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고대로부터.
늙은 늑대는 동굴 속에서 제 앞에 무너진 조각상을 한참을 바라보며 과거를 떠올렸다. 그가 아직 혈기 넘치던 젊은 시절, 이 조각상은 이렇게 처참하게 무너져 내린 모습은 아니었다. 이 조각상을 처음 보았던 건 그가 아주 어렸을 때. 그 시절의 족장이 그를 이곳에 데리고 오며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이 조각상을 그가 지키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그때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린 늑대는 알 수 없었다. 그 의미를 깨닫게 된 것은 그가 성인식을 치르게 되었을 때였다.
지금의 그만큼이나 늙어있던 과거의 족장은 성인식을 성공적으로 치른 그를 다음 대의 족장으로 결정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지친 숨을 거두었다. 그를 제대로 가르칠 틈도 없었던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한 손에도 들려질 법한 새끼 늑대를 이곳에 데려왔던 건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습니까?"
이제 막 성인식을 치렀던 젊은 늑대에게 족장이란 자리는 부담스럽고 무거운 자리였다. 그는 자신의 일족을 책임져야만 했고 경험이 부족했기에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간신히 이 숲을 에라스들로부터 지키는 사명을 수행해왔다. 과거 족장이 했던 자신들이 진짜로 지켜야 할 것은 숲이 아닌 이 조각상이라는 말도 하루하루가 바쁜 생활과 책임감에 묻혀 사라져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에라스들은 이 숲을, 나무를 노리고 찾아왔고 그들은 에라스들이 숲을 해치지 못하도록 사냥을 준비했다.
문제는 없었다. 늘 그래왔듯 그들을 방심시키고 익숙하게 숲을 해치던 그들을 사냥했다. 문제는 다음 순간에 벌어졌다.
"숲 안으로 도망쳐!"
어떤 에라스가 소리치자 에라스들이 일제히 숲의 안으로 달려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젊은 족장은 당황스러웠다. 지금까지 그 어떤 에라스도 숲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려 하지 않았는데. 그 에라스들은 상관없다는 듯이 달려갔으니까. 이러한 상황에 익숙하지 않았던 그는 일족들을 이끌고 다급하게 에라스들을 추적하고 사냥하며 일부는 동굴에 가두었지만 에라스의 체력은 상상 이상의 것이었다. 늑대들이 시간이 갈수록 빠르게 지쳐가는 반면 그들은 계속 달리고 있었다.
단순한 속도로는 상대도 되지 않았던 그들의 모습에 그는 그들을 얕보고 방심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그렇게 오래 달릴 수 있을 것이라 그 어떤 일족도 감히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명백한 경험 부족이었지."
그는 그때를 떠올리고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너무나도 씁쓸하고 치명적인 실수였다. 그날 이 동굴로 돌아온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지켜야만 했던 조각상이 처참하게 무너져내린 모습이었으니. 그리고 발견한 것이 어셔에게 건넨 구슬이었다. 조각상을 지키는데 실패한 그는 그동안 신경 쓰지 못했던 족장만이 들어올 수 있는 동굴 벽에 새겨진 그림들을 꼼꼼하게 살폈다. 혹시 무너진 조각상을 되돌릴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지고. 그러나 그가 알 수 있었던 것은 한 번 무너진 조각상은 다시는 되돌릴 수 없다는 것과 그들이 지키는 숲의 주인에 대한 것이었다.
"플라타니, 아가피아, 카브시어스."
모두 소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녀가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 그리고 어떠한 존재인지 그 어린 에라스는 조금도 알지 못한다. 얼마나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는지조차도 말이다. 지친 몸을 땅에 뉘던 그의 눈에 은빛 털을 가진 늑대의 발이 보였다.
"왔구나, 벨리치예."
"명령하신 일을 완수했습니다."
"그런가."
저런 눈에 띄는 털색을 가진 건 그가 차기 족장으로 지목한 늑대밖에 없었다. 다행히 자신에겐 성인식을 치른 그를 가르칠 시간이 주어졌고 자신과 같은 실수를 다시는 저지르지 않도록 최대한 많은 것을 가르쳤다. 늑대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힘이 아닌 지혜. 평소에 따로 지내는 늑대들을 통솔하는데 힘도 중요하지만 오랫동안 내려져온 지혜가 없었다면 금방 멸족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지혜를 선대로부터 물려받아왔다.
