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방랑자들.
"저 사람을 너무 미워하지 말렴. 다른 건 다 좋은데 하필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
그러다 여인은 잊었던 일을 떠올린 듯 노인에게 말했다.
"아, 단주님, 저는 이만 환자들에게 음식을 먹이러."
"뜨루스!"
"네, 넷!?"
그녀의 말을 들은 노인이 뜨루스를 부르자 한구석에서 외로이 꼬치 하나를 뜯어 먹던 그가 화들짝 놀라며 답했다. 분명 같이 왔던 것 같은데. 언제 저 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던 걸까? 음식과 사람들에게 정신이 팔려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는 어쩐지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서도 혼자 떨어져 있는 느낌이었다.
"환자들은 자네 담당이지 않나? 식사를 마치면 시프와 함께 고생 좀 해주게."
아직 고기가 남아있는 꼬챙이를 들고 다친 다리를 쩔뚝이며 이끌고 온 그의 어깨를 노인이 두드리며 말했다. 시프는 뜨루스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까? 그러면서도 여인은 착실하게 그가 허겁지겁 음식을 다 먹어치울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고 보니 소개가 늦었구나. 나는 시프란다. 네 이름은 뭐니?"
"어셔에요."
"그래, 나중에 보자."
마리와 닮은 여인은 그렇게 말하며 뜨루스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얘야."
"아, 네!"
어셔는 석연치 않은 기분에 떠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신경 쓰였지만 자신을 부르는 노인의 목소리에 돌아보아야 했다.
"네 친구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느냐?"
"그게, 네."
언제부터 무리하고 있었는지 몰라도 의사 아저씨의 말대로라면 벨카는 빨라도 저녁때쯤에야 일어날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흠, 너희는 어디로 향하는 길이었느냐?"
"그건, 벨카라면 알 것 같지만."
노인의 말에 어셔는 당황하면서 벨카를 핑계로 둘러대었다. 꼭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에게 어디로 갈지 모른다고 이야기했었지만 어쩐지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해둔 것처럼 움직였으니까.
"조금 아쉽구나. 우리와 동행하지 않을지. 물어볼 생각이었는데."
"동행, 이요?"
"둘이서 이 황야를 건너기엔 쉽지 않을 거란다."
너희들끼리 이런 황야를 돌아다니고 있던 것을 보면 뭔가 방법이 있는 것 같지만, 그는 몹쓸 노파심이라며 이야기했다.
"할아버지는 어디로 가시는 길이었는데요?"
"우리는 란투아에 가는 길이었단다."
그가 기억하기로 란투아는 슬리탄과 함께 난쟁이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 때문에 어셔는 그들과 동행하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자라났지만 역시 벨카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었다.
"죄송해요. 역시 벨카가 깨어나면 결정하고 싶어서."
"하지만 의사 양반 말로는 그 아이는 저녁때가 되어서야 일어날 것 같다던데."
노인은 곤란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미안하지만 우리는 계속 란투아로 달려가야 한단다. 그래도 괜찮겠느냐?"
이런 황야에서 조금이라도 시간을 지체하거나 오랜 시간 머무르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라며 그들은 지금부터 해가 저무는 저녁때까지는 쉬지 않고 달려야 한다고 한다. 혹시라도 그들이 원래 향하던 곳과 방향이 다르다면 그들은 오히려 더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할 수도 있다며 노인은 걱정했다.
"벨카가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쉴 수 있다면 상관없어요."
그의 말에 노인은 잠시 할 말을 잃은 듯했다.
"무척 소중한 친구인가 보구나."
결국 노인은 그들에게 조금의 유예를 주고 함께 하기로 했다.
"그러면 너희들이 데리고 온 말을 따로 마차에 넣으려고 하는데. 도움을 좀 줄 수 있겠느냐?"
"그러고 보니."
노인의 말에 지금까지 그들이 타고 왔던 말의 존재를 깜빡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방도 함께 두었을 텐데.
