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7화 〉고대로부터. (27/220)



〈 27화 〉고대로부터.

뚝뚝, 벨카의 머리카락을 타고 흘러내린 물기가 그 붉은빛에 물들어 그 끝에 맺히더니 이내 투명해지고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물에 젖은 검붉은 원피스는 소녀의 피부에 달라붙어 그녀의 맨살을 희미하게 드러내며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벨카의 얼굴은 물속에 오래 있었던 탓에 새하얀 것을 넘어 창백해 보였다. 그럼에도 그녀의 아름다움은 줄어들지 않았고 스러질  처연함만을 더했다.

"미안해. 벨카, 너무 오래 있었지."

지상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호수 속의 광경에 한참을 빠져있었던 어셔는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에야 소녀의 창백한 안색을 발견하고 물과 땅의 경계조차 애매한 수면을 더듬어 올라온 것이다. 크고 작은 물고기들이 초록빛이 우거진 나무의 주위를 날아다니고 그 사이를 오가는 모습은 그가  숲에서 보아온 그 어떤 이상하고 아름다운 광경들과 비교해봐도 독특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라 정신이 팔린 탓이었다.

"더 보고 싶지는 않아?"


그의 사과에 벨카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그녀의 고갯짓에 따라 살랑이는 붉음과 그 끝에서 흩어지는 물방울에 시선을 빼앗기는 것도 잠시.

"괴, 괜찮아."

어셔는 두려워하기는커녕 가까이 다가와 그들의 옷이나 피부를 콕콕 찌르는 물고기들의 모습과 물속을 푸르게 비추는 녹음의 빛이 아직도 눈에 아른거렸지만 애써 부정했다. 하지만 티가 났던 것일까?

"...."

벨카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기 시작했다. 평소와 같은 소녀의 표정이었지만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는 그 모습에는 어셔도 식은땀을 흘렸다. 태양빛을 반사하는 잔잔한 금빛이 진실로 그러하냐고 그를 추궁하는 것만 같았다.


"...조금  구경하고 싶어. 아주 조금만."


결국 그는 소녀의 시선을 이기지 못해 실토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덧붙인 말은 작은 반항이었다.

"보고 싶다면 말해줘. 또 데려가 줄 테니까."


그제야 만족한 듯 벨카는 그를 뭍으로 이끌었다. 투명한 물 아래 자리한 푸른 잔디가 육지까지 이어져 애매했던 물과 땅의 경계였지만 그들의 움직임에 따라 물이 일렁이며 그 경계를 드러내었다. 발을 움직일 때마다 스치던 차가운 물의 감촉 대신 오후의 햇빛에 따스하게 달구어진 땅과 풀잎의 감촉이 확실하게 닿았다. 그들이 완전히 뭍으로 올라온 것이다. 차가운 물에 빼앗겼던 햇빛의 따뜻함이 피부에 닿자 드디어 그 동굴을 빠져나왔다는 실감이 들었다. 그에 기뻐하기를 잠시.

"동굴을 통과했구나. 에라스여."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어셔는 몸을 굳혔다. 슬며시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면 늙은 늑대의 모습이 보였다. 늑대는 마치 대견하다는  혹은 안타깝다는 듯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셔는 그의 시선이 거북했다. 직접 그런 짓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동굴에 들어갔기 때문에 하마터면 죽거나 영원히 동굴 속에 갇힐 뻔했으니까. 그의 시험을 보기로 한 것은 그 자신이었지만 이 늑대는 동굴의 안에서 그가 그런 일을 겪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정말로 알지 못했을까? 어셔는 그런 생각에 그 늑대의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그때 소녀가 그를 보호하려는 듯  품에 끌어안았다.


"어셔는  시험에 응했고 통과했어. 또 무언가 시험하고 싶다는 이유로 간섭한다면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번은 없다고 경고하는 소녀를 흐린 눈으로 바라보던 늙은 늑대는 체념한 기색으로 말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네. 시험을 통과한 이상 그만한 보상이 없으면 안 될 터."

