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늑대의 품.
"어셔."
이곳에 오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애처로운 금빛이 떠올랐다. 가지 말라는 절박한 걱정을 한가득 담아 놓고도 그를 보내주었던 소녀를. 만일 그가 이대로 이것들에게 잡아먹혀서 동굴을 나가지 못한다면 벨카는? 그녀는 어떻게 되는가? 그런 생각이 들자 어셔는 더 이상 이 괴상한 물고기들이 두렵지 않았다. 더 두려운 것이 있었으니까. 그는 있는 힘껏 팔을 휘둘러 자신을 향해 다가오던 손들을 뿌리쳤다. 닿기만 해도 끌려들어 갈 것만 같았던 그들의 손이 그의 손에 허무하게 튕겨나가지만 그것은 고작 일부였다. 이미 그것들은 가까이에 다가와 있었고 몇몇은 그를 물고 있었다.
"끄악!"
이빨이 살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감각에 어셔는 비명을 질렀다. 그 감각에 그는 가끔 사냥을 하러 간다던 마을 사람이 숲에 설치하곤 했던 덫이 떠올랐다. 강철로 된 날카로운 이빨만이 남아 배를 채울 수는 없음에도 걸려드는 것이 누구든 무엇이든 끝까지 물고 늘어지려는 것처럼 땅에 놓이던 덫. 직접 걸려본 적은 없었지만 만일 걸린다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수많은 덫에 한 번에 걸린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것들의 이빨은 날카롭고 거칠었다. 심지어 그것들이 물고 있는 입의 안쪽에서는 손과도 같은 혀까지 그의 살을 붙들고 있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저리 꺼져!"
-끄르륵.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것들 하나하나의 힘은 몬스터치고는 오히려 마을의 어른들보다 약했다. 그래도 무시할만한 수준의 힘은 아니지만 그가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그들의 끔찍한 모습 때문에 패닉에 빠지고 말았었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그것들이 한꺼번에 공격을 하는 것은 힘들다. 한꺼번에 공격해온다고 해도 그들의 크기로 보아선 여섯 마리가 한계. 그가 최소한 누워있지만 않는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정도는 아니었다. 지금까지 왜 그렇게 무력하게 있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도 아니었다.
"벨카에게 가야 해."
두려움과 함께 무기력함을 떨쳐내자 남은 것은 이 동굴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소녀를 만나야만 한다는 의무감에 가까운 간절함이었다. 살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이빨들이 아팠다. 그들에게 물려있는 살들이 떨어져 나갈 것만 같은 고통이 몰려온다. 지금 그가 입고 있는 옷은 상의밖에 없었지만 나머지 옷들을 챙길 시간은 없었다. 나머지 옷들은 저들 중 하나가 먹으려다 뱉어버렸기 때문에 저들 사이에 파묻혀 있으리라.
그나마 가면을 챙길 수 있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어셔는 어느 때보다 빠르게 굴러가는 머리를 느끼며 그들 사이에서 동굴을 살폈다. 천장에서 내려오는 달빛은 동굴 벽까지 닿지는 않았지만 벽과 벽이 아닌 곳쯤은 어렴풋이 구분할 수 있었다.
"고드름?"
그러다 발견한 것은 추운 겨울날이면 지붕 끝에 매달리던 고드름 같은 것들이 줄줄이 늘어선 공간이었다. 통로가 저곳으로 이어지는지 집중해서 귀를 기울이면 이 공간에 흘러들어와 고여있던 물들이 저곳으로 빠져나가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저곳이 정말로 출구로 이어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 그에게 찬밥 더운 밥을 가릴 시간이 없었다.
"하아!!"
-끄륵!