"사실 밖에 두면 추워할까 싶어서 비어있는 화물용 마차에 넣어주려 했지만 경계심이 너무 심해서 말이다."
결국 노인은 말에게 담요를 하나를 덮어주는 걸로 어찌 밤을 보낸 것 같다고 한다. 그렇게 식사가 끝나고.
"저기 어르신, 시프는?"
"마침 잘 돌아왔네. 도나르."
때마침 시프의 잔소리를 피해 도망쳤다가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돌아온 도나르에게 노인은 어셔를 부탁했다.
"아저씨."
그와 함께 나란히 말을 찾으러 가는 길.
"왜 그러냐?"
"시프 누나랑은 무슨 사이에요?"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보는 거냐?"
어셔의 호기심 섞인 물음에 그는 곤란하다는 듯 그리고 부끄럽다는 듯 애매한 감정의 경계에서 침음을 흘렸다. 얼굴을 가리는 황동색 투구 때문에 자세한 것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 상단에 들어왔을 때. 처음 만난 사이지."
"에이, 그럼 별로 오래 안 된 거 아니에요?"
서로 말하는 것을 보면 오래 알고 지낸 사이 같았는데. 조금 더 두근거리는 이야기를 기대했던 어셔는 실망했다. 그 모습을 본 도나르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대체 뭘 기대한 거냐?"
"그거야 당연히 연애 아니에요?"
"끙, 어린 게 발랑 까져서."
남녀 사이에는 빠지지 않는 이야기가 있지 않은가? 그가 살던 마을에서도 누가 누구랑 사귄다는 소식이 있으면 금세 마을에 쫙 퍼져서 와르르 몰려가 사실인지 확인하고 사실이라면 마을 전체의 놀림감이 되기도 했다. 그럴 땐 안타깝게도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커플은 놀림당하기 싫다는 이유로 헤어지는 일도 더러 있었다.
"그러는 너도 네가 데리고 온 여자애랑 사귀는 사이 아니냐?"
"윽, 그건."
그의 말에 어셔는 자신도 남을 놀리거나 할 때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요즘 애들은 참 빠르단 말이지."
도나르가 한탄하듯 말했다.
"어쨌든 네가 생각하는 것보단 오래 알고 지냈어."
"하지만 상단에 들어왔을 때. 처음 만났다면서요?"
그렇다면 오래되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넌, 이 상단이 만들어진지 얼마나 됐다고 생각하냐?"
"길어 봐야 반년쯤?"
어셔는 방랑 상인이라는 것이 오랫동안 할만한 일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 아무리 길어봐야 반년. 그 이상은 유지비며 상품의 문제며 오히려 손해를 보는 일이 많기 때문에 멀리 떨어진 마을이나 나라를 오가는 상단은 필요에 따라 상인들이 모여 결성하거나 나라에서 수입이나 수출을 위해 계획적으로 사람을 모아서 결성되고 목적을 다하면 해체된다고 들었다.
"틀렸어. 이제 1년을 좀 넘었지."
"그렇게나 오래요?"
그러면 팔려는 상품에 문제가 생기거나 유지비가 많이 들지 않던가?
"그럴 수 있는 이유가 있지. 자, 봐."
그런 의문을 품고 바라보자 그는 마침 지나가던 길에 있는 마차를 가리켰다. 그 마차는 노인이나 뜨루스가 타던 마차와는 다르게 독특한 구조로 이루어져 창문을 열면 간단한 가판대가 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가판대를 만들면서 훤히 드러난 마차 안에 전시된 것은.
"갑옷?"
"그래, 갑옷이지."
돌을 던져도 흠집 하나 나지 않을 것 같은 갑옷들이나 보기만 해도 섬뜩할 정도로 날카롭게 벼려진 무기 같은 것들이었다. 물건을 파는 사람들은 물건에 손상이 가거나 하지는 않았는지 점검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외에도 저런 가판대 역할을 할 수 있는 마차들을 보면 반짝거리는 장신구나 공예품 같은 물건들을 주로 볼 수 있었다.
