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6화 〉고대로부터. (26/220)



〈 26화 〉고대로부터.

손목을 잡힌 순간부터 온갖 생각들이 어셔의 머릿속에 빠르게 떠오르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이대로 인어들에게 붙잡혀 영원히 동굴 속에 갇혀 살아야 하는 건 아닐까? 발버둥 치는 것마저 잊고 굳어있었을 때. 그는 붙잡은 인어가 한참이 지나도 아무런 말이나 행동이 없다는  눈치챘다.

"자고 있잖아."


그가 도망치려는 것을 눈치채고 붙잡은 줄 알았던 인어는 여전히 잠들어 있는 모습이었다. 고작 잠꼬대에 놀란 것이 한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안심했다. 긴장이 플리면서 수초를 짚고 있던 손에 힘까지 풀려 그대로 물속에 빠질 뻔한 그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손목을 잡혀있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조심스레 손을 움직여보니 그를 붙잡고 있는 힘은 생각보다 강하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깨어나기라도 할까 인어의 손을 조심스레 떼어내고 물속으로 들어가면 그가 이곳에서 처음 물에 빠졌을  보았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어두컴컴한 물속. 그곳을 밝히고 있는 것은 바닥이 있는 지도 의문스러운 저 어둠 속에서 뻗어 나온 푸른빛을 내는 기이한 수초들이다. 거대한 기둥과도 같은 수초들은 포하티가 그에게 먹였던 초록빛 열매를 군데군데 매달고 있었다. 숨을 쉬어야 하기 때문에 깊이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수초들의 간격은 아슬아슬하긴 해도 줄기를 잡고 옮겨가는 방식으로 어찌어찌 움직일 수 있을  같았다. 다만 신경 쓰이는 건 수초 위에서 잠든 인어들이었다. 수초 위에만 상반신을 올려놓고 하반신은 물에 담아둔 건지 그들의 커다란 꼬리지느러미들이 수초 위에서 살랑거리는 모습이 몇몇 보인다.


아마도 인어들은 저렇게 잠드는 모양이었다. 저들의 꼬리에 닿아서 깨우는 일이 없도록 어셔는 먼저 꼬리지느러미가 보이지 않는 수초를 향해 손을 뻗으며 원래 있던 수초에서 떨어졌다. 헤엄을 칠 수 없어서 살짝 아래로 내려온 것 같았지만 다시 수초를 타고 오르면 그만이었다. 덕분에 이대로 반복하다 보면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그가 옮겨  때마다 휘청 기울어지는 수초의 모습이 불안했지만 다른 방법이 없으니 최대한 조심하는 것이 한계였다.

"흡, 하."

숨이 막힐 때면 수초를 타고 올라가 소리 없이 공기를 마시며 점점 멀어지는 인어들의 동태를 살폈다. 다행히 그들은 깨어나지 않았고 어셔는 느리지만 착실하게 수초와 수초를 옮겨 갔다. 하지만 어셔는 점점 더 초조해졌다. 더 이상 인어들이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왔는데도 불구하고 좀처럼 동굴의 출구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쪽이 출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최악의 상황마저 떠올랐다. 그래도 아직 동굴은 이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쯤 수초 사이를 옮겨가길 반복했을까.

-!!!


 뒤편에서 여인이 외치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어셔의 귀에 들려왔다. 거리가 상당히 멀어졌음에도 들려오는 것은 이곳이 조용한 동굴이기 때문이겠지.  소리를 들은 그는 차가운 물속으로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땀이 몸을 타고 흐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최대한 빠르게 수초와 수초 사이를 옮겨갔지만 차오르는 숨을 내쉬려 수면 밖으로 고개를 내밀 때마다 수많은 물소리들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초조함은 그의 가슴을 쥐고 누르기 시작했다. 그러다 그는  이상 붙잡고 옮겨갈만한 수초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에 당황스러워하며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면 역시나 지금까지 계속 보이던 빛나는 수초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조금 떨어진 곳에는 벽이 수초들의 빛에 희미하게 비쳐 보였다. 출구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어셔가 허망하게 그 벽을 바라보고 있으면 부쩍 가까워진 물소리들이 들려왔다. 이대로 인어들에게 잡혀가는 것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한 순간. 그는 고요하다고만 생각했던 물이 흐르고 있는 것을 알아챘다. 이제 보니 이곳의 수초들은 뻣뻣하게 수면 위로 솟아있는  아니라 약간 기울어져 있었다. 어쩌면 이건.