"그동안 이 늙은이의 말을 들어주느라 수고가 많았다."
다시는 그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스스로도 지나치다 생각할 정도로 엄격하게 가르친 녀석이었다. 그런데도 이 녀석은 군말 없이 모든 일을 받아들였었지. 그는 그것이 못내 미안하여 더 신경이 쓰였다.
"이제 그만 물러가거라. 혼자 있고 싶구나."
그가 이곳에 다시 돌아올 즘이면 더 이상 이곳에 그는 남아있지 않으리라. 꺼져가는 자신의 불씨를 느끼고 말했지만 그의 말을 듣고도 새하얀 발은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그에 늙은 늑대는 흐린 눈을 굴려 벨리치예의 얼굴을 보고자 했다. 그러나 흐릿한 시야가 그것마저 허용치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흐릿한 모습 위에 벨리치예의 얼굴이 덧그려지는 듯했다.
"무엇이 그리 슬프더냐."
"...."
늙은 늑대의 물음에도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여간 과묵한 녀석이라 생각하면서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으로 마주한 것은 어젯밤 두 개의 달이 마주 보는 호수에서 그를 배웅하던 아름다운 금빛이었다. 이윽고 미미한 불씨는 이제 새하얀 재만을 남기고 스러졌다.
"역시 그대는 지나치게 상냥해."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를 짓누르던 오랜 죄책감과 책임감이 드디어 그를 놓아주었다.
"무슨 소리지?"
하룻밤을 지내고 일어난 어셔는 어디선가 구슬픈 늑대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 두리번거렸지만 보이는 건 하얗게 빛나는 하늘과 찰랑이는 풀, 그 위를 날아다니는 색색깔의 물고기들뿐이었다. 지금 그는 어제 못 다했던 호수의 안쪽을 구경하기 위해 벨카와 호수 안에 들어와 있었으니까.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공기방울 소리와 귀를 가득 채운 먹먹한 물소리만이 가득했다. 딱히 다른 일이 벌어지는 것 같지도 않아서 그는 다시 호수 안을 구경하러 다니려고 했다.
"벨카?"
그와 함께 호수 안을 돌아다니던 소녀가 그의 움직임에도 움직이지 않아 돌아보면 멍하니 서있는 그녀가 보였다. 가늠할 수 없는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듯 아득한 눈동자와 옅어진 그녀의 존재감에 어셔는 덜컥 겁이 났다.
"벨카."
"...불렀어?"
다세 한번 조심스럽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곧 정상적으로 돌아온 소녀의 존재감에 안심하면서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말했다.
"저기도 한 번 둘러보자."
그가 가리킨 곳은 원래부터 호수의 일부였는지 물속에서 자라는 수초들로 가득한 곳이었다. 걷는 듯 날아다니는 듯 애매한 감각 속에서 물속을 돌아다니다. 그는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저건 뭐지?"
수초와 이끼에 쌓여 잘 보이지 않았지만 살짝 드러난 부분에서 누군가 인위적으로 새겨놓은 듯한 선을 발견한 그는 그것을 향해 다가갔다. 표면을 뒤덮은 수초를 손으로 쓸어 떼어내자 드러난 것은 직선으로 이루어진 문자들이었다. 그리고 어셔는 그것을 어디에서 보았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이건 마법책에서 봤던 거잖아."
그 문자들은 마법책에서 마법을 사용할 때 손으로 그려야 하는 문자들과 똑같았으니까. 그중에서도 정말로 간단하게 그린 물고기를 세로로 세운 문자와 마찬가지로 간단하게 그려진 테이블 같은 것을 옆으로 세워놓은 듯한 문자가 크게 새겨져 있었다. 그의 옆에 있던 소녀가 문자가 새겨진 바위를 쓸며 말했다.
"오틸라와 퍼스구나."
"읽을 수 있어?"
"응, 이걸 만들 땐 정말로 급했던 것 같아."
그러면서 벨카는 퍼스라 부른 문자의 끝에 손가락을 놓았다.
"어셔, 나와 속도를 맞춰서 그 문자를 따라가줘."