"우리나라는 튼튼하고 편리한 갑옷이랑 저런 사치품이 유명해서 말이야. 저런 걸 상품으로 취급하고 있지."
"그러면 아저씨가 입고 있는 건요?"
어셔는 곧 상품이라는 갑옷과 별 차이가 나지 않는 도나르의 갑옷을 보고 물었다. 그의 갑옷은 오래 사용했는지 햇빛에 비쳐도 광택이 나지 않는다는 것만 빼면 비슷한 모습이었다.
"그야 원래 우리나라의 갑옷이니까. 나는 이 상단을 지키는 역할이고."
갑옷을 입고 검을 차고 있는 모습에 혹시나 했었지만 그가 입고 들고 있는 건 장식 같은 게 아니라 진짜 갑옷과 무기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지키다니? 무엇으로부터?
"이런 상단은 돈이 될게 많으니까. 여차하면 도적들도 있고 위험한 생물도 많거든."
"아저씨 나라는 어떤 곳이었길래. 저런 갑옷이랑 무기를 파는 건데요?"
도나르는 그의 물음에 움직임을 멈추더니 망설였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궁금한 마음에 그를 지켜보고 있으면 그는 한숨을 내쉬며 버릇처럼 오른손으로 자신의 왼쪽 가슴 부근을 쓸었다. 그곳에는 흠집이 많이 나 있는 그의 갑옷 중에서도 네모난 모양으로 유독 깨끗하고 빛이 바래지 않은 모습이었다. 마치 무언가 오랫동안 붙어있다가 떨어진 것처럼.
"기사국, 파시페니아... 였지."
그건 듣는 사람이 씁쓸하게 느껴질 정도로 조용하고 애수에 가득 찬 목소리였다. 그래서 어셔는 그도 기사냐고 물어보려던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시프와 뜨루스는 말없이 환자들이 잠들어 있을 마차로 걸어가고 있었다. 오전이라 아직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지만 해가 떠오르는 새벽만큼 강하게 바람이 불지는 않아서 천을 뒤집어쓰지는 않았다. 그리고 도착한 마차. 시프는 말없이 들고 온 묽은 죽을 적당히 떠서 누워서 잠든 환자들의 입에 조금씩 정성스럽게 부어서 먹이고 있었다. 그 행동은 분명 호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지만 그녀와 동행한 뜨루스는 안중에도 없는 듯 무시하고 있었다. 그 또한 시프에게 굳이 관심을 받을 생각은 없는지 무시했다. 충돌도 없으니 서로가 음식을 먹일 환자도 자연스럽게 반대로 정해졌다.
""....""
그 침묵 속에서 시프는 생각했다. 왜 하필 이런 남자와 도나르가 가장 친한 사이인 걸까? 그녀는 남자의 존재 자체가 못마땅했다. 꼴에 의사라고 그분께 믿음을 받고 떠나는 길에 동행할 수 있었고 도나르는 그가 팔을 고쳐주었다는 사실만으로 감사했다. 그분께서 공통적으로 맡기신 일이 있다는 것도 동질감을 부추겼겠지. 그녀가 아는 도나르는 단순한 면이 있어서 그것만으로도 친근감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 뜨루스란 남자가 너무도 싫었다. 그와 둘만 남아 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는 것이 싫어서 환자에게 음식을 먹이는데 집중할 때. 다음 차례에서 그녀의 시선이 멈추었다.
"이 아이는."