"저기 있어!"
"잡아!"

그는 뒤에서 들려오는 인어들의 목소리에 더 이상 생각할 틈도 없이 수초를 밀어내고 어설프게나마 헤엄을 쳤다. 물의 흐름 덕분에 그의 어설픈 몸짓에도 어셔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인어들의 헤엄 실력에는 못 미쳤던 것일까? 그의 등 뒤에 닿는 누군가의 손길에 결국 잡혔다고 생각한 순간.  손길은 그를 붙잡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의 등을 밀어주는 것이 아닌가? 그에 놀라 뒤를 보려 했지만 그는 이미 거세진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있었다.


"콜록! 콜록!"

언제 정신을 잃었던 것일까. 문득 떠오르는 의식 속에서 기침하고 있으면 그가 건조한 모래 바닥이 느껴졌다. 이번에야말로 동굴 밖이라고 생각하며 눈을 뜬 그에게 보인 것은 실망스럽게도 여전히 동굴의 안이었다.


"어?"

그러나 다른 누군가 그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어셔에게 눈앞의 광경은 얼빠진 소리를 내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어셔는 지금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동굴 속에서도 밝게 빛나는 호수의 위에서 어느 곳 하나 다른 색이 보이지 않는 새하얀 말이 목욕을 하고 있었다. 다만 그 말의 머리 한가운데에 자리한 뿔이 문제였다. 처음에는 그도 단순한 착각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순백의 말과 그 말의 머리에 나있는 뿔은 사라질 기색이 없었다.


-푸르르르르!


아니, 오히려 환청까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말이 빛나는 호수에서 빠져나와서 몸을 털며 내는 소리가 어셔의 귀에 생생히 들려왔으니 말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지금  광경이 터무니없는 환상, 혹은 꿈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순백의 말이 호수 속에서 거칠게 움직이며 튀어 오른 물방울이 그에게 닿자 사라지고 말았다.


"차가워! 차가워...?"

그의 피부에 닿은 물방울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꿈은 보통 이런 감각까지 느껴지지 않는 편이 아니었던가? 너무나 생생한 물의 감촉에 어셔가 당황하고 있을 때. 순백의 말이 그에게 다가왔다. 그는 그 말이 다가오자 곧바로 경계했다. 머리에 달린 뿔만 제외한다면 단순한 말일뿐이기 때문에 과한 반응이라고 그도 생각했다. 그럼에도 어셔는 안심할  없었다. 그 인어들에게서 겨우 벗어났지만 그는 아직도 동굴의 안에 있었다. 처음  동굴에 떨어졌을 때 평범한 돌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입을 쩌억 벌리며 그를 먹으려 했다.


인어의 아름다운 모습에 방심했다가 그대로 그들에게 쥐여짜였다. 때문일까 저 말이 겉보기에만 말일뿐 전혀 다른 꺼림칙한 생물일 거라는 모른다는 의심을 그는 떨칠 수 없었다.  동굴에 들어온 뒤로 겉보기만 그럴싸할 뿐 정상적인 생물과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특히  말의 머리에 달린 뿔이 더욱 의심의 끈을 놓을  없게 만들었다. 그래서였다.

"다가오지 마!"


어셔는 그것이 그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외쳤다. 저 말이 다음에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어 두려운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푸르릉.

