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8화 〉고대로부터. (28/220)



〈 28화 〉고대로부터.

"그럼 그냥 걔가 족장이 되면 안 돼? 힘도 세 보이던데."
"그는 분명 강하지만 젊기에 경험이 부족하지. 그래서 이 숲에서 가장 오래 살아온 족장님께 가르침을 받고 있는 거다."


회색 늑대는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라 당부했다. 그렇게 말해도 그는 마을의 촌장 님이 할아버지인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고 짐작할 뿐이다.


"어쨌든 걔한테 물어보면 그 시험이  때문에 해야 했던 건지 알 수 있다는 거지?"


그러나 그녀는 어셔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는 어떤 면에선 족장님보다도 더 고지식하지. 족장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셨다면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할 거다."
"그게 뭐야."

결국 그 시험이 무엇을 위해서였는지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 동굴이 삿된 것을 내보내지 않는다느니 했지만 그것과 지금 그가 들고 있는 돌이 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어셔가 투덜거리고 있자. 회색 늑대가 기다렸다는 듯 무언가를 그에게 건넸다.


"목걸이?"

그건 얇은 가죽으로 촘촘하고 깔끔하게 짜여 쉽게 떨어지지 않을 듯한 목걸이였다. 중심에는 둥글게 홈이 패인 특이한 장식도 매달려있다. 장식은 얇고 되다만  형태의 모습으로 안쪽이 텅 비어있는 느낌을 준다. 그나마 금색이 화려한 느낌을 주지만 장식이라 말하기엔 어딘가 부족한 모습이었다.

"이건 왜?"
"족장님께 받은 돌을 끼우면 된다."


그녀의 말에 그는 소녀에게 들키지 않고자 주먹을  손에 숨겨놓았던 돌을 목걸이의 장식에 조심스럽게 맞춰보았다. 그러자 처음부터 제 것이었다는 것처럼 장식의 홈에  맞아떨어지는 돌. 단지 맞추었을 뿐인데 손을 대지 않아도 떨어지지 않았고 직접 떼어내려 힘을 주어 당겨보아도 안 떨어졌다. 그에 놀라고 있자 회색 늑대의 말이 다시 들려왔다.


"아무래도 숲의 주인께 들키지 않으려면 몸에 직접 들고 다니는 편이 수월하겠지. 옷 안쪽에 숨기고 다니면 될 거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을게 이 돌이 뭔지 알아?"

늙은 늑대는 이 돌이 그가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했을 때. 대신 대가를 치러 줄 것이라고 했다. 이 돌이 무슨 돌인지도 알 수 없지만 대가라니 어떤?


"족장님의 말을 굳이 어설프게 이해하려 하지 않아도 된다. 때가 되면  누구보다 네가 가장 잘 알게 될 테니."
"윽, 너희는 다들 그런 식으로 이야기해?"

회색 늑대의 말을 듣고 어셔는 볼멘소리를 내었다. 벨카도 그렇긴 했지만 늑대들은 모두 모호한 말로 그를 헷갈리게 만들었다. 소녀와 지내면서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식으로 다른 이들과 대화하게 되니 답답하게 느껴졌다. 벨카는 그가 원한다면 쉽게 설명하거나 알려주기라도 했지 늑대들은 그런 것조차 없다. 인도자가 무엇인지 어떤 것인지 알려주지도 않아서 만나기는 했는지도 의문이었다.

"잠깐 그러고 보니까  말은!"
"말이라면, 네가 타고 나왔던 녀석을 말하는 건가?"

회색 늑대의 인상이 티가  정도로 찌푸려졌다.


"그래, 그 녀석 말이야!"


그 말이 은색 늑대가 말했던 인도자인가 싶기도 했지만 길고 뾰족한 뿔이 정수리에 달린 거 빼고는 단순히 하얀 말에 불과했다. 게다가 어셔는 자신을 태우고 잘도 헤엄친다 싶더니 갑자기 거칠게 헤엄치는 바람에 그를 떨어트리는 것만으로 모자라 발굽으로 칠 뻔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호색한 녀석이라면 지금쯤 어딘가에서 아무 여자나 붙잡고 구애나 하고 있을 거다."
"호색한?"

마음에 걸리는 단어를 들은 어셔가 그녀를 제대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후우, 그래, 같은 숲의 주민으로서 말하기 부끄럽지만 놈은 종족을 불문하고 마음에 드는 여자라면 들이대고 보는 소문난 바람둥이다."