보자마자 생각했다.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소녀라고. 오묘한 빛깔의 붉은 머리카락 창백할 정도로 새하얀 피부. 검붉은 원피스는 소녀의 가련함을 부추겼다. 그녀도 사람들에게 칭찬받으며 나름 아름답다고 자부하는 몸이었지만 이 소녀에게는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처음 보는 환자였지만 이 소녀가 어셔가 데리고 왔다는 아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아직도 얼굴 한 번 비추지 않은 어셔의 친구가 화젯거리였다.
누군가 붉은색 머리카락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그녀도 이 소녀를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다. 손에 들린 묽은 죽을 먹이느라 어쩔 수 없다며 스스로에게 핑계를 대면서 그녀가 소녀의 모습을 좀 더 자세하게 구경하고자 홀린 듯이 허리를 숙였을 때였다.
"윽!"
누군가 그녀의 치마를 들춰 올리는 것이 느껴진 것은. 그녀는 혐오스러움에 으득, 이를 갈았지만 그래도 움직일 수 없었다. 저항할 수 없었다.
"마침 참아주는 것도 한계였는데. 이렇게 박기 좋게 엉덩이를 내밀다니, 사실은 너도 즐기고 있었던 거지?"
그녀는 이 남자가 정말로 싫었다.
그의 취향에 강제로 맞춰 입었던 짧은 치마는 엉덩이 위로 들춰져 그녀의 속옷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는 건 직접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스윽스윽, 얇은 속옷 위로 노골적인 손길이 그녀의 둔덕을 스쳤다.
"흐흐, 언제 봐도 매력적인 엉덩이야. 시프."
그녀의 엉덩이를 희롱하는 남자의 손길은 점점 더 대담해졌다. 그녀의 치부를 가리고 있었던 얇은 팬티마저 그의 손길에 벗겨졌다. 결국 전부 드러나버린 두 개의 새하얀 언덕과 치부. 남자가 그녀의 은밀한 곳을 감상하듯이 바라보는 시선이 끔찍할 정도로 생생하게 느껴졌다.
"도나르는 왜 이런 여자를 진작에 따먹지 않았을까?"
시프는 남자의 천박한 입을 꿰매버리고 싶었다. 그녀의 엉덩이를 꽉 틀어쥐었다 놓고 또 쓰다듬기를 반복하는 남자의 노골적인 손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하여간 바보 같은 자식이라니까."
"닥쳐!"
그 더러운 입으로 그 사람을 모욕하지 마. 참다 참다 참지 못한 그녀가 울컥하는 마음에 소리치는 순간이었다.
"허억?!"
"이래야 겨우 입을 열다니 너도 참 한결같아. 그래서 매력적이지만."
길고 두껍고 뜨거운 육봉이 그녀의 균열을 파고들어 배 안쪽까지 거리낌 없이 찔러들어온 것은. 변변찮은 준비 하나 되지 않은 그녀의 아랫배가 화끈거리며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고 그녀는 비명에 가까운 헛숨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 이상의 고통은 없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녀는 이미 처녀가 아니었으니까.
"도나르가 진작에 네 마음을 알아채고 따먹었다면 하다못해 네 처녀를 내가 가져가는 일은 없었을 거 아니야?"
그의 말대로였다. 그녀가 가지고 있었던 처녀는 다른 누구도 아닌 이 남자에게 허무하게 빼앗겨 버리고 말았으니까. 그런 이유로 정말로 한심한 녀석이라 도나르를 조롱하는 남자에게 닥치라고 다시 외치고 싶었지만 그녀는 아랫배의 고통과 비명을 삼키느라 말할 여력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가장 고통스러운 이유는.
"하앗!"
이렇게 강제로 속살을 허락했음에도 고통 속에서 느껴지는 쾌락 때문이었다. 그녀가 입술을 깨물어 간신히 참아내던 신음을 흘려버리자. 남자의 움직임은 더욱 거세졌다.
"누가 알았겠어! 그 고고하신 시프가 알고 보면 남자에게 강제로 범해지며 쾌감을 느끼는 변태라는걸!"
"끄윽!"