"이거?"
어셔는 소녀의 부탁대로 오틸라라 불린 문자의 끝에 손을 대고 그녀가 문자를 따라가는 속도에 맞춰 문자를 따라갔다. 그러나 중간에 그의 숨이 차버리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바위의 모습에 실망하는 것도 잠시. 벨카가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추고 조심스레 숨을 불어 넣어주었다.
"미안해. 나 때문에."
"괜찮아."
그녀에게서 숨을 넘겨받은 그가 소녀와 함께 다시 한번 시도하니 성공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야 그 자리에 못 박혀 움직이지 않을 것 같던 바위가 덜덜 떨더니 이내 아래로 확 꺼져버렸으니까. 때문에 놀라는 것도 잠시. 그곳이 그들을 빨아들이는 바람에 앞으로 넘어져 버렸다.
"케엑, 이게 무슨...?"
그러다 깨달은 건 숨이 쉬어진다는 것이었다. 놀란 마음에 주변을 둘러보니 물은 그들의 허리까지 내려와 있었고 이상한 글들이 빼곡히 들어찬 동굴의 모습이 보였다. 어셔는 또 동굴이냐는 생각에 슬슬 질린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 동굴은 어딘가 또 달랐다. 수많은 문자들로 가득한 벽면들이 보였던 것이다. 게다가 벽돌처럼 하나하나 따로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은 그가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책인가?"
호수의 표면처럼 반질반질하게 빛을 반사하는 그것들의 모양은 길쭉하고 얇았다. 그 모양새가 책과도 같아 어셔는 그중에서 하나를 뽑아들었다. 책을 뽑아든 어셔는 내용을 읽으려 했으나 읽을 수 없었다. 그야 책이라 생각했던 그것은 책 같은 것이 아니었으니까.
"뭐야? 이건."
모양새만큼은 책에 가까웠지만 그것을 책이라 부르기엔 이상했다. 깔끔한 책 모양의 그건 의미를 알 수 없는 글이 새겨진 한 면만을 제외한다면 어디 하나 모난 부분이 없었다. 지나칠 정도로. 내용이 쓰여 있지도 내용이 쓰일만한 공간도 없는 벽돌처럼 오로지 그것이 전부일뿐이다. 그렇다고 단순한 벽돌이라고 하기엔 보관되어 있는 모습이 마치 책과도 같지 않은가? 심지어 그는 만져보면 걸리는 느낌도 없이 미끄러지는 이런 감촉을 가진 물체는 처음 보았다.
아무리 깔끔하게 구워낸 벽돌이나 마감을 잘한 나무라도 거칠거칠하거나 울퉁불퉁했는데 이건 그런 것이 없었다. 혹시 이것만 그런 것이 아닌지 다른 것도 하나씩 꺼내어 보았지만 모두 무섭도록 같은 모양, 알 수 없는 재질로 이루어진 알 수 없는 물체일 뿐이었다. 차라리 책 같은 것이었다면 이것들이 이렇게 보관되어 있는 것을 납득할 수 있었을 텐데 아무리 봐도 책 같지는 않았다. 결국 아무것도 알아낸 것이 없어 한숨을 내쉬고 있으면 벨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물이구나."
"유물?"
그녀의 말에 어셔는 이것들이 무엇인지 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설마 이건, 소녀가 이야기해 주었던 시대의.
"마도구야?!"
벨카는 그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아무렇게나 꺼내 놓은 책 같은 것들을 살피는 듯하더니 두 개를 빼내들었다.
"자, 이제 돌아가자."
"하지만."
어쩌면 대부분 다 유실되었다는 마도구일 수도 있을 이 많은 것들을 그대로 두고 가야 한다니 아까운 마음에 망설였지만.
"이 많은 걸 전부 들고 다닐 수는 없는걸."
그녀의 말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동굴 같은 곳은 어셔가 들어왔던 곳들 중에선 가장 작은 편이었지만 정말로 작다고 볼 순 없었다. 마도구라고는 해도 이걸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데 전부 들고 다니는 건 확실히 무리였으니까. 그는 소녀가 따로 빼놓은 두 개의 것만 챙겨 나가야 했다. 그들이 잠시 들렸던 동굴을 빠져나와 호수를 나가는 길. 호수의 아래는 여전히 물속이라 생각되지 않을 만큼 지상과 똑같았고 그렇기 때문에 더 아름다운 곳이었다.