회색 늑대는 질린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벨리치예가 아니었다면 골치 아팠겠지."


그러나 어셔는 이미 그녀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 말이 그를 떨어트렸을 때가 어떤 상황이었는지 다시 떠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은 분명 처음에는 안정적으로 헤엄치고 있었다. 그렇다면 대체 무슨 이유로 갑자기 거칠게 움직였던가? 생각해보니 그가 벨카를 발견하기 직전이었다. 또한 말이 바라보고 있었던 방향도. 그것들을 하나하나 종합해 보았다.

"...늑대는 냄새를 잘 맡지?"
"그, 그렇다만."

회색 늑대가 싸늘하게 식은 그의 목소리에 당황하면서도 확실하게 대답했다.

"지금 벨카의 냄새를 맡을 수 있어?"
"으음, 그건 곤란하다. 숲의 주인께서는 특별한 냄새 같은 것이 없으니."
"그럼 그 말의 냄새는?"
"껄끄럽기는 하지만 가능하다."


어셔가 그 녀석이 어디 있는지   있냐고 묻자 코를 몇 번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던 회색 늑대가 한 방향을 바라보고 말했다.


"저쪽에서 냄새가 나는군. 그런데 저쪽에는 딱히 특별한 것이 없을 텐데. 왜 멈춰있는 거지?"


회색 늑대가 고개를 돌린 방향은 소녀가 그에게 먹을 것을 찾아오겠다 말하며 걸어갔던 곳이었다. 그것까지 확인한 그는 이미 그쪽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회색 늑대가 얼빠진 표정으로 그가 달려가는 모습을 보고 있었지만 이미 어셔에게 뵈는 것은 없었다. 그의 달리기는 늑대나 말에 비하면 우스울 정도로 느린 편이었지만 기세라고 해야 할까? 어셔가 제법 재빠른 편이기도 했지만, 사납게 느껴지는 그런 것이 있어서 우연히 근처를 지나가던 작은 동물들이나 늑대들은 놀라서 멈춰 서거나 길을 비켰다. 그렇게 얼마쯤 달렸을 때. 그의 눈에 드디어 작고 따스한 붉은색이 비쳤다. 문제는 역시 그 옆에 있는 커다란 하얀색이었다.

-히이이잉!


놈은 소녀에게 자신의 뿔이 위협스럽지 않도록 하면서도 쓰다듬어달라는 듯이 자꾸 머리를 들이밀고 있었다. 저게 분명 놈이 구애를 하는 행동이리라. 그 증거로 벨카는 품에 타원형에 가까운 연주황색 열매를 품에 안은 채 곤란한 표정으로 말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어디서 벨카한테 들이대고 있어?!"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났을까. 어셔는 달려오던 기세를 그대로 담아서 소녀의 손이 닿기 쉽도록 고개를 숙이고 있던 말의 머리를 향해 드롭킥을 날렸다.


-푸히히힝!?!


말은 그대로 그의 발에 정통으로 머리를 맞아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고 말았다.  혼란스러운 광경의 중심에서 소녀만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없는 듯 두 눈을 천천히 깜박이고 있었다. 어셔는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


"저런 거 상대해 주지 말고 돌아가자."
"하지만."

벨카는 그에게 맞고 쓰러져 버린 말이 신경 쓰이는지 힐긋힐긋 살폈다. 어셔는 하다 하다 말에게 불편한 감정을 느껴야 하는 이 상황이 탐탁지 않았다.


"나보다  말이 더 중요해?"
"그런  아니야. 아직 먹을 걸 구하지 못했는걸."

어셔는 그제야 그녀의 품에 하나밖에 없는 타원형 과일이 눈에 들어왔다. 소녀가 아무리 적게 먹는 편이라도 저거 하나로 둘이서 배를 채우기엔 무리였다. 그는 자신이 착각했다는 것을 알고 귀가 뜨거워졌다.

"그럼 도와줄 테니까."
"응."

그가 쓰러트린 말이 가끔 경련했지만 그들은 신경 쓰지 않고 음식을 찾아 나섰다. 그러다 발견한 것은 하나의 줄기에 짧고 통통한 여러 개의 열매들이 층층이 매달린 이상한 나무였다. 먹을만해 보이기도 했지만 어셔는 떫은 표정을 지었다.