그녀는 기고만장해져서 더욱 자신을 몰아붙이는 남자의 말에 타오르는 듯이 뜨거운 가슴에 증오심을 삼켰다. 이 남자와 이런 관계가 된 것은 꽤 오래된 일이었다. 처음에는 관심도 없었다. 이 상단에 들어온 뒤에야 알게 된 사이였으니. 하지만 그녀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도나르와 친한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덜렁거리며 허술한 그의 모습에 이것저것 챙겨 주다 보니 안면이 생겼을 뿐이었다. 딱 친구의 친구. 그 정도쯤 되는 관계가 전부였고 그 이상은 원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관계는 어느 날 끝이 나고 말았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그녀가 유독 심한 생리통에 참지 못하고 그에게 찾아갔던 날. 자고 일어나면 괜찮을 것이라는 그의 말을 믿고 잠들었을 때였다.
"흐윽, 하응!"
이상한 감각이 들었다. 먼 곳에서부터 자신의 신음이 들려오는 것 같았고 아랫배가 무척 아픈 것 같으면서도 간질거리며 등허리를 휘게 만드는 쾌락이 자신의 몸을 괴롭히고 있었다.
"아응, 도나르! 하아."
처음에는 꿈이라 생각했다. 도나르가 그녀의 위에 올라타 허리를 흔드는 모습을 보고 꿈이 아니면 뭐라고 생각할까? 찝찝하고 기분 나쁜 통증이 느껴지는 도중에도 그녀의 안쪽을 두터운 살로 긁는 것이 기분 좋아서 달콤한 한숨을 내쉬며 다리로 도나르의 허리를 감쌌을 때. 그녀는 그제야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꿈이라기엔 지나치게 생생하지 않은가? 그녀가 다리로 감싸 안은 도나르의 허리도 자신의 안쪽을 찌르는 물건의 뜨거운 감촉도 흐르는 땀의 찝찝함과 그녀의 위에서 헐떡이는 숨결도.
"으윽! 다, 당신! 누구야?"
그러나 그녀가 수마의 늪에서 빠져나오는 그 순간 그는 그녀의 몸을 꽉 끌어안으며 그녀의 안에 뜨거운 정을 토해냈고.
"하으윽!?"
그녀는 반사적으로 그의 허리를 다리로 붙잡은 그대로 꽉 끌어안아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모든 정사가 끝났을 때야. 그녀는 그가 도나르가 아니란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때 느꼈던 자괴감은 지금도 그녀를 괴롭혔다. 상대가 누군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아래에 깔려서 좋다고 헐떡였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져서 혀를 깨물거나 손목을 그으려 했던 적도 있었다. 이 남자 때문에 그마저도 실패하고 말았지만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
"흐으."
그녀는 자신의 안쪽을 파고들며 유린하는 남자의 물건에 혐오스러움을 느끼면서도 자극당하고 마는 몸에 절망하고 있었다. 벌써 이 자와 이런 관계가 된지 오랜 시간이 흘렀다. 약을 먹으며 아이가 생기는 것만큼은 막았지만 남자는 이미 그녀의 어떤 부분이 약한지 모두 알고 있었고 결국 느껴버리는 자신에게 혐오감을 느끼고 괴로워하는 하루하루. 마음 같아선 모든 걸 폭로하고 싶었지만 이미 그런 시도는 몇 번이고 해봤었다. 이 남자에게는 이상한 힘이 있어서 그녀는 저항하고 싶어도 저항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이상한 힘의 정체를 그녀는 짐작하고 있었다.
'마법일 거야. 그것밖에 설명할 방법이 없어.'
대체 이런 남자가 어떻게 마법에게 선택받아 사용하고 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건 마법이 확실했다. 몸의 움직임을 강제로 조종하고 말을 막고 정신마저 흩트리는 힘은 마법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흐윽!"