공기처럼 투명하고 맑은 물속에 드리운 푸르른 녹음과 그 사이를 돌아다니는 물고기들의 모습은 쉽게 눈을 뗄 수 없는 광경이라 그들은 조금 더 물속을 돌아다닌 후에야 호수를 빠져나왔다. 그 광경을 어쩌면 다시 볼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셔는 가슴 한구석이 찡했지만 이곳에 평생 머무를 수는 없었다. 그가 물에 젖어 축축했던 옷을 갈아입고 바닥에 누우면 파릇파릇한 풀들이 살랑이며 그의 귀를 간지럽히고 숲의 바람이 밀려와 그의 몸에 남은 물기를 날려주었다. 물에 푹 젖어버린 머리카락까지 불어오는 바람에 천천히 말리며 푸른 하늘을 구경하고 있었을 때. 작은 동굴 속에서 가져온 그것들이 떠올랐다.
"...이건 어디에 쓰는 건지 알 수가 없네."
근처에 놓여있던 그것들 중 하나를 들어 햇빛에 비추어 보기도 하고 가려보기도 하며 이리저리 돌려보며 살펴보았지만 그가 알아낼 수 있었던 사실이란 별거 없었다. 글자가 새겨진 부분을 제외하면 정말로 아무것도 없는 듯 미끄럽다는 것과 햇빛에 비추어보면 빛을 반사하고 그의 얼굴을 갖다 대어 보면 얼굴이 보인다는 사실뿐이다. 어디를 봐도 쓸만한 부분은 보이지 않았다. 어셔가 이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한동안 붙잡고 있으면 소녀가 다가왔다.
그녀는 그가 마도구 같은 것을 살펴보는 사이 옷을 갈아입은 듯 말라있는 원피스 위에 벗어 두었던 하얀 소복을 입고 가면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곁에 앉으며.
"뭔가 알아낸 거라도 있어?"
"아니, 어디에 쓰는 건지 도저히 모르겠어."
광택이 나는 게 철과 비슷한 것도 같은데 같은 무게의 철보다 훨씬 가볍다. 그렇다고 돌이라고 보기엔 어딘가 다른 느낌이다. 어디에 사용하는 물건인지는 고사하고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조차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가 결국 포기하고 한숨을 내쉬자 벨카가 쿡쿡 웃는다.
"이건 이들이 남겨놓은 또 다른 유산이 아니라면 해석할 수 없을 거야."
"그런 거면 진작에 알려주지."
"어셔가 즐거워 보였으니까."
소녀가 사랑스럽다는 듯 콕 하고 그의 볼을 찔렀다. 때문인지 가슴 한구석이 간질거리는 듯하여 어셔는 괜히 싫증이 난 듯 그 책 같은 것을 그녀에게 건네며 하늘을 바라보는 척 소녀의 시선을 피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던 중이었다.
"숲의 주인이시여."
회색 늑대의 목소리가 들려와 돌아보면 회색 늑대뿐만이 아니라 갈색과 그보다 조금 옅은 털색의 늑대 두 마리가 회색 늑대를 지키듯이 그녀의 뒤에 있었다. 벨카 또한 그들을 바라보니.
"부탁하신 것들을 가져왔습니다."
그녀의 말에 어셔는 갈색 늑대들이 커다란 풀잎을 말아놓은 보따리를 물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혹시 늑대들은 저런 식으로 물건을 가지고 다니는 걸까. 소녀는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는 듯 늑대들이 가져온 풀잎을 열어보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약초?"
그가 다쳤을 때 벨카가 치료에 사용했던 약초들이 거대한 풀잎 안에 꽉 차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머지 하나도 같은 것이라는 걸 알고 있는 듯 굳이 열어보지 않고 가방 안에 집어넣는 소녀.
"이 약초는 숲 밖에서는 구할 수 없으니까. 넉넉하게 구해달라고 했어."