늙은 늑대의 말에 어셔는 호기심을 느끼고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주치는 시선과 일말의 죄책감. 여전히 거부감이 느껴지는 늑대의 눈동자였지만 그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마주 보았다. 그건 그가 이미 그 늑대의 시험을 통과했기 때문이었을까. 혹은 벨카와 함께하는 데에 있어 그가 더 이상 꿀리는 것이 없기 때문이었을까.


"에라스여. 잠시 시간을 내어줄 수 있겠나. 보상에 대해 이야기할 겸. 시험이 어째서 그러한 것이었는지. 그 의미를 이야기하고 싶으니."

어셔는 늑대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벨카는 조금 못마땅한 기색이었지만 그가  듣고 싶다고 이야기하자.


"하아. 알았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제 품에서 어셔를 풀어주었다. 그리하여 그는 지금 늙은 늑대와 함께 동굴 속을 걷는 중이었다. 벨카와 어셔가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늙은 늑대가 나왔던 바로 그 동굴이었다. 그 기괴한 생물들이 있었던 동굴이 떠올라 무서웠지만  동굴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그 동굴이 돌들이 녹아내린 듯 끈적하고 눅눅한 모습이었다면 이 동굴은 거대한 바위로 이루어져 밋밋하고 투박한 모습이다. 들어오기 전에 한 늑대에게서 건네받은 횃불을 들고 그의 뒤를 따라서 천천히 걸으면 동굴의 벽에 새겨진 그림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그림들은 모두 독특한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도끼를 든 사람들이 어디론가 향하는 모습, 그리고 나무를 베어내는 모습들이었다. 순조롭게 나무를 베던 그들을 늑대들이 포위하고 늑대들은 사람들을 공격하는 모습이 이어서 그려져있다. 하지만 그들은 숲 안으로 도망치기 시작했고 늑대들은 계속 그들을 쫓고 쫓아 철저하게 사냥했다. 그러나 단 한 명만큼은 놓쳐버리고 말았다. 이 외에도 많은 그림들이 있었지만 어셔가 알아볼  있었던 것은 고작 여기까지였다. 하지만 이 벽화들이 무슨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이건..."


마을에서 마스카피르가 열리게  이유가 되었다고 전해지는 이야기가 아니던가?


"이 그림들은 우리의 선조가 예언한 것들이다."

벽에 새겨진 그림들을 그가 구경하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늙은 늑대가 입을 열었다. 그의 걸음은 동굴에 들어왔을 때부터 여전히 어셔가 천천히 걸어도 따라잡을  있을 만큼 느렸다.


"어떻게?"


늑대의 손으로 저런 것을 그렸다는 것일까. 믿기지 않을 만큼 동굴에 새겨진 그림들은 섬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저 그림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까지 모두  수는 없었지만 동물이나 사람들의 모습은 쉽게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글쎄. 우리가 그린 것은 아니니 알 수 없는 일이지. 이 예언이 실현되기 전까지. 우리는 단순한 기록이라 생각했고 정말로 예언이라 생각하지는 못한 채. 사명만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여겼으니."


어셔는 늑대가 말하는 사명이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궁금했지만 입에 담을 수 없었다. 그렇게 이야기하며 천천히 동굴을 걸어가는 늙은 늑대의 뒷모습이 지쳐있는 것처럼 초라하게 보였기 때문에. 결국 멈춰버린 대화. 그들은 침묵 속에서 동굴을 걸어갈 뿐이었다. 이윽고 그 끝에 도달한 곳은 지금까지 그들이 지나온 동굴보다 큰 공간이었다. 횃불을 좀 더 높이 들어 보아도 빛이 제대로 비치치 않을 정도로 넓은 공동. 그 중심에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돌 무더기?"

처음에 그건 단순한 돌무더기처럼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서야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무엇을 조각했었던 것인지  수는 없었지만 무너져내린 석상이었다. 조각조각 떨어진 한 덩이 한 덩이에 단순한 돌이라 보기엔 조각한 것처럼 매끈하고 불규칙한 형상이 보였다. 그건 더 이상 맞출 수 없는 퍼즐 조각처럼 무너져내린 조각상이었다.