발치에서 그를 물려던 녀석을 망설이지 않고 발로 차버리자 그것은 충격을 받고 넘어져 버렸다. 하지만 그것을 차버린 그의 발도 마냥 멀쩡하지는 않았다. 앞뒤를 생각하지 않고 차버렸기 때문일까. 뼈와 뼈가 부딪힌 것처럼 얼얼한 고통과 함께 피가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방금 그것으로 길은 조금이나마 트였다. 그것들의 혀가 자꾸만 그의 발목을 붙잡고 그를 물고 있던 것들은 아직도 꽉 물고 놓아주지 않아 피가 줄줄 흘러내렸으나 지금은 그 비릿한 철 냄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것들은 물고기 주제에 물속에서도 다리 같은 지느러미로 기어 다녀야 했는지 물속에서는 더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덕분에 그를 물고 있는 세 마리를 제외하면 어셔를 따라잡지 못했다. 그래도 시간만 있다면 그것들은 그를 따라잡을 것이 분명하기에 어셔는 한시라도 이 위험한 동굴을 빠져나가고자 출구로 이어져 있을 것이라 생각되는 동굴의 통로를 향해 몸을 던져 넣었다. 그러자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어셔는 자신이 물속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에 잠긴 귀는 물속에 있으면서도 물이 흐르는 소리를 잡아내고 있었고 눈을 뜨려 하면 침입하는 물에 꾹 감아버리고 만다. 처음 물에 떠내려갈 때와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이미 충분할 정도로 숨은 들이킨 후였으니 더 오래 참을 수 있다. 이 물살이 그를 좀 더 출구와 가까운 곳으로 보내주기를 바라며 흐르는 물에 몸을 맡겼다.
"욱!"
하지만 그는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충격에 꼬르륵 공기방울을 내뿜고 말았다. 물살이 다시 격해진 것인지 어딘가에 부딪히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처음 물살에 떠내려갈 때 부딪혔던 감각과는 달랐다. 마치 작은 기둥과 부딪히는 듯한 기분이다. 다행히 그 기둥은 얇아서 한 번 부딪히면 충격과 함께 부러져 떠내려가는 것을 막지는 않았으나. 부딪히는 숫자가 너무 많았다. 몇 개는 그가 아닌 그를 물고 있던 것들에게 부딪힌 듯 그것들이 물고 있던 곳의 살점이 떨어져 나갈 듯이 아프기도 했다. 그렇게 물속에서 이곳저곳을 부딪힌 끝에 어셔는 다시 얕아진 물을 느낄 수 있었다.
"끄응, 대체 뭐랑 부딪힌 거야."
다행히 처음과는 다르게 이번 통로는 그리 길지 않아서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물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그의 몸은 처음보다도 엉망진창이었다. 상의는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 때문에 붉게 물들어 있었고 상처에서는 여전히 피가 배어 나왔다. 그를 물고 있던 것들은 아까 기둥 같은 것들에 부딪힌 영향인지 대부분이 떨어져 나가있었다. 그럼에도 그것들이 물고 있던 자리에 그것들의 이빨들이 그대로 붙어있는 모습에는 기겁하고 말았다.
"이건 대체 언제까지 붙어있으려고."
게다가 운 좋게 그 기둥 같은 것들에 부딪히지 않았는지 아직 그를 물고 있는 것까지 한 마리. 억지로 떼어내려 하면 살점까지 떼어져 버릴 것 같아서 그는 자신을 물고 있는 그 한 마리와 이빨들을 떼어내지 못했다. 피가 자꾸만 흐르고 다리까지 다친 탓에 천천히 얕은 물을 헤쳐나가고 있으니 발가락 사이로 부스스 흩어지는 모래 알갱이들이 느껴졌다. 이건 출구가 가까워졌다는 신호일까? 기대하면서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에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걸어가고 있으면 동굴이 생각보다 어둡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건..."
그리고 발견한 것은 스스로 빛을 내는 이상한 식물들이었다. 곤충들이 빛을 내는 모습은 보았지만 식물들이 빛을 내며 어두컴컴한 동굴 안을 밝히는 신비한 모습에 어셔는 홀린 것처럼 빛나는 식물들을 향해 걸어갔다.
-끅! 끄륵!
그러자 지금까지 끈질기게 그를 물고 있던 것이 드디어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절대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굴던 것이 떨어져 나가자 개운했다. 어째서 떨어졌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아마도 저 식물들에게 저것이 싫어하는 뭔가가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을 때였다.
