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늑대의 품.
"벨리치예."
타박하듯이 그의 이름을 부르는 회색 늑대의 목소리에 은색 늑대는 그녀에게 시선을 돌린다. 은색 늑대의 자줏빛 눈동자와 회색 늑대의 청록빛이 서로를 바라보기를 얼마간. 조용해진 주변에 저 멀리서 강물이라도 흐르는지 희미하게 물이 흐르는 소리가 허공을 채웠을 때. 먼저 시선을 돌린 것은 은색 늑대였다.
"족장께서 기다리신다."
그는 그런 말을 남기고 뒤돌아 걸어가는 듯 땅에 차오른 물을 걷어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고집은."
회색 늑대는 그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며 그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어셔는 뭐라 말하고 싶었지만 이런 애매한 분위기 속에서 입을 열 만한 담력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늑대의 등을 빌려 물로 가득 찬 숲길을 헤쳐나가다 보면 그는 어쩐지 숲을 걷는 것이 아니라 호수 위에서 배를 타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에 휩쌓였다. 비가 대체 얼마나 많이 내렸으면 숲에 이렇게 물이 차올랐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곧 그 생각도 비명소리 같은 울림과 함께 사라졌다.
"왔군."
나무들이 빼곡한 숲에서 서서히 거리를 벌리는 나무들의 틈새로 서서히 강해지던 달빛이 온전히 숲을 비추었을 때. 늙은 늑대와 그가 앉아 있는 장소가 그의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에라스여. 그대가 치를 시험은 간단하다."
그가 서있는 곳은 어떤 동굴의 위였다. 이 주변에 동굴이 얼마나 많은지는 모르겠지만 어셔는 저 동굴이 이곳에서 본 어떤 동굴보다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그 동굴은 난데없이 공터에 자리 잡은 것처럼 주변에는 어떤 나무도 보이지 않는다. 거대한 바위의 반을 잘라서 그 안을 파낸 것처럼 땅을 뚫고 나온 거대한 입이 숲에 차오른 물들을 게걸스럽게 삼키고 있는 모습에 그는 몸을 떨었다. 멀리서부터 강물 소리처럼 들려오던 희미한 물소리는 저 동굴이 물을 삼키던 소리였던 것이다. 동굴에 가까이 있는 지금, 물소리는 흐르는 소리를 넘어서 비명소리와도 같이 동굴 안을 맴돌고 있었다. 어셔는 그가 다음에 어떤 말을 할지 알 것만 같았다.
"이 동굴을 통과해라."
시린 달빛 아래에서 푸른 두 눈동자를 형형하게 빛내는 늙은 늑대가 지상의 모든 것을 먹어치우려는 것만 같이 암흑으로 가득한 아가리 속을 드러낸 동굴의 위에서 선고했다. 그 모습이 마치 그에게 죽으라 말하는 것처럼 느껴져 몸이 덜덜 떨려왔다. 그런 그를 진정시킨 것은 의외로 은색 늑대의 목소리였다.
"걱정하지 마라. 네가 진정으로 시험을 통과할 자격이 있다면 인도자가 나타나 너를 이끌어 줄 테니."
또한 함께 떠오른 벨카의 모습이었다. 어셔는 상상 이상으로 두려운 시험의 모습에 도망칠 뻔했지만 그녀는 분명히 그들의 시험이 위험할 것이라 경고했다. 그럼에도 여기까지 온 것은 자신의 의지였다. 벨카가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시험을 치르겠다 한 것은 자신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저 늙은 늑대의 앞에서 시험을 포기하고 벨카에게 돌아가는 건 정말로 싫었다. 불어난 물을 쉴 새 없이 암흑 속으로 들이키는 동굴의 모습에서 죽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끼고 있어도 도저히 물러설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는 느리지만 확실하게 동굴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어째서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그는 단지 좀 더 당당하게 누구도 자신과 소녀가 함께 있다는 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게 그녀와 마주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동굴의 벽을 조심스레 짚으며 안으로 들어서자 안 그래도 어두웠던 밤인데 극단적으로 어두워졌다. 조심스럽게 뒤돌아보면 빛은 보이지만 그곳은 돌아가야 할 곳이 아니었다. 또한 돌아갈 수도 없는 곳이었다.
