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방랑자들.
떠오르는 의식 속에서 어셔가 가장 먼저 느꼈던 것은 지독한 두통과 코를 찌르는 듯한 역한 냄새였다. 마치 자신의 입안에 직접 머금었던 것처럼 독하고 어지러운 냄새. 그것을 멀미 때문이라 여기고 그는 지친 숨을 내쉬었다.
"으으."
"조금 괜찮니?"
어셔가 깨어나는 낌새를 느꼈는지 시프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여전히 그를 괴롭히는 매스꺼움과 숨 막히는 답답함에 어셔는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도 달리고 있는 거예요?"
"곧 있으면 멈출 것 같긴 하지만, 확신하지는 못하겠어."
시프의 말로는 마차를 몰고 있는 마부들이 밖에서 활동할 수 있을만하다고 판단하면 그제야 마차를 멈추고 캠프를 설치하여 밤을 보낼 준비를 한다고 한다.
"마부 아저씨들은 안 쉬어요?"
아직도 어지럽고 괴로웠지만 지금까지 마차를 몰고 있다는 마부들의 이야기에 감탄과 걱정이 뒤섞여 물어보았다. 창문으로 기울어 새어들어오는 햇빛의 빛깔을 보면 이미 해가 저물어 가는 시간이다. 마차가 출발했을 때. 해가 떠오르는 시간이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쉬지도 않고 달렸다는 소리였다.
"아주 안 쉬는 건 아니야. 어차피 앉아 있는 게 대부분이고 자기네들 말로는 더운 것보다 지루한 게 흠이라던데."
하는 일도 마차를 끄는 힐디스비니의 체력을 생각해 속도를 늦출 땐 신호를 준다던가 길을 따라가도록 방향을 정해주는 것 빼고는 할 일도 없다고.
"마부들은 대단하네요."
엄청 더울 텐데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오랫동안 가만히 있기까지 하다니. 어셔는 자신이 한다면 도저히 그렇게는 못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혹독한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니 당연하지 않나 싶지만."
시프의 말을 들어보니 마부가 되려면 특별한 훈련까지 받아야 하는가 보다. 그는 자신이 깨어났음에도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 마차에 이대로 다시 잠들어야 하는지 고민할 때였다.
"이제 세우려나 보네."
마차가 천천히 속도를 늦추더니 지금까지 쭉 일직선에 가깝게 달리던 것과는 다르게 옆으로 움직이는 것이 느껴진 건. 그렇게 계속 느려지던 마차는 이내 잠깐 기울어지는 듯한 느낌과 함께 움직임을 멈추었다. 어셔는 녹초가 된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 하루 종일 자고 있었던 거 같은데. 피로가 풀리기는커녕 오히려 잔뜩 쌓인 기분이었다. 지금 그가 가장 원하고 있는 건 바깥의 공기였다.
"지금 내려도 되는 거죠?"
"잠깐만!"
마부가 문을 열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며 시프가 소리쳤지만 어셔는 당장 이 갑갑한 마차에서 내려서 신선한 공기를 들이쉬고 싶었다. 멀미가 시작되면서 느껴지던 역한 냄새가 너무 심하게 느껴져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결국 문을 여는 순간. 고여있던 마차 안의 공기가 빠져나가고 후덥지근하지만 신선한 공기가 들어오는 느낌과 함께.
-까앙!
"악!?"
단단한 철 같은 것에 부딪혀 맑게 울리는 소리와 함께 이마에 가해진 충격에 찔끔 눈물을 흘렸다. 그래도 갑갑한 마차에서 벗어나 신선한 공기를 들이쉰 어셔는 뒤늦게 제정신으로 돌아와 상황을 파악했다. 그의 앞에는 당황한 눈치의 마부가 자신의 가슴팍에 부딪힌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머리를 짚고 있는 시프와 숨을 죽여 웃고 있는 뜨루스의 모습은 덤이었다.
"하하하하하! 그래서 샬비한테 사과하고 있었던 거냐?"
그리고 마차가 멈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아와 그 장면을 본 도나르의 반응이다.
"제발 그만 좀 웃으세요!"
도나르의 놀림조에 어셔가 발끈하며 소리쳤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되려 옆의 마부에게 어깨를 걸치며.
"그래, 샬비. 저 녀석의 박치기는 어땠냐? 엄청났지?"
