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기만.
"혹시 내가 일어나기 전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잠에서 깨어난 어셔는 미묘한 분위기를 느끼고 벨카에게 물었다. 요즘 깨어날 때마다 머리를 괴롭히는 두통과 물로 헹구고 싶어지는 냄새가 입안을 맴돌아서 기분이 나빠서 그런 것일까? 고민해보았지만 이 분위기는 그런 것으로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뜨루스가 자리에 없는 것은 그렇다 쳐도 시프의 경우.
"오늘은 마차 안에만 있는 편이 좋아."
"네? 하지만 그러면 식사는."
"그건 내가 가져다줄게."
이렇게 이유를 가르쳐 주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말하다 식사를 가져온다는 이유로 나가버린 것이다. 그녀가 도저히 가르쳐줄 기색이 보이지 않아서 그가 깨어나기 전부터 먼저 일어나 있었던 벨카에게 물어봐도.
"글쎄. 딱히 신경 쓰고 싶지는 않은걸."
괜히 그 깊은 숲속에 혼자서 살아왔던 것이 아닌지 그녀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옅었다. 그저 어디서 났는지 모를 책을 들여다보는 모습에 어셔는 호기심이 생겼다. 책의 내용을 엿보고자 소녀의 뒤로 살금살금 다가가면, 그녀의 머리카락처럼 붉은색이 떠오르는 달큼한 꽃향기가 풍기며 책의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책 속에는 룬 문자와 함께 그 룬이 마법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었다.
"마법책? 하지만 내가 들고 있던 거랑은 좀 다른 거 같은데."
종이로 만들어진 책에는 비교적 커다랗게 그려진 룬을 중심으로 빼곡하게 글씨가 적힌 글씨와 함께 적혀 있었다. 빈 페이지에 가득한 글씨는 어찌나 작고 빽빽한지 읽는 것이 힘들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페이지의 가운데 그려진 룬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다는 것이 신기하게 보였다. 하지만 역시 어셔가 읽던 마법책과는 달랐다. 그건 이렇게 읽는 것이 힘들 만큼 빼곡하게 글이 쓰여있지도 지나치게 두껍지도 않았으니까. 그의 마법책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이건 어디서 난 거야?"
"이곳의 책장에 꽂혀 있었어."
벨카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책이 여럿 꽂혀있는 책장이 보였다. 의무실로 사용하는 곳에 마법책이 있다니 뜨루스는 의사라면서 마법에도 관심이 있었던 것일까? 묘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같이 읽어도 돼?"
"응."
소녀는 그렇게 말하며 그가 쉽게 볼 수 있게 옆으로 책을 빼주었다. 그녀의 옆으로 옮겨가면 책의 내용을 겨우 보고 읽을 수 있었다. 현재 페이지의 가운데 쓰인 룬은 화살표의 조각이 맞물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역시 어셔는 이것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알 수 없었지만 이 책은 그 룬을 어떻게 부르는지부터 마법으로서의 용도와 그 의미까지 자세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수확과 일 년, 회복? 이런 건 어떻게 알아낸 거래."
저 간단한 그림 같은 단어에 어찌나 많은 뜻이 담겨있는지 이 페이지에 쓰인 것만 해도 어셔는 머리가 아플 것 같았다. 학자들이 룬에 대해 해석하고 밝혀냈다는 빼곡하게 쓰인 글은 물론 흥미로운 사실이었지만 저 작은 문자 하나에 어떻게 저렇게 많은 해석을 할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이 책은 한 사람만의 해석을 담은 게 아니라서 그럴 거야."
그의 의문을 읽은 것처럼 소녀가 말했다.
"그럼 여러 명이 이 책을 만든 거야?"
"일단 이 책 자체는 한 사람이 만들었어. 단지 그는 다른 사람들이 연구하고 주장하는 것들을 간추려서 이렇게 한데 엮은 거야."
그녀의 말을 듣고 글을 다시 읽어 보니 뒤늦게 어떤 것은 어떤 학자가 주장하는 것이다. 또 일부는 어떤 소수민족이나 단체에서 생각하는 의미이다. 같은 형식으로 쓰인 것들이 곳곳에서 보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재미있어 보이기는 하는데. 어렵다. 대체 이런 걸 어떻게 만들었는지 모르겠어."
