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0화 〉마법이란. (50/220)



〈 50화 〉마법이란.

다시 찾아온 아침. 사람들은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하루를 시작했다. 재판은 모두 끝났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오늘 다시 재판이 열린다는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뭐야? 재판은 어제 다 끝난 거 아니었어?"
"하지만 다시 한다는 것 같은데?"


모여든 사람들의 목소리가 불안과 불만, 의문을 담고 웅성거렸다. 어셔는 재판이 다시 열리게 된 이유를 짐작할  있었지만 그저 소녀와 함께 입을 다물고 있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으니까. 재판이 다시 열린다는 소식 때문인지 아침식사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불편하게 보였다. 어셔도 식사를 하면서 눈치가 보였을 정도로. 하지만 다음에 벌어진 일이야말로 그를 놀라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좋은 아침."
"어, 엉?! 나한테 이야기 한 거냐?"

벨카는 그의 물음에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은 아침...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소녀가 먼저 그들에게 다가온 도나르에게 인사를 하며 말을 걸었던 것이다. 이곳에 와서도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그 누구에게도 먼저 말을 걸어본 적도 가면을 벗어본 적도 없는 벨카가 말이다. 얼마나 의외였는지 인사를 받은 당사자도 어안이 벙벙한 모습이었다.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어셔가 멍하니 두 사람을 바라만 보고 있자. 근처에 있던 다른 마부들도 이쪽을 보며 놀라는 모습이 보였다.


"너, 그렇게  봤는데 설마 건드린 거냐?"


그와 함께 식사를 하려던 마부가 의심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자 도나르는 더욱 당황한 모습이었다.

"고작 인사한 거잖아! 그보다  건드렸어!"


그는 억울하다는 듯 부정했지만 의심의 시선은 거둬지지 않았다.


"능력도 좋다. 저 까다로워 보이는 아가씨를 대체 언제 꼬신 거냐?"
"시프도 꼬셨으면서!"
"내가 언제! 꼬신 적 없다니까!?"

오히려 상황을 지켜보던 다른 마부들도 끼어들어 그를 놀리기까지 하니 더욱 곤란해졌다.

"인사한 것뿐인데. 다들 너무 과민반응하는  아니냐?"


도나르는 고작 인사한 것뿐이라고 안면을 좀 익혔으면 인사를 할 수도 있지 않냐며 변명했다. 그리 이상할 것도 없는 이야기였기에 마부들도 대충 납득하는 듯했으나 그를 더욱 곤란하게 만든 것은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어셔였다.

"...벨카는 낯을 많이 가려요. 평소에는 사람들에게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정도로."

그 증거로 지금도 소녀는 제가 쓴 가면을 벗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낯을 가린다는 것은 오래 지내보지 않아도  수 있을 정도였는데. 숲에서도 벨카는 어셔의 부탁은 거의  들어주는 편이었지만 절대로 허락하지 않는 것의 대부분이 위험한 일이나 혹시라도 사람과 만날 가능성이 있는 일들이었다. 그와 만나기 전에는 어떻게 혼자 살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벨카에게 외롭지는 않았냐고 물어보았을 때.

"외롭다. 일까? 잘 모르겠지만 외롭지 않은 건 아니었다고 생각해. 단지 익숙하기도 하고 사람은 무서운걸."


어셔의 눈이 질투로 타오르는 모습을 본 도나르가 기겁했다.


"그러니까 그런 게 아니래도!?"

마부들도 그를 다시 수상하다는 듯이 보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까. 알고 지낸 시간만 보면 우리도 도나르랑 별다를 게 없는데?"
"그러게 그 말대로라면 우리한테도 인사를 했어야지?"

그리고 재기되는 의혹에 도나르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다행히 벨카가 나중에 도착한 오두르와도 인사를 나누면서 장난스러운 의혹은 사라졌지만 말이다. 그렇게 잠깐의 여유가 끝나고. 다시 열린 재판에 재판 대상으로 모두가 생각했던 뜨루스가 아닌 판이 끌려 나오자 사람들의 웅성이는 소리는 더욱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입을 열 수 없게 재갈을 물려놓고 허리와 손을 엮어 움직일 수 없게 하고 손가락 하나 꿈틀거리는 것조차 허락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처럼 꼼꼼하게 묶여있는 손가락까지.