"물살이 너무 센데."
동굴은 아래로 이어져 있는 듯 경사져 있었다. 때문에 그의 무릎까지 차오른 물들을 무리 없이 삼키고 있었던 것이다. 동굴의 바닥은 미끄럽기까지 하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가 물살에 떠내려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울퉁불퉁한 벽면을 붙잡고 있었던 덕분이다. 그마저도 간신히 버티고 있는 것이 한계였지만 말이다. 그렇게 울퉁불퉁한 벽면을 붙잡아 물살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천천히 내려갔지만 동굴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암흑은 그의 시간 감각마저 앗아가버렸다. 벽면을 하나하나 붙들며 버티던 손과 팔도 한계를 맞이했는지 그의 마음과 다르게 덜덜 떨리고 있었다.
"아악!"
그러나 그토록 물살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노력했던 어셔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물살에 함께 굴러 들어온 작은 돌덩이가 물에 잠겨 있던 그의 다리에 강하게 부딪히면서 허사가 되고 말았다. 그 고통으로 인해 벽면에서 손을 놓쳐버린 것이다. 그는 그 순간이 무척이나 느리게 느껴졌지만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우부웁!!"
그는 그리 깊지 않은 물임에도 물 위로 빠져나갈 수 없었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에 최소한 숨을 최대한 들이마시는 준비조차 할 수 없었던 그는 두 눈을 꼭 감고 물에 떠내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던 탓에 정신이 점점 더 혼미해지던 순간. 어셔는 자신을 떠내려 보내던 물살이 갑자기 약해지고 물의 깊이가 낮아졌음을 알아차렸다. 그를 떠내려 보낼 만큼 강했던 물살이 더 이상 그를 떠내려 보내지 못했던 것이다.
"푸하!"
겨우 물 밖으로 고개를 내민 그는 이곳에 빛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혹시 동굴을 통과한 것인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눈을 뜨면 실망스러운 광경이 그의 눈에 담긴다. 그는 아직도 동굴의 안이었다. 빛의 정체는 동굴의 위, 천장에 뚫린 구멍이 달빛을 내려보내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천장은 정말로 높았고 당연히 그가 그곳을 통해 빠져나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물에 젖은 생쥐 꼴로 새어들어오는 달빛에 의지해 확실하게 얕아진 물이 닿지 않는 동굴 속 마른 땅을 찾아낸 그는 조금이라도 휴식을 취하고자 몸을 눕혔다.
"하아하아, 끙, 안 아픈 곳이 없네."
물에 떠내려가면서 이리저리 부딪혔는지 삭신이 쑤셨다. 그나마 다행이었다면 기적적으로 피를 흘릴만한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녹초가 된 어셔는 이대로 누워서 잠들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물에 젖은 옷은 벗어서 따로 말려두어야만 했다. 젖은 옷을 입고 잘 수는 없었으니까. 옷이 잘 마르도록 펼쳐둔 그는 마른 땅 위에 다시 몸을 눕혔다. 늑대들이 깔아주었던 동물 가죽마저 없는 동굴 바닥은 무척이나 딱딱하고 불편했지만 그는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오는 수상한 형체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그 무렵 어셔를 동굴로 내려보낸 늑대들의 경우.
"설마, 진정으로 시험을 치르고자 할 줄이야."
늙은 늑대는 그리 중얼거리며 숲 한 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대가 에라스에게 시험을 치르라 떠밀지는 않았을 터인데."
"나에게 어셔가 스스로 선택한 일을 막을 자격은 없는걸."