"오, 엄청나기만 했을까? 드래곤 대가리에 정통으로 부딪힌 기분이었어."
끼리끼리 논다던가. 갑옷 위에 붉은 모래색 천을 두르고 있는 것을 제외하면 똑같은 차림의 마부도 도나르와 함께 웃으며 과장스럽게 말했다. 이미 마차에서 내리면서 멀미는 거의 사라졌고 아직 남아있는 멀미의 후유증은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다. 어셔는 부끄러워 얼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그들의 사이에서 얼마나 놀림당하고 있었을까?
"아! 시끄러워! 자는데 방해되잖아!"
마차의 안쪽, 환자들 사이에서 거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오며 웃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지워버렸다. 도나르와 샬비가 그를 놀리던 것이 멈춘 것은 좋았지만 어셔는 그 목소리에 놀라 목을 움츠렸고 시프는 인상을 잔뜩 찌푸렸으며 뜨루스는 겁을 먹은 것처럼 침대 뒤에 쭈그려 앉아 숨을 죽였다. 그는 본능적으로 그들이 이 목소리의 주인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판, 일어난 거냐?"
그 남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름을 부르는 도나르의 목소리가 유난히 낮게 들렸다.
"끄으, 도나르냐? 환자들만 있는 곳에 잘도 오는구만."
그는 여태까지 침대에 계속 잠들어 있던 환자들 중 한 명이었다. 하필이면 맨 끝, 벨카의 바로 옆 침대에 있었던 탓에 어셔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유난히 덩치가 커 보이는 그는 약에 취한 듯 비틀거리며 일어나더니.
"시프가 이곳에 자주 간호하러 와서냐?"
"윽! 저리 비켜!"
그는 몸을 못 가누는 척 근처에 있던 시프의 품에 쓰러지듯 얼굴을 파묻으려 했다. 하지만 시프가 기겁하며 자리를 비키자 그는 혀를 차며.
"까탈스러운 여자 같으니. 저번에 습격하는 놈들을 다쳐가면서 물리쳐 줬는데. 한 번쯤은 대줘도 되잖아?"
"하, 당신만 고생한 것처럼 이야기하지 마. 그리고 죽는 한이 있어도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시프는 더러운 것을 피하듯이 일어나 뜨루스가 숨어있는 곳을 한심하다는 듯이 째려보고 마차를 빠져나가버렸다. 그런 시프의 모습에 혀를 차던 남자는 곧 기분 나쁘게 웃으며.
"아니면 네 덜떨어진 친구 때문이냐?"
"흐익?!"
그는 뜨루스가 숨어있던 곳에 굳이 찾아가서는 쿵쿵 노골적으로 발을 크게 구르며 위협했다. 뜨루스가 겁을 먹고 덜덜 떨자 그는 낄낄 비웃었다.
"너를 치료해 준 녀석이다. 조금이라도 예의를 차리지그래?"
도나르가 무언가를 잔뜩 억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남자가 시프에게 우연을 가장해 안기려 했을 때부터 화가 나 보였지만 샬비라는 마부가 말리고 있어서 간신히 참은 것 같았는데.
"하, 이 녀석은 의사잖아?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뭐? 아이고 고맙다고 해야 해? 이런 재주 하나라도 없었으면 중간에 버렸을 거야."
"이 자식!"
결국 참다못한 도나르가 뜨루스를 괴롭히던 그에게 다가가 멱살을 잡았지만 그의 비웃음 섞인 조롱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때리려고? 때려봐! 환자를 때려잡네! 잡아!"
그건 보고 있는 이들마저 욱할 정도로 재수 없는 모습이었다. 샬비가 그를 말리고자 다가갔지만 이미 도나르의 주먹은 휘둘러져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그 남자를 때린 후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일방적인 폭력이었다. 그야 남자는 갑옷도 입지 않은 상태였고 환자였는데. 도나르는 갑옷을 입고 있었으니까. 허리춤에 있는 칼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최소한으로 남은 그의 인내심 덕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보다 괜히 갑옷을 입고 있던 것은 아니었는지 도나르는 싸움을 잘했다. 그것도 엄청.
