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기만.
판의 방해로 뜨루스에게서 별다른 정보를 얻지 못한 도나르와 샬비는 뜨루스가 갇힌 마차를 지켜보며 이야기했다.
"이제 어쩌냐? 저 자식은 계속 버티고 있을 기세인데."
샬비는 오두르라는 엄연한 경비가 있음에도 근처를 서성이는 판의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판은 노골적으로 주변에 다가오는 사람들을 슬쩍 위협적으로 행동해서 쫓아내고 있어서 안 그래도 지나다니는 이들이 적었던 마차에는 개미 새끼 하나 보이지 않는다.
"어쩔 수 없어. 뜨루스에게 이야기를 듣는 건 포기할 수밖에. 그리고 진짜로 녀석이 그랬다면 거짓말을 할 경우도 생각해야지."
"그건 그렇지만 말이다."
샬비가 답답한 마음에 뒷머리를 마구 긁었다. 뒤집어쓴 투구 때문에 참으로 의미 없는 행동이었지만 말이다. 도나르는 그런 그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물었다.
"너는 뜨루스가 범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냐?"
"응?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아니, 나야 녀석과 제법 친했지만 너는 별다른 대화도 없었던 것 같은데. 이런 일에 먼저 이야기를 꺼내는 게 이상해서."
그는 도나르의 말에 곰곰이 생각하는 듯 팔짱을 끼고 고민하더니.
"생각해 보니 그러네?"
"어이, 그걸 네가 모른다고 하는 거냐?"
그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하자 샬비는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 그냥 뭐랄까. 직업병 같은 거야. 내가 교도관 중에서도 죄수의 연행을 자주 맡았던 건 기억하지?"
"아니."
"에라. 돌머리 새끼야."
도나르의 단호한 부정에 그의 뒤통수를 때린 샬비는 잠시 숨을 들이쉬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유죄든 무죄든 증거가 필요해야 직성이 풀려."
샬비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끌고 갔던 죄수들은 대부분 무죄라 주장하며 그 증거를 대는 사람들이 많아도, 설령 증거가 없다 해도 단 한 사람의 주장으로 인해 형을 선고받아 감옥에 갇히거나 사실상 사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정작 그때는 아무런 힘도 없고 사는 것이 바빴던 그는 그들의 명령대로 행동하는 기계처럼 살았었다. 어쩔 때는 반대의 경우도 상당했던가. 정작 극악무도한 잘못을 저지른 놈들은 사소한 명분으로 풀려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죄인들이라 낙인찍힌 그들을 교도관으로서 늘 지켜보며 생활했다. 가슴 깊은 곳에 애써 구겨놓은 양심이 가슴을 찌르고 만신창이로 만들어도 생계를 위해 알아도 모르는 척, 감정이 있음에도 없는 척. 그럴 때는 늘 갑갑했던 자신의 갑옷과 투구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저 바이저를 내려 얼굴만 감춰도 다른 모두와 똑같은 모습이 되어 무표정한 강철 인형처럼 보일 수 있었으니까.
"오두르도 나와 마찬가지일걸."
"오두르도?"
"저 녀석, 나와 같은 교도관 출신이잖아."
아니면 왜 뜨루스를 감시하고 있었겠냐며 그는 도나르를 타박했다.
"그나저나 정말 이 방법은 쓰고 싶지 않았는데. 남은 게 이것뿐이니 어쩔 수 없나."
"뭐야? 또 방법이 있었던 거냐?"
자신도 그랬는데 진작에 말하지 그랬냐며 도나르가 몸을 풀자. 샬비는 그를 말렸다.
"일단 판을 두들겨 패서 쳐들어가는 건 아니니까. 몸 푸는 건 그만둬."
"아니었냐?"
"그래, 지금 우리한테 필요한 건 객관적인 정보야."
그렇게 쳐들어가서 뜨루스에게 정보를 얻어봤자 결국 그것은 주관적인 이야기가 될 것이 뻔하기에 참고만 가능할 뿐이다. 그렇다고 확실한 증거가 남아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렇다면 좀 더 다양한 이야기를 모아 진실에 최대한 근접한 답을 찾는 수밖에.
"용의자의 의견도 들어봤는데. 피해자의 의견도 들어봐야 하지 않겠냐?"
