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기만.
"그분께서? 하지만 저는."
시프는 혼란스러웠다. 그분께서 그런 말을? 그녀가 특별하다 이야기하기엔 이 상단에서 그녀와 비슷한 사정이나 억울한 일을 겪었던 이들은 많았다. 아니, 거의 모두가 한 번쯤은 그런 일을 겪었던 이들이기에 시프는 그들에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고 그녀도 이들을 편하게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 또한 그분에게 구해진 사람들 중 한 명일 뿐일 거라 생각했다.
"네 사정은 알고 있었어."
"그것도 그분께 들으신 건가요?"
도나르에게 그 말을 듣기 전까지는.
"음, 그분은 멋대로 이야기를 했다며 네가 미워할 거라고 생각하셨지만."
도나르가 하는 행동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분은 입이 무거운 도나르에게 이야기하는 것조차 한참 망설였을 터다. 그러다가도 시프가 걱정이 되어서 마지못해 이야기했겠지. 그녀가 아는 그분은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분께 자신은 특별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저는 그분이 밉지 않아요."
다시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커녕 어머니의 사랑조차 받지 못했던 그녀를 자신의 딸처럼 여겨주셨다. 그때는 깨닫지 못했지만 그녀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아버지라는 존재를 그분으로부터 배우고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그저 포기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분께 구해진 이들이 많아서 그분이 추구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녀를 신경 쓸 이유가 없다고. 멀리 떨어져 있는 지금에서야 그분의 어설픈 아버지 같은 모습을 깨닫다니.
"하지만 역시 얄밉네요."
뚝뚝 마부석 바닥에 그녀의 눈물이 흘러떨어졌다.
"잠깐! 우, 우는 거냐?"
도나르의 당황하는 목소리에도 그녀는 좀처럼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그녀가 도나르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어찌 보면 단순했다. 시프의 사정이 특별하지 않은 곳에서의 생활은 완벽하지는 않아도 편안했고 채워질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그녀의 공허한 마음을 그분께서 채워주셨다. 그러다 특별한 사람이 생겼다. 도나르는 우연히 그녀를 마주칠 때마다 친절하게 대해주었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누구보다 먼저 도와주었으며 고민이 있으면 묵묵히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시프가 도나르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어찌 보면 단순했다.
다른 사람들이 그녀에게 친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유독 도나르는 시프에게 큰 호의를 베풀었다. 그가 그녀에게 그 이상의 호의를 가질만한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호의가 더 특별하게 느껴졌고 그가 자신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기대하게 되었다. 결국 그녀의 일상에 그가 함께하는 것이 당연하게 되었을 때. 그녀는 그가 특별해졌다. 하지만 도나르의 모든 호의와 친절이 그분의 부탁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자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결심이 섰다.
"좀 괜찮냐?"
시프가 운 이유도 묻지 않고 손수건을 건네는 그의 호의에 두근거리는 자신 가슴에 단순한 착각이라 일침 하며 그녀는 일어섰다.
"시프?"
그가 건네는 손수건은 받지 않았다. 그의 의문 어린 시선이 그녀를 망설이게 만들었지만 마음을 굳게 먹었다.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요."
시프가 그렇게 말하며 그를 데리고 간 곳은 한 마차의 앞이었다.
"뜨루스의 마차잖아?"
그래, 그 남자의 명령대로라면 시프는 아침때까지 누군가 이곳에 관심을 끌거나 오지 않도록 유도해야 했겠지만, 이젠 아무래도 좋았다. 명령 같은 것도 남자가 직접 보고 있지 않는 한 강제성도 약한 것 같았으니까.
"여기는 왜?"
도나르의 의문에 그녀는 직접 대답하지 않았다. 태양도 슬슬 떠오를 시간이다. 그 남자도 그녀가 직접 명령을 어길 거라 예상하지는 못하겠지. 그녀는 마차의 문을 열었고 최근 들어 항상 피워 두는 수면향과 알싸한 약초의 향에 뒤섞여 마차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꿉꿉한 땀 냄새와 비릿한 냄새가 풍겨왔다. 그 지독한 냄새에 그녀에게 배신당할 것도 모르고 어지간히 신나게 해댄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남자를 비웃었다.
