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9화 〉마법이란. (49/220)



〈 49화 〉마법이란.

"갑자기 무슨 소리냐?"
"시치미 떼도 소용없어. 이 몸에 남아 있는 흔적도 그 아이에게 그런 일을 시킨 것도 당신이라는  지금 확인했으니까."

그녀의 말에 판이 입을 다무는 것도 잠시. 그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웃기 시작했다.


"하, 하하하! 그래, 마녀의 마법은 그런 것도 할 수 있는 건가?


쓰읍, 그는 웃는 도중에 새어 나온 군침을 삼켰다. 범용성이 뛰어나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지만 이 정도였을 줄이야. 더 탐이 났다. 지금 당장이라도 저 소녀를 가지고 싶을 만큼. 강렬한 충동이 판을 뒤흔들었다. 그런 것으로 자신을 협박할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렇다면 정말로 우습고 귀여웠다.

"그래서 네가 그걸 안다고 해서   수 있는데?"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런 말을 한다면 미쳤다고 의심받거나 사실 자는 척하면서 즐기고 있었던 것 아니냐며 손가락질 받을지도 모른다.

"네가 마녀라는 걸 밝히면서 이야기할 생각이냐?"

마녀라는 것을 밝히고 증명하면 증명하는 대로 소녀에게 큰일이  것이다. 반드시 소녀를 높으신 분들께 팔아넘기려는 이들이 있겠지. 사람이란 원래 그런 생물이니까.

"너는 아무것도 할  없어."


하물며 그뿐일까?

"말을 돌리는 건 이쯤하고 결정하라고. 몸을 바칠지 말지."


그의 손에는 소녀가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소년이 그의 손에 붙잡혀 있다.


"이거 놔! 놓으라고!"
"닥치고 있어!"
"으윽!"

발버둥 치며 그를 발로 차는 어셔가 거슬려 그가 다시 마법을 사용하자 다시 괴로워하는 소녀. 그는 이미 이 둘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감을 잡은 지 오래였다.

"벨카를 더 괴롭게 하고 싶지는 않겠지? 응?"

판의 말에 어셔는 어쩔 수 없이 발버둥을 멈추고 이를 갈았다. 소녀가 무슨 결정을 하든 그녀는 자신의 손에 들어오겠지만 되도록이면 스스로 그에게 굴복하는 편이 제일 좋았다. 얼마 전에 들어온 소년이 갑작스럽게 사라진다면 일이 귀찮아졌으니까. 물론 귀찮아질 뿐이지 마법사인 그에겐 그것을 감수하고도 남을 힘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일이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소녀는 결코 소년을 외면할  없을 테니까.

"...그래, 맞아. 내가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소녀는 그의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그녀의 마법으로는 그의 마법을 막는 것이 고작. 그러나 그는 마법사이기 전에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기사다. 그런 그를 시골 소년과 마법을 사용하는 데 제약이 심한 그녀가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당신의 생각대로 일이 흘러가게 두지는 않을 거야."
"뭐?"


소녀의 말에 이상을 느낀 판은 그제야 자신의 뒤에서 들려오는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알아챘다. 그는 바로 몸을 피하고자 했지만 그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그가 어셔를 붙잡고 있던 팔에서 둔탁한 소리가 나는 것이 먼저였으니.


"끄악!"


판은 비명을 지르며 손에서 어셔를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괜찮냐? 얘들아."


부러진 팔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참고 뒤를 본 그는 침음을 흘렸다.

"도나르!"

그곳에는 모래를 밟을 때 소리가 나지 않도록 두꺼운 천을 덧대어 신은 도나르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으니까. 한 손에는 방금 그의 팔을  것으로 보이는 철편이 보였다. 생긴 것은 단순한 막대기이며 비교적 위력이 강한 무기도 아니라 주로 몬스터나 드래곤들을 상대하는 기사들에게 있어서 그리 자주 사용하는 물건은 아니었으나 주된 용도가 진압과 호신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우습게 볼만한 물건은 결코 아니었다. 그의 이름을 부르는 판을 도나르는 냉정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잘도 날뛰었구나. 이 자식."