"...샬비, 제정신이냐?"
도나르가 정색하자 샬비는 한숨을 내쉬며.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한 건지는 잘 알고 있어."
샬비는 만일의 경우엔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며 도나르를 이끌자. 도나르는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니, 그 녀석은 일단 내 친구이기도 해. 책임을 질 거면 같이 져야지."
"하, 바보 같은 놈."
그렇게 그들이 도착한 곳은 아직 벨카와 어셔가 머무르고 있는 뜨루스의 마차였다.
"그래서 저희를 찾아왔다고요?"
"그래."
현재 그들은 어셔와 벨카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당장 나가요! 벨카를 의심하기라도 하는 거예요?!"
물론 이런 반응일 것이라 예상하고 있던 그들이긴 했지만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한 어셔의 기세에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을 계기로 미움받을 것을 각오하고 온 그들이었지만 어린아이에게 미움받는다는 것은 그들에겐 꽤나 가슴 아픈 일이었다. 결국 이 이상 물어보면 상처를 더 헤집는 일밖에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그들이 일어서려 했을 때.
"어셔, 상관없어."
지금까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조용히 인형처럼 입을 다물고 있던 소녀, 벨카가 입을 열었다. 그 미성에 다시 감탄하는 것도 잠시 그 목소리에 담긴 말에 그들은 소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벨카, 또 괜찮다고 넘기는 거라면."
"이번에는 그런 것과 달라. 그들은 진실을 원할 뿐이니까."
소녀는 그들을 쫓아내려던 어셔를 말리고 그들에게 물었다.
"당신들은 어떤 대답을 원해?"
그녀의 물음에 도나르가 침을 삼키며 물었다.
"정말로 너에게 그런 짓을 한 게 뜨루스가 확실한 거냐?"
샬비는 조용히 도나르의 옆에서 소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미 그들은 아이들에게 미움받을 것을 각오하고 온 상황이다. 소녀의 대답이 확실한 열쇠가 되어주길 바랐다. 이윽고 그녀의 입이 열렸을 때. 그들에게 남은 것은 더욱 어중간한 희망이었다.
"하긴 자는 사이에 당한 것 같았으니. 기억이 있을 리가..."
현재 도나르는 선두의 마차를 몰며 행렬을 이끌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말을 닮은 거대한 생물, 힐디스비니의 고삐를 쥐고 그들의 체력을 고려해 깃발로 속도에 대한 신호를 내리는 그의 갑옷 위에는 다른 마부들이 그러했듯이 붉은 모래먼지에 물든 천을 감싸고 있었다. 힐디스비니가 단단한 모래땅을 박찰 때마다 날아드는 모래먼지 속에서도 그는 능숙하게 마차를 몰며 소녀의 대답을 떠올렸다.
"그가 정말로 나에게 그랬는지 알 수 없어. 확신할 수 있는 건 누군가 이 몸에 그런 짓을 했다는 느낌뿐이었으니까."
결국 그들은 허탈한 심정으로 마차를 나서야 했다. 하지만 아직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라는 걸 도나르는 알고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뜨루스가 그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행동하며 그를 뜨루스의 마차로 안내했던 시프에게는 정작 묻지 않았던 그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어느새 마차를 몰아야 할 시간이 다가왔고 이번에는 도나르가 마차를 끌 차례였기에 시프에게 물어볼 시간은 없었다.
"하, 미치겠네."
아니, 그녀에게 사실을 물어볼 시간은 충분히 많았다. 그러나 그는 그럴 수 없었다. 이미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물어볼 자신이 없었다.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그가 짐작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대체 어떻게 시프를 대해야 하며 대체 어떤 면목으로 그분을 봬야 한단 말인가? 그는 복잡한 심정으로 마차를 몰았다.
"답답해 뒤지겠네. 창문을 열수도 없고."
로기는 자신의 옆에서 그런 말을 중얼거리는 친구의 말에도 대답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자신이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리고 있었다. 마부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은 정말로 우연이었다. 뜨루스가 죽는다는 이야기에 혼란스러운 생각과 두근거리는 가슴이 도저히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체 왜? 어째서 이야기가 그렇게 된단 말인가? 로기가 생각에 빠져있을 때였다.