아이들끼리 싸우면 서로의 머리채나 옷 같은 걸 붙잡고 먼저 놓으라느니 싫다느니 하는 자존심 싸움만 하다가 어른들이 찾아와 말리면 못 이기는 척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화해하는 게 전부였는데. 그는 척 봐도 각이 잡힌 동작으로 확실한 타격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 싸움에 비하면 통쾌할 정도였다. 판이라는 남자도 첫인상부터 영 꽝이어서 맞고 있는 모습이 거북할 정도는 아니었고. 하지만 어셔는 그들이 싸우고 있는 곳 근처에 있는 환자들의 모습을 보고 불안해졌다.
혹시라도 근처에 있는 소녀에게 피해가 갈까.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어셔의 뒤, 마차의 문에서 앳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여기 싸움났, 케엑!"
흥미로운 걸 발견한 것처럼 들떠있던 소년의 목소리는 있으면 안 될 것을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끊어졌다.
"어? 너는."
"너! 네가 왜 여기 있어?!"
그 소년은 어셔에게 발을 걸어 넘어트렸다가 호된 꼴을 당했던 소년, 로기였다. 서로의 모습에 그들이 당황하고 있으니 노인의 호통소리가 들려왔다.
"환자들이 있는 곳에서 이게 무슨 소란인가?!"
"어르신."
도나르는 주먹질을 멈추며 남자를 놓았고 맞고 있던 남자, 판은 킬킬 웃었다.
"아이고. 노인장. 여기 애먼 환자를 패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차 벽에 기대어 앉은 판의 모습을 본 노인은 인상을 찌푸렸다.
"쯧, 또 자네인가? 둘 다 따라오게."
그렇게 두 사람은 노인에게 불려갔고 샬비는 그들의 뒤를 따라가버렸기 때문에 마차에 남은 사람은 잠들어 있는 환자들을 제외하면 뜨루스와 어셔, 그리고 로기뿐이었다. 잠깐 어색한 분위기가 맴돌았지만 어셔가 먼저 입을 열었다.
"도나르 아저씨랑 그 아저씨는 맨날 싸워?"
"어? 응, 저렇게 주먹질까지 하는 건 드물지만 대부분 판 아저씨가 시비를 걸어서."
"그렇구나."
그리고 다시 침묵. 아무래도 첫 만남이 영 좋지 않았으니 더 어색했다.
"아, 진짜! 그런데 넌 어디서...!"
그 어색함을 참지 못했는지 로기가 소리치며 뭐라 말하려 했지만 어셔는 이미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벨카!"
그의 눈에 나비의 여린 날갯짓처럼 속눈썹을 파르르 떨면서 벌꿀처럼 투명하고 달콤한 금빛을 드러내는 소녀의 모습이 들어왔으니까. 어셔는 그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달려들듯 그녀에게 안겼다.
"어셔."
"미안해! 나는 네가 무리하는 것도 모르고!"
울먹이며 사과하는 그의 모습에 소녀는 잠이 덜 깬 상태에서도 곤란하다는 듯이 쓴웃음을 지으며 그를 마주 안고 살며시 토닥여주었다. 마치 부서지기 쉬운 공예품을 보는 것으로는 도저히 만족하지 못해 조심스레 어루만지듯 울지 말아 달라 애원하듯. 그 언제나처럼 애정이 가득한 손길이 너무 좋아서 어셔는 그 광경에 시선을 빼앗긴 이들이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그보다 여긴?"
"그게 벨카가 쓰러져 버려서. 지나가던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하다가..."
그가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벨카에게 이야기하고 있을 때였다.
"야, 너희들끼리만 이야기하지 말고 설명 좀 해주지?"
어딘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로기가 끼어든 것은.
"뭘?"
때문에 벨카와 이야기가 끊겨버린 어셔가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그는 짜증 난다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도 힐긋 소녀의 눈치를 보았다. 그 시선에 벨카가 고개를 기울이니 로기는 언뜻 붉어진 얼굴로 그에게 속삭였다.
"쟤는 누군데?"
"벨카?"
"그래!"
로기는 어셔와 친한 사이로 보이는 벨카를 마주한 순간부터 빠르게 두근거리는 심장을 느꼈다. 보는 것만으로도 꿀처럼 달콤한 감상을 주는 어여쁜 소녀의 모습은 소년의 마음에 너무나 치명적이었다. 게다가 몸이 좋지 않은지 병약한 인상에도 제 또래의 남자애를 애정 어린 모습으로 감싸주는 자애로운 모습에 소년의 마음은 함락되어버리고만 것이었다. 바야흐로 앓는 일만이 남은 첫사랑의 시작이었다.