아마 자세한 사정을 모른다면 너무 과한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은 구속이었다. 이내 노인이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죄인 판에 대한 재판을 시작하겠네."

아무런 설명도 없이 시작된 재판에 모두가 놀라 할 말을 잃었을 때. 가장 먼저 시프가 손을 들었다.

"시프, 이야기해보거라."
"그가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여쭈어도 될까요?"

노인이 발언을 허락하자 질문하는 그녀. 그건 이 자리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자 노인이 답하길.

"잠들어 있는 소녀를 강간하고 어젯밤 다시 시도하려  죄, 의료용으로 사용하는 약품을 악용한 죄, 죄 없는 자에게 자신의 죄를 덮어씌우려  죄, 이상일세."


어셔는 벨카와 맞잡은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러다 소녀가 아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힘을 풀면서 앞을 보았다.

"자, 잠시만요! 그렇다면 뜨루스는 무죄란 이야기인가요?!"

시프는 더욱 혼란스러워진 얼굴로 말했다. 뜨루스가 무죄라는 이야기가 믿기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녀의 모습에 노인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딘가를 향해 말했다.


"샬비, 뜨루스를 데리고 나오게."

그러자 여전히 묶여있었지만 묶여있는 밧줄이 눈에 띄게 줄어들어 비교적 자유로워 보이는 뜨루스가 샬비와 함께 걸어 나왔다.

"뜨루스, 어제의 재판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나?"

그는 묶여있는 판의 모습을 보며 겁이라도 먹은 것처럼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대답을 하지 못하자 노인은 좀 더 자상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자, 자세히 보게.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못하도록 꽁꽁 묶어 놓았지 않은가?"

사람들은 유독 손가락을 강조하는 노인이 이상했지만 더욱 이상한 것은  말에 안심하는 뜨루스의 모습이었다.

"다시 한번 묻겠네. 이전 재판에서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가?"
"그, 그게."

모두가 그를 바라보는 가운데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그의 입이 열렸다.

"판이 저, 저를 협박하고 있었기 때, 때문이었습니다."
"말도 안 돼요!"


그가 말을 끝내자마자 시프의 앙칼진 목소리가 허공을 가르고 뜨루스가 몸을 움츠렸다. 사람들이 웅성이는 소리도 커지자 노인은 인상을 찌푸리며 사람들을 조용히 시켰다.

"조용! 그리고 시프, 나는 자네에게 발언권을 주지 않았네."
"그렇지만...! 하아, 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지 입을 몇 번 더 벙긋거리던 그녀는 노인의 엄격한 표정과 몰려드는 사람들의 시선에 입을 다물었다.


"시프의 말은 나중에 들어보기로 하고 마저 이야기해 보게. 뜨루스."


뜨루스는 시프가 그런 말을 한 것이 신경 쓰이는  힐끔거리며 눈치를 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평소의 그처럼 버벅대는 목소리라 듣기에는 무척 거슬렸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어젯밤의 일로 어셔와 벨카, 일부 기사들은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사람들은 몰랐을 그런 사실.

"파, 파파, 판은 마법에게 선택받은 사람입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마법이란 말에 사람들 사이로 경악이 퍼져나갔다. 그 말은 판이 마법사라는 것이었으니까. 너무 놀라서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몇몇은 벌벌 떨고 있기까지 했다. 하지만 누군가 이상하다는 듯 손을 들었다. 노인이 그의 발언을 허락하고.


"마법사라니... 그렇다면 그는 지금 대체 어떻게 붙잡혀 있는 겁니까?"


확실히 그건 누가 봐도 타당한 의문이었다. 마법사가 괜히 마법을 사용한다는 사실만으로 경외 받으며 어느 국가에서나 영입하기를 바라는가? 그건 사용하기에 따라 단신으로 군대에 맞먹는 힘을 휘두르고 가히 무적이라 부를만한 마법 그 자체 때문이었다.