그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판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라도 분명 모두가 잠들어있었을 시간을 노렸고 먼저 마부들이 잠드는 마차마다 빼돌렸던 수면향을 사용해 도중에 깨어나는 상황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끄윽, 어떻게 일어난 거냐?! 나는 분명 수면향을...!"
"이걸 말하는 거냐?"

도나르의 손에는 그가 마부들의 마차에 놓았던 수면향들이 뭉쳐져 있었다.

"모를 거라고 생각했냐? 나는 이래 봬도 뜨루스의 마차에 자주 가는 편이라 수면향이 어떤 냄새인지 잘 알고 있거든."


그리고 수면향이 아무리 냄새가 없는 편이라 해도 타는 냄새에 폐쇄된 마차 속에서 냄새를  맡는 것이  이상하다며 그는 손에 모아두었던 수면향을 쥐어 부숴버렸다. 하지만 판이 무엇보다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은 그는 분명 방호 마법으로 스스로의 몸을 보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설마!"

마녀에겐 마법사의 마법을 캔슬 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설마 그게 하나의 마법에 하나씩 대응되는 것이 아니라 단 한 번으로 사용 중인 모든 마법을 캔슬하는 것이었단 말인가? 그는 급한 마음에 소녀가 있던 자리를 보았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가 당황하며 주변을 둘러보면 어셔와 벨카는 멀찍이서 또 다른 기사와 함께 그를 지켜보는 모습이 보였다. 아무리 그가 정신이 팔려있었다지만 지나치게 빠른 속도였다. 그가 떠올린  달리기가 특기인 한 기사였다.


"샬비...!"
"어디에 정신을 팔고 있는 거냐?"
"커억?!"

판은 허리에서 느껴지는 타격에 고꾸라졌다. 아무래도 갈비뼈가 부러진  같았다. 그는 이를  물고 도나르를 노려보았다. 그는 원래 방호 마법으로 상시 몸을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맞아도 몸이 아플 일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뜨루스를 협박해 사람들을 속이고 환자인 척 갑옷을 벗고 생활해 왔는데 그것이 오히려 최악의 선택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기회였다. 샬비가 소년과 소녀를 데리고 멀리 떨어진 상태였고 그들을 지키듯 도나르가 막아선 상황.

그렇다면 소녀는 그가 마법을 사용하는지 확인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 사용할 수 있는 기회는 단 한 번뿐이겠지만 그 한 번만으로도 충분했다. 그  번의 마법으로 기사들을 전부 제압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도나르가 그를 발로 밀어 찼을 때. 기회라 생각한 그는 고통을 참아내고 손가락을 들어 룬을 그리려 했다.

"아아아악!"

그러나 룬을 그리던 손가락에서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격통이 찾아와 판은 비명을 질렀다. 그가 격통을 참아보려 손가락을 부여잡으려 했지만 그가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꺾여서  되는 방향으로 꺾여버린 손가락의 섬뜩한 감촉이다. 그 사실을 자각하자 고통을 참아내려  행동이 오히려 고통을 더욱 생생하게 전해왔다.  끔찍한 고통에 지금 이곳이 황야라는 것도 잊은 그가 흙바닥을 뒹굴다 깨달은 사실은 또 다른 기사의 존재였다.

샬비와는 다른 곳에 위치를 잡고 끈과 가죽으로 된 슬링에 탄환을 끼워 넣고 휙휙 돌려대는 기사. 그가 그의 손가락을 이렇게 만든 것이 분명했다. 마치 그가 손가락을 들기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노려서 부러트리는 이 소름 끼치는 정확도라면 오두르 밖에 없었다. 그는 이미 포위 당한 상태였던 것이다. 판은 그들에게 욕이라도 실컷 퍼부어주고 싶었지만 그에게 다가온 도나르가 그를 기절시키는 것이 먼저였다.


도나르는 기절한 판을 꽁꽁 묶으며 생각했다. 그가 판에게서 아이들을 구하게 된 것은 단순한 우연은 아니었다. 재판이 열리기 전 그는 노인을 찾아갔었다.


"어르신, 샬비가 한 이야기가 사실입니까?


