올라서서 창문을 통해 작게 보이는 판을 지켜보았다. 그는 지금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원형으로 세워진 마차들의 중심에 꽁꽁 묶인 채 방치되어 있었다. 희미하게 발버둥 치는 모습이 보이지만 재판 때보다 더 꽁꽁 묶여버린 그의 발버둥은 하찮아 보일 지경이었다. 하도 입으로 떠들어대는 것이 성가셔서 더 뚜꺼운 재갈까지 물려두고 왔다던가. 어셔와 벨카, 뜨루스로도 모자라 함께 마차에 탄 샬비가 시원섭섭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저 녀석을 보는 것도 끝이라는 거지."
"그런데 아저씨는 왜 같이 탄 거예요?"
이 마차를 이끈 적은 몰라도 같이 타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기억한 어셔의 물음에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마차에 탄 이후로 투구를 벗은 그는 정말 잘생겼다고 말할만한 얼굴을 아니었지만 흑발의 훤칠한 인상의 사내였다.
"뭐, 어른의 사정이라는 거다."
그는 뜨루스를 곁눈질했다. 진짜 범인이 밝혀졌음에도 사람들은 아직 뜨루스를 의심하고 있는 것일까? 그 자리에 있던 어른들은 판이 범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음에도 혹시 반대로 마법으로 자신들을 속이고 있는 것이 아니냐 물었었다. 그들은 뜨루스에게 마법을 사용할 때처럼 손을 움직여보라며 그가 마법사가 아닌지 의심했고 그는 자신이 마법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마법을 시도하기까지 했다.
당연히 마법은 발동하지 않았지만 다음으로 뜨루스가 진정으로 그러한 행위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는 않았을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어셔의 눈에 어른들은 마치 뜨루스가 그런 짓을 안 할 리가 없다고, 안 하면 안 되는 것처럼 보는 것 같았다. 이미 진짜 범인이 밝혀진 후였음에도 뜨루스를 바라보는 의심스러운 눈길들이 아직도 그를 범인이라 몰아가고 있었다.
"아저씨도 의심하고 있는 거예요?"
어셔는 뜨루스가 마법사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판의 행동에 동참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해야 했던 갖가지 행동을 지켜보면서 어른들이 한심해 보이기까지 했다. 범인이 아니면 된 거지 왜들 그리 호들갑이란 말인가?
"그런 건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이 혹시 모르지 않냐며 성화라서."
샬비는 일단 감시한다는 명목으로 함께 탄 것일 뿐 뜨루스를 의심할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드디어 출발하는 듯 깃발로 신호를 보내는 마부들의 모습이 보인다. 말을 닮은 이형의 생물들이 내딛는 발걸음에 조금씩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판의 모습을 가리기 시작하더니 마차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이내 판의 모습은 흙먼지 속에 묻혀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