"그건 우리가 설명할 수 있어."


그 의문에 답한 것은 도나르였다. 그의 옆에는 오두르도 있었다.

"우리는 뜨루스에게  이야기를 듣고 판에게 확인하러 갔었다."

판이 마법사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아내고 제압했느냐고 묻는다면 벨카가 마녀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말해야 했기 때문에 곤란했지만 뜨루스와 말을 맞추는 것으로 해결했다. 조금 위험한 일일 수도 있지만 그들은 이미 어젯밤, 소녀와 판의 대화에서 모든 걸 들은 후였기에 걱정은 없었다. 어제저녁 뜨루스에게 그런 판결을 내린 것도 판의 반응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고 설명했다. 만약 아니었다면 뜨루스는  판결 그대로 황야에 버려졌을 거라 이야기하며 말을 잇는다.

"하지만 판은 어젯밤에 또다시 아이를 덮치려고 했고 그걸 우리가 발견해서 방심한 사이에 공격해 제압한 거다."

뜨루스가 판이 마법사라는 사실을 알려주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판의 손가락을 오두르가 부러트리는 것으로 제압했다고 말이다. 최대한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없도록 해보았지만 워낙 간단하게 진행되는 상단의 재판인 만큼 조금 허술해도 넘어갈  있다는 게 이번만큼은 다행이었다. 되도록이면 진실만을 이야기하여 판의 죄를 심판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벨카가 마녀라는 이야기까지 해야 하기 때문에.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어쩔  없는 일이었다.


마녀는 마법사나 성녀와 달리 무척이나 꺼림칙한 존재로 인식되어 왔고 귀족 같은 이들에게 팔아먹기 좋은 대상으로 생각하는 게 사람들이었으니까. 상단의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소녀가 마녀란 사실을 알고 누군가 나쁜 마음을 먹을지 혹시 누가 알겠는가? 때문에 진실은 일부나마 숨겨져야 했다. 그리고 마법사를 쓰러트린 것을 이렇게나마 변명할 수 있는 이유는 사람들이 마법사가 대단하다는 걸 어렴풋이 알고만 있을 뿐. 직접 만나거나 그 힘을  기회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뜨루스는 원래 상단에 참여할 예정이 아니었다. 그는 의무병으로서 일했고 그의 고향에는 부상자들이 넘쳐났다. 그런 상황에서 고향을 떠날 수 없다는 생각에 상단에 들어갈 의사는 다른 사람이  예정이었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그가 환자들을 돌보며 머물던 막사에 침입자가 나타나 뜨루스의 머리를 가격하고 인질로 삼았던 것이다.


"뜨루스! 정신 차려! 뜨루스!"


다행히 침입자는 제압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그는 다리가 부러져버렸고 치료할 시간을 놓치는 바람에 심각한 후유증을 앓게 되었다. 말은 더듬기 일쑤였고 다리를 저는 절름발이가 되었다. 그래도 의무병으로서의 활동에 지장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남아있으려 했었다. 어느 날 동료들의 험담을 엿들을 일이 없었다면.


"크크, 뜨루스 그 자식 말 더듬는 거 봤냐?"
"다리는 어떻고? 이제 완전히 얼뜨기로만 보이잖아?"


천막의 얇은 천막 하나를 사이에 두고 동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욱 충격적이었던 것은 그들 사이에 같은 의무병으로서 공감하면서 가장 친한 친구라 여겼던 이들이 함께 있었다는 것이었다. 다리의 후유증이 단순히 치료할 시기를 놓쳐서 그런 것이 아닌 고의적인 실수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배신감에 치가 떨렸다.

"그 자식이 좀 재수가 없었잖아."
"그러니까! 쉬러 가자는데. 환자를 돌봐야 한다며 남는다더니."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누군가는 반드시 환자들의 곁을 지켜야만 했고 누가 남을지 실랑이를 벌이는 것이 귀찮아 그 일을 자처했던 것이다. 그들은 아무도 남을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까. 계속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놀 틈이 생기면 그 혼자서 환자들을 돌보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어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의무병!"