"이거, 오이 같은 거 아니야?"


세세한 부분은 많이 달랐지만 열매의 모양이 꼭 오이와 닮아 있기 때문이었다. 오이는 숲을 걷다 보면 가끔 발견할 수 있는 덩굴에서 열리는 열매였다. 이것처럼 여러 개가 다발로 열리지도 않고 굵은 나무줄기도 없었지만 비슷한 모양이었다. 이전에 호기심으로 한 번 그것을 먹어보았던 어셔는 배탈이  기억이 있었다. 그 후로 어른들에게 혼나면서 들은 이야기로는 먼 옛날에는 먹어도 문제가 없었지만 언제부터인가 독성이 강해져서 먹을 수 없다고 한다. 다른 열매라는 건 딱 봐도   있었지만 너무 비슷한 모양이라 경계심이 들었다.

"그것과는 전혀 다른 거니까 먹어도 괜찮아."
"그러면 상관없지만, 저거 어떻게 따지?"

벨카가 괜찮다고 하면 괜찮겠지만 문제는 열매가 제법 높은 곳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와 소녀가 아무리 팔을 뻗어도 닿을  같지는 않았다. 줄기의 굵기를 보면 장대로 두드려봐도 끄떡도 하지 않을  같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그녀를 목마 태우는 것뿐이다.

"잠깐, 어깨에 올라타봐."

어셔가 쭈그려 앉아 말하니 벨카는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차리고 그의 어깨 위에 다리를 얹었다.

"무겁지 않을까?"

그러면서도 걱정스러운 듯 묻는 소녀의 말에는 어셔가 직접 일어서는 걸로 대답했다. 소녀가 무거운 편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가 고려하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엇?!"


그는  동굴 속에서 이미 많은 체력을 썼던 후였던 것이다. 그런 상태로 말에게 무리하게 드롭킥을 날렸으니 힘이 다 빠질 만도 했다.  의지와는 다르게 다리의 힘이 풀려 뒤로 넘어가는 중에도 어셔는 제 어깨 위에 있던 벨카가 떠올랐다. 그는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그녀를 제 앞으로 끌어당겼고 덕분에 아래에서 소녀를 받칠  있다. 그의 등 뒤에 닿는 폭신한 풀들의 감촉을 느끼고 있으면 그대로 넘어져도 괜찮았을 것 같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다만 이런 상황은 정말로 예상치 못했다.

"아."
"힉!"


그의 숨결이 닿았는지 벨카의 작은 비명 같은 신음이 들려왔다. 그야 그의 눈앞에는 소녀의 치마 속 광경이 그대로 눈에 들어오고 있었으니까. 호수에 들어갔던 벨카의 옷은 아직 젖어있어 물 냄새가 났지만 그 사이로 언제 맡아도 지겹지 않은 동백꽃처럼 달콤한 향기가 풍겨왔다. 동굴 속에서 인어들에게 그렇게 쥐여짜여 놓고도 소녀의 향기에 반응해 그의 물건이 부풀어 오른다.


"읏! 어셔?"

그 모습을 벨카도 보았는지 당황하며 그의 위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어셔가 그녀의 얇은 허벅지를 잡아 누르는 것이 먼저였다.

"흐윽?!"


그의 코가 속옷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소녀의 은밀한 균열에 닿았다. 조금  확실해진  냄새와 소녀의 향기 속에서 야릇한 향을 찾아내고 코를 이용해 그녀의 속옷을 옆으로 걷어냈다.


"아우, 그런."

그러자 드러나는 소녀의 꽃잎에 그는 입맛을 다시며 혀를 세워 넣었다. 언제 맛봐도 같은 사람이라 믿기지 않을 만큼 달콤함이 그의 혀를 적시며 아리게 만들었다.


"히읏!"


츄읍츄읍 그녀의 균열에 그의 혀가 드나드는 소리가 그의 욕구를 더욱 부추기고 벨카의 신음은 더욱 커져갔다.


"흐으으, 이제 나도 몰라."


그러다 그녀가 그의 바지를 내리는 것과 함께 뻣뻣하게 부푼 그의 성기가 바깥공기를 만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곳을 감싸는 따스하고 축축한 감촉에 소녀가 그의 자지를 물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빨이 닿아 그가 아프지 않게 입술로 물고 그가 가르쳐주었던 대로 혀로 그의 물건을 정성스럽게 핥으며 빨았다.