그곳에는 소녀가 자신의 옷이 물과 비에 젖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흙탕물로 가득한 곳에 서있었다. 양쪽으로 묶어낸 꽃처럼 붉은 머리카락은 빗물에 젖어 흐르고 새하얀 자기처럼 하얀 피부는 차가운 물과 공기에 창백한 빛으로 처연함을 더했다. 물에 젖은 원피스와 하얀 소복은 축 처져 소녀의 기분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러다 늙은 늑대의 시선이 향한 곳은 소녀가 머리 한 쪽에 빗겨 쓴 가면이었다.
"가면이라. 그러고 보니 그 에라스도 하나 가지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대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나."
"응, 지금은 그 의도도 왜곡되어 버린 거 같지만."
"가끔 에라스의 마을에서 풍겨오는 불쾌한 냄새도 그 때문이었군."
늙은 늑대는 가면과 원수라도 진 것처럼 금방이라도 부수고 싶다는 듯 노려보지만 그저 노려보기만 할 뿐 정말로 부수고자 하지는 않았다. 소녀는 그의 시선을 느낀 듯 자신이 쓴 가면을 매만지며 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그가 원망스러워?"
소녀의 물음에 늙은 늑대는 그제야 그녀가 쓴 가면에서 시선을 떼었다.
"어찌 원망스럽지 않을 수 있을까? 그 에라스는 나의 사명을 망친 존재이거늘."
그의 침중한 목소리에는 그가 살아왔던 세월만큼이나 많고 복잡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야. 아무리 빈틈을 메워도 그곳이 빈틈이라는 사실이 달라지지 않는 것처럼. 언젠가는 벌어질 일이었고 그것이 너의 때였을 뿐이니까."
소녀의 말을 들은 늙은 늑대가 가만히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그대는 지나치게 상냥하군."
"...그렇지 않아."
"그대와도 같은 존재가 우리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만큼 그대가 상냥하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겠는가?"
소녀는 무어라 더 말하려고 했으나 늙은 늑대의 말이 먼저였다.
"벨리치예, 힐리스. 갈 길이 멀구나. 그분을 데리고 먼저 출구로 향하거라."
늑대들이 소녀를 데리고 그 자리를 떠나고 남은 것은 어셔가 들어간 어두컴컴한 동굴을 바라보는 늙은 늑대뿐이었다.
어셔는 졸졸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멍하니 눈을 떴다.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동굴 틈으로 들어오고 있는 달빛과 어렴풋한 감각은 그가 얼마 잠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준다. 꿈조차 꿀 수 없었던 아주 잠깐의 잠은 쌓여버린 피로를 모두 날려버리는 것은 무리였는데도 잠결에도 스며든 싸늘한 감각이 그를 강제로 깨웠다. 동굴에는 바람 한 점 불지 않았지만 물에 휩쓸리면서 이미 몸이 푹 젖고 말았기 때문이었을까. 그게 아니라면 차디찬 돌바닥 때문이었을까. 혹은 알몸으로 잠들었기 때문일까. 자꾸만 괴롭히는 추위에 그는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시험이라는 게 이런 거였다면 먹을 거나 덮고 잘 가죽이라도 챙길걸 그랬네."
그는 그렇게 툴툴거리면서도 그런 것들을 챙겨왔다면 물살에 휩쓸렸을 때 모두 떠내려가거나 물에 젖어서 못 쓰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은 이렇게 마른 땅 위에서 쉬고 있지만 입구에서부터 상당한 거리를 물살에 떠내려왔다. 아무런 짐이 없는 몸으로도 물살을 감당하기 힘들었는데 짐까지 있었으면 더 일찍 물살에 휩쓸렸을 것이다. 그랬다면 죽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최대한 떠내려가지 않고자 노력했던 것이 아주 무의미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일단 옷부터 입을까."
아직 옷이 젖어있을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지만 집안도 아닌 이런 곳에서 실오라기 한 장 걸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상당히 어색하게 느껴졌다. 옷을 갈아입을 때 잠깐이라면 몰라도 옷을 벗고 돌아다닌다던가 하는 일은 한 번도 없었으니 더욱. 그렇게 자신이 벗어둔 옷을 찾고자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여기 이런 게 있었나?"