병사들이 부상을 입은 병사를 데리고 들어왔다. 별로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병사들이 다치는 일은 흔했고 죽는 일도 많았다. 죽어서 이곳에 오지 못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일이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평소처럼 그 병사를 치료했고 고비를 넘겼다. 보통이라면 진작에 죽었을 상처를 안고 잘도 돌아왔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들과  부상당한 병사가 특수공작을 목적으로 하는 정예병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 뒤의 이야기였다. 치료해  병사와 친해지는 것도 드문 일은 아니었으니.

"그래서 두고 나갔더니 그 사이에 그 녀석과 친해졌잖아!"

문제는  병사와 친해진 것이었나 보다.


"그날 내가 남아있었어야 했는데!"


그는 그들에게 강제로 쉬러 가라고 한 적은 없었다. 그들은 그가 쉬고 싶은 날에도 당연하다는 듯이 그에게 일을 떠넘겼고 그날도 그랬을 뿐이다. 그들의 험담은 좀처럼 끊기는 일이 없었고 그 일로 뜨루스는 자신의 부상과 후유증을 이유로 고향을 떠나는 상단에 이름을 올렸다. 누가 봐도 타당한 이유로 여겨졌기에 상단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그때 친해진 병사, 도나르까지 상단에 합류하게  것은 의외의 일이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출발하게 된 상단, 처음에는 괜찮은 생활이  것이라 여겼다. 말을 더듬고 거동이 불편한 그를 아이들이 괴롭히는 일이 많았지만 장난의 선을 넘지는 않았고 부상당한 환자들의 치료도 순조로웠다. 먼 길을 떠나기 때문에 조금은 고되지만 약 한 달간은 제법 즐겁고 편안한 생활이 이어졌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그날도 특별한 날은 아니었다.


"자, 잠깐만 그 책은!"
"이거 설마 마법책이냐?"

상단에서 새로 만나 친해진 친구가 그가 머무르는 마차에 찾아와 얘기를 나누다 그가 모아두었던 의료용 서적 사이에 개인적인 취미로 끼워 넣었던 마법책을 발견했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이야, 보통은 이런  어렸을 때나 좀 구경하고 시도해보다가 포기하지 않냐?"
"됐으니까. 그, 그만  자리에 갖다 놔!"

그는 취미를 들켜 부끄러운 마음에 소리쳤다. 그래, 마법책을 읽고 시도해보는 것은 보통 어린아이들이나 하는 일이었고 동경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뜨루스 정도의 나이라면 동경은 동경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마법을 사용한다는 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지 깨달으면서 포기하는 일이 대부분이다. 본인이 마법에게 선택받은 것이 아니라면. 잠시 그의 마법책을 휘리릭 넘기며 대충 살펴보던 친구가 갑자기 어느 한 페이지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말했다.

"나 이 책 좀 빌려도 되냐?"
"사, 상관없지만 별로 쓰, 쓸모는 없을 텐데?"
"아니,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말이야."

뜨루스는 친구에게도 같은 취미가 생길 수 있다는 생각에 그 책을 흔쾌히 빌려줬다. 어차피 외우기만 할 뿐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책을 돌려주었지만 가끔씩 찾아와 책을 펼쳐 놓고 마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간은 정말로 즐거웠다. 도나르를 제외하고 진정한 의미로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친구가 생겼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피로가 쌓였는지 유독 피곤했던 날이었다.

"그렇게 피곤하면 좀 자는 게 어때?"
"하지만 화, 환자들이."
"나도 네가 하는 거 옆에서 좀 봤으니까. 위험한 병이나 상처가 아니면 돌보는 것 정도야 쉽다고."
"그, 그럼 조금만."


안심하고 좀 자두라는 친구의 말에 뜨루스는 안심하고 개인용으로 놓아둔 작은 침대에 그는 누웠고 어느 때보다 빠르게 잠들어버렸다. 그렇게 얼마나 잠들어 있었던가? 그는 귓가에 어떤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철썩철썩!