"읍! 흐읍."

츕, 츄읍, 쭈읍쭈읍, 서로의 소중한 곳을 혀로 핥고 빠는 소리와 벨카가 흘리는 신음이 끝난 것은 어셔가 그녀의 입안에 제 씨를 털어놓았을 때였다. 그의 물건 끝에서 울컥울컥 쏟아져 나오는 백탁액을 소녀가 거리끼지 않고 마시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더 이상 정액이 나오지 않을 때쯤 그가 그녀의 아래에서 빠져나와 일어나면 손으로 입을 가린 벨카가 보였다.


"다 마셨어?"


그녀가 꿀꺽 무언가를 삼키는 소리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으면 소녀는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어셔는 지금 당장이라도 그녀와 관계를 맺고 싶어졌지만.

"악!"
"어셔?"

역시 지나치게 짜였던 탓인지 조금이나마 가셨던 아픔이 다시 찾아왔다. 그러자 걱정이 가득한 금빛으로 다가오는 벨카를 어셔는 그저 괜찮다는 말로 달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나중에 찾아온 회색 늑대의 도움을 받아서야 그들은 따려고 했던 열매를 딸 수 있었다. 이런 건 자신들에게 부탁해도 된다며 이야기하는 회색 늑대의 말을 들으며 그들은 호숫가로 돌아왔다.


"그보다 관계를 맺는 건 상관없지만 장소를 좀 가리는 편이 좋겠군."
"...."

어셔는 벨카에게 들리지 않게 속삭이는 회색 늑대의 말에 귀가 달아올랐다. 그런 그를 소녀가 의아한 기색으로 쳐다보는 것이 보이자 그는 배가 고프다는  급하게 열매로 손을 뻗었다. 다발로 열려 있던 열매가 그의 손에 끊어져 나왔다. 하지만 오이와는 다른 것이라는 건 알고 있어도 비슷한 모습이 쉽게 손을 댈 수 없게 만들었다. 어떻게 먹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그러자 소녀도 열매에 손을 뻗었다.

"어셔. 이건 이렇게."


그 오이 같은 모양과는 다르게 벨카가 꼭지를 중심으로 껍질을 당기자 껍질은 손쉽게 벗겨졌다. 그러자 드러나는 새하얀 과육과 함께 달콤한 향기가 퍼진다. 확실히 그녀에게서 건네받은 열매는 오이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오이는 이렇게 껍질이 두꺼운 편도 아니었고 쉽게 까지지도 않았다. 이내 달콤한 향기를 이겨내지 못한 그가 과육을 한입 베어 물자.

"와."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새하얀 과육을 씹자 부드럽게 씹히고 혀로 굴리자 녹아내리듯 허물어졌다. 전날에 먹었던 열매가 맛이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이건 너무 맛있었다. 크게 베어 물면 고작  입만에 하나를 먹어치울  있을 정도의 크기라는 게 아쉬웠다. 다발에 매달린 열매의 숫자가 정말 많다는 것이 다행스러울 정도였다. 그렇게 그들이 열매들로 배를 채우던 때.

-히~히이이잉.


어디선가 구슬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들려온 곳에는 아니나 다를까.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나무 뒤에서 소심하게 고개를 내밀고 있는 말이 있었다. 그 덩치에 비해 날렵한 몸 때문인지 이 숲의 나무가 유독 두껍기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어셔가 보기에 몸을 전부 가리고 목만 내민 말의 행동은 제법 귀여워 보인다. 말은 자신도 먹고 싶다는 듯이 애절하게 바라보고 있어서 아무것도 몰랐다면 열매를 나누어 줬을 지도 모른다.


그 말이 벨카에게 찝쩍대던 말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몸 전체가 새하얗기 때문일까. 뭔가 신성해 보이기까지 하는 말이지만 그는 회색 늑대에게  말의 실체를 듣고 난 후였다. 그 말과 우연히 눈을 마주친 어셔의 행동은 간단했다.

"벨카도 먹어봐."

그냥 무시하고 제 손에 들려 있던 열매의 껍질을 먹기 편하게 까서 벨카에게 건네주었다.


-히이이이힝!