말의 짧은 울음소리와 함께 발굽 소리가 멈추었다. 그에 의문을 느끼며 조심스레 돌려버렸던 고개를 다시 돌려보면 놀랍게도 말이 멈춰 서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모습에 당황하는 것도 잠시.  커다란 눈을 뒤룩뒤룩,이라 표현하기엔 어딘가 애교 있는 느낌으로 굴리며 그의 눈치를 보던 말이 조심스럽게 다리 하나를 그의 가까이로 옮기는 모습에 그가 뒤로 물러서자 말이 황급히 다리를 제자리에 가져다 두는 모습을 발견하고 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말의 체격은 어셔보다도 컸다. 비교하자면  동굴로 들어오기 전에 보았던 은색 늑대를 제외한 다른 늑대들 정도의 크기일까. 저 말이 지상의 말들과 똑같은 초식 동물이라고 해도 어셔가 힘으로 이기는 것은 불가능할 텐데도 그의 눈치를 보는 말의 모습이 어색해 보였다. 저 순한 모습을 보면 그를 해칠 의도는 없어 보이지만 그럼에도 어셔는 섣불리 경계를 풀 수 없었다. 어셔는 여전히 그를 쳐다보고 있는 말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주변을 살폈다.


그가 아직 동굴의 안이라는 것은 확실해 보였지만 놈들이 있었던 곳과는 다른 곳으로 보였다. 아까와 같은 빛나는 수초들은 보이지 않지만 어째선지 동굴의 안은 지나치게 밝다. 아마도 그건  말이 목욕을 하던 빛나는 호수 때문이리라. 그가 조금만 더 여유로웠다면 이 광경에 감탄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어셔는 너무나 예민해져 그런 것들을 감상할 틈이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대치하고 있었을까?


-...푸릉.

말은 안절부절하며 발을 동동 구르는 것처럼 보이더니 한숨을 내쉬듯 소리를 내고 저벅저벅 그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주제에 귀찮다는 기색이 가득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이 어이가 없어 어셔는 그 말을 멍하니 쳐다만 보고 있었다. 말의 행동에 어셔가 방심하는 순간. 다가온 말이 그의 뒷덜미, 옷자락을 이빨로 물었다.

"케엑!? 콜록! 자, 잠깐만! 갑자기 무슨!"

그리고는 그를 등에 강제로 태운 말이 방금 전까지 자신이 목욕하고 있었던 호수에 뛰어드는 것이 아닌가? 때문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눈을 감고 최대한 힘을 줘서 말의 목을 붙잡는 것뿐이었다. 말의 목은 감탄이 나올 만큼 단단하고 튼튼한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어셔에겐 잡기 불편하다는 감상밖에 주지 못했다. 말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를 등에 태우고 빛나는 호수에 뛰어들었는지 어셔는 도저히 예상할  없었다. 하지만 물에 잠수하는 것은 잠시뿐이었던 건지 그는 곧  밖으로 빠져나오는 것을 느꼈고 소리쳤다.


"너!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러나 그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얼굴에 남은 물기를 팔로 닦아낸 어셔가 눈을 떴을 때. 어셔와 말은 어째서인지 태양빛이 내리쬐는 투명한 호수 위에 서있었고 그 호수의 주변에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늑대들이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늑대들은 놀란 표정이었지만.

"에라스가 돌아왔다!"
"동굴을 통과했어."
"선택받을 만한 이유가 있었던 건가."

그들은 그를 반기고 있었다. 가장 크기가 크기 때문인지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은색 늑대였다. 어셔가 그와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을 때. 늑대는 이미 돌아서서 뒷모습만을 보이고 있었다. 그는 하늘에서 내리쬐는 태양빛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 어둡고 차가운 동굴 속에 있었는데. 말에게 강제로 태워져 호수에 빠지니 동굴 밖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 무서웠던 경험들이 환상처럼 흩어져 버린 기분이었다.


"윽!"

그러나 그의 물건에서  아픔이 느껴졌다.  고통이 멀어져 가던 현실감을 그에게 상기시켰다. 인어들에게 쥐여짜인 탓인지 그의 물건은 여전히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이  달린 말을 만난 순간부터 좋지 않은 꿈이라 치부될 뻔했던 동굴 속에서의 일들이 다시 현실감을 되찾았다. 그를 노리던 기괴한 생물들과 수많은 인어들의 모습이 함께 떠올라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푸웁!"

그때 갑자기 그의 얼굴을 덮치는 차가운 호숫물에 생각이 끊어졌다.