그것은 마치 모래더미 같기도 하고 바위 같기도 했다. 크기도 제각각인 그것들은 그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여러 개가 모여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단순한 바위들이었는데 그는 어째서 이곳에 없었던 물건이 갑자기 생겨난 듯한 위화감을 느끼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바위가 스스로 움직일 수 있을 리가 없었기에 어셔는 기분 탓이라 여겼다. 아까는 물살에 떠밀려 내려와서 옷만 간신히 벗어두고 잠들어버렸으니까. 주변을 제대로 보지 못했으니 단지 못 봤던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역시 아직도 젖어있네."
옷은 찾았지만 예상대로 여전히 물기가 마르지 않아 축축한 모습 그대로였다. 불을 피울 수도 없고 바람도 불지 않는 이곳에서 옷이 언제 마를지 모른다. 이곳이 안전하다고 해서 옷이 마를 때까지 머무르고 있다가는 시험을 통과할 수도 동굴을 나갈 수도 없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급한 대로 상의를 집어 입으면 젖은 옷의 싸늘함이 그대로 피부에 들러붙었다.
"으, 추워."
차라리 벗고 있는 편이 덜 춥게 느껴질 만큼 동굴 바닥에 펼쳐져 있던 옷은 차가웠지만 입지 않을 수는 없었다. 옷을 입지 않으면 안 날 상처도 생기고 쓸데없는 짐이 늘어나는 꼴이 될 테니. 겨우 차가운 옷에 적응하고 다음 옷을 집어 들려는 순간 그는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내가 옷 위에 돌 같은 걸 놓았었나?"
그의 다른 옷들 위에 조금씩이지만 근처에 모여있는 모래색 바위들이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위가 그의 옷을 누르고 서있는 듯한 그 모습에 안 그래도 느끼고 있던 위화감이 더욱 커지는 것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옷을 집어 드는 순간.
"어?"
쩌어억, 바위가 입을 열었다. 분명 모래 더미 같은 바위에 불과했던 것이 입을 드러내자. 그 안으로 보이는 것은 생물의 것이 분명할 번들거림과 녹아내린 사람의 손 같은 것이었다. 그 비현실적인 모습에 그는 그저 얼빠진 소리를 내며 옷을 놓쳤고 그것이 행운이었다. 녹아내린 사람의 손 같은 것이 그가 집고 있었던 옷을 낚아채더니 바위의 입안으로 끌고 들어간 것이다. 그건 정말로 한순간에 불과해서 그가 옷을 놓치지 않았다면 그의 손이 그것에게 붙잡혔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위의 행동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의 옷을 먹어버린 그것은 씹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제야 어셔는 그것이 바위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것이 옷을 먹이로 착각하고 소화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하자 모래 더미로도 바위로도 보였던 그것의 본모습이 비로소 드러났다. 그건 이상하게 변이된 물고기 같았다. 몸의 색과 완전히 똑같은 색으로 이루어진 네 개의 지느러미들은 마치 다리처럼 땅을 딛고 있었고 비늘조차 없이 퉁퉁 부어오른 듯한 피부와 바위 같은 둔중한 몸은 물고기보다는 두꺼비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꾸륵 꾸르륵.
울음소리마저도 두꺼비 같았지만 그건 두꺼비라 부를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에게는 발처럼 사용하고 있지만 지느러미가 있었다. 아주 못생기고 헤엄도 칠 수 없을 것 같은 모습이지만 어렴풋하게나마 물고기의 형태를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것을 또 물고기라 부르기에도 무리가 있을 것이다. 지금 그것들은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는지 몰라도 명백하게 물 밖에 나와서 바위처럼 위장하고 있었으니까. 사냥감이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어째서 깨닫지 못했던 걸까. 얼마 잠들지 못했음에도 그의 잠을 깨웠던 싸늘한 감각은 추위 따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본능의 경고였다. 그대로 계속 잠들어 있었다면 이것들에게 잡아먹힐 것이라는 경고였던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자 그것이 입을 벌렸던 순간 보였던 녹아내린 사람의 손 같은 혀가 함께 떠올랐다. 물에 젖은 피부의 위에서도 식은땀이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감각이 선명했다. 일어났을 때 주변에 있던 바위들이 갑자기 생겨난 것 같다는 위화감도 착각이 아니었다. 그를 둘러싼 바위 같은 것들은 전부 바위가 아니라 그것이 위장한 모습이었다. 그는 지금 그 물고기도 두꺼비도 아닌 것에게 포위된 상태였다.