-끄륵! 끄르륵! 끅...!!
철퍽철퍽 소리가 날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던 그것의 소리가 단말마 같은 울음소리와 함께 갑자기 사라졌다. 그제야 그는 이상을 느꼈다. 저런 몬스터가 살고 있는 동굴이다. 그런데 저런 몬스터가 꼭 한 종류만 있을 거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빛을 내는 식물에게서 신경을 치우니 이곳에 무언가 더 있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다친 발을 들어 올리고 외발로 최대한 빠르게 이곳을 벗어나고자 했을 때.
"으풉?!"
첨벙하고 그는 물속에 빨려 들어가듯이 빠져버리고 말았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고 허우적거렸지만 그의 손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래서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물에 빠질 것이라는 생각에 눈에 물이 들어오는 따가운 감각을 참고 눈을 뜨면 보이는 것은 깊고 깊은 무저갱이었다. 빛나는 식물의 정체도 뒤늦게 알아챘다. 저것은 단순히 빛을 내는 식물이 아닌, 고요한 무저갱 속에서 기어 나와 수면 위까지 뻗어있던 수초였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가까이 다가갔으니 이렇게 깊은 물에 빠지고 말았다.
비록 물살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아무런 흐름이 느껴지지 않는 고요한 물은 생각보다 더 공포스럽다. 그는 어떻게든 팔다리를 움직여 헤엄을 쳐보고자 했지만 제대로 헤엄칠 줄도 모르는 그가 팔다리를 움직여봐야 무의미한 허우적거림이 될 뿐이었다. 허우적거린 끝에 어떻게든 그가 온 곳을 돌아보긴 했지만 그곳에는 끝없이 이어지는 절벽과 방금 전까지 그를 물고 있었던 몬스터가 물고기 주제에 헤엄을 치지 못해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덕분에 그가 점점 더 아래로 가라앉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건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피부에 직접 닿는 것처럼 생생한 절망감이 느껴졌다.
'벨카.'
돌아가야 하는데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가 점점 더 막혀가는 숨통과 희미해지는 시야 속에서 소녀를 떠올렸을 때. 언뜻 여인의 모습이 보였던 것 같다.
[가여운 것.]
누구의 것인지 모를 목소리가 들려왔다. 머릿속으로 직접 말을 걸어오는 듯한 이질적이고 독특한, 그 무엇으로도 정의할 수 없을 듯한 인자한 목소리. 어둠으로 가득해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이 상황이 두려운데도 그 두려움을 지워주는 포근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어둠 속에서도 이상하리만치 확실하게 보이는 것이 있었다. 커다란 날개와 길고 날카로운 손톱, 기다란 목과 꼬리. 이렇게 생긴 생물을 그는 알고 있다. 모를 리가 없었다.
[너는 가장 소중히 지켜야 할 것을 결국 밖으로 이끌고 말았구나.]
그것은 몬스터들의 왕 혹은 드래곤이라 불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알던 것과는 모습이 조금 다르다. 몸을 감싼 단단한 비늘로도 모자란다고 여겼는지 철처럼 보이는 밋밋한 갑주를 겹겹이 머리부터 꼬리까지 감싸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머리를 감싼 투구에는 눈을 위한 구멍조차 뚫려있지 않아 앞이 보이는 지도 의문스러운 이상한 갑룡. 그러나 그 모습에서 느껴지는 위엄은 도저히 줄어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도감을 주는 듯한 포근한 느낌을 무어라 말해야 할까?
[지금 우리와 만나기에 너의 실타래는 아직 이곳이 끝이 아니라 말하는구나. 자, 돌아가거라. 가련한 전능자여.]
그 목소리가 끝나는 것과 동시에 어셔는 어둠 속에서 벗어났다.
"콜록! 콜록! 웨엑!"
목과 코를 막은 이물질에 숨이 막혀 반사적으로 기침을 하니 빠져나오는 물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아직 남아있는 것 같은 비릿한 물 냄새에 누워있던 몸을 돌려 엎드리고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을 때였다.
"일어났다!"
어떤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우욱! 누구, 욱!"
