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1화 〉늑대의 품. (21/220)



〈 21화 〉늑대의 품.

쏴아아, 땅과 나무에 떨어져 부딪히는 빗소리들과 동굴의 끝자락에 두껍게 맺혀 있다가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언제부터 내렸는지 모를 비는 그칠 생각이 없는 듯 계속 쏟아져 내렸고 할 일이라고는 없는 지루한 시간이 이어졌다. 어제의 일들이 모두 끔찍한 악몽이라고만 착각할 것만 같은 이 평온 속에서 어셔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했다. 언젠가 마을을 떠나 여행을 하고자 하였으나 정작 이렇게 마을을 벗어나고 보니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초조한 마음에 더 준비해야 할 것이 있었는지 되짚고 있으면 맥이 말했던 사실과 그 광란으로 가득한 축제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렇다 해도 기억도 나지 않는, 어렸을 적부터 자라온 마을이다. 가족과도 같았던 사람과 살았던 곳이며 벨카와 만났던 곳이다. 아주 작은 정이라도  들래야 안 들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 꺼림칙한 마을에  이상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설령 돌아간다 해도 그곳에는 여치나 메뚜기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한 생김새를 가진 몬스터가 들어왔었다.

그게 얼마나 더 있는지는 알 수 없어도 그런 것들에게 마을이 습격 받았다면 분명 무사하지 못하리라. 돌아갈 곳도 가야  곳도 없이 길을 잃어버린 듯한 막연한 기분에 자각하지 못했던 추위를 느끼고 떨고 있을 때면 조심스레 그를 끌어당기는 손길이 있었다. 희미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감각에 이끌려 가면 그는 어느새 소녀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벨카?"

의아한 마음에 소녀의 무릎에 누운 상태로 그녀와 마주 보고 있으면 어느새 들려오지 않던 빗소리가 다시 귓가에 들려왔다.

"때로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 편이 좋아."
"하지만."
"생각이 너무 많으면 그만큼 불안한 마음도 커지고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마저 걱정하게 돼버리니까."


그를 다독이는 소녀의 금빛 아래에서 갈피를 잃고 혼란스러웠던 머릿속이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니까. 지금은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렇게 고요를 되찾은 동굴에는 빗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해가 먹구름에 삼켜져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다는 건 불편했지만 그래도 비가 내리는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어도 지루하지는 않았다. 쏟아져내리는 빗줄기는 하늘 아래 있는 것이라면 모두 적시려는 것처럼 흙과 나무, 바위를 구분하지 않고 두들겼고 저마다의 소리로 비를 받아내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제대로 듣고 느끼지도 못했을 소리, 두터운 빗줄기에 일그러진 숲을 비가 닿지 않는 동굴 속에서 바라보며 비와 함께 시간을 흘려보내었다.

"이제 먹어도 될 거 같네."


어셔가 빵이 빗물에 충분히 머금어 부풀어 오른 모습을 발견하고 가져오면 늑대의 미심쩍은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게 정말로 먹는 것이냐 묻는 듯한 시선에도 그는  말이 없었다. 그야 그가 보기에도 물을 머금어 부풀다 못해 불어 터진 듯한 빵의 모습은 그리 먹음직스러운 모습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으으, 맛없어."

그리고 정말로 맛이 없었다. 빵의 겉면은 물에 불어 터져서 물컹거렸고 씹어도 두꺼운 종이를 여러 장 겹쳐 물에 불려 씹는 듯한 식감이었다. 분명 만드는 과정에서 소금이 조금 들어갔던  같은데 소금의 짠맛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차라리 따뜻했다면 조금이라도 먹을만했을  같은데 빗물에 젖은 만큼 차갑기까지 했다. 오늘 처음 먹었던 열매들이 너무 맛있었던 탓에 빵이 맛이 없다는 게 더 크게 느껴졌다. 그의 옆에서 떼어준 빵을 씹고 있던 늑대도 퉤하고 흐물흐물한 빵을 뱉어냈다. 그러다 그는 그런 빵의 맛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 않게 우물거리며 먹고 있는 소녀의 모습을 보았다.


"벨카는 어때?"
"이런 걸 맛이 없다고 하는구나."

그녀마저 뒤늦게 빵을 내려놓는 모습에 어셔는 어색하게 웃었다. 벨카가 여행을 할 때는 오래 보존되는 음식이 필요하다는 말에 그가 케이트 아줌마에게 부탁해 미심쩍은 시선을 받으면서도 철전으로  빵이었지만 누가 먹어도 맛이 없다는 말이 나오는 빵의 맛에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아줌마가 미리 맛이 없다는 이야기는 하긴 했었지만 그도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모두가 빵의 처참한 맛에 할 말을 잃었을 때. 동굴 밖의 빗줄기를 뚫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먹을 것이 부족했던가?"