그것들은 아마도 잠들어 있던 그를 잡아먹으려 모여든 것이 분명했다. 아마도 바위 같은 모습으로 위장하고 있었던 것은 사냥감인 그에게 들키지 않기 위함이었음이라. 그것을 알고 보니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사실들을 어셔는 알 수 있었다. 그것들은 확실히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지만 그의 시야가 닿지 않는 곳에서는 들려왔다.
"...."
-철벅철벅.
-스윽스윽.
그건 물이 흐르는 소리가 아니었다. 물이 흐를 때 무언가 걸어 다니며 물이 튀는 소리가 날 리도 없었고 돌이 긁히는 소리가 나지도 않는다. 그가 긴장감으로 꿀꺽 침을 삼키며 돌아보면 역시나 확실하게 가까이 다가온 바위들을 볼 수 있었다. 어떤 것은 반쯤 물에 몸을 담그고 있었고 어떤 것은 이미 그의 근처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옷을 삼켰던 것이 겨우 먹을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옷을 뱉어내는 모습도 보인다.
-꾸륵 퉷!
하지만 그것이 씹고 있었던 옷은 이미 날카로운 것에 난도질 된 것처럼 너덜너덜하고 일부는 녹아내린 모습이었다. 이것들에게 잡아먹힌다면 어셔의 미래는 저 옷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할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가 뒷걸음질을 치는 순간. 갑작스럽게 알싸한 고통이 그의 발목을 찔렀다.
"악!"
그 고통에 놀라서 자신의 발치를 내려다보면 주변의 것보다 상대적으로 작은 것이 자신의 발목을 물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리고 작기 때문에 더 재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던 걸까. 그가 그것을 내리쳐 황급히 떼어 보지만 주르륵 붉은색이 발목을 타고 흘렀다. 그리고 코끝을 찌르는 쇠 비린내. 그리고 찾아온 섬뜩한 한기에 돌아보면. 어셔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것들이 모두 눈을 뜨고 있었다. 이어서 쩌억 하고 일제히 벌어지는 입들. 그들의 입은 그 덩치의 것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컸다. 자신의 몸집보다 큰 것이라도 기어코 삼키겠다는 듯한 집착마저 엿보이는 기분이었다.
-끄륵.
-꾸르르륵.
그 안에는 군침으로 번들거리는, 녹아내린 사람의 손 같은 연붉은 색의 혀가 꿈틀대고 있었다. 그는 본적도 없지만 사람의 가죽 아래가 과연 저러할까? 그것들은 이미 어셔를 보내줄 생각이 없는지 그의 머리보다 커 보이는 입을 벌리고 녹아내린 사람의 손 같은 혀는 그를 향해 있었다. 그 모습이 이미 죽은 자들이 그것들의 입을 통해 손만 뻗어 나와 손짓하는 듯이 보여서 더욱 끔찍했다. 이윽고 그것들의 인내심이 다했는지 하나둘씩 그에게 달려들기 시작했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는다.
녹아내린 듯한 사람의 손이 하나 둘 뻗어오고 그 뒤로 이어지는 어둠으로 가득 찬 그들의 입안. 이대로 둘러싸여 저것들에게 먹힐 것을 생각하니 암울한 생각만 들었다. 결국 손들이 그를 붙잡으려는 찰나 근처에 떨어져 있던 가면이 발에 치였다. 아무런 무늬도 없는 새하얀 바탕의 가면에 소녀가 그려놓은 작은 십자 모양이 눈에 들어오자 퍼뜩 정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