"그러고 보니까. 너희들 그 소식 들었냐?"
누군가 생각났다는 듯이 감탄하더니 비밀 이야기를 하려는 것처럼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짐짓 마차 안의 어른의 눈치를 보는 모습이었지만 어른들은 이미 잠들어있다. 사실 그들이 타는 마차는 각자 정해져 있었지만 아이들은 친구들과 놀고 싶다는 이유를 내세워 친근한 아이들끼리 마차에 모여있었다. 어른들은 마차 안에서 떠들고 난리 치는 아이들을 귀찮아했고 영악한 아이들은 그런 어른들의 생각을 기가 막히게 이용했다.
어른들은 마차 안에 같은 어른만 같이 있으면 상관없다는 식이었으니까. 멀미가 심해 잠드는 일이 많은 어른의 마차에 타서 이렇게 자신들끼리 비밀스러운 일을 하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뜨루스 그 새끼 강간했대."
"뭐? 그 어리바리한 아저씨가? 누구를?"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소식이 알려지지 않도록 의논했던 모양이지만 아이들은 이미 입이 가벼운 어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을 주워 담는 요령이 있었다.
"이번에 새로 온 애들 있잖아. 그중에서 가면을 쓴 여자애 말이야."
"그 애? 와, 미친놈 아니야? 그거?"
"그래도 걔가 딱 봐도 엄청나게 예쁘긴 했잖아."
"그럼 걔 맨얼굴도 봤나? 나는 걔 맨얼굴이 궁금했는데."
"그런 애랑 했다니 그 아저씨가 좀 부럽긴 하다."
하지만 조금의 무게감도 없이 뱉어지는 아이들의 말에 로기는 심장이 찔리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아이들은 꺼려 하는듯하면서도 부러워하는 것 같았다. 아이들은 어른들을 동경했고 그들이 하는 일들은 무언가 멋있어 보였으니까. 그래서 안심하고 조금 자랑하고 싶으면서도 정말 그런 일조차 부러워할 수 있다는 말이 의심스럽고 그런 생각을 한 자신에게 소름이 돋았다. 로기는 자신이 했던 일이 떠올랐다. 분명히 그건 소년이 겪었던 어떤 일보다 기분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도 함께 떠오른다.
"착각하지 마 이제 너도 공범이라고? 누구한테 말하면 너도 끝인 거야."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았다.
"나 좀 잔다."
"웬일로? 아프냐?"
"그런 것 같아."
자신의 상태를 묻는 아이에게 대충 대답한 로기는 근처의 침대에 누워서 생각했다.
'최악이다.'
해가 떠있는 시간 동안 마차의 행렬은 쉬지 않고 달리고 달렸다. 누군가 바라든 바라지 않든 태양은 천천히 기울어가고 이윽고 태양이 저물어가는 모습에 마차의 행렬은 정해진 대로 한 바퀴를 돌며 천천히 멈춰 섰다. 높은 마부석에서 내려온 마부들이 무언가를 경계하듯 주변을 살피다 마차 문을 두드리거나 열자 한나절의 대부분을 마차 안에 있었던 사람들이 하나둘 빠져나와 찌뿌둥한 몸을 풀었다. 그중에는 어셔도 있었다.
"흐아암, 낮에 이렇게 많이 자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
"멀미는 체력을 많이 소비하니까. 어쩔 수 없어."
마차가 움직이자 멀미를 피하기 위해 잠들었던 그가 걱정하자 벨카는 그의 흐트러진 옷을 정리해 주며 말했다.
"그래도 오늘은 멀미가 그렇게 심하진 않았어."
어셔의 말대로 그는 오늘 멀미를 심하게 하지 않았다. 멀미를 아예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어지럽고 숨이 막히며 사소한 냄새에도 토할 것 같았던 것이 단순하게 잠이 오는 것으로 그친 것이다.
"그러게 신기했지. 어제까지만 해도 멀미 때문에 곧바로 죽을 것 같이 행동하던 애가."