"이건?"


그 처참한 모습에 묻자. 늑대는 아련한 눈으로 그것을 보았다.


"내가 지켜야 했던 것이지. 이렇게 무너져버렸지만 말이다."

그 조각상 무더기에 다가간 늙은 늑대는 조각상을 앞발로 뒤적거리며 무언가를 찾는 듯하더니 이내 무언가를 입으로 물어 꺼냈다.

"자, 가져가거라."

그리고 그것을 그에게 건네는 늙은 늑대. 그가 건넨 것은 밤하늘의 일부분을 그대로 떼어내 담아 놓은 듯한 푸른 구슬이었다. 횃불 아래에서도 선명한 푸른색을 중심으로 하얀색과 금빛의 은하수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구슬의 모습이  봐도 귀한 물건처럼 보였다.

"에라스여. 그대가 그 동굴을 통과한 것을 진심으로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게 무슨 말이야?"

이 늙은 늑대는 그에게 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벨카는 볼 필요가 없다 하는 시험을, 그를 도발하다시피하며 보게 한 시험을 통과해서 다행이라 하다니.

"그 동굴은 삿된 것을 통과시키지 않는다. 그 동굴을 통과했다는 것은 그대가 적어도 삿된 자는 아니란 것이겠지."


그가 묻기 무섭게 그는 말을 이었다.

"그 동굴을 통과해야만 지금 그대가 쥐고 있는 물건을 보고 만질 수 있는 권한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동굴 속에서 겪었던 일들에 대한 것은 뭐라 할 말이 없구나. 그 일들이 그대에게 씻을  없는 상처를 주었다면 사과하마. 그대가 바란다면 설령 목숨이라 해도 내놓을 테니 무엇이든 말해보거라. 늙은 늑대의 결연한 모습에 어셔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대체 왜 그랬던 걸까."

늙은 늑대에게서 구슬을 받은 어셔는 홀로 동굴 밖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와 함께 들어왔던 늑대는 조금  있고 싶다고 했기에 두고 온 상태였다.


"그런데 정말 많네."

그는 횃불에 비치는 동굴의 벽에 새겨진 수많은 그림들의 모습에 감탄하며 발걸음을 늦추었다. 들어가는 길에도 얼핏 보긴 했지만 모든 벽화들을 살피기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천장까지 빼곡히 그려진 벽화들은 그만큼 많았다. 하나하나 살펴보다간 며칠을 보낼 것 같아 그림들 중에서도 유독 크고 눈에 띄는 그림들만을 살폈다. 무너져내리는 높은 탑이라던가 물에서 하늘로 솟아오른 섬, 물이 안개로 바뀌는 듯한 그림. 자세한 의미를 알  없는 그림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의 눈에 가장 띄었던 것은 고개를 숙여 나무꾼과 마주 보고 있는 거대한 드래곤의 그림이었다.

드래곤, 날고 기는 많은 몬스터들 중에서도 왕이라 불리며 인간과 함께 유이하게 마법을 쓸 수 있는 존재. 그렇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마법은 드래곤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다.  벽화에 그려진 드래곤은 모든 것이 그가 알고 있는 것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몸을 감싼 갑각과 눈이 없는 모습만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어셔는 그 벽화에 잠깐 손을 올려 쓸어보았지만 만져지는 건 역시 딱딱한 돌의 감촉이다. 정신을 잃었을   드래곤의 모습을 보았던 것 같은데. 이런 드래곤이 대체 왜 그의 꿈에 나타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고민하다가 그를 기다리고 있을 소녀가 떠올라 잠시 멈추었던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나온 동굴의 밖. 늑대에게서 받은 구슬은 동굴 안에서 횃불에 비친 모습도 아름다웠지만 햇빛을 받으니 그 이상으로 더욱 아름다운 푸른빛을 뽐내고 있었다. 드높은 밤하늘을 작은 구슬 속에 집어넣은 듯한 푸르른 남색에 골고루 뿌려진 금빛과 하얀 줄무늬는  멀리에서 빛나는 별과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이 구슬은 사람을 매료시키는 듯한 묘한 느낌을 주었지만 어셔는 그보다는 이것을 받고 동굴을 나올 때 늙은 늑대가 했던 말이 더욱 신경 쓰였다.