이렇게 많고 방대한 의미를 어떻게 외울 수가 있단 말인가? 어셔는 페이지를 펼치는 것만으로 압도되는 듯한 느낌마저 주는 빼곡한 글씨의 양에 질릴 것 같았다.
"아마도 마법을 좋아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마법을...?"
"응, 어셔는 마법을 어떻게 생각해?"
소녀의 물음에 어셔는 고민했다. 마법이란 그의 생각 속에서 무언가 대단하고 멋진 것이었다. 그저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우러러 보아지는 그런 꿈과도 같은 것. 사용할 수 있다면 기준은 알 수 없지만 위대한 것으로부터 선택받았다는 자신감까지 생길만한 것이었다.
"이걸 쓴 사람도 참고한 이들도 어셔와 같았을 거야."
"나랑?"
"하지만 절망한 거야. 마법을 좋아하는데도 누구보다 열심히 마법을 갈망했는데도 선택받지 못했다는 사실에."
벨카의 말을 듣고 다시 책의 내용을 읽으니 왜 이런 책이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의 말대로 이 책을 쓴 사람, 그리고 그가 참고했다던 수많은 학자들과 소수민족들은 적어도 처음은 어셔와 같았다. 같았을 것이다. 그들은 제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마법을 사용하고 싶어 했다. 글을 자세히 읽으면 읽을수록 그곳에서 묻어 나오는 사람들의 마법에 대한 갈망과 동경, 절박함이 엿보였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은 내용을 차지하고 있는 건 마법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닌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 사람들이 사용했던 수많은 방법들이었으니까. 언뜻 설득력이 있어 보이는 것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 정말로 했다고 믿기지 않는 말도 안 되는 행위들까지 이 책은 전부 담아내고 있었다. 그 광기마저 느껴지는 행위들에 어셔는 몸을 떨었다.
"...나는 이렇게까지 해서 마법을 얻고 싶지는 않아."
마법을 사용하는 것만으로 사람들의 존경과 엄청난 부와 명예를 손에 넣을 수 있다고 해도 말이다. 그럼에도 그의 마음 한구석에선 이 책에 쓰인 사람들의 행위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가 조금 충격적이었다. 그때였다.
"호오, 그거 신기한데?"
책에 대한 그의 감상에 대답하듯 어떤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에 놀란 어셔가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면 도나르와 싸웠던 사내, 판이 마차의 문으로 들어오며 웃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또래 중에서도 덩치가 작은 편인 어셔와 그보다도 작은 벨카에겐 큰 거인과도 같았지만 어셔는 그를 노려보았다.
"여기는 무슨 일이에요? 아저씨는 더 이상 여기서 치료받지 않아도 된다고 들었는데요."
그는 첫인상부터가 별로였다. 그 누가 일어나자마자 다른 사람을 희롱하고 괴롭히며 시비를 거는 험악한 인상의 사내를 좋게 볼 수 있을까? 그 대상이 하필 자신에게 친절히 대해준 사람들이었기에 경계심은 더했다. 혹시 벨카에게 해코지하려 온 건 아닐지 그를 노려보고 있으면 그에게서 능글맞은 대답이 들려왔다.
"너무 그렇게 경계하지 말라고. 네 친구가 좀 괜찮은지 확인하려고 찾아온 거였으니까."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오, 뭐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가르쳐주지도 않은 거냐? 하하하하! 이거 걸작인데!"
뭐가 그렇게 우스운지 무릎까지 탁탁 치며 과장스럽고 기분 나쁘게 웃어대는 남자의 모습에 어셔가 불안을 느끼고 벨카를 돌아보면 어른에게 혼나기 직전의 어린아이처럼 그의 시선을 피하는 소녀가 보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응? 말해줘. 벨카."
더욱 커져가는 불안에 그가 애원하듯 묻자. 벨카가 입술을 달싹였지만 사내가 끼어들어 말하는 것이 먼저였다.
"아주 갸륵하기도 하지. 역겨워서 토할 것 같아."
"당신 그게 무슨...!"
"모두 잠든 사이에 뜨루스 그 얼뜨기 자식이 수면제를 먹이고 자기를 따먹었다는 것도 제 친구에게 이야기하지 못하고 말이야."