"내가 왜 너한테 말해줘야 하는데."
내 발이나 걸어 넘어트리려 했으면서. 그런 소년의 심정을 알 리가 없는 어셔는 그런 그의 모습이 이상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로기는 그의 말에 낭패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는 것 같더니.
"내가 여기 얼마나 있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너희 같은 애들은 처음 본다고."
"중간에 얻어 탄 거뿐이야."
"그러면 더 이상 하지. 이 주변에는 사람이 살만한 곳도 없단 말이야."
어셔는 꼬치꼬치 캐묻는 그가 슬슬 귀찮고 짜증 났다. 설명을 하려면 못할 것도 없었지만 왠지 로기가 벨카를 바라보는 시선이 거슬려서 굳이 시간을 들여서 설명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왜 너한테 그런 걸 설명해 줘야 하는데?"
"그건!"
본인도 변명이 떠오르지 않는지 말문이 막힌 그의 모습을 보면서 어셔는 무시하기로 결정하고 고개를 돌렸다.
"에이씨!"
로기는 결국 열이 받았는지 그대로 쿵쿵 발을 구르며 마차를 나가버렸다. 마음 같아선 벨카에게 직접 말을 걸어보고 싶었던 로기였지만 안타깝게도 가슴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쉴 새 없이 두근거리는 심장인데 소녀에게 직접 말을 걸기라도 했다간 펑 터져버릴 것 같았다. 게다가 하필이면 그 소녀와 제일 친한 상대와의 첫인상이 최악이라니. 로기는 우선 물러나서 나중에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쟤는 대체 뭐가 문제였던 걸까?"
그의 예상대로 어셔는 로기를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이상하고 재수 없는 녀석이라 생각했다. 그러다 어셔가 다시 벨카를 보면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의 아랫배를 만지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무언가 잘못되기라도 한 것일까?
"배가 아파?"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걱정스러운 마음에 물어보자 확신하지 못하는 듯 애매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런 벨카의 말투에 익숙한 그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그럼 의사 아저씨에게 말해볼까?"
"의사?"
"응, 저기."
그들의 시선은 지금까지 조용히 숨어있던 뜨루스에게 향했다. 그는 판이라는 남자가 일어나 소란이 벌어지며 숨었던 자리에서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머리만 빼꼼히 내밀고 있었다. 어딘가 모자라 보이는 어른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겁까지 많은 걸까. 지금까지 계속 의사 일을 하고 있었다는 것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의사 아저씨?"
"...."
어셔가 정신이 나간 것처럼 멍 때리고 있던 그를 불렀지만 반응하지 않고 이쪽만 보고 있다. 설마 너무 무서워서 정신이라도 나가버린 걸까?
"의사 아저씨!!"
"우왓?! 부, 부부, 불렀니?"
황당한 심정으로 다시 소리쳐 부르자. 그제야 반응하는 그의 모습에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게다가.
"끼고 있던 반지는 어디로 갔어요?"
"바, 반지? 무슨 반지... 아, 시, 실수로 떨어트렸나 보다. 나중에 찾지 뭐."
자신의 물건도 쉽게 잃어버리는 이 사람을 정말 믿어도 되는 걸까? 고민하면서도 말했다.
"벨카가 배가 아프다고 해서요. 좀 봐주실 수 있어요?"
"으, 응! 배, 배 말이지?"
뜨루스는 어셔의 말에 허겁지겁 일어나 아까 전의 소란으로 떨어져 있던 청진기를 주웠다. 뜨루스는 소녀가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뜬 순간부터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안 그래도 아름다운 소녀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금빛의 눈동자를 직접 보았을 때. 그는 머리가 아찔해졌다. 당장 소녀를 덮치라는 충동이 뜨루스를 괴롭혔다.
"그, 그. 자, 잠시만 앞섶을 풀어주겠니?"
이래서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는 청진기를 변명 삼아 벨카에게 앞섶을 풀어달라 이야기했다. 그의 말에 소녀의 금빛이 당혹스러운 듯 흔들리지만.
"괜찮아. 진찰만 하는 거라니까."