어제 만난 늙은 늑대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그들과 함께 있던 회색 늑대는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부탁해도 가져다주었을 것을. 설마 이런 물에 젖은 종이뭉치 같은 것을 먹고 있었을 줄이야."

빗줄기를 비집고 동굴 안으로 들어온 늙은 늑대는 회색 늑대가 씹다 뱉은 빵과 그들이 먹고 있던 빵들을 보고는 종이뭉치라 평했다. 어셔는 실제로 그런 맛이라서 아무런 반박도   없었다. 그래도 변명할 거리가 있었다면.

"하지만 어른들이 보존식 같은 건 맛있게 만들려고 해도 만들 수가 없다고 했다고."

늙은 늑대가 그에게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모습에 어셔는 황급히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지금까지 같이 있었던 늑대는 그렇지 않았는데  늙은 늑대와는 쉽게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과연 에라스는 저런 것을 보존식으로 쓰고 있었던 건가."

털을 적신 물기가 거슬리는  거세게 몸을 흔들어 물기를 털어낸 늙은 늑대가 땅에 떨어져 있는 빵의 냄새를 맡아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한마디.


"벨리치예."

누군가의 이름으로 들린  말에 또 한 마리의 늑대가 빗줄기가 만들어낸 커튼을 걷어내며 나타났다. 다른 늑대들보다 커다란 덩치, 유별나게 반짝이는 듯한 은빛 털. 어젯밤 그들을 안내했던 은색의 늑대였다.


"에라스가 먹을만한 음식과 보존식들을 가져오너라."

늙은 늑대의 말에 은색 늑대는 동굴 안으로 들어온  얼마나 되었다고 순식간에 밖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힐리스, 잠깐 나가있거라."


그의 말에 그녀들과 함께 있었던 늑대도 동굴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러자 동굴 안은 지금까지 그들이 있었던 곳이 맞나 싶을 정도로 엄숙한 분위에 휩쌓였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 탓에 그가 눈치를 보고 있자 먼저 입을 연 것은 벨카였다.


"무슨 일이야."

그러자 늙은 늑대는 푹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역시 그대는 힐리스의 설득조차 제대로 들어보지 않은 듯하군."
"필요 없으니까. 듣지 않았을 뿐이야."


그와 벨카의 말들이 이어지지만 어셔는 그 대화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후우, 그래, 우리가 어떤 말을 해도 그대에겐 들을 가치가 없는 것에 불과하겠지."
"...."

그의 말에 긍정하듯 소녀는 침묵했다. 그가 모르는 사이 늑대가 무슨 말을 했었는지 몰라도 벨카를 설득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소녀는 그렇게 고집이 강한 편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지나칠 정도로 무던해서 탈이지만 어딘가  수 없는 부분에서 완고한 면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대를 위해서라도 이 일은 하고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했네."
"괜한 참견이야."

벨카는 여전히 감정을 알 수 없을 만큼 무표정한 모습이었지만.

"우리가 그 에라스를 시험하는 것을 허락해주게."

벨카는 그런 늙은 늑대를 노려보고 있는 듯했다. 자신을 향하는 시선이 아니었음에도 그가 오한을 느낄 만큼  기세는 서슬 퍼렇게 다가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늙은 늑대는 말을 이었다.

"시험의 결과가 어떻든 그대의 마음이 변치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네."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면서  그런 요구를 하는 거야."

소녀가 퉁명스럽게 그의 말에 대답했다.

"그래야만 조금이나마 안심하고 그대를 보낼 수 있을 것 같군."
"그러니까 의미가 없다는 거야. 너의 행동은 그저 오지랖에 불과해. 어떤 변명을 해도 네가 참견할 자격은 없어."

늙은 늑대에게서 시험이라는 이야기가 나온 후 벨카는 그를 매몰차게 대했다. 그런 늑대와 소녀의 사이에서 어셔는 우연히 늙은 늑대와 눈을 마주쳤다. 벨카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손녀를 걱정하는 할아버지처럼 연민과 슬픔, 아쉬움 같은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무엇이 그렇게 걱정스러운지  수는 없었지만 벨카를 걱정하는 그 마음만큼은 어쩐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대의 뜻이 정 그렇다면 그 에라스에게 직접 의사를 물어보는 것이 어떤가?"
"읏!"

그 늑대의 눈은 그와 시선을 마주쳤던 어셔를 향해 있었다. 그러자 소녀가 분한 듯 작게 입술을 깨물며 입을 열려고 했지만 늙은 늑대가 말을 잇는 것이 먼저였다.