그가 샬비에게 전해 들었던 이야기는 앞으로 열릴 재판의 결과를 크게 뒤집을 수도 있는 내용이었으니까.


"그래, 샬비가 잘 전해준 모양이군."


노인의 긍정에 도나르는 속으로 안도했다. 샬비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잡혀있는 뜨루스는 범인이 아니라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진짜 범인은 누굽니까?"

그러다 그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사실에 의문을 품었다. 뜨루스가 범인이 아니라면 소녀에게 그런 짓을 한 진짜 범인은 누구란 말인가? 아예 그런 일이 없다고 보기엔 시프와 함께 목격했던 건 정사의 흔적이 분명했다. 그의 물음에 노인은 한숨을 내쉬며.

"판이라네."
"그 자식이...!"
"당장 멈추지 못하겠는가?!"


그 말을 듣자마자 판을 붙잡고자 뛰쳐나가려는 도나르를 예상했던 노인이 호통치며 그의 발을 멈춰세웠다.


"내가 항상 말했었지 않았나? 자네는 언제나  급한 성격이 문제일세!"

이럴 줄 알고 먼저 샬비에게 범인에 대한 것은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었자며 노인은 그를 꾸짖었다.


"하지만 판이 범인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잡아야."
"후우, 그래. 틀린 말은 아니지. 하지만 지금 사람들은 뜨루스가 범인이라고 믿고 있네. 아무 이유 없이 판을 진짜 범인으로 내세운다면 사람들의 의혹만 커질 게야."

그러면 자신을 왜 막는 것이냐고 물으려고 했었지만 노인은 이미 그의 생각을 예상하고 말을 잇고 있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판을 처벌한 후에도 뜨루스를 범인이라 생각하고 판에게 뒤집어 씌웠다고 생각할 수도 있네."
"그런."

그건 정말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러다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어르신은 범인이 판이라는 것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 일을 직접 목격한 자가 있었네. 기특하게도 알려주고자 직접 찾아왔더군."

노인은 씁쓸하면서도 기특한 표정이었다.

"자, 나오거라."
"너는?"

그리고 나타난 이의 모습에 그는 놀라고 말았다. 그리고 노인이 왜 목격자가 있음에도 함부로 목격자를 내세워 판을 재판에 세우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후로 그들은 현장에서 직접 판을 붙잡을 작전을 세웠다. 저녁 후에 열리는 재판에서 표면상으로는 뜨루스에게 판결을 내리고 그날 밤에 도나르와 샬비를 비롯한 이들이 판을 붙잡기로 했던 것이다. 예상외의 일이 벌어지기는 했지만 말이다.

"...."

마차 안을 밝히고자 켜놓은 작은 촛불에 은은하게 비치는 붉은 머리카락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수 없는 새하얀 가면을 쓴 작은 소녀와 잔뜩 긴장한 눈치로 그들을 살피는 금발의 소년. 도나르가 판을 기절시키고 노인의 마차에 모여든 이들은 원래 이곳에 있을 예정이 없었던 아이들을 힐끔힐끔 바라보고 있었다. 판을 붙잡은 뒤 그대로 두고 가기도 조금 그랬는지 샬비가 아이들을 함께 데리고 왔던 것이다. 비록 노인을 포함하더라도 고작 네 명에 불과한 인원이었지만 그들은 아이들과 판의 대화를 모두 듣고 있었다.

"어, 그러니까 진짜 마녀냐?"


이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도 어색하게 느껴져 도나르가 물었다. 노인이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눈을 감고 좀처럼 입을 열 기색이 보이지 않는 노인의 모습에 그가 먼저 말을  것이었다. 그러자 지금까지 촛불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소녀는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나를 어떻게 불러도 상관없어. 이미 당신들은 확신하고 있잖아."
"끙, 그러냐."

무척 독특한 말투였지만 도저히 아이 같지 않은 소녀의 분위기 때문일까. 어색하거나 이상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자신을 팔아넘길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걸까? 좀처럼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소녀와 그들의 눈치를 보는 어셔의 모습에 대화를 이어가는 것이 힘들다고 생각이 들었을 때.


"크흠!"


노인이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모았다.