어제의 어셔가 얼마나 멀미에 시달리는지 보았던 시프도 그런 그의 모습이 신기해 보였다. 얼마나 멀미가 끔찍했으면 마차가 움직일 때만 해도 벨카에게 매달리며 차라리 자신들끼리 말을 타고 란투아에 가면 안 되겠냐고 질색했었다. 다행스럽게도 그의 멀미는 약해졌지만 그 방법이 조금 이상했다.
"벨카 덕분이야!"
그의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시프는 멀미에 시달리던 그가 소녀의 무릎을 베개처럼 베는 것만으로 눈에 띄게 안정되던 모습을 떠올렸다. 참 뭐라 하기에도 애매하고 이상한 방법에 시프는 할 말이 많았지만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에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생각대로라면 이 아이들이 더위에 약한 말을 타고도 황야를 돌아다닐 수 있었던 것도 소녀가 마법책에 관심을 가졌던 것도 어셔가 멀미를 적게 한 것도 모든 것이 납득이 갔기 때문이었다.
소녀의 정체는 아마도. 시프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그녀는 소녀의 금빛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 같은 모습에 오싹한 느낌을 받았지만 소녀는 비밀이라고 이야기하듯 검지를 자신의 입술 위에 대어 보였을 뿐이다. 이내 소녀는 가면을 써 제 얼굴을 감추었지만 그 행동에서 느껴지는, 도저히 어린 소녀의 것이라 생각할 수 없는 요염한 색태에 시프가 멍하니 벨카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누나? 누나!"
"아, 왜 그러니?"
그녀를 부르는 어셔의 목소리에 시프가 정신을 차리면 벨카는 더 이상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대신 어셔가 그녀를 걱정스레 쳐다보고 있었다.
"누나도 멀미하는 거예요?"
"그냥, 조금 생각할게 있어서."
그의 말에 대답을 얼버무린 그녀는 식사를 준비해야 한다며 말을 돌렸다. 되도록이면 아이들이 마차 안에서 안전하게 밥을 먹길 바랐지만 재판은 식사 뒤에 아이들을 마차로 보내거나 재우고 시작되니까.
"어셔."
"어, 왜?"
어셔는 자신을 부르는 소녀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자 걸음을 멈춘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시프는 식사 준비를 한다며 먼저 가버린 후였다.
"잠깐 볼 일이 생겼어."
"화장실 말하는 거야?"
"아니, 하지만 필요한 일이야."
벨카의 말은 뜬금없었지만 어셔에게 그녀의 행동과 말은 익숙한 것이었다. 그도 그녀가 저런 말을 할 때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저럴 때의 소녀는 고집스럽게 알려주려 하지 않았으니까.
"무슨 일인지 알려주지 않을 거지?"
"응."
역시 벨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어셔는 그녀를 책망할 수 없었다. 소녀는 이런 말을 할 때마다 정작 그 말에 스스로가 상처를 받는 것처럼 보여서. 그녀는 어셔에게 자신들을 찾아왔던 사내들과 함께 있으라는 말만을 남기고 어디론가 걸어가버렸다.
"야야! 걔 저기 있다."
식사를 하러 가는 길. 로기는 제 친구의 목소리에 흠칫하고 친구가 보는 곳을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 시선의 끝에는 웬일인지 붉은 소녀가 혼자 서있는 모습이 보였다. 불을 떠올리기엔 차갑고 피를 떠올리기엔 부드러워, 그저 붉은 꽃이 생각나는 달콤하고 아름다운 소녀. 지금은 저 검붉은 원피스가 몸을 감싸고 있었지만 로기는 보기만 해도 그 아래의 하얗고 부드러운 살갗과 자신의 물건을 삼켰던 소녀의 은밀한 계곡이 떠올랐다. 때문에 바지 속에서 자신의 물건이 부풀어 오르는 느끼고 로기가 당황했을 때였다.
"어? 쟤, 여기로 오는 것 같은데?"
그 말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자. 이곳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로기는 소녀의 눈과 자신의 눈이 마주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녀의 얼굴을 감추고 있는 가면 때문에 그럴 리가 없는데도. 그 시선이 자신을 책망하는 것 같다는 느낌에 로기는 소름이 돋았다. 저 소녀가 자신이 한 일을 알고 있다는 생각에 식은땀이 흘렀다.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지만 아니라면 왜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단 말인가? 소녀가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에 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 이유가 설렘 때문인지 죄책감 때문인지 알 수는 없었다. 단지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가득 채웠다.