"이게 무슨 냄새... 하?"
도나르가 그녀를 따라 들어오며 본 광경은 직접 본 사람이 아니었다면 믿을 수 없을 광경이었다. 침대 위에 잠든 환자들은 평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중 한 곳 눈에 띌 수밖에 없는 남자와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옷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엎드려 잠들어 있는 남자, 뜨루스와 그가 깔아뭉개듯 덮치고 있는 나신의 소녀를 말이다. 그의 아래에서 피처럼 흘러내린 오묘한 색채의 붉은 머리카락이 뜨루스의 아래에 있는 소녀가 누구인지 말해주고 있었다.
해가 떠올라 거센 바람이 부는 아침. 식사 준비를 위해 한참 부산스러웠을 사람들은 조용한 침묵 속에 모여있었다. 가끔씩 들려오는 목소리도 이 상황과 분위기가 못마땅하거나 의아한 이들이 속삭이는 소리뿐이다. 그런 가운데 노인의 엄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뜨루스, 시프가 말한 것 그리고 도나르가 목격한 것이 사실인가?"
사람들의 중심에는 뜨루스가 밧줄에 꽁꽁 묶여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를 보는 시선은 여러 가지였다. 믿을 수 없다는 눈초리나 경멸 혹은 공포.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가 하나같이 그를 죄인으로 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른 아침, 사람들에게 전해진 소식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뜨루스가 이번에 그들과 동행하는 아이 중 하나를 잠든 사이에 강간했다는 소식. 설령 외부인이라고 해도 그들의 고향에서 그 죄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모를 이들이 없다.
"정말로 사실이냐고 물었네!"
"...."
뜨루스는 답하지 않았다. 무겁고 답답한 침묵이 사람들 사이에 내려앉았다. 아직 죄가 확정된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하며 간단하게나마 재판을 연 노인이었지만 목격자와 신고자가 사람들의 신뢰를 받는 도나르와 모두가 말은 하지 않아도 그분이 딸처럼 여기던 시프다. 게다가 잡혀온 죄목은 상단에 동행하는 어린 소녀를 잠든 사이에 강간했다는 것이다. 여성들과 아이들의 숫자가 많은 상단이기 때문에 중앙에 묶여있는 뜨루스를 보는 눈초리는 더욱 매섭다.
"뭐라도 말 좀 해보게!"
"...."
그저 침묵하는 뜨루스의 모습 때문일까? 노인의 호통소리가 날아들어도 그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재판은 침묵 속에서 진전조차 없이 말하지 않는 그에 대한 사람들의 소리 없는 원성만 커져가고 있을 때였다.
"거 노인장, 목격자도 있고 정황도 확실한데. 왜 이렇게 질질 끄는 거요?"
사람들 사이에서 불만에 가득한 남성의 목소리가 끼어든 것은. 그 목소리의 주인은 뜨루스의 마차에서 자고 있던 환자들 중에 한 명이었던 판이었다. 아직 모두 회복된 모습은 아니었지만 멀쩡히 걷고 행동하는 모습을 보면 거의 회복된 것 같았다.
"판."
그를 본 노인은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어디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존재였다. 이번에는 또 무슨 행동으로 공정해야 할 재판을 훼방을 놓을지 알 수가 없다. 평소 행실 문제로 구설수에 오르내리는 남자였지만 이번만큼은 사람들도 그의 말에 내심 동의하고 있었다. 뜨루스가 이야기하지 않으니 재판은 진행되지 않았다. 아이들이 아니더라도 이런 무거운 분위기에서 오랫동안 있는 것은 어른들에게도 달가운 문제가 아니었다. 곧 식사를 할 시간이라 사람들의 불만도 심했다.