"이 일은 함구하기로 하세."


아이들이 놀란  그를 바라보았다. 노인의 말은 마녀에 대한 인식을 생각해 보면 확실히 놀라운 것이었다. 예로부터 성녀는 칭송되어 왔고 반대로 마녀는 불길하고 삿된 것으로 취급되어 사람들은 눈에 불을 켜고 마녀를 찾아 높으신 분들께 일러바치거나 협박하며 그 힘을 이용하곤 했다. 그렇게 해도 거리낄 것이 없었다. 마녀란 그런 일을 당해도 억울해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자리에 모여있던 그들은 노인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판, 그놈이 이 아이를 덮치려다 도나르에게 잡히는 것밖에 못 봤는데요?"

가장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밤에는 뜨루스의 감시를 다른 사람이 서는 덕분에 그들과 함께 했던 오두르였다.


"으음, 저도  녀석들이랑 산책 나왔다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확인했다가 판이 그러는 걸 발견했다고 치죠."


샬비까지 그러자 도나르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야, 니들이 그러면 내가 눈치 없는 놈이 되잖아."
"너는 원래 눈치가 없었어."
"이 자식이!"

도나르는 자신을 디스 하는 샬비에게 달려들었다. 갑자기 왁자지껄해진 상황을 따라잡지 못하는 것일까. 어셔는 멍하니 그들을 지켜보았다.

"뜨루스와 판에 대해서는 내일 재판 때 이야기하도록 하겠네. 그럼 시간도 늦었으니 얼른 들어가서 자거라."


노인은 해산을 명했고 아이들에게도 그만 자러 가라 말했다. 그렇게 마차를 나서는 그들.

"난 애들 좀 데려다주고 온다."
"그래, 덮치지 말고."
"내가 판 같은 새낀 줄 아냐!?"


도나르는 그들과 농을 주고받으며 아이들과 함께 반대로 걸어갔다. 말없이 마차 사이를 걷고 있자 힐디스비니들이 발걸음 소리를 듣고 중간중간 고개를 들어 쳐다보았지만 경고를 하는 일은 없었다. 지나갈 때마다 저러는 모습이 우스워 보이기도 했다. 어셔는 소녀와 함께 그를 뒤따라 가다 물었다.


"저기... 아무것도  물어봐요?"
"궁금하기는 하지."

도나르는 어셔의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마녀라는  그다지 좋은 느낌은 아니니까."
"그러면 왜."
"그 이전에 너희들이 우리의 은인이잖냐."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대체 어째서 자신들이 그들의 은인이 되었단 말인가?


"우리는 판이 마법사일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다고. 아마 그 사실을 모르고 우리가 달려들었다면 분명 당했을걸?"

그건 딱히 그들의 잘못은 아니었다. 마법이라는 것은 사용하는 자가 참으로 드문 것이었으니까. 어떤 기준으로 왜? 어떻게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지 아무도   없으니 더욱. 게다가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면 마법사라는 사실을 밝히고 얻는 이득이 까마득할 정도로 많아서 보통은 숨기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때문에 마법사가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숨기면 판처럼 아무도 그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니까 너희 덕분이다."

결국 마차 앞에 도착한 그들.

"좋은 꿈 꿔라."

도나르가 아이들이 마차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섰을 때였다.


"저기."

작지만 뒤에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온 건. 뒤를 돌아보니 들어갔다고 생각했던 소녀가 마차와 황야의 경계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볼일이라도 남았냐?"


그의 물음에 벨카의 몸이 작게 떨린다. 그 여린 몸짓에 도나르가 소녀가 겁먹을 만한 말을 하기라도 했는지 고심했을 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자세히 듣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목소리였지만 사방이 조용했기 때문일까? 소녀의 그 여린 목소리조차 확실하게 귓가에 닿았다. 그러면서 소녀는 작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가면을 더듬더니 이내 벗었다. 그리고 드러난 벨카의 얼굴을 도나르는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고마워."