"그 돌은 그대가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을 때.   번, 대신 대가를 치러 줄 거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대가를 대신 치러 준다니.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이 무엇을 말하는지도 제대로 알  없었다. 특히  뒤에 이어진 말은 더욱.


"다만 아가피아에게 그 돌의 존재는 비밀로 하는 것을 추천하고 싶군."


아가피아라는 건, 역시 벨카를 말하는 거겠지. 왜 이 돌의 존재를 그녀에게 비밀로 하라는 건지 어셔는   없었다. 여차하면 이 돌이 어떤 것인지 벨카에게 물어보려고 했는데. 그의 시야에 때마침 소녀의 모습이 들어왔다. 단순히 붉다고 말하기엔 어딘가 모자란다고 느끼고 마는 따스하고 부드러운 붉음, 그런 머리카락을 잔디 위에 늘어트린  젖은 옷 또한 그대로 입고 쓰러진 통나무 위에 앉아 호수를 바라보고 있는 소녀의 뒷모습에 그가 소리 높여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벨카...!"

진중하게 이야기하던 늙은 늑대의 모습이 다시 떠오르는 바람에 새된 목소리를 내고 말았다.


"어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서 이상을 느꼈을까. 소녀가 의아한 기색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 있었어?"
"어, 아무것도 아니야."

걱정스러운 금빛이 자신을 향하자. 어셔는 약해지는 마음에 자신이 들고 있는 돌을 들킬까. 얼버무리며 주먹을 쥐어 숨겼다. 벨카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도 아무  없이 손으로 옆자리를 톡톡 두드렸다. 같이 앉자고 말하는 손짓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하얀 소복과 가면을 피해 천천히 다가가 그녀의 옆에 앉으니 그의 발끝에 차가운 물이 닿았다.


"여기까지 물이 있었구나."

너무나 투명한 물 때문에 소녀가 물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는 것조차 알아차리는 것이 늦었다. 땅과 물의 경계를 가리지 않고 자라난 풀과 들꽃들 때문이기도 했다. 그 모습에 어셔는 때마침 생겨난 궁금증을 이용해 어색한 마음과 분위기를 없애보려 했다.


"보통 호수 안에는 이런 풀들이  자라지 않아? 여긴  호수 안에서도 풀과 나무가 자라?"


벨카는 어셔의 말에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때문에 그는 자신이 들고 있는 돌을 들킨 것이 아닐까 불안해졌지만.


"호수 안에서 풀과 나무가 자라는 건 아니야."


다행히 그녀는 한  눈을 감더니 투명한 호수로 시선을 돌리며 답해주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상한 말.


"여기는 원래 호수가 아니었으니까."
"원래 호수가 아니라니. 아무리 봐도 호수인데?"

어셔는  물속에서 보았던 물고기들을 떠올렸다. 환상이라고 느껴질 만큼 아름다운 광경이긴 했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그의 피부를 콕콕 찔러보던 물고기들을 환상이라 말하는 건 이상했다.


"호수는 맞아. 하지만 원래 이렇게  크기는 아니야. 이곳은 지대가 낮으니까 이 시기만 되면 주변에서 물이 흘러들어와 이렇게 호수가 아니었던 곳까지 물이 불어나는 거야."


벨카의 말을 듣고 그는 다시 커다란 호수를 바라보았다. 이 숲은 정말로 아름다우면서 알 수 없는 것들 투성이였다. 그 동굴도 그렇고. 동굴을 떠올리자마자 함께 떠오르는 괴상한 물고기들과 인어들의 모습에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 모습을 떠올리고 있으면 아직도 삭신이 쑤시고 그곳이 아팠다. 그런 그를 끌어당기는 미약하지만 익숙한 손길이 있었다.


"아."

