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0화 〉기만. (40/220)



〈 40화 〉기만.

판과 함께 노인에게 불려갔던 도나르는 노인의 잔소리를 떠올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판과 도나르의 싸움은 상단 내에서 누구라도 누가 먼저 잘못했는지 짐작할  있을 만큼 퍼져있는 상태다. 그만큼 그와 판은 많이 다투었고 많은 사람들이 보았으니까. 그래서 지금 그는 노인의 잔소리에서 조금  일찍 벗어나 그의 친구, 샬비와 함께 저녁과 야영을 준비 중인 사람들 사이를 걷고 있을  있는 것이다.

"그 욱하는 성격 좀 죽여보라고 했잖아."
"세상에 이젠 너까지 잔소리를 하는 거야? 좀 봐줘. 판, 그 자식의 행태는 모르는 사람이 없잖아."

그는 샬비의 잔소리에 기겁하며 부탁했다. 안 그래도 그는 노인, 에르미스 씨에게 훈계를 받느라 지친 몸이었다.


"그 자식은 어르신이 뭐라고 하든 귓등으로도 안 들어."

그와 함께 훈계를 듣던 판은 노인의 말을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한술 더 떠서 귀를 파며 무시하는 행동 때문에 도나르가  주먹을 날릴 뻔했지만 노인에게 그 모습이 딱 걸려 잔소리만 늘었을 뿐이다.


"그 자식 말에 반응하면 손해 보는  너뿐이라고 했었잖아."
"그래도 도저히 참을 수 없는데 어쩌겠냐."

그는 실수를 가장해 시프의 품에 안기려건 판의 모습을 떠올리고 주먹을 꽉 쥐었다. 하필이면 그녀에게 몹쓸 짓을 하려 하다니. 그렇게 실컷 때렸는데 지금도 생각만 하면 열불이 터졌다.

"쓸데없이 맷집만 좋아서."


판은 도나르가 검만 안 휘둘렀을 뿐이지 갑옷을 입은 상태에서 무자비하게 때렸는데도 정작 상처 같은 건 얼마 되지 않았다.


"그건 그래. 판  자식이 싸움을 잘하긴 했지만 그렇게 일방적으로 두드려 맞았는데도 실실 웃고 있을 때는 섬뜩하지."


샬비도 그의 말에 공감했다. 그래, 판은 그가 아무리 열이 받아서 두드려 패도  맞았다 싶으면 아무렇지 않게 자리에서 털고 일어났다. 보는 사람을 열받게 만드는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으면서. 아무리 맞아도 소용이 없다는 식의 조롱 같은 것은 아니었다. 무언가  근본적으로 다른 느낌의 비웃음이라 더욱 꺼림칙한 비웃음이다. 때문에 다시 열이 받은 도나르가 그를 두들겨 패는  이제 흔한 일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마차를 향해 걷고 있을 때.

"야! 싸움 났어!"
"뭐? 누구랑 누가?"
"로기랑 이번에 새로 온 애래!"

아이들이 신난다는 듯이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온 것은.  소리에 설마 하는 심정으로 도나르와 샬비는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서로 볼  있는  공통적으로 쓰고 있는 투구뿐이었지만 그것이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그들은 서로의 생각을 눈치채고 아이들이 달려간 곳을 뒤쫓았다. 싸움이라니 이번에 새로 온 아이라면 잠들어있는 어셔의 친구를 제외하면 어셔 본인밖에 없다. 그들은 어셔를 걱정하며 달려왔지만 그들은 볼 수 있었다.

"캬악! 너 당장  일어나? 어딜 엿보고 그냥 넘어가려고?!"

금발의 소년이 자신보다 덩치가  소년의 멱살을 붙잡고 흔들며 성난 드래곤처럼 날뛰는 모습을. 더욱 놀라운 건 어셔가 멱살을 붙잡고 있는 소년, 로기는 이미 정신을 잃고 축 늘어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다만 그의 멱살을 잡고 있는 어셔는 그걸 기절한 척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같았지만. 때문에 싸움 소식에 신나게 몰려들었던 아이들은 놀란 눈치였다. 주변에서 구경하는 사람들도 그의 기세가 워낙 사나워서 말릴 엄두를 내지 못하는 모습이다. 그 광경에 샬비가 먼저 감탄의 소리를 내었다.