그러고 보니 지금 그는 물 밖에 나와 있었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바닥조차 보이지 않는 깊은 물속이었는데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보니 그녀가 구해준 모양이었다. 겨우 물을 다 토해낸 어셔는 감사 인사를 하기 위해 매스꺼운 감각을 애써 참고 고개를 들었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누, 누구세요?!"
그의 눈에 벌거벗은 여인의 모습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하얗다 못해 창백한 피부와 탐스러운 과실과도 같은 가슴이 매달린 상체를 과감 없이 드러낸, 물빛이 감도는 하얀 머리카락과 투명한 붉은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여인이 그와 같은 높이로 엎드려서 호기심을 가득 담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 제멋대로 부풀어 오르는 욕구를 느끼고 황급히 그곳을 가린 그가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며 묻자 여인이 샐쭉 웃었다.
"으흐흥,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어. 역시 수컷이야."
"수, 수컷이라니."
짐승에게나 쓰는 단어가 여인의 입에 담겨 그를 가리키니 묘한 굴욕감을 느끼면서도 그녀의 가슴에 시선을 빼앗겨 부푸는 욕구를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럼 암컷이야?"
무심코 거북하게 대답한 탓인지 그녀가 이상하다는 듯 그에게 물었다.
"그건! 아닌, 데요."
"그렇지!? 그렇지!?"
어셔는 뭐라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꾹 눌러 참았다. 여인의 나신이 자꾸만 그의 눈을 사로잡는 통에 제대로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여인의 풍만한 가슴은 그녀의 몸이 소녀와는 다른 곡선을 그리게 만들었다. 저 탐스러운 과실과도 같은 가슴에 손을 올리고 싶다는 충동에 자꾸만 손끝이 움찔거렸지만 그녀의 몸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던 시선을 겨우 떼어냈다.
"저기, 당신이 구해주신 거죠?"
여인의 말투나 행동은 어딘가 어린애 같은 천진함이 있어 어리게 느껴졌지만 그렇다 해도 여인은 그보다 나이가 더 많아 보였기에 그는 자연스레 존대를 썼다.
"응! 응! 내가 물속에서 가라앉던 너를 구했어. 헤엄을 정말로 못 치더라."
"윽! 헤엄 같은 걸 칠 기회가 없었으니까요!"
무엇보다 헤엄을 칠 필요가 있을 만큼 깊은 물을 본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소녀와 목욕했던 느티나무 뒤편의 계곡이 다였는데 그곳도 그리 깊지는 않았었다. 그러자 여인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흐응, 역시 너는 밖에서 왔구나? 밖은 물이 정말로 없나 봐?"
"어, 이 동굴 밖이라면 맞는데. 혹시 이곳에 사시는 건가요?"
그녀의 말속에서 마치 이 동굴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은 어셔가 의아해하며 묻자. 여인은 까르륵 웃었다.
"응, 난 태어났을 때부터 쭉 이곳에서 살았어."
"이곳에서요?"
주변을 둘러보면 아까 깊은 물에 빠지기 직전 그가 보았던 빛나는 수초들이 수면 위로 머리를 내밀고 푸른빛을 내뿜는 모습이 사방에서 보였다. 그가 깨어난 곳을 땅이라 착각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그가 있던 곳은 그 수초들이 얽히고설켜서 만들어진 곳이었던 것이다. 그에 어셔는 절망하고 말았다. 그나마 동굴의 출구에 가까워졌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아까 그곳과 위치가 그리 달라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사방이 깊은 물이라 헤엄을 칠 줄 모르는 그에게 이곳은 빠져나갈 수 없는 감옥과도 같았다.
"이런 곳에서 대체 어떻게..."
