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마법이란.
어셔는 복잡한 표정으로 재판을 끝내고 돌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다. 이런 말을 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재판이라는 거. 생각보다 별거 없었네."
식사가 끝나고 시작된 재판은 정말로 얼마 되지 않아 끝이 났다. 죄인의 입장이라 묶여있던 뜨루스를 끌고 와 노인이 그에게 몇 가지를 물었지만 뜨루스는 그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기에.
"정녕 아무런 할 말이 없는가?"
노인의 엄숙한 표정에 조금이나마 답답한 마음이 드러날 정도로 그는 침묵을 고수했다.
"나는 자네가 겁이 많아도 그런 짓은 하지 않을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네."
"...."
"하지만 이 일은 실망이 크군."
결국 그에게서 대답을 듣기를 포기한 노인은 도나르와 시프가 목격한 사실을 바탕으로 의료용으로 사용하는 수면제와 수면향을 악용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소녀를 범한 죄로 죄인의 낙인을 새기고 꽁꽁 묶어 식량과 물조차 남기지 않고 버려둔다는 판결을 내렸다. 차라리 재판의 준비가 더 길게 느껴졌을 만큼 허무한 재판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한 사람의 죽음이 결정되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재판이 좀 짧게 느껴져도 어쩔 수 없어. 상단을 운영하는데. 저런 일에 지나치게 시간을 끌면 상단 내의 결속이 흔들리거든."
대답을 바랐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혼잣말에 도나르의 대답이 돌아왔다.
"아저씨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어보면 뜨루스와 도나르가 친한 친구 사이였다는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들어볼 수 있었다. 그런 친구가 몹쓸 짓을 하고 죽는다는데. 그의 기분은 어떨까?
"그러는 너야말로 썩 개운한 표정은 아니잖냐? 네 여자친구한테 심한 짓을 한 녀석이 벌을 받는다는데."
도나르의 말에도 어셔는 뭐라 답할 수 없었다. 확실히 본래대로라면 그가 가장 길길이 날뛰었을 테지만. 뜨루스가 그 어떤 변명의 말도 없이 노인의 판결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직접 보고 있었으니 찝찝한 기분이다. 그가 진짜로 범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더욱. 그러나 어셔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는 뜨루스가 범인이 아니라는 것만 알고 있을 뿐 어떻게 해야 그의 무죄를 증명하고 진짜 범인을 찾을 수 있는지 몰랐으니까.
재판이 끝나고 도나르와 헤어져 그들이 잠을 자러 돌아온 곳이 뜨루스가 지내던 마차라 그런지 더욱 싱숭생숭한 기분이었다. 어셔가 하루 종일 땀을 흘리고 샤워를 하지 않은 듯한 기분에 누워있어도 좀처럼 잠이 오질 않아서 뒤척이고 있으니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경 쓰여?"
그는 소녀에게 걱정거리 같은 것은 도저히 숨길 수가 없었다. 어셔가 조금이라도 고민하는 것이 있으면 귀신같이 눈치채 버리니까.
"그 사람이 범인이 아니라면 정말로 억울한 사람을 죽이는 거잖아."
그리고 그 사실은 진짜로 벨카에게 그런 짓을 저지른 범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들 틈에서 살아갈 것이라는 말과 똑같았다. 그 자가 소녀에게 또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보장은 있는가? 어쩌면 지금도 어딘가에서 소녀를 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도저히 잠이 오질 않았다. 복잡한 생각으로 머리가 어지러운 느낌마저 들었을 때. 그의 가슴을 토닥이는 작은 손길이 복잡한 상념을 끊어주었다.
"아."
상념에 흐려졌던 시야가 개이며 벨카의 금빛과 다시 마주쳤다. 숲에서 보았던 호수처럼 깨끗하고 파란 하늘처럼 맑은 눈빛. 언제 보아도 사랑스러운 그녀의 눈동자가.
"괜찮아. 끝까지 진실을 보고자 하는 이들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어셔가 우려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벨카의 말은 항상 어려워."