그리고 그를 비추는 금빛. 그의 뒷머리에 닿은 부드러운 감촉에 소녀가 그에게 무릎을 내주었음을  수 있었다. 쿵쿵 빠르게 두근거리던 심장이 천천히 울리고 느껴지던 고통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힘들었지."
"...응."

울컥 솟아오르는 눈물과 매여버린 목에 어셔는 그녀에게 답하는 목소리가 떨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그가 끝내 울지 않은 것은 그를 바라보는 소녀의 금빛에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한 죄책감이 맺혀 떨어지려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울어버린다면 그녀의 죄책감이 더욱 커져버릴  같았다.


"미안해. 그런 일을 당하는데.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그런 벨카의 말에 어셔는 그녀가 맥에게 범해졌을 때. 어째서 그에게 괜찮다고 말하며 내색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 자신도 벨카가 범해졌을 때. 저런 표정을 짓고 있었을 테니까. 그녀에게 무겁기만 한 죄책감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소녀가 너무나 소중한 나머지 스스로가 느끼고 있는 아픔보다 그녀가 느끼는 슬픔이 더 절절하게 와닿아서. 그러니까.


"괜찮아."

그의 말에 금빛이 일렁이더니 이내 감정을 숨기려는  소녀가 눈을 감았다. 사라져버린 금빛에 작은 아쉬움을 느끼면서도 어셔는 그녀를 지켜보았다. 그들은 그렇게 침묵하며 그대로 시간을 흘려보내었다. 슬프고 괴로운 감정이 가라앉아 서로가 아픔을 느끼지 않을 때까지. 침묵 속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와 바람에 흔들리는 풀과 나무의 소리가 곁을 머물렀다. 소녀와 함께하는 이 순간이 이렇게나 행복한데 하염없이 흐르기만 하는 시간이 안타까운 이유를 어셔는 아직  수 없었다.

-꼬르륵

그러다 그의 뱃속에서 들려오는 뱃고동 소리에 그는 자신이 밥을 먹은 지 꽤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에 먼저 반응한 것은 그 소리의 주인인 어셔가 아닌 그에게 무릎을 내주었던 벨카였다.


"먹을 걸 가져올게."

자신의 다리를 베고 있던 그를 조심스럽게 일으키고 기다리고 있으라 말하며 어디론가 걸어가는 소녀의 뒷모습을 아쉬운 마음에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자신의 등 뒤에서 느껴지는 누군가의 기척에 뒤돌아보자.

"시험을 무사히 통과했구나."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건 힐리스라 불리는 회색 늑대였다.


"그 시험이란 건 결국 무슨 의미가 있었던 거야?"


그녀의 모습에 마침 잘 됐다 싶은 마음으로 그는 물었다. 늙은 늑대가 무어라 말했었지만 어셔는 솔직히 그의 말을 이해할  없었다.


"아마도 족장님께서는 숲의 주인이 걱정된 것이 아닐까 싶군."
"벨카가?"
"내가 족장님은 아니니 확실하게 대답할 수는 없다."

회색 늑대의 말은 의외의 것이었다. 분명 이곳에 왔을  둘은 처음 만났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걱정할 정도로 친근한 사이였던 걸까? 그녀는 부족장 정도가 아니라면 족장의 의중을 제대로  수 없을 거라 이야기했다. 그러다 동굴을 빠져나왔을 때 눈을 마주친 은색 늑대의 모습이 떠올랐다.


"혹시 그 은색 늑대를 말하는 거야?"
"그래, 그는 벨리치예라 한다."
"나는 그 늑대가 우두머리인 줄 알았는데."


일단 늑대들 중에서 가장 크기도 크고 가장 멋진 털색을 가지고 있어서 처음에는 영락없이 그 늑대가 우두머리라고 생각했었다. 늙은 늑대에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후후, 그가 지금까지 태어난 전사 중에 가장 뛰어나기는 하지."

회색 늑대는 실제로 은색 늑대가 다음 족장으로 예정되어 있다고 말했으니 그가 아주  못 본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 족장이라는 늑대는 너무 늙고 지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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