-푸르릉!
"갑자기 뭐야? 또."


그 이유를 찾으니 말이 흥분이라도  듯 거친 숨을 내며 과장스럽게 물장구를 치고 있었다. 말이 원래 수영을 잘하는 동물이었는지   없었지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작은 나룻배처럼 잔잔하게 물 위를 헤엄치던 모습은 사라지고 거칠게 수영하는 모습은 당황스러웠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얌전했던 말이 이러는 것에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 그는 말의 시선이 한 곳에 고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가 발견한 것은 내리쬐는 햇볕을 받아 영롱하게 빛나는  쌍의 금빛이었다. 그 금빛과 마주하자마자 숨조차 쉬기 힘들 정도로 차오르는 기쁨에 잠시 헛숨을 들이켰던 어셔는 한껏 소리를 높여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벨카!"


그 금빛의 주인은 다름 아닌 소녀의 것이었기에. 몸집이 커다란 늑대들 사이에 있기 때문에 묻혀 보이지 않을 만도 하건만 늑대들 사이에서도 그녀의 붉음은 묻히지 않고 피어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소리쳤기 때문일까?

-히이이이이잉!!
"엇?!"


말은 놀라서 어셔를 등에서 떨어트렸고 그는 호수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첨벙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 위까지 삼켜오는 물에 그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어셔는 허우적거리며 붙잡을 것을 찾아보았지만 역시 손에 잡히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그녀의 근처를 스치는 위협적인 물살에 허우적거리는 일조차  수 없었다. 아마도 그건 말이 발을 움직이며 일어난 것이리라. 그를 등에서 떨어트리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하마터면 말에게 얻어맞을 뻔한 그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이놈의 말을 확 그냥!'


물에서 빠져나오면 그 잘난 뿔을 꺾어버리겠다고 생각하면서 헤엄쳐보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의 몸은  위로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혹시 또 엄청나게 깊은 곳에 빠진 것은 아닐까? 동굴 안에 있었던 그 깊은 물속이 떠올라 덜컥 겁이 났다. 물 아래에 완전히 가라앉은 것도 떠있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이기 때문에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눈을 감고 있는 그는 끝도 없는 어둠 속에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겨우  끔찍한 동굴을 빠져나왔는데 이대로 물에 빠져 죽는다니 어셔는 억울했다. 눈을 뜨고 싶지만 뜨고 싶지가 않았다. 또 그런 곳이라면 어셔는 절망하고 말 테니까. 그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그때였다.


[눈을 떠도 괜찮아.]


귀가 물에 막혀버려 들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누군가의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눈에 물이 들어오면 따갑고 아팠다. 그 감각이 영 적응이 되지 않아서 계속 눈을 꼭 감고 있었는데. 눈을 뜨라니.

[겁먹지 않아도 돼. 조금만 아주 조금만 떠도 좋으니까.]

혼란스러워하는 그의 마음을 아는 것처럼 더 선명해진 미성이 상냥하고 달콤하게 그의 가슴을 어루만졌다. 아아, 이 목소리를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어셔는 물이 눈에 직접 닿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잊고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러자 눈에 들어온 광경에 그는 이곳이 물속이라는 것을 잊었다. 벨카가 그 선명한 붉음을 꼬리처럼 늘어트리고 검붉은 원피스 자락을 나풀거리며 드문드문 하얗고 노란 꽃들이 피어난 초록빛 잔디밭을 천천히 걸어서 그에게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허공에 떠있는 그의 몸과 움직일 때마다 공기 대신 느껴지는 무겁고 차가운 물의 감촉은 이곳이 물속이라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의 눈은 지상을 담고 있는 것일까? 그 꿈과도 같은 광경에 어셔는 소녀가 다가올 때까지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드디어 그녀가 그에게 도달했을 때. 벨카는 그가 내려다보지 않으면 안 되는 위치에 서있었다. 그는 아직도 허공에 떠있는 상태였고 소녀는 땅에 서있는 모습이었으니 말이다. 이내 그녀는 어셔를 향해 두 손을 뻗었다. 마치 자신의 손을 잡고 내려오라는 듯한 행동에 그가 조심스레 소녀의 손을 붙잡자.