"한바탕 즐긴 흔적도 가득했고 도나르도 시프도 보았고 노인장도 한 번 확인했다고 않았수. 이미 확실한 거 아니요?"
노인은 그의 말에 주름이 깊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래, 정황과 목격자가 너무 확실했다. 당사자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시간만 늘어나고 그럴수록 이 문제로 모인 사람들의 불만과 반감만 커질 뿐이다.
"오래간만에 제대로 먹고 움직일 수 있게 되었는데. 빨리 밥이나 먹고 싶단 말입니다."
"쯧."
노인은 결국 혀를 차고 말았다. 역시 판은 여러모로 이런 일에 좋지 않았다.
"어쩔 수 없군. 재판은 오늘 저녁, 식사 후로 미루겠네."
노인의 말에 사람들은 대놓고 기뻐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환호하며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노인은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판을 보았다. 지금 모습을 보면 믿기지 않아도 판이 원래부터 저런 사내는 아니었다. 처음부터 저런 성격이었다면 이 상단에 동행조차 할 수 없었을 테니까. 나름대로 성실한 성격이었고 조금 문제가 되는 행동을 해도 대부분 장난으로 끝날만한 일들이었다. 문제는 어느 날부터였다. 그의 언행은 더 이상 장난으로 넘길만한 일들로 끝나지 않았고 불쾌함을 느끼게 했다.
다른 사람에게 시비를 걸어 싸움을 벌이는 일도 늘어났고 도나르와의 다툼은 이제 일상이 될 정도였다. 그나마 최근에는 부상을 입어 조용해진 것이 달가웠는데.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은 알지만 적어도 란투아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대체 어쩌다가 저리 되었는지."
노인은 한숨을 내쉬다 도나르에게 끌려가는 뜨루스를 보았다.
뜨루스가 끌려가 노인에게 재판을 받을 무렵. 시프는 소녀의 몸을 닦아주고 있었다.
"정말 많이도 저질러놨구나."
그저 보기만 해도 감탄이 나오는 소녀의 새하얀 몸에는 감출 수 없는 밤의 흔적이 가득했다. 발갛게 달아오른 이런저런 흔적들은 이 소녀가 잠든 사이 그 남자가 얼마나 괴롭혀댔는지 알 수 있을 정도다. 마음 같아서는 물을 한가득 받아 목욕이라도 시켜주고 싶었지만 물은 아주 귀한 것이라 이렇게 물에 적신 수건으로 몸을 닦아주는 것이 한계였다. 이런 일은 그녀가 직접 하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 시켜도 문제는 없었지만 시프는 굳이 이 일을 자처했다. 아직도 깨어날 생각을 하지 못하는 소녀의 몸을 조심스럽게 닦아주며 중얼거렸다.
"내가 이기적이지만 않았다면 아무런 상관이 없는 너까지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그 남자의 수작이라면 당해봤기에 알고 있었다. 이렇게 소녀를 잠재운 뒤에 몰래 강간하고 확실한 기회를 잡아서 일부러 깨우거나 깨어있는 상태에서 강간하여 정신적으로 고립시키고 주도권을 잡는 것이다. 이미 시프는 이 수법에 오랫동안 사로잡혀 있었다. 시프는 처음 자신이 깨어난 그날에 시작이었다고 생각했었지만 알고 보니 더 오래전부터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몸을 더럽혀져왔던 것이다. 직접 범해진 건 그때가 처음이었겠지만.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얼마나 괴로웠던가?
그 사실이 도나르에게 알려질까 봐. 그녀는 두려웠다. 스스로가 끔찍하게 느껴질 정도로 이기적인 생각. 그 죄책감 때문에 그녀는 이 일을 자처했다.
"미안해. 나는..."
이 소녀가 외부인인 만큼 그 일은 더욱 쉽다고 생각했겠지. 또한 그녀는 이 소녀가 외부인이기 때문에 외면하려고 했다. 이마저도 도나르라는 그녀의 약점을 손에서 놓아버린 뒤에야 할 수 있었던 일이다. 도나르를 놓지 못했다면 그녀는 아마도. 그 순간이었다.