어셔의 말만으로 진정한 듯 차분하게 가라앉은 소녀의 금빛에 뜨루스는 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작은 질투심이 생겨나는 것을 느꼈다. 어떠한 불순물도 없이 서로를 믿는 그 모습이, 이런 달콤한 소녀와 그런 관계를 가지고 있는 어셔가 너무나 부러웠다. 소녀의 옷은 하얀 소복 같은 것만 제외하면 앞섶만 풀면 입고 벗기 간편한 검붉은 원피스였다. 소녀가 앞섶을 직접 풀자 누워 있을 때와는 다르게 원피스는 사이즈가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흘러내렸다.
소녀는 고운 어깨와 가슴 부근에 속옷이 아슬아슬하게 드러났을 때 더 이상 흘러내리지 못하도록 붙잡았다. 그에 뜨루스는 아쉬움을 느끼면서도 소녀의 가슴 부근에 청진기를 갖다 대었다.
-두근두근.
그는 지금 자신의 귀에 들리는 심장소리가 소녀의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간신히 소녀에게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을 뿐이다.
"다, 다음은 배를 봐야 하는데."
하지만 배에 청진기를 대려면 원피스의 앞섶을 푼 채 전부 내리던가 스커트를 들어 올려야 했다. 배 같은 곳에 굳이 청진기를 댈 필요는 없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지만 그들이 그 사실을 알 리는 없었다. 어느 쪽이든 맨살과 속옷을 보여야 하는 상황에 망설이는 듯 벨카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지만 평온하게 구경하는 어셔의 모습에 소녀는 안심한 듯 흘러내리지 않도록 붙잡고 있던 원피스를 놓았다. 그 순간 본능처럼 그의 눈길이 소녀의 몸이 그리는 우아한 곡선, 이곳저곳을 훑었다. 저 작은 과실을 탐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고 생각하며 청진기를 가져다 대려는 순간.
"야! 너희는 언제 나오는데!"
쾅 하는 커다란 소리와 함께 닫혀있던 문이 열렸다. 그에 그들이 놀란 눈으로 문이 열린 곳을 보면. 화를 내려다 자신의 눈에 들어온 광경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멀뚱히 서있는 로기의 모습이 보였다.
"어?"
처음 제 발로 마차 문을 열고 나가버렸던 로기는 후회했다.
"아, 진짜! 왜 그랬지!"
더 오래 있어도 말을 걸어볼까 말까 한 판에 스스로 그 기회를 걷어차다니. 로기는 오늘따라 조절이 안 되는 제 감정이 원망스러웠다. 그는 제 또래의 아이들은 많이 봐왔던 소년이지만 이곳에는 대부분 동생처럼 생각했던 아이들뿐이었다. 그럴 때 갑자기 나타난 어셔라는 낯선 소년은 그에게 호기심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다만 덩치가 작은 편이라 놀리기 좋을 거라 생각하고 장난을 쳤을 뿐인데. 순해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한 성격했다. 설마 반격당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그때부터 첫 단추를 잘못 끼우고 말았다는 것도.
"제발, 시간이라도 되돌리고 싶다."
하지만 소문으로만 듣던 마법을 사용한다고 해도 시간을 돌릴 수는 없다는 걸 로기는 알고 있었다. 애초에 로기가 살던 나라는 인간 중에서 사용자가 정말로 드물다는 마법을 숨 쉬는 것처럼 사용하는 괴물들과 전쟁을 벌이는 곳이었으니까. 그렇다면 그가 벨카에게 말을 걸어볼 수 있는 기회는.
"사과해야 하나?"
하지만 그건 큰 문제가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로기는 알 수 있었다. 어셔는 자신과 동류라고. 그 조막만 한 소년에게 반격당했을 때.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분명 약점을 잡고 우려먹을 텐데."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지 묻는다면 바로 그 자신이 그랬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로기는 장난을 치고 사과 같은 걸 한 적이 없었다. 장난의 대상은 대부분 어른들이었고 그들이 용서해 주거나 혼내는 것으로 넘어가버렸으니까. 그래서 그는 사과하기보다는 익숙한 방식으로 당당하게 나가보자 했고 그것이 이 사단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가장 상황 파악이 빨랐던 어셔는 분기탱천하여 로기에게 달려들었고.
'이거 완전 성난 드래곤이잖...!'
로기가 생각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그는 이마의 충격과 함께 눈앞이 시커멓게 물들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