진득하게 젖은 무언가 불었다 떨어지는 것만 같은 묘한 소리였다. 처음에 그는 그것이 어떤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흐응!"


하지만 다음에 들려오는 여자의 교성에 그는 잠이  달아났다. 막 잠에서 깨어났던 그는 정신이 없었다. 자신이 잠든 사이 의무실에서 어떤 커플이 대담하게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 부끄러웠고 부럽기도 했다.


"하아."

아무래도 그들은 아직 그가 잠들어 있다고 생각하는지 신음 소리는 더욱 커져갔다. 처음으로 들었던 소리는 다른 무엇이 아닌 관계를 가지며 서로의 살이 부딪히는 소리였던 것이다. 질퍽이는 소리와 여성의 신음이 자꾸만 들려오니 그는 자신의 물건이 그새를 참지 못하고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도 남자니까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는 긴장감에 꿀꺽 침을 삼키면서도 천천히 감고 있던 눈을 떴다.


환자들이 잠들어 있는 마차에서 대체 어떤 대담한 커플이 관계를 맺고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엿보는 것에 죄책감이 들었지만 그건 부주의한 커플 탓이었고 그도 구경 정도는 하고 싶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도저히 믿지 못할 광경을 목격했다. 그곳에 있었던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본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무, 무슨...!"

그는 자신이 엿보고 있다는 것조차 까먹고 소리칠 뻔한 입을 막았다. 잘못 본 것이라 생각하기엔 지금도 여성과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은 눈을 씻고 봐도 뜨루스, 자신의 모습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는 더욱 믿지 못할 광경을 발견할  있었다. 자신의 모습을 한 자의 아래에는 잠들어 있는 여성이 있었던 것이다.


"으으응."

관계를 맺는 소리에 단순한 커플이라 생각했던 뜨루스를 비웃듯이 그녀는 자신이 무슨 짓을 당하고 있는지 알지도 못한 채 범해지고 있었다. 어지간히 술에 취하지 않거나 약품을 사용하지 않는 이상 저런 격렬한 행위를 하면 여성이 깨어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아는 그는 분노했다. 그 말은 즉  자가 환자에게 사용할 약물을 악용했다는 이야기였으니까. 그의 환자 중에는 저런 여성도 상당한 숫자였다.

그럴 때 성욕이 끓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에겐 그보다 의사로서의 의무감이 먼저였다. 환자에게 그런 짓을 할 만큼 그의 의무감은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모습을 한 자가 누군지는 몰라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의무병이라도 어쨌든 병사로써 사용하던 검은 불편한 몸으로 사용할만한 것이 아니었고 지금 다룰 수 있는 것은 붕대를 자를 때 사용하는 단검뿐이었다. 결코 사람을 찌를 때 사용할 만한 것이 아니었지만 그는 환자를 지켜야 했다.

단검인 만큼 그의 불편한 몸으로도 예전의 감각을 살려서 휘두를 수 있었다.  뒤로 천천히 다가간 뜨루스는 놈의 옆구리를 노리고 있는 힘껏 단검을 휘둘렀다. 단검이 살을 파고드는 느낌이 들었을 때.

"끄윽?!"


뜨루스는 자신의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경악했다. 한 패가 있었다는 생각에 뒤를 돌아 본 그는 멍하니 그 자리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고통이 느껴진 자신의 허리를 보면 그의 옷이 천천히 피로 물드는 모습을   있었다. 그때 드디어 그 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흐흐흐, 어때 재미있지 않아?"
"이 목소리는... 판?"


그 자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분명 뜨루스를 대신해서 환자를 돌봐준다고 이야기했던 친구의 목소리였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옆구리를 부여잡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면서 그의 손에 들려있던 단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렇게 떨어진 단검에는 확실하게 피가 묻어있었다. 하지만 그 자의 몸에는 상처 하나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뜨루스만 상처를 입었다. 그가 정확히 그 자를 찔렀던 자리에.


"이건, 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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