"괜찮아."
잠들어 있는 소녀에게 전해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며 혼자서 읊조리던 그녀의 말에 소녀의 미성이 답해온 것은.
"아?"
시프가 놀란 마음에 퍼뜩 고개를 돌려 소녀의 얼굴을 보면. 분명히 잠들어 있었던 소녀가 눈을 뜨고 그 화사한 금빛으로 뚜렷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지 않은 소녀는 단언컨대 그녀가 지금까지 보아온 어떤 이들보다 아름다웠다. 어째서 가면으로 감추고 다녔는지 이해할 수 있을 만큼.
"깨, 깨어났니? 언제부터?"
"네가 자책할 때부터."
그저 자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했던 혼잣말일 뿐이었는데. 그 말을 전부 다 들었단 말인가? 때문에 그녀가 당황스러워하는 것도 잠시.
"내가 뭐 때문에 그런 소리를 했는지는 알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니."
시프는 자신이 이러는 이유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소녀가 자신을 위로해 주는 것이라 여기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소녀는 자신의 아랫배를 문지르며.
"아마도 이 느낌 때문에."
"...알고 있었니?"
"이미 겪어봤으니까. 이번에는 단지 누가 그랬는지 알 수 없었을 뿐."
그녀는 벨카의 말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남자가 이 소녀가 처녀가 아니었다고 했을 때. 그럴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저렇게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벨카는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데 어째서 그녀가 더 슬프게 느껴지는 것일까.
"범인은?"
"이미 잡았어. 이제 단주님께서 처벌을 결정하시면 될 거야."
"그가 어셔에게 손을 대지는 않았어?"
소녀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때마침 비워진 침대에 눕혀 놓았던 소년의 모습이 보였다. 당연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멀쩡한 상태였다. 남자가 벨카와 딱 붙어 다니는 어셔를 거슬려 하는 거 같긴 했지만 두들겨 패거나 상처를 낸 적은 없었으니까.
"그랬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아."
"그럼 됐어."
그녀의 말에 벨카는 다행이라는 듯 안도하는 모습으로 말했다. 정작 본인의 이야기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야기라도 들은 것처럼 행동했으면서.
"그럼 됐다니... 정말 그걸로 끝이니?"
시프는 그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그래도 어셔에게는 이야기하지 말아줘."
또 자책할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덧붙이는 벨카에 시프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프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이 그런 일을 당했을 때의 그 절망, 혐오, 공포와 슬픔을. 이 소녀라고 다를 리가 없을 텐데. 어떻게 곁에 있던 소년을 먼저 걱정할 수 있단 말인가?
"대체 이 아이가 너에게 어떤 의미이기에."
"내 모든 것."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돌아온 벨카의 대답에 시프는 이번에야말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단순한 연인이라 설명하기엔 너무나 이상한 아이들의 관계는 그녀에게 많은 의문을 주었지만 감히 물어볼 수는 없었다. 시프가 멍하니 벨카를 바라보는 사이 소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밤의 흔적이 가득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다가도 관심을 잃은 것처럼 시프에게 물었다.
"내 옷은?"
"아! 그건 여기 있어."
벨카의 물음에 정신을 차린 시프가 소녀를 보고 있어도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속옷부터 시작해서 차례대로 옷을 입어나갔다. 소녀의 옷은 간단해서 시간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결국 모든 옷을 입은 벨카는 잠시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져보더니 시프를 바라보았다.
"머리카락, 묶을 수 있어?"
시프는 홀린 듯이 소녀가 건네주는 머리끈 두 개를 받았다. 벨카의 모습은 현실감마저 멀어지게 만드는 힘이 있어서 시프는 별다른 의문도 말하지 못하고 소녀를 품에 앉히고 머리를 묶어주고자 먼저 머리를 빗어주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르륵 사르륵 조용히 머리를 빗는 소리만이 마차를 채우는 가운데 시프는 감탄했다.