이윽고 어셔는 벨카의 손에 이끌려 드디어 땅에 두 발을 붙일 수 있었다. 문제는 이곳에서는 숨을 쉬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윽! 숨이!'


어셔는 숨을 참는 것에 한계가 오는 것을 느꼈다. 때문에 그의 몸이 제 주인의 의사를 무시하고 숨을 쉬기 위해 공기가 아님에도 숨을 들이켜려는 순간. 그의 입을 막는 부드러운 무언가가 느껴졌다.

'숨이... 쉬어져?'

막혀버린  때문에 함께 감아버렸던 눈을 다시 뜨자 그는 자신의 눈앞을 가득 채우는 금빛을 마주할 수 있었다. 벨카였다. 그녀가 그에게 입을 맞추어 숨을 불어넣어 준 것이었다. 숨을 되찾았음에도 숨이 넘어갈 듯한 아찔한 감각을 느끼며 어셔가 한숨을 돌리자 소녀는 그에게 다가왔을 때처럼 소리 없이 물러났다.

"벨카, 여기는 어디야?"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물에서 말하려는 탓인지 꼬르륵 공기방울이 떠오르고 물속에 묻혀 그 소리조차 희미했지만 소녀는 알아들은 것 같다.

"호수 안이야."

어쩐지 방금 들었던 목소리와는 살짝 다른 느낌이었지만 벨카가 입을 열자 그처럼 작은 공기방울이 위로 올라가고 물속이라 해도 해칠 수 없는 고운 미성이 그의 귓가를 간질였다. 그보다 놀라운 것이 있었다면.


"여기가 호수 안이라고? 하지만 아무리 봐도."


벨카는 호수의 안이라 말했지만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면 파릇파릇한 풀들과 언뜻 벨카와 만나던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는 언덕에 흔히 자라나던 작은 꽃들의 모습도 보인다. 도저히 물속에서 자라는 식물들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작게만 보아도  정도인데 더 깊은 곳을 중심으로 바라보면.

"저기 나무들도 있잖아."


오목하게 파여진 저 아래에 자리한 나무들도 고작 다섯 그루 정도밖에 없었지만 그가 언제나 기억하던 숲의 나무들과 다름이 없었다. 물조차도 지나치게 투명하고 맑아서 눈으로도 확인할 수 없는 지금. 이곳이 물속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숨을 쉴 수 없다는 것과 움직임을 미묘하게 방해하는 무거운 물의 감촉뿐이었다. 그러던 그때.

"어?"

그는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그 믿지 못할 광경에 휙 고개를 돌린 어셔는 그것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건 바로 연한 노란색의 줄무늬가 인상적인 물고기가 허공을 헤엄치듯 날아다니는 모습이었으니까.


"정말로 물속이었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 비현실적인 광경에 부정해버렸던 사실이었다. 그러나 저렇게 물고기가 헤엄치는 모습을 본다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물고기가 헤엄쳐 떠나가는 꼬리의 끝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에게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더 구경해보고 싶어?"

원한다면 이끌어주겠다는 듯 손을 붙잡은 벨카에게 그는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의 손을 붙잡고 있던 소녀가 발로 땅을 밀어내며 날아올랐다. 이곳이 물속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 광경을 날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날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도착한 곳은 멀리서 보았던 나무였다. 늘 올려다보았고 올려다보아야만 했던 나무를 날아다니듯 헤엄치며 내려다보는 감각은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감동을 주었다.


나무들 사이로 날아다니는 형형색색의 물고기들은 그들이 다가가면 도망치기는커녕 호기심을 보이는 듯 다가오기까지 했다. 어셔가 숨이 막힐 때면 소녀가 그에게 숨을 불어 넣어주어야만 했지만 그 약간의 불편함이 오히려 기뻤다. 서로의 입술이 맞닿을 때마다 느껴지는 두근거림, 상냥하고 따스한 촉감에 지금까지 동굴에서 느꼈던 불안, 걱정, 근심, 불쾌함 같은 안 좋은 감정들이 깨끗하게 씻겨내려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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