하지만 그녀의 말은 항상 그를 안심하게 만들어 주었다. 복잡한 생각으로 어지러운 머리가 진정되었지만 그래도 잠이 좀처럼 오지 않으니 그의 옆에 누워있던 소녀가 몸을 일으켰다. 소녀의 머리카락이 그를 부드럽게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끼고 있으면 그녀가 물었다.
"잠이 오지 않으면 바람이라도 쐬고 올까?"
"그럴까."
어셔는 그녀의 제안을 가볍게 수락했다. 오늘은 유난히 잠이 안 오는 밤이었다. 어차피 그들이 있던 마차 안의 사람들은 잘 깨어나지 않았지만 혹시라도 그들의 잠을 깨울까 그들은 천천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낮 동안 태양에게 받았던 뜨거운 열기를 전부 날려버린 밤의 황야는 차가운 공기로 가득했다. 시린 달빛과 별빛을 받아 빛나는 모래들이 더욱 차가운 느낌을 주었지만 거대한 구름 장벽을 비추는 달빛의 아름다움만은 퇴색되지 않았다. 어셔는 하늘의 일부를 가로막은 구름바다의 모습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저런 구름바다는 어쩌다가 생긴 걸까?"
켜켜이 쌓여있는 눈처럼 새하얗고 만지면 보송 거릴듯한 구름의 장벽은 어떻게 생겨났는지 감히 이해하는 것이 어려울 정도로 장엄한 광경이다. 가끔씩 튀어나와 밤하늘을 날아다니는 물고기들은 더욱 신기했다. 그때 벨카가 입을 열었다.
"나는 저 구름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아."
그녀가 읊조린 말에 그가 놀라 소녀를 바라보니 고개를 기울이는 그녀.
"왜?"
"어, 아니, 벨카가 싫어한다고 하는 게 있다니까."
소녀는 낯을 많이 가리긴 해도 언제나 무던한 편이었기에 싫어한다고 한 적이 거의 없어서 어셔는 무심코 놀라고 말았다.
"...나도 싫어하는 것쯤은 있는걸."
조금 과장스럽게 놀랐던 게 원인인지 소녀가 토라진 듯 볼을 부풀렸다. 어셔는 그런 그녀를 달래며 함께 달빛 아래를 걸었다. 신발을 신고 있음에도 모래가 가끔 그들의 발가락 사이를 간지럽혔지만 그것이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았다. 황야의 모래는 거칠고 물처럼 차갑기만 한 것이 아니라 고운 가루처럼 그들의 발길을 따라 부드럽게 스러졌으니.
-사박사박
사람들이 모두 잠들어 있을 시간. 인기척이 없는 마차의 사이로 울려 퍼지는 그들의 작은 발걸음 소리는 낮 동안 마차를 이끌던 생물의 시선을 끌었다.
-쿠르륵?
힐디스비니라 불리는 말을 닮은 이형의 생물은 인간들에게 모래로 가득한 황야나 사막의 이동 수단으로 이용되었지만 그들에겐 또 다른 역할이 있었다. 그건 바로 밤이건 낮이건 습격해오는 위협적인 생물의 존재를 먼저 알아차리고 경고하는 것이다. 본래 동족에게 위험을 알리는 행동이었으나 인간들은 그들의 습성을 이용해 밤의 정찰을 맡기곤 했다. 그건 그들의 본능이었기 때문에 작은 소리도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것의 눈에 비친 것은 자신들을 위협하는 다른 생물이 아닌 소년과 작은 소녀의 모습이었다.
"아, 일어나버렸다."
"우리가 방해했니?"
어셔는 아쉬운 듯 중얼거리고 그것과 시선을 마주친 벨카는 미안하다는 듯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힐디스비니는 소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제 머리를 내려 그녀의 손에 갖다 대었다.
"좋은 아이구나."
소녀는 자신보다도 훨씬 커다란 이형의 생물이 무섭지도 않은지 즐거운 듯 미소 지으며 보기에 따라 징그러울 수도 있는, 파충류의 것처럼 단단하고 매끄러운 비늘을 쓸어주었다.
"이 녀석 물지는 않겠지?"
어셔는 긴장한 목소리로 소녀에게 물었다. 사실 이곳에 먼저 오고자 한 건 그였다. 일어나 있을 때는 덩치가 워낙 커서 만질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밤에 보니 얌전히 몸을 웅크리고 잠들어 있는 모습에 만져도 괜찮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다가왔던 것이다.