어셔가 판의 모욕적인 조롱에 뭐라 하려 했으나 그가 그의 말을 끊고 하는 이야기에 어셔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잠시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던 그는 마차 안에서 보이지 않던 뜨루스의 모습과 오늘따라 이상했던 시프의 태도를 떠올렸다.
"벨카, 왜 말하지 않았어?"
어셔는 주먹에 힘이 들어가며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뜨루스가 벨카에게 그런 짓을 했다는 것이. 무엇보다 그걸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그와 태연하게 대화를 나누었던 자신이 너무나 한심하고 비참하고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미안해."
"이번에도 괜찮다고 이야기할 거지?"
"...응."
소녀는 그를 마주 볼 자신이 없는 듯 고개를 숙이고 힘없이 답했다. 그녀가 이런 성격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정작 안 좋은 일을 당한 건 본인이면서 그를 먼저 걱정했으니까. 이번에도 그런 것이리라. 자신이 당한 일은 그저 괜찮다는 한 마디로 넘겨버렸으면서 어셔를 걱정했겠지. 그 행동이 그를 더 비참하게 만든다는 것도 모르고.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워?"
벨카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이렇게 숨기려 하지 마. 적어도 이야기라도 해줘."
"응, 그렇게 할게. 정말로 미안해. 나는 그저 어셔가 걱정돼서..."
서로를 껴안으며 그들은 서로의 마음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래, 이렇게나 사랑스러운 마음이 너무나도 크고 또 커서 어셔는 그녀를 원망할 수도 미워할 수도 없었다.
"오, 뜨루스 그 얼뜨기 녀석이 따먹었는데. 괜찮다고? 그럼 나도 따먹어도 상관없나?"
남자의 기분 나쁘고 말도 안 되는 헛소리에 그가 소리치려는 순간이었다.
"당신도 그 남자처럼 되고 싶으면 그렇게 해. 그전에 잡히겠지만."
식사를 가지러 갔던 시프가 마차로 들어오며 싸늘하게 말했다. 판은 시프가 들어오자 쯧 하고 혀를 차더니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대체 뭐 하러 이곳에 찾아왔는지 알 수 없는 남자의 행동이 기분 나빴다.
"저 아저씨는 대체 뭐 하는 사람이에요?"
"이 상단을 호위하는 사람들 중에 한 명이야."
어셔가 그에 대해 짜증을 내며 물어보자 시프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노는 것 밖에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요."
아니면 같은 사람끼리 싸우거나. 그가 부상 때문에 이곳에서 쉬고 있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남자의 태도와 행동은 그것을 고려해봐도 결코 좋은 인상을 줄 수 없었다. 방금 전에도 갑자기 찾아와 시비를 걸다가 나가버렸으니까.
"그래도 실력 하나는 확실해. 저러는 모습을 보면 차라리 쫓아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들지만."
조금이라도 실력이 모자랐으면 진작에 쫓아냈을 정도라며 시프는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행동했다.
"혹시 너희들한테 해코지하지는 않았니?"
"해코지 같은 건 안 했어요. 단지... 뜨루스 아저씨가 벨카에게 그런 짓을 한 게 사실이에요?"
어셔의 말에 그녀는 잠시 벨카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하아, 저 인간이 왜 이곳에 찾아왔나 했더니 그새 이야기해버린 모양이구나."
시프는 정말로 성격 나쁜 인간이라며 혀를 찼다.
"그렇다는 건."
"그래, 사실이야."
"그 아저씨는 어떻게 됐는데요?"
그가 화가 난 기색으로 당장이라도 뜨루스가 있는 곳으로 달려갈 듯한 기색이 보이자 시프가 그를 붙잡으며 말했다.
"그 남자는 저녁을 먹고 간단한 재판을 거친 후에 황야에 버려두고 가기로 결정했대."
"...고작 그걸로 끝이에요?"
"물론 물과 식량도 남겨주지 않을 거야."