하지만 어셔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 광경을 모두 보고 난 후 다시 본 여인의 하반신이 그의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상반신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하반신은 아무것도 입지 않았다. 않았을 터인데 그곳에는 그녀의 머리카락과 같은 색의 물빛이 감도는 새하얀 비늘이 빼곡히 박혀있었던 것이다. 뿐만이 아니었다. 여인의 다리는 두 개가 아닌 하나로 이어져 있었고 그 끝에는 얇지만 무척이나 넓은 그녀의 머리카락과 비늘과 같은 색의 지느러미가 살랑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니 그저 아름다운 여인이라 생각했던 그녀에게서 보통 사람이라면 보이지 않을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늘고 긴 손가락 사이에는 그 사이를 메우고 있는 막이 손가락 끝까지 넓게 차지하고 있었고 팔꿈치에도 작은 지느러미 같은 것이 삐져나와 있었다. 아름다운 색감의 머리카락에 가려져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그녀의 귀도 인간의 귀라기보다는 물고기의 지느러미처럼 보였다. 다만 그녀의 몸을 감싼 비늘은 드래곤의 것처럼 억세고 단단하다기보다는 부드럽고 아름다운 비단과 같은 장식품 같았다. 그 모습에 어셔는 떠오르는 단어가 있었다.
"인어?"
"헤, 밖에서는 우리를 그렇게 부르는구나?"
그러나 여인은 그가 놀란 나머지 중얼거린 그 단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불만스럽게 제 입술을 손으로 툭툭 두드렸다.
"나는 포하티, 포하티야."
"그거 이름,인가요?"
"응! 너는? 안 가르쳐 줄 거야?"
처음으로 보는 인어의 모습에 놀라는 것도 잠시 생각보다 수다스러운 여인 때문에 그녀에 대해 놀라고 있을 시간도 없었다.
"저는 어셔예요."
"어셔! 어셔구나!"
그의 이름을 들은 여인은 재미있다는 듯이 제 입안에 그의 이름을 두고 굴려먹는 사탕처럼 그의 이름을 여러 번 불러대었다.
"어셔, 어셔!"
문득 그녀가 제 이름을 곱씹는 모습을 보다 보니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녀가 떠올랐다. 그래, 그는 더 이상 이곳에서 시간을 허비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꾸 그의 이름을 말하던 여인을 불렀다.
"저기 포하티?"
"응? 왜?"
기다렸다는 듯 돌아오는 여인의 대답에 놀라면서도 어셔는 침착하게 물었다.
"혹시 출구가 어디 있는지 알아요?"
그와 동시에 신난 것처럼 들뜬 기색이 역력했던 여인이 우뚝 멈춰 섰다. 그녀의 기분을 알려주듯 살랑거리던 아름다운 꼬리지느러미도 멈추면서 잔잔한 물 표면에 그리던 파문도 사라졌다. 여인이 무표정하게 굳은 얼굴과 언뜻 섬뜩하게 느껴지는 투명한 붉은 눈동자로 그를 빤히 바라보기 시작하니 이유 모를 오한이 물에 젖은 그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혹시 자신이 무언가 실수한 것이라도 있는 건지 어셔가 고민하려던 순간이었다.
"흐으응, 출구는 왜? 나가려구?"
"그게, 네."
금세 표정을 푼 그녀가 물으니 조금이나마 안심하며 대답했다.
"알고 있어."
"알고 있어요?!"
"으! 시끄러워!"
"아, 죄송합니다."
그가 흥분해서 소리를 지른 탓에 귀를 막는 시늉을 하며 인상을 찌푸리는 여인의 모습에 그가 사과하니 그녀는 표정을 풀며.
"원한다면 데려다줄 수도 있어."
"정말요?!"
"으! 시끄럽다니까."
그가 다시 사과하려 하자 그전에 여인은 말을 이었다.
"너 헤엄 못 치니까."
"그건 저도 연습만 하면!"
"하지만 넌 지느러미도 없잖아?"
그녀가 당연한 사실을 확인하듯이 말하니 어셔는 뭐라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가 수영을 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어쨌든 출구까지 데려다줄 수 있는 거죠?"
"응."
"그럼 지금 당장...!"
그러나 동굴을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들뜬 마음으로 여인에게 부탁하는 그의 입을 그녀가 손으로 막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조건이 있어."
여인이 곧 그의 귓가까지 입을 가져다 대고 속삭이는 말은.
"나와 교미를 하는 거야."
등골이 오싹할 만큼 음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