"와우, 농담 삼아 드래곤 같다고 했지만 진짜 드래곤 같네."
"그러게. 설마 로기를 이겨먹을 줄이야."

도나르 역시 순수하게 감탄했다. 로기는 장난기가 심한 악동이긴 해도 자신들의 나라에서 나름 유망주로 불리던 소년이다. 아무리 로기가 진심으로 상대할 마음이 없거나 방심해도 또래의 아이가 쉽게 이겨먹을만한 상대가 아닌데. 대단한 녀석이라고 생각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우리 저거 말려야 하지 않나?"
"아."

도나르는 샬비가 잊었던 사실을 떠올린 것처럼 말했을 때야 뭐 하러 달려왔는지 생각해냈다. 원래는 로기가 이기고 있을 거라 생각하고 로기를 말리러 왔는데 정 반대의 상황에 싸움을 말리러 왔던 것조차 잊고 있었다. 겨우 원래 목적을 떠올린 그들이 어셔를 말리고자 했을 때.

"어셔."

곱디고운 소녀의 미성이 들려왔다. 딱히 그 목소리가 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감정이 담기지 않은 것처럼 평이한 목소리. 그럼에도 그 미성은 사람들이 웅성이는 소리 사이에서도 기이할 정도로 그들의 귀에 똑똑히 들려왔다. 모두가  맞추기라도 한 듯 말을 멈추자.


-또각또각

작은 구두 소리가 마차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나타난 소녀의 모습에 사람들은 잠시 숨을 멈췄다. 그건 도나르와 샬비도 예외가 아니었다. 제일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고운 색감의 붉은 머리카락, 단순히 피나 불꽃을 떠올리게 만드는 섬뜩한 색감도 타오르는 듯한 색감도 아니었다. 굳이 고른다면 선홍빛의 꽃 같은 색감. 가녀린 몸을 검붉은 원피스로 감싼 아름다운 소녀는 새하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돼."


소녀는 그들이 들었던 목소리의 주인이라 증명하는 고운 미성으로 로기의 멱살을 붙잡고 흔들던 소년을 만류했다.

"하지만 이 녀석이."
"어셔."

소녀가 그의 이름을 다시 한번 부르자 어셔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로기의 멱살을 놓았다. 로기는 여전히 기절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대로 땅에 드러누워버린 꼴이 되었다.


"뭐야, 진짜로 기절한 거였어?"


그는 그것을 이제 깨달았는지 황당한 눈치였다.

'아니, 그 녀석을 쓰러트린 네가 제일 이상해.'


도나르는 그런 말이 턱 끝까지 올라온 것을 꾹 눌러 참았다. 노인에게 저 아이들이 숲의 주민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그는 혹시 숲의 주민들은 기본적으로 힘이 엄청 강한 게 아닐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배는 괜찮아? 문제라도 있는 건 아니래?"
"딱히 문제는 없는 것 같아. 단지 수면향과 약의 부작용 같대."


어셔의 걱정에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 의사 아저씨, 믿을만한 거지?"
"아마도."

그리고 안심하라는 듯 로기를 쓰러트리느라 흐트러진 소년의 옷과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정리해 주었다.

"그보다는 어떻게 된 일인지 더 말해줘. 아까 이야기하다 말았으니까."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던 도나르는 소녀가 불안한 듯 주변을 둘러보는 것이 보였다. 어셔도 그녀의 행동에 주변에 사람들이 있다는 걸 뒤늦게 눈치챈  같았다.


"어, 언제 이렇게?"

그렇게 상황은 끝이 났다. 얼마 후. 그들은 저녁을 먹고자 노인의 마차 근처에 모여들었다.

"그러니까 그 녀석의 친구라고 했었지?"

도나르가 벨카에게 말을 걸자 그녀는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인지 흠칫 몸을 떨면서 어셔의 곁에 붙었다. 이 소녀가 쓰러지는 바람에 어셔가 이곳에 도움을 청했다던가. 그는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고 알만한 이들은 다 알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셔만 알고 있었다.

"너무 가까이 오지 마세요. 벨카가 무서워하잖아요."
"내가 뭐 잘못이라도 했냐? 너무하네."


도나르가 섭섭하다는 듯 이야기해도 어셔는 단호했다.