"네 머리카락은 정말로 부드럽구나."
소녀의 붉은 머리카락은 약간의 곱슬기가 있었지만 손으로 매만지면 물이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듯 흘러내렸고 굳이 빗질을 하는 것이 헛수고로 느껴질 만큼 엉키는 느낌이 없었다.
"혹시 어떻게 관리하는지 알 수 있을까?"
그녀도 머릿결이 좋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었지만 소녀만큼 좋지는 않아서 방금 전의 일도 잊고 물어보고 말았다.
"딱히 관리라고 할만한 일은 한 적이 없어. 어셔가 가끔 빗어주기는 했지만."
"그럼 어셔에게 물어봐야 하려나."
소녀와 그런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시프는 쓰게 웃었다.
'나도 참 무슨 소리를 하는 거람.'
그녀는 저도 모르게 딴 생각으로 빠져버리고 만 것을 깨달았다. 어째서인지 그게 이 소녀가 의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묶는 건 어떻게 해줄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소녀의 조그마한 머리를 내려다보면서 물었다.
"양쪽으로 묶어 줘."
"그렇게 묶는 걸 좋아하는구나."
"어셔가 좋아하니까."
그런 느낌의 머리카락을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문데. 소녀가 바라는 대로 머리끈으로 머리카락을 묶어주니 원래부터 그녀를 위해 있었던 것처럼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머리를 풀어 놓았을 때는 성숙한 분위기를 풍기던 소녀가 확실하게 앳된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도 소녀의 아름다움과 특유의 분위기만큼은 감출 수가 없었다. 사라질 듯 사라지지 않을 듯 신기루와도 같은 아슬아슬하고 신비로운 분위기. 때문에 그 남자의 목표물이 된 것이었겠지. 다시 그 일을 떠올리고 시프가 우울해할 때.
"네 탓이라 자책할 필요는 없어."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쁜 건 그런 일을 한 사람이지. 네가 아니니까."
"그래도 나는!"
시프가 소리치며 벨카를 바라보면 어느새 돌아선 소녀의 금빛과 마주쳤다. 그 금빛을 직접 마주하고 있으니. 고작 자신보다 어린 소녀일 뿐인데도 도저히 어린 소녀를 상대하는 것 같지가 않아서. 말하는 것조차 조심스럽게 느껴졌다.
"...너를 외면했어. 그냥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내가 더럽혀졌다는 게 들킬까 봐. 모두가 나를 더럽다고 생각할까 봐."
그건 하나의 고해성사였다. 이 소녀에게 모든 걸 털어놓고 싶었다. 그녀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직접 벌해주기를 바랐다. 시프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도저히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내 이기심 때문에 너를 그 남자에게 갖다 바친 거나 마찬가지야."
그러니 제발 자신을 욕하고 벌해달라 빌며 벨카를 보았다. 소녀의 금빛은 여전히 평온했고 모든 것을 담은 듯 혹은 아무것도 담지 않은 듯 무심한 표정으로 조용히 손을 들어 올렸다. 시프는 소녀가 뺨이라도 때릴 것이라 생각하며 눈을 감았지만 예상했던 고통은 찾아오지 않았다. 대신 찾아온 것은 그녀의 머리를 토닥이는 작은 손길이었다.
"나는 이미 이야기했어. 괜찮아."
눈을 뜨고 바라본 소녀의 금빛은 여전히 무심해 보였지만 그 목소리에는 자애가 깃들어 있었다. 정말로 도저히 어린 소녀의 것이라 생각할 수 없는 눈빛과 미성. 정말로 같은 인간이 맞기는 한 것일까?
"인간이란 본디 그러한 존재니까. 누구도 너를 함부로 욕할 수 없어. 지나친 건 좋지 않지만 이기적이지 말라고 강요하는 건 너무 가혹하지 않을까."
상냥함으로 가득한 그 손길에 시프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