"야! 너 갑자기 어디 가?!"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친구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로기는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도망치지 않으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자신이 저지른 짓을 소녀가 모두 말해버릴 것 같았다. 그렇게 겁에 질린 토끼처럼 달려서 도착한 곳은 오늘 타고 왔던 마차의 앞이었다.
"젠장."
평소라면 이렇게까지 숨이 차지 않았을 텐데. 급하게 뛴 탓인지 금방 숨이 차올라 지친 숨을 내뱉었다. 그 소녀와 관련되면 로기는 가슴속이 마구 요동쳤다. 이래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는데.
"나 뭐 하는 거지."
로기는 갑자기 자신이 한심해졌다. 소녀가 자신을 책망하는 것도 자신에게 오는 것도 그저 우연히 길이 겹쳤을 수도 있는 것인데. 지레 짐작해서 도망쳐버리고 말았다. 아니라면 도망치듯 달려나간 자신이 소녀의 입장에서 얼마나 이상해 보였겠는가? 언제부터 자신이 이렇게 겁이 많았나?
"돌아가자."
한숨을 내쉬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친구에게 돌아가려 했을 때였다. 탓 탓 작게 들려오는 발소리와 지친 숨을 내쉬는 누군가의 숨소리에 몸이 굳어버린 것은.
"하아, 콜록콜록! 왜 도망치는 거야?"
이어서 들려오는 소녀의 미성에 로기가 고개를 돌려보면 붉은 소녀, 벨카가 지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체력이 좋은 편은 아닌 듯 다른 아이들이라면 가볍게 뛰어다닐 수 있는 거리에도 숨이 막히는 듯 기침을 하며 그에게 묻고 있는 소녀의 모습에 로기의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설렘? 죄책감? 그런 감정은 옅었다. 지금 심장을 가장 크게 뛰게 만드는 것은 두려움이다.
"그, 그러는 너야말로 왜 쫓아왔는데?"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녀가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던 게 착각이 아닌 사실이라면? 소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도 그 시선 속에 담긴 책망까지 모두 사실이라면? 심장소리가 너무 커져서 귓속에서 커다란 북을 두드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아하아,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하지만 지금도 계속 커져가는 심장소리조차도 소녀의 미성이 그 귀에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뭐가? 대체 뭐가 궁금해서!?"
조금만 생각해봐도 로기는 자신이 얼마나 신경질적으로 대답했고 그 행동이 얼마나 수상해 보이는지 알 수 있었지만 이미 그에게 그럴 여유는 남아있지 않았다. 소녀의 눈빛이, 행동이, 그에게 물어볼 것이 너무나 두려워서. 소녀가 입을 여는 순간이 너무나 느리게 느껴졌다. 소녀가 입을 열지 않았으면 했다. 물어볼 것이 제발 그가 생각한 것만은 아니길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소녀의 입은 열렸다. 태양이 뜨고 진다는 변치 않는 사실처럼.
"너는... 이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야?"
소녀의 말투는 어딘가 이상해서 알아듣지 못할 수도 있었지만 로기는 당사자였기에, 당사자이기 때문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벨카는 자신이 그녀에게 한 짓을 알고 있다고 한 것이다. 그 순간 머릿속에서 무언가 툭 하고 끊어진 것 같았다.
"하, 하하. 하하하하!"
착각이 아니었다. 소녀가 그에게 다가오는 것 같다는 생각도 자신을 보는 것이라 생각했던 시선도 그 속에 담긴 책망도. 이 소녀는 모든 걸 알고 자신에게 찾아온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걸 말하라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제 아무래도 좋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대체 뭐 때문에 이렇게 시달리는 기분이 드는지 더는 알고 싶지 않았다.
"너는... 윽!?"
미친 듯이 웃는 자신에게 소녀는 무언가 더 말하려는 것 같았지만 로기는 더 이상 그녀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가 소녀의 손목을 강하게 붙들자 그녀는 고통에 말을 잇지 못했지만 로기는 그대로 소녀를 마차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처음부터 이렇게 했어야 하는데. 이미 해버렸는데 더 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지 않냐고 자신에게 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