그녀의 말에 어셔는 이제 이 숲마저도 떠나야 한다는 것을 떠올렸다. 마을을 떠나면서 지금까지 많은 일이 있었지만 아직도 그들은 숲 안에 있었다. 그건 마을을 떠나는 것과는 또 다른 기분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 숲 가장 깊은 곳에서 살고 있었으면서도 이 숲을 무척이나 두려워했지만 그에겐 이 숲이 제 집과도 같았다. 그럼에도 숲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적었지만 그래도 숲 밖에 대한 것보다는 많았다.
"어셔."
하지만 그런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도 걱정스러운 금빛과 마주치고 나면 햇볕을 쬔 얼음처럼 사르르 녹아버렸다. 그래, 이다지도 사랑스러운 소녀를 어떻게 홀로 밖으로 내보낼 수 있을까. 어셔는 벨카의 부름에 답하는 대신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밖으로 떠나는 것도 두렵긴 했지만 역시 벨카와 떨어지는 것만큼 두렵지는 않았으니까. 그들이 모든 준비를 끝냈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회색 늑대의 말이 들려왔다.
"정말로 숲을 떠나시는군요."
"이미 오래전에 예정된 일이었어. 그게 지금일 뿐이야."
안타까운 듯 그리고 슬픈듯한 회색 늑대의 말에도 벨카는 평이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들과는 상관없다고 하는 것만 같은 그 목소리가 서운하게 느껴질 법한데도 회색 늑대는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한 듯 말했다.
"게리, 프레키. 외곽까지 안내해 드리거라."
게리와 프레키라 불린 갈색 늑대들은 회색 늑대의 말에 군말 없이 그녀들에게 다가와 숙여 등을 내주었다.
"이 숲은 험합니다. 에라스에게도 지금의 당신께도."
갈색 늑대들을 타고 가라 이야기하는 그녀의 눈길은 간절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숲 밖은 더 험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 부디."
회색 늑대와 벨카가 눈 싸움을 하는 듯 얼마나 눈을 마주치고 있었을까. 결국 벨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회색 늑대의 얼굴에 화색이 돌며 이야기했지만.
"족장님께서 배웅을..."
"필요 없어. 이미 그는 먼저 가버렸으니까."
소녀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회색 늑대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결국 먼저 떠나겠다는 그들을 붙잡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그들은 갈색 늑대들의 등을 타고 숲의 밖으로 향하게 되었다. 늑대들이 달리는 속도는 아주 빨라서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그들은 어느새 숲 밖에 도착해 있었다. 처음으로 나와 보는 곳을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었는지 묻는다면 그건 아주 간단한 사실 때문이었다.
"정말 아무것도 없네."
숲은 어느 곳을 기준으로 뚝 끊겨있었다. 밖과 가까워질수록 두께가 얇아지고 밑동만이 남아 그 위로 다른 식물들이 자라난 나무들의 숫자가 점점 더 늘어나더니 결국 얕은 잡초들만이 자리 잡은 이곳에 도달한 것이다. 몇 걸음만 더 앞으로 가면 그곳에는 더 이상 풀이 자라지 않았다. 누군가가 가위로 잘라 정해 놓은 것처럼 그곳부터는 오로지 주홍빛으로 가득한 황야가 지평선의 너머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 광경 속에서 그나마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면 사람들이 지나다니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있는 길이었다.
그 길만이 조금이지만 색이 달랐다. 저곳을 따라가면 될 것이라 막연한 생각만 들 뿐인 황야의 모습에 넋을 잃는 것도 잠시. 그들을 데려다준 갈색 늑대들을 떠올리고 돌아보았지만.
"그러고 보니 너희들은?"
"이미 돌아갔어."
작별할 틈도 없이 그들은 함께 들고 왔던 짐만 덩그러니 놓아두고 자신들이 사는 숲으로 돌아간 뒤였다. 친절했던 그들이 이렇게 매정하게 사라지니 아쉬운 마음도 들었지만 저게 늑대들이 살아가는 방식인 거겠지.
"벨카."
"응."
"우리, 지금부터 어디로 가는 거야?"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단지 아주 먼 곳이라는 것밖에."
끝없는 황야의 저편을 바라보고 있으면 벨카의 모른다는 말이 이렇게 와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숲을 떠나 향하는 곳은 익숙함과는 거리가 먼 오로지 낯선 것들로 가득한 세상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