어셔의 화가 덜 풀린 것으로 보이자 시프는 그것만으로도 사실상 사형선고나 마찬가지라며 그를 타일렀다. 황야에는 인간을 잡아먹거나 죽이는 위험한 생물들이 많으며 그런 곳에 물과 식량도 없이 맨몸으로 던져두면 힘들게 손을 쓰지 않아도 죽일 수 있다는 설명도 함께였다. 혹시라도 누군가 구하지 않도록 범죄자라는 낙인도 함께 새길 테니 다른 사람에게 구해질 염려도 없다고.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어셔는 간신히 진정할 수 있었다.
"대신 저도 그 재판에 참여하고 싶어요."
"그건..., 후우, 어쩔 수 없구나. 단주님께 말씀드려 볼게."
우선 식사부터 하고 생각해보자며 시프는 들고 온 작은 냄비 하나와 빵 세 개를 풀어놓았다. 우선은 아침을 해결해야 할 시간이었다.
아침 식사가 한창인 가운데. 평소와 다른 분위기가 식사 자리를 맴돌았다. 식사가 시작되면 항상 떠들썩했던 식사시간은 오늘따라 조용해서 놀기 좋아하는 아이들도 어른들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앉아서 식사를 한다. 그러기를 한참. 끼리끼리 모여든 마부들 사이에서 누군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식사를 하고 있으니 입이 심심했는지 누구도 함부로 꺼내지 않았던 주제를 조심스레 꺼내들었다.
"뜨루스, 그 녀석 사형이나 마찬가지라며?"
"야, 입 조심해. 애들 들을라!"
그러자 곁에 있던 다른 마부가 그의 뒤통수를 쳤다.
"조용히 이야기하면 되잖아! 조용히!"
"조용히고 자시고 주변에 신경 좀 쓰라고."
먼저 이야기를 꺼낸 마부가 불평하자 뒤통수를 친 마부는 함께 밥을 먹던 도나르를 슬쩍 바라보며 조용히 하라며 검지를 투구 근처에 대었다. 그제야 도나르를 알아차린 듯 그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우리 모두 같은 갑옷을 입고 다녀서 누가 누군지 구분이 잘 안 가는데 어떻게 하라고."
"그렇긴 하지만 이제 구분할 때도 됐잖아."
"시답잖은 소리는 그만두고 바이저나 올려서 밥이나 마저 먹어 새끼들아."
그들에게 도나르의 곁에 있던 샬비가 한 소리 하자 그들은 투덜거리면서도 제 몫의 단단한 빵을 깨트려 가루로 만들어 수프에 섞어 먹었다. 샬비가 그들을 한심하게 바라보다가 도나르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서 좀 괜찮냐? 너 말은 안 해도 걔랑 친했잖아."
"아, 뭐, 그랬었지. 이제는 좀 그렇긴 하지만"
샬비가 걱정스럽게 묻자 도나르는 괜찮다는 듯 이야기했지만 그 대답을 들은 샬비는 믿을 수 없었다.
"정말로 걔가 한 게 확실해? 네가 잘못 본 건 아니고?"
"어."
샬비의 물음에도 도나르가 무덤덤하게 대답하니 그는 답답한 마음에 가슴을 두드렸다. 평소에는 이런 일에 가장 먼저 행동하고 볼 인간이 정신줄을 놓은 것처럼 멍하니 있으니 그의 행동을 말리던 샬비가 오히려 답답할 지경이었다.
"걔 이번에 진짜 죽어. 적어도 이유는 좀 들어보자고. 말도 안 하던데."
단단하고 붉은 모래로 가득한 황야는 인간에게 불친절할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위협적이고 배타적인 생물과 몬스터로 가득하다. 당연히 이런 황야를 횡단하는 것에는 크나큰 위험이 따르기 때문에. 상단 내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협력과 결속력은 중요한 요소다. 상행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불만이 없을 래야 없을 수가 없기 때문에 상단 내의 범죄 행위에 대해선 도시나 나라에서 진행하는 재판보다 더 엄격한 판결이 내려진다.
도시나 나라에서는 다스리는 이들마다 천차만별이지만 감옥에 가두거나 하는 식으로 끝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상행 중에는 죄인으로서도 가장 판결 받기 힘든 사형이 내려지는 빈도가 훨씬 높다. 게다가 뜨루스가 지은 죄의 무게는 그들의 고향을 생각하면 답이 없었다.