"벨카가 무서워하니까. 이유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너무 과보호하는 거 아니냐?"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도나르도 어셔가 왜 벨카를 과보호하고 있는지 이해했다. 그 또한 이번에 소녀의 모습을 제대로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으니까. 품이  검붉은 원피스로 몸을 감싸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도저히 감출 수 없는 가녀린 체구. 독특한 빛깔의 붉은 머리카락, 검붉은 원피스와 대비되는 창백하게 느껴질 정도로 새하얀 피부가 한 떨기  같은 가련한 감상을 주는 소녀.  속삭이는 듯한 미성까지. 가면으로 얼굴을 숨기고 있음에도 보는 사람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지나치게 매력적인 소녀였다. 때문에 벨카라는 소녀는 사람들 사이에서 빠르게 유명해졌다.

어려 보이는데도 뭇 남성들을 설레게 만드는 모습은 그렇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남자아이들은 물론 숫총각이나 임자 있는 몸들도 꼭 한 번씩은 힐긋힐긋 눈이 돌아가는 모습이 보일 정도다. 그중에 여자들도 제법 있다는 것이 놀랍다면 놀랍달까. 그러나 소녀는 남자들에게 별로 좋지 않은 추억이라도 있는지 꺼려 하는 것 같았다. 가면 속 소녀의 얼굴이 궁금한지 남자들이 다가오면 같이 있는 어셔에게 바짝 붙으며 거부감을 표했고 그럴 때마다 어셔가 으르렁거렸다. 그 기세가 워낙 사나워서 다른 남자들은 접근도 못하고 있다.


"저 정도면 그냥 드래곤 아니냐?"
"드래곤이지."

샬비가 그의 곁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정도면 보물을 건드리려 하는 인간을 경계하는 드래곤이었다.


"마법이라도 쓰면 인간인지 드래곤인지 구분도 못할걸?"
"다 들리거든요!"
""이크.""

그래도 도나르 정도면 샬비와 함께 최대한 정중하게 거부당한 편이다. 적어도 같은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었으니 생각보다 섭섭하지도 않았다. 소녀가 특별히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는데도 제일 심하게 쫓겨난 로기에 비하면야. 어셔는 슬쩍 소녀를 훔쳐보는 사람들을 경계하는 것을 멈추지 않고 도나르에게 물었다.


"그런데 아저씨는 드래곤을 본 적 있어요?"

그는 샬비와 도나르가 대화하는 뉘앙스를 듣고 놀림당한다는 것을 느끼고 화를 냈었지만 드래곤에 대한 것은 확실히 궁금했다. 지하의 동굴 속에서 눈이 보이지 않는 이상한 갑룡을 본 기억도 있거니와 늑대들의 동굴 속에서 보았던 벽화에도  드래곤이 있었으니까.

"직접 보기만 했으면 다행이게? 가까이서도 질리도록 봤다. 어우, 징그러운 것들."


도나르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징그럽다는 듯 치를 떨었다.


"일단 생긴 건 그냥 날개 달린 도마뱀인데 말이야."
"크기가 사람만큼 크다는 것만 빼면 그렇지."


도나르의 설명에 샬비가 덧붙였다.

"잠깐만요. 드래곤이 고작 그 정도 크기밖에 안 된다고요?"

어셔가 기억하는 드래곤은 무척이나 커다랬다. 자신이 그것의 손톱보다도 작게 느껴졌었으니까. 동굴의 벽화에서도 그 드래곤을 무척이나 크게 그려 놓았었으니 그만의 착각은 결코 아니었다.

"의외겠지만 보통은 그래. 대부분의 드래곤은 사람 크기를 넘지 못해. 가끔씩 집채만 한 것들이 있긴 하지만 그건 드문 일이고."

하지만 도나르는 오히려 큰 것이 드물다고 말했다.

"게다가 녀석들은 성질도 더러워서 잘못 건드리면 뵈는 게 없어져서 달려들거든."

안 그래도 지랄맞게 강한 것들이 앞뒤 가리지 않고 그런 식으로 달려들기 시작하면 피해가 만만치 않게 커졌다면서 그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어셔는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보았던 드래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느낌의 설명에 고민하면서도 주변에 얼쩡거리던 남자아이 하나를 쫓아냈다.