"지금이라면 괜찮을 거야."
벨카의 말에 용기를 얻은 그는 소녀의 옆에서 조심스레 손을 뻗어 힐디스비니의 머리를 만졌다.
"와."
안 그래도 파충류와도 같은 비늘의 모습에 단단할 것이라 생각하긴 했지만 직접 만져본 말과 같은 이형의 생물의 피부는 보이는 것과 달리 따뜻하고 매끈하면서도 울퉁불퉁했다. 그래도 그 생물의 따스한 온기가 썩 나쁘지 않아서 계속 만져보고 있었을 때였다.
"이제 슬슬 나오는 게 어떨까."
소녀가 힐디스비니를 쓰다듬는 손길을 멈추지 않고 어딘가를 향해 말했다. 어셔는 당황스럽게 벨카를 보았지만 그녀는 이곳에 그들 말고도 또 다른 누군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태연한 모습이다. 어셔가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고 있으면 근처에 있던 마차의 뒤편에서 스르르 모습을 드러내는 그림자.
"언제부터 눈치채고 있었냐?"
그 그림자의 주인은 다름 아닌 판이었다. 어셔는 그의 모습에 긴장했다. 비록 만난 지 얼마 안 되는 사람이었지만 그는 이미 판에 대해서 대충 어떤 인간인지 알고 있었으니까. 도나르가 그 정도로 적의를 품고 사람들 사이에서 기피되는 모습이나 그의 행동들을 보고 있으면 어느 정도는 그에 대해서 알게 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이전에는 괜히 그들에게 시비를 걸려는 듯한 느낌을 받았으니 경계하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처음부터."
지금처럼 다른 어른들이 모두 잠들었을 이런 상황이라면 더욱 말이다. 그도 자신들처럼 단순히 밤 산책을 나왔다고 한다면 납득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지만 왜 숨어있었단 말인가? 어셔가 소녀를 뒤에 숨기고 계속 그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일까? 판의 표정이 점점 더 일그러지더니.
"너, 거슬리게 굴지 말고 꺼져라."
그는 손가락을 들어 허공에 무언가를 그려 넣기 시작했다. 어셔는 그 모습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허공에 빛무리가 그의 손가락을 따르며 그에게 익숙한 문자를 그려내고 있었으니까. 그건...
"'투리사즈'"
마법이었다.
어셔는 꼼짝없이 자신이 죽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가 알기로 투리사즈는 번개의 마법. 단순한 화염 보다 속도와 위력, 범용성도 뛰어난 그 마법은 가장 강한 마법 중에 하나라 불려도 손색이 없다. 사람 하나쯤은 순식간에 죽일 수 있는 힘이었으니까.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뭐야?"
마법을 사용하려 했던 판은 얼빠진 표정을 짓다가 중얼거렸다. 단순히 마법사가 아닌데도 허세를 부린 것과는 다르다. 그는 분명 마법에게 선택받은 자였다. 제 눈으로 허공에 문자가 그려지는 광경을 보았으니 믿지 못할 리가 없었다.
"아윽."
"벨카?!"
그때 들려오는 소녀의 억눌린 듯한 비명소리에 어셔는 놀라 그녀가 있는 곳을 돌아보았다. 벨카는 가슴께를 부여잡고 주저앉아 있었다. 어찌나 고통스러워하는지 고운 이마에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그 금빛으로는 판을 노려보고 있는 그녀. 그 모습에 어셔가 급하게 소녀의 이마에 손을 대어보았지만 열 같은 건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대체 어째서.
"으으읏!"
그 순간 다시 고통스러운 신음이 소녀의 잇새로 새어 나오고 제 가슴께를 부여잡는 그녀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벨카! 갑자기 왜 이런...!"
"큭, 크하하하! 그래! 그런 거였나? 그런 거였어!"
그리고 그 광경이 뭐가 그리 즐거운지 들려오는 판의 웃음소리에 어셔는 그를 표독스럽게 노려보았다.
"뭐가 그렇게 우스운 건데!"