"후우, 이게 무슨 일 이래냐. 그 녀석 좀 못 미덥긴 해도 그런 녀석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샬비가 허탈하게 중얼거리자 도나르는 수프가 담긴 그릇을 전부 들어서 자신의 입에 전부 털어놓았다.
"그래, 네 말대로. 왜 그랬는지 정도는 알아야겠어."
"하, 이제 좀 평소 같네."
샬비까지 빠르게 식사를 끝내고 그들이 향한 곳은 맨 뒤에서 두 번째 마차였다. 원래는 식량창고로 쓰던 곳 중에 한 곳이지만 목적지에 거의 다 도착해가는 만큼 채워질 일이 거의 없는 곳이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죄인이 된 뜨루스를 가두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었다.
"오두르, 별일은 없어?"
"너무 조용해서 심심하기는 했지."
그들이 그 마차 문을 열고 들어가자 텅 빈 마차 안에 밧줄에 묶이고 갇혀있는 뜨루스와 그가 허튼짓을 하지는 않는지 감시하던 사내가 보였다. 샬비가 반갑게 인사하니 그 또한 둘을 반겼다.
"심심했다고?"
그 모습에 샬비가 의아하다는 듯이 묻자.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어, 자기는 아니라던가 풀어달라던가 발악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그런 것도 전혀 없었어."
"그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있었다는 소리에 도나르의 시선이 뜨루스를 향했다.
"잠깐 우리가 맡을 테니까. 조금 바람이나 쐬다 와."
"그러면 나야 고맙긴 한데. 왜?"
"저 녀석한테 좀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야."
샬비의 말에 도나르와 뜨루스를 번갈아 쳐다보던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풀어주면 안 된다?"
"알아, 고맙다. 새꺄."
그렇게 뜨루스를 감시하던 오두르가 마차를 나가고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도나르였다.
"뜨루스, 왜 그랬냐?"
거봐. 자기가 제일 묻고 싶었으면서. 샬비는 그렇게 생각하며 문 옆에 기대어 앉았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뜨루스가 도망치는 일이 생기면 곤란했으니까. 하지만 좀처럼 대답하지 않고 침묵하는 뜨루스의 모습에 결국 아무것도 들을 수 없을 거라 실망했을 때였다.
"내, 내가 아, 아니라고 한다면, 믿어 줄 거야?"
"그게 무슨..."
드디어 뜨루스가 입을 열어 말한 것은. 그 말에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묻고자 했으나. 그때 문밖에서 다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더니 강제로 문이 열리며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에 뜨루스는 다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런, 안 되지. 너희들 사적으로 사람을 심문하는 건 안 된다는 거 모르지는 않을 텐데?"
"판."
그 목소리의 주인은 판이었다. 결국 그들은 일을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난 판의 비꼬는 소리와 으름장에 질려 뜨루스에게서 변변찮은 대답도 듣지 못하고 마차를 나올 수밖에 없었다.
"미안하다. 마차 앞에서 바람이나 쐬려고 했는데. 판 녀석이 갑자기 오는 바람에."
"네 잘못은 아니잖아. 따지고 보면 우리가 잘못한 거니까."
오두르는 판을 막다가 땅을 뒹굴었는지 그의 갑옷은 흙투성이였다.
"그래서 뭐 털어놓은 건 없는 거냐?"
"어, 녀석이 범인이 아닐 것 같다는 느낌은 드는데. 이게 우리 감정 문제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어."
판이 끼어들지만 않았다면 더 알아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놈의 성격상 뜨루스가 범인이던 아니던 끝까지 지켜보고 그들이 하려는 일을 방해할 것이 뻔했다. 뜨루스가 죄를 저지른 것이 목격된 상황에서 어느 쪽이든 증거가 없으니. 이대로라면 단주님의 판단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그래, 저 녀석이 계속 입 다물고 있으면 죽을 거야."
"뜨루스가 진짜로 저지른 거면 할 말이 없는데.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으니까. 역시 좀 찝찝하네."
"그렇지. 무죄 건 유죄 건 확실한 증거가 나오면 찝찝하지는 않을 텐데."
오두르와 대화하던 샬비의 눈에 어디론가 뛰어가는 작은 인영이 비쳤던 것 같았지만 그는 근처에서 놀던 아이겠거니 가볍게 넘겨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