"그리고 반짝이는 물건이나 보물 같은 걸 광적으로 좋아해서. 자기 둥지에 모아두고 죽어도 안 뺏기려 하지."


그의 말로는 만약 드래곤과 마주치거나 싸우는 중에 성질을 건드리지 않았는데도 드래곤이 집착한다면 드래곤이 마음에 들어 하는 물건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니 냉큼 그런 걸 찾아 던져줘서 목숨을 부지하는 편이 좋다고 한다. 만일 드래곤에게 물건을 도둑맞는다면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이상 영원히 못 찾는다고.

"그거 그냥 깡패잖아요."
"그래! 깡패지!"


역시 그가 보고 느꼈던 드래곤의 느낌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이야기였다. 그가 보았던 드래곤은 크기도 엄청나게 크고 무섭게 생겼었지만 그 분위기가 포악하기보다는 온화한 느낌이었으니까. 때문에 이질감을 느끼던 어셔였지만 이어지는 도나르의 말에 관심이 돌아갔다.


"말도 마. 심지어 놈들은 마법까지 사용하는데. 상대하는 입장에선 죽을 맛이라고."
"마법이요?"

그러고 보니 그랬다. 드래곤들은 마법을 사용할 줄 알았던 것이다. 마법이라는 단어에 어셔의 눈이 빛나자 도나르는 그가 기대한 것과는 다른 이야기가 될 것을 예상하고 쓰게 웃었다.


"그 녀석들은 마법을 입에서 뱉어내거든."
"네?"

어셔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서 되물었다.


"말 그대로 뱉어내. 어떤 놈은 불을 뿜고 또 어떤 놈은 차가운 숨을 내뿜거나 독을 뿌리는 녀석도 있지."

그런 거랑 덩치가 큰 것만 빼면 성질 더러운 날아다니는 도마뱀들일 뿐이다. 도나르는 어셔를 실망시켜 미안했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놈들이 이렇게 단순한 마법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의 고향은 일찌감치 멸망했을 테니까.

"뭐, 특별한 예외가 셋 있지만."

도나르가 기억하기로 드래곤이 몬스터들의 왕이라고 불리긴 하지만 솔직히 제대로 준비만  상태라면 아예 상대하지 못할만한 것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단 세 마리, 드래곤 중에서도 가장 크고 가장 강한  마리의 드래곤만큼은 예외였다. 그것들은 수많은 드래곤들이 습격해도 버텨낼 수 있는 나라를 단 한 마리만으로도 멸망에 이르게 할 수 있는, 살아있는 천재지변에 가까운 존재였다.


"혹시 그 드래곤들도 본 적 있어요?"
"야, 그걸 한 번이라도  적이 있다면 나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걸?"

다행히 그놈들이 직접 나서는 경우는 드물다. 놈들 중에 한 마리라도 직접 나서는 순간. 그때는 정말로 나라의 멸망을 각오해야 한다. 실제로 놈들 중 하나가 나타났을 때의 일들은 그의 고향에서 하나같이 모두 대재앙으로 기록되어 있다. 최근에는  번쯤 나타나 달라고 빌고 싶긴 했었지만.


"어쨌든 드래곤과 사람이 사용할  있는 마법은 달라. 심지어 사람의 마법은 어떻게 사용할  있는지 불분명하기까지 하고."

의외로 마법에 대한 정보는 많다. 어떻게 해야 마법을 발동할  있는지 상세하게 적힌 책들이 어딜 가나  권쯤은 있을 정도다. 문제는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선 알  없는 특별한 조건이 필요한데. 어떻게 해야  조건을 충족시킬  있는지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설령 그 조건을 충족한 사람이라도 어째서 자신이 조건을 충족하는지 모른다고 할 정도로 그 누구도 조건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에이, 그게 뭐예요."


어셔는 그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혹시 드래곤들이 마법을 사용하는 이야기를 듣고 따라서 마법을 사용할  있는 방법을 알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었는데. 용들이 마법을 사용하는 방법은 생각보다  원시적이고 별로였다. 게다가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선 아무도 모르는 특별한 조건이 필요하다는 건 그도 아는 이야기였다. 그나마 새로 알게  사실이 있다면 특별한 드래곤들의 존재뿐이다.