"너는 벨카에 대해서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그는 끅끅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사실 그도 방금 알아챈 사실이었지만 소년이 정말로 소녀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걸 아니 정말로 우스웠다. 그야 그의 생각이 사실이라면 이건 대박을 쳐도 초대박을 친 것이었으니 말이다.
"벨카를 함부로 부르지 마!"
판은 꽥꽥 소리를 지르는 어셔가 거슬렸지만 지금 그는 기분이 무척이나 좋았기에 약간의 자비를 베풀기로 했다.
"벨카가 고통스러워하는 이유가 궁금하지? 그럼 이걸 봐라."
어셔는 자꾸 친근하게 소녀의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모습에 이를 갈았지만 다음 광경에 그는 긴장했다. 그가 허공에 방금과 같은 룬을 그리기 시작했으니까. 한 번은 운이 좋아서 우연히 마법이 발동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이번에야말로 죽는다고 생각했는데.
"어?"
마법은 발동되지 않았다.
"으윽!"
대신 소녀의 괴로운 신음이 휑한 허공을 채웠다. 그리고 이어지는 판의 목소리.
"벨카가 내 마법을 캔슬 한 거다! 그리고 이런 건 마녀가! 그중에서도 극도로 적은 마녀들 밖에 할 수 없지!"
힐디스비니는 똑똑하고 강인한 생물이다. 이 메마른 황야에서 살아가면서 그들을 사냥하거나 대적할 수 있는 생물들은 드물 정도. 그런 생물들이 인간과의 공생을 택한 이유는 인간이 그 얼마 안 되는 것들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 줄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인간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인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도 낯선 인간이 다가오면 경계하고 심하면 다른 위협적인 생물들을 만났을 때처럼 경고하는 힐디스비니다.
자신을 직접 길들인 이들이 아니라면 손길을 거부하는 높은 콧대도 있었다. 원래라면 힐디스비니는 작고 연약한 소녀와 평범한 소년의 손길 따위 허락조차 하지 않아야 정상이었다. 저 압도적인 덩치에서 나오는 힘 덕분에 군마로도 쓰이며 그 위력은 말할 것도 없다. 기병을 상대하려면 같은 기병으로 상대하거나 총포를 사용하는 것이 편할 정도다. 함부로 건드리면 건장한 성인에게도 치명적인 공격을 하는데 하물며 저렇게 작은 소녀가 공격당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소녀가 공격당해 사용하지도 못하게 될까 봐 뛰쳐나갈 뻔했던 남자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힐디스비니가 경계하기는커녕 온순한 강아지처럼 작은 소녀에게 스스로 고개를 숙여 제 머리를 가져다 대는 것이 아닌가? 광활한 황야를 비추는 달빛 아래에서 커다란 덩치로 어울리지 않게 온순한 태도의 이형의 생물과 그 생물을 쓰다듬는 아름다운 소녀의 조화는 남자가 넋을 잃고 쳐다보게 만들기에 충분한 광경이었다. 그 또한 마녀의 마법이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마법이 있다. 책에 기록되어 지식으로 전해지는 소환 마법과 피에서 피로 이어지는 혈계 마법. 이 두 가지 마법은 같은 마법이지만 서로 다른 방향성을 가지고 있었다. 소환 마법은 허공에 특수한 문자를 그리는 것으로 그에 대응되는 마법을 사용할 수 있지만 전쟁에 쓰일 만큼 대부분이 파괴적인 것이다. 실제로 많은 마법사들이 전쟁에 동원되어 공을 세웠고 마법사는 힘과 파괴의 상징이 되어 경외시 되었다.
반면 혈계 마법은 소환 마법만큼 파괴적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소환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와 비교하자면 전투력은 형편없다. 하지만 혈계 마법이 특별한 이유는 번거로운 동작도 없으며 범용성이 무궁무진했기 때문이다. 소환 마법에 비해 파괴력이 떨어지더라도 혈계 마법의 범용성은 그 단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무궁무진하다. 하지만 혈계 마법은 웬만해선 소유자의 공통점을 찾을 수 없는 소환 마법과는 다르게 특별한 공통점이 있었다. 그건 바로 혈계 마법의 사용자가 전부 여성이라는 것.