심지어 그 힘을 이용해 도나르의 앞에서 범해줄 수도 있다는 그의 말에 결국 그녀는 굴욕적으로 남자에게 몸을 허락하고 만 것이었다. 거침없이 자신의 안을 유린하는 남자의 뜨거운 육봉에 이런 건 자신의 몸이 아니라 부정하며 현실감마저 멀어졌을 때였다.
"있잖아 시프, 내 말대로 해준다면 너를 놓아줄 수도 있는데."
"윽! 무, 무슨?"
미치도록 달콤한 제안이 귀에 들어와 그녀를 강제로 현실로 내던졌다. 그의 손길이 그녀의 옷 속에 들어와 가슴을 주무르고 여전히 그녀의 안은 남자에게 유린당하고 있었지만 남자의 말에 정신이 팔렸다.
"너는 충분히 예쁘지만 말이야. 슬슬 질리기 시작했거든."
멋대로 그녀를 범하고 놓아주지 않았던 주제에 여유가 넘치는 말이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녀는 이 남자에게 있어서 자신의 성욕을 풀고 재미 삼아 가지고 놀 수 있는 단순한 장난감에 불과했다는걸.
"네 앞의 아이를 봐. 어때? 아름답지 않아?"
"당신은 미쳤어!"
그녀는 그 말에 남자의 목적이 무엇인지 단 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런 어린 소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다. 지금의 그녀처럼 만들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하다 하다 어린 소녀까지 손을 대고 싶어 하는 그의 모습에 치가 떨렸다. 하지만 그녀의 앞에 있는 이 절세의 소녀는 그것을 초월할 정도로 매력적이라 그의 마음이 이해가 간다는 사실에 그녀는 다시 자괴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차피 너랑은 관계가 없는 아이잖아? 우리랑 같은 곳에서 온 아이도 아니고 다른 곳에서 온 낯선 아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거라고?"
"흣, 그건!"
그녀의 안쪽을 긁어 대는 남자의 물건이 자꾸만 그녀의 의식을 흩트렸다.
"너도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이 아이만 희생시킨다면 너는 자유롭게 도나르와 있을 수 있어."
"아으, 도, 나르."
악마와도 같은 놈의 제안에 흔들려서는 안된다고 가슴속에서 외치고 있었다. 그 가슴속 외침을 들었으면서도 그녀는 그의 달콤한 제안에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면 어때? 평생 나의 씨받이가 되어 내 아이를 낳으면서 살아갈래?"
"으크윽!"
점점 빠르게 움직이던 남자는 그녀의 발버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힘으로 그녀의 엉덩이를 붙잡아 안쪽에 자신의 씨앗을 한가득 싸질렀다.
"나는 그것도 좋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녀는 자신의 뱃속에서 또 다른 심장처럼 뜨겁게 고동치는 남자의 물건에서 정액이 쏟아져 나와 그녀의 뱃속을 때리며 물들여가는 것을 느꼈다. 생생하게 느껴지는 그 감각이 얼마나 끔찍한지. 드디어 길고 긴 그의 사정이 끝났을 때. 그의 물건이 그녀의 속살을 스치며 빠져나갔다. 뱃속을 꽉 채웠던 이물감이 사라지자 느껴지는 것은 허전함과 그의 물건이 있던 자리에 파고드는 차가운 공기.
그리고 그녀의 안에서 흘러내리는 뜨거운 정액의 감촉이었다. 어느새 그녀의 가슴속에서 들려오던 외침은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정도로 작게 줄어들었다.
"...그 말 사실이지?"
그녀는 자신의 앞에 잠들어 있는 소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가슴속의 작은 외침은 여전히 들려오고 있었지만 그녀는 무시해버렸다. 무시해버리고 말았다. 소녀에게 미안한 마음은 그녀의 이기적인 저울 위에서 한없이 가벼울 뿐이다. 자신은 이 소녀를 알지 못하니까. 처음 보니까. 그녀는 이 지옥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