어쩌면 그가 보았던 드래곤이 그중  마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것만으로 실망스러운 감정까지 달랠 수는 없었다. 마법을 사용하는 방법이란 아직도 요원했다. 벨카가 그런 어셔를 위로하듯 토닥여주었다.


"자, 이야기는 그쯤하고 식사를 하는 게 어때요?"


드래곤과 마법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시프가 커다란 냄비를 들고 노인과 함께 나타났다.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소리와 함께 구수한 향이 코를 타고 흘러 들어와 주린 배를 자극했다.


"오오, 웬일이래! 오늘은 물까지 사용한 거냐?"

도나르가 어셔와 대화하던 것도 잊고 흥분한 목소리로 시프에게 말했다.


"단주님께서 특별한 손님도 있으니 힘써 달라 부탁받았으니까요."

시프는 그에게 싱긋 미소 지으며 힐긋 어셔 쪽을 보았다. 혹시 특별한 손님이라는 게 그들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어셔가 얼떨떨하게 시프와 노인을 바라보니 그가 입을 열었다.


"다행히 친구가 무사히 깨어난 모양이구나. 어디 더 아프지는 않고?"
"네, 의사 아저씨도 이제 이상이 없다고 하셨어요."


그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노인은  소녀를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네가 어셔의 친구로구나. 벨카라고 했었지?"
"...."


그녀는 여전히 어셔의 곁에서 말을 걸어온 노인을 가면 너머로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편하게 식사나 하면서 이야기하자꾸나."

소녀가 낯을 많이 가리기 때문이라지만 자칫 버릇이 없어 보일 수도 있는 행동에 어셔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노인을 바라보면 다행히 그는 기분이 상한 것 같지는 않아서 겨우 안심할  있었다.

"오늘은 포식 좀 하겠는데."
"랍스카우스로 기뻐하는 너도 참 이상해."


도나르가 시프가 건네주는 그릇을 받으며 이야기하자 샬비가 장난스럽게 타박하며 그도 그릇을 받았다.


"뭐, 어때. 지금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것 중에서는 제일 맛있는 음식이잖아?"
"요리사 솜씨 덕분이 아니겠어?"
"아무리 그렇게 칭찬해도 콩고물 같은  안 떨어져요."

그들의 화기애애한 대화가 이어지는 가운데. 노인도 시프에게 그릇을 받으며 이야기했다.

"그래서 너희는 어떻게 하기로 했니?"

노인과의 이야기는 이미 벨카에게 이야기했었다. 동행할지 아니면 헤어질지 그녀에게 물어보고 결정하기로 했다고. 혹시 자신이 짐을 떠넘긴 탓에 벨카가 부담스럽지는 않을지 걱정했었지만.


"란투아로 간다고 하셨죠?"
"그렇단다."

낯을 가리는 소녀를 대신해서 어셔가 노인과 대화를 하고 있을 뿐. 벨카는 이미 이들과 동행하자고 결정한 후였다. 혹시 원래 목적지와 다른 곳은 아니냐고 거리가 너무 멀어져서 어쩔 수 없이 동행하는  아닌지 물어보기도 했었지만 다행히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이들과 함께하는 것이 어셔가 위험하지 않다고 이야기하면서.


"그, 정말로 실례가 안 된다면 란투아까지 동행해도 괜찮을까요?"

그의 말에 노인이 고대하던 대답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만족스럽게 웃었다.


"물론 환영이란다. 자, 어서 받거라."

그리고 그는 조금 떨어져 앉아 있는 그들에게 그릇을 건네주었다. 어째선지 노인이 더 안심한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가 내미는 그릇을 건네받으니. 조금은 희미해졌던 구수한 냄새가 그릇에서부터 올라왔다. 어느새 차가워진 공기에 식어있던 손을 따뜻한 그릇이 덥혀주었다. 그릇 안을 보면 고기나 야채 같은 것들이 뒤섞인 걸쭉한 갈색 스튜 같은 것이 보였다. 솔직하게 말해서  식욕을 자극하는 모습은 아니었지만.


"시프! 한 그릇 더!"
"작작  처먹어!"


불꽃이 피어오르는 화로를 사이에 두고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왁자지껄한 소리와 국물이 만들어내는  따스한 감각이 마음에 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