별다른 미사여구도 없는 담백한 한마디. 그뿐이었지만 그렇게 말하는 소녀는 예상치 못했던 선물을 받게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달빛을 받아 빛나는 소녀의 말간 미소와 호의로 가득한 금빛이 도나르의 뇌리에 새겨진 기분이었다. 심장을 주먹으로 치는 듯한 충격이 찾아왔다. 이내  광경이 환상이었다 말하는 것처럼 다시 가면을 써버린 소녀는 부끄러움을 타는 듯 급하게 돌아서서 마차의 문을 닫아버렸다. 그는 소녀를 붙잡을 생각도 못 하고 멍하니 지켜보았다.


'위, 위험했다.'


만일 그가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면 나잇값도 못하고 어린 소녀에게 반해버렸을 지도 모른다. 자신의 마차로 가는 동안 그 미소가 지워지지 않아 마차에  번 부딪힐 뻔하며 힐디스비니들의 이상한 시선을 받기도 했지만 어차피 동물들이니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러면서 도나르는 마녀에 대해 다시금 떠올렸다. 마녀라는  그들의 고향에서도 불길하고 천대받는 존재였다. 혹시라도  존재가 발견되면 무조건 포획을 명령받아 사로잡는 것이 기사들의 많고 많은 의무 중에 하나였을 정도다.

그렇다 해도 그는 높으신 분들에게 소녀를 팔아넘길 생각은 없었다. 그들은 더 이상 파시페니아의 국민이, 기사가 아니었으므로. 또한 그러기엔 그들이 겪어온 불합리와 억압은 마녀라 불리는 이들에게 짙은 동질감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가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도 따지고 보면 마녀였으니까. 마녀라고 해서 팔아넘길 수 있을 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한 일을 했을 뿐이었다. 그들의 고향에서 여성을 보호하는 조항조차 마녀에게만큼은 자비가 없었다. 참으로 불합리하고 이기적인 외면이었다.


하지만 이건 그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인 이야기겠지. 높으신 분들의 생각과 명령이야말로 그들이 따르던 정의이자 전부였는데. 꽤 옛날에는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때의 그는 그저 높으신 분들의 명령을 수행하는 기계에 불과했으므로. 스스로의 생각과 판단은 그저 사치였다. 파시페니아에서 기사라는  그런 의미였다. 그러나 아무리 스스로를 기계라 여겨도 그는 결국 인간이었기에 한계가 왔다. 깨닫고 말았던 것이다.

차라리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면 괴롭지 않았을 텐데. 그리고 찾아온 건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이 아닌 삶에 대한 지독한 회의감. 그의 기억에 가장 많이 남은 것은 겉치레조차 되지 못하는 명예가 아닌, 그와 비슷한 처지의 이들에게서 받은 원망과 저주의 말들뿐이었기에. 소녀의 수줍은 감사 인사란 그에겐 좀 더 특별한 의미가 되었다. 그저 공허하게 울리는 의무적인 올바름과 높으신 분들의 치하가 아닌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뿌듯함이 좋았다.

"그분께서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는 고향에 남겨진 은인을 떠올렸다.

"도나르, 너는 왜 전쟁에서 이기는 것만이 다라고 생각하나?"


그날도 어김없이 피를 피로 씻던 날이었다.


"그야 전쟁에서 이겨야만 모든 것을 얻을  있지 않습니까?"


반대로 전쟁에서 지면 모든 것을 잃을 테니까.

"틀린 말은 아니지. 하지만..."

그러면서 그는 쓰러져 시체가 된 기사의 앞에 쭈구려 앉았다. 적의 시체였다.


"피를 흘리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야. 우리는 상대의 피를 얼마나 더 많이 흘리게 만드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피를 적게 흘릴 수 있느냐를 따져야 해."


그는 싸늘하게 식은 자의 투구를 매만지며.

"생각해 봐. 우리는 분명 저 위의 인간들을 끌어내리기 위해 싸우고 있어. 그런데 우리가 지금까지 뼈와 살을 깎아가며 상대해왔던 이들은 누구지?"

적은 우리와 같은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니 그는  상단을 만들기로 결정했던 것이리라. 그분께 입었던 은혜가 많아서 하나하나 기억하기도 힘들지만 그분의 희생이 헛되지 않을 삶을 살아가고자 했던 다짐을 되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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