다시 들려오는 구슬픈 울음소리에 한 번쯤은 더 돌아볼 법도 하건만 그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러자 말은 초조함을 느꼈는지 어셔의 눈치를 보면서도 조금씩 조금씩 소심하게 그들에게 다가왔다. 안절부절하며 덩칫값을 못하는 모습을 보면 없던 불쌍한 마음도 생기려 했지만 저런 겉모습으로 여러 여자들을 꼬셨다던가. 말의 실체를 아는 그는 그런 말을 오히려 괘씸하게 여겨 소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여긴  거슬리니까. 다른 데서 먹자."
"응."


벨카는 말이 신경 쓰이는 듯했지만 어셔의 재촉에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 지으며 이끌려갔다. 자신도 달라는 듯 따라다니는 말을 피해 다니며 과일을 먹다 보면 날은 금세 저물었다.


"이런  어떻게 만들었대."


어셔는 현재 움막의 안에서 소녀의 품에 안겨 누워있었다. 늑대들은 손도 없는데 뼈대가 될 나무 기둥을 세우고  위에 가죽을 덮어 움막을 만들어 놓았으니 재주도 좋았다. 더 독특한  천장을 덮는 부분이 모자랐는지 아니면 일부러 저렇게 만든 건지 움막의 꼭대기에는 덮여있는 가죽이 없어 밤하늘에 총총히 빛나는 별들이 나무 기둥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딱히 춥지도 않으니 문제는 없었다. 오히려 벨카와 함께 누워 별을 바라볼 수 있는  상태가 마음에 들었다. 그래도 밤하늘의 별을 계속 올려다보고 있으면 가슴 한구석이 아려오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내일이면 이 숲도 마지막이구나."


그들은 내일 이 숲을 완전히 떠나기로 결정했다. 오늘은 그가 많이 지쳐있어셔 하루를 더 쉬고 출발하기로 한 것이다. 솔직히 이후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원래 어셔가 마을을 탈출하려고 세웠던 계획은 숲의 다른 마을을 통해 안전하게 숲을 빠져나가는 것이었는데 완전히 반대편으로 나와버려서 세워두었던 계획은 이미 엉망이 된지 오래였다. 이제 와서 계획대로 하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고 돌아가기에도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 뻔했다. 다만 걱정되는  있다면 더 이상 마을이 있을 리 없는 숲의 반대편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의 불안한 마음을 알아챘을까? 토닥토닥 그의 가슴팍을 두드리는 소녀.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그녀의 두근거리는 소리가 그의 불안을 가라앉혔다. 포근하고 따스한 그녀의 품에 안겨 잠시나마 모든 걱정과 불안을 내려놓으면 그는 잠이 드는 것을 알아차릴 새도 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벨카는 그런 어셔를 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일렁이는 금빛이 그의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 금빛에 짙은 슬픔과 애정이 한데 뒤섞여 이슬이 맺힐 듯 맺히지 않을 듯 애달프게 녹아내렸다. 잠에  소년을 하염없이 쳐다보던 소녀는 이윽고 몸을 일으켰다.

"으으음."

그러자 그가 불편한  칭얼거리고 몸을 일으켰던 벨카는 그런 그의 곁에 앉아 머리카락을 쓸어넘겨주며 그의 이마를 어루만졌다. 그가  이상 불편해하지 않을 때까지 그의 곁을 지키던 그녀는 곧 움막의 밖으로 나와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느린  여유로운듯하면서도 비척이는 듯한 걸음으로 걷던 소녀가 도착한 곳은 위아래로 두 개의 달이 서로를 마주 보는 드넓은 호숫가였다. 그러나 그곳에는 이미 또 다른 그림자가 하나 자리 잡고 있었다.

"왔는가."

다름 아닌 늙은 늑대였다. 소녀는 의미를  수 없는 금빛으로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런 몸으로 시험을 치르는 건 무리였어."

그녀의 목소리는 그를 질책하는  같았지만 늙은 늑대는 허허롭게 웃으며 답했다.


"걱정해 준 겐가. 허나 어쩔  없는 노릇이지. 상대를 시험하려는 자, 같은 시험에 들어야 하는 법이니."


그렇게 말하는 늙은 늑대는 오히려 기뻐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높은 하늘에 떠오른 달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후회하고 있어?"
"후회할 일이라.  늙은이에게 케케묵을 만큼 쌓이고 쌓인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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