그리고 그 혈계 마법의 궁극은 마법사의 소환 마법을 캔슬 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을 이렇게 직접 눈으로 보게 될 줄은 판도 상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소녀의 상태를 보아하니 그리 편리하기만 한 힘은 아닌 모양이다.
"대단하긴 하지만 마법을 캔슬 시키는 것도 제약이 많은 거 같은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속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마법이란 게 무엇인가? 그야말로 절대적인 힘이었다. 그런 마법사의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게 만드는 그녀들은 무적이라고까지 칭송받는 마법사들마저 두렵게 하는 존재였다. 성지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혈계 마법을 사용하는 그녀들을 두고 이렇게 규정해왔다. 성녀와 마녀라고. 어떤 기준으로 성녀와 마녀를 나누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었으나 대마도시대의 유물과 마도구를 여럿 보관하고 소유하고 있는 성지의 이야기는 파급력이 컸다.
성녀는 성지나 다른 국가에서도 존중받으며 보호되는 반면 마녀는 불길한 존재가 되어 소재를 들키면 목줄이 채워져 높으신 분들에게 팔려가 교배 대상이 된다.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혈계 마법은 피에서 피로 이어진다. 그 말은 즉 마녀의 핏줄은 혈계 마법을 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마녀의 아이라고 무조건 혈계 마법을 발현하는 것은 아니며 매우 희박하기까지 했지만 그 가능성만으로도 높으신 분들이 혹하기엔 좋은 조건이다. 마녀의 숫자는 적고 찾기도 힘들다.
때문에 시대를 불문하고 마녀를 원하는 귀족은 많았고 지금도 비싼 값에 팔린다던가? 그렇게 팔려간다면 소녀는 종마 취급을 받으며 몸이 쇠하는 날까지 범해지며 아이를 낳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 소녀를 팔 생각이 없었다. 그 또한 각인 마법을 원하고 있었기에. 판은 이 소녀에게 자신의 아이를 낳게 만들며 자신을 위해 마법을 사용하게 할 생각이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에게 더 이상 약점이라고 할 만한 것은 사라진다. 물론 이런 결정을 하는 이유는 아름다운 소녀에 대한 추잡한 욕망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판은 어셔와 벨카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어셔가 잔뜩 긴장하고 그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판에겐 콧방귀나 뀔 수준이었다. 보통 마법사라면 육체적인 노동은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가 마법을 사용할 줄 알기는 해도 그는 원래 기사였다. 제대로 된 훈련을 받지도 않은 꼬맹이 따위 상대도 되지 않는다. 실제로 그가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어셔가 달려들었지만.
"끅! 끄윽! 이거 놔!"
이렇게 그의 손에 멱살을 붙잡힌 것만으로도 발버둥 치는 게 한계였으니. 그는 그러면서 시험 삼아 다시 마법을 어셔에게 써보았다.
"으읏!!"
역시 마법은 발동되지 않았고 소녀의 고통스러운 신음만이 들려온다. 그에 판은 웃었다.
"언제까지 내 마법을 캔슬 시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냐? 네가 한계가 오는 순간 난 이 녀석을 잿더미로 만들 텐데."
어셔는 그의 말에 부들부들 떨려오는 몸을 느꼈다. 죽는다는 것은 무서웠다. 하지만 이 떨림은 공포 때문만은 아니었다. 화가 났다. 무엇보다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제일 불쾌하고 분했다.
"자, 그럼 제안을 하나 할까? 어차피 이대로 가면 네가 먼저 한계가 찾아올 거고 그 순간 이 꼬마는 재가 되겠지. 그렇게 될 바에는 나한테 스스로 몸을 바치는 게 어때?"
판의 말에 어셔는 머리가 새하얘지는 것 같았다. 그는 괴로움에 주저앉아 있는 벨카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대신 이 녀석은 살려주마. 좋은 조건이지 않냐?"
판은 소녀가 이 제안을 거절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하물며 어셔마저도 그녀의 대답을 예상하고 손에 피가 나도록 주먹을 쥐었으니.
"당신이었구나... 그 아이의 마음을 더럽힌 게."
그러나 소녀에게서 돌아온 건 그 제안에 대한 수락이 아닌 무언가에 대한 확신 어린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