"태양이 완전히 저무는 시간에... 흠, 지금은 먹구름에 가려져 있으니. 시험을 치를 생각이라면 밤이 찾아오는 그때. 힐리스나 벨리치예,  중 하나에게 말해주길 바라겠네. 어린 에라스여."

그 말을 끝으로 늙은 늑대는 동굴을 나가버렸다. 늙은 늑대가 다녀간 동굴은 불편한 침묵으로 가득했다. 오죽하면 늙은 늑대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 회색 늑대와 먹을 것을 가지고 돌아온 은색 늑대가 눈을 굴리며 이쪽의 눈치를 보고 있을 정도였으니. 그리고 그 불편한 침묵의 중심에는 역시 벨카가 있었다. 그녀가 딱히 눈치를 준다던가 불편해하는 기색은 아니었지만 아마도 늙은 늑대가 그들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늑대들도 알고 있는  같았다.


침묵을 깬 건 그의 뱃속을 울리는 것만으로 모자라 동굴까지 울리는 꼬르륵 소리였다. 빵의 경우는 제대로 먹을만한 물건이 아니었기에 그가 먹었던 것은 열매들뿐이다. 그로부터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몰라도 이렇게 울리는 모습을 보면 확실하게 배를 채우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벨카가 눈을 떴다.

"배고팠을 텐데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아, 아니야."


은색 늑대가 커다란 보따리 같은 것들을 입에 물고 다가왔다. 보따리 하나를 풀자 나오는 것은 말라비틀어진 검붉은 무언가 여럿과 알갱이가 밀알보다 조금 작은 노르스름한 하얀 가루다.


"이건, 아무래도 보존식으로 써야겠네."

냄새를 맡아보면 어쩐지 고소하고 달짝지근한 향을 풍겨서 식욕을 자극했으나 보존식으로 쓰는 것이 좋겠다며 보따리를 다시 싸서 가방에 넣는 소녀를 그는 말리지 못했다. 보존식이라는 것도 있지만 하얀 가루 같은 것을 본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고운 아미를 미미하게 찌푸리는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지금 먹어야 할 것은 회색 늑대가 들고 왔던 것처럼 커다란 나뭇잎에 싸여진 것이었나 보다. 들고 온 늑대의 덩치에 비례해서 크기도 커진 것 같은 보따리를 플어 보았다.


"물고기?"

길이에 비해 가늘지만 제법 통통한 은색 비늘이 돋보이는 물고기들이 보였다. 근처에 강이라도 있었던 걸까? 물고기들은 아직도 살아있는 듯 입과 아가미를 뻐끔거리며 물을 찾고 있었다. 오트밀이나 빵에 비하면 이것도 포만감을 적게 줄 것 같지만 크기도 크고 네 마리나 있어서 둘이서 배를 채우기엔 충분할 것 같았다.

"설마 이걸 생으로 먹어야 해?"

그러나 아무리 찾아봐도 불을 피우거나 할 것이 보이지 않아 은색 늑대를 바라보면 무엇이 문제냐는 듯이 멀뚱멀뚱 그를 바라보았다.

"인간은 이런 물고기 같은 건 제대로 익히지 않으면 먹을  없어."


다행히 소녀의 말을 들은 회색 늑대가 동굴의 안쪽에서 마른 나뭇가지들을 들고 와서 걱정을 덜 수 있었다. 나뭇가지 몇 개를 물고기를 꿰는 꼬챙이로 쓰고 남은 나뭇가지들을 쌓고 보면 그럭저럭 구색은 갖추었다. 가방 안에 넣어 두었던 부싯돌로 불을 붙이면 타닥타닥 휘어지며 타들어가는 나뭇가지들. 마른 지푸라기 같은 것이 없어서 불을 붙이는데 시간이 조금 오래 걸렸지만 근처에 꽂아둔 물고기들이 열기에 노릇노릇하게 익어가는 모습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공복을 견디지 못한 그가 적당히 익은 물고기 하나를 먹어치우고 있으면 소녀가 물고기에 손을 대지 않는 것이 보였다.


"벨카는  먹어?"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아서."

결국 소녀는 그가 모든 물고기들을 먹어치울 때까지  한 번도 물고기에 입을 대는 일은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하나를 건네보아도 고개를 젓는 소녀가 걱정스러웠지만 결국 물고기들은 전부 그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불을 붙이는데 제법 많은 시간을 썼기 때문일까? 동굴 밖에는 먹구름을 뚫고 들어오는 햇빛조차 옅어져 새카만 어둠이 자리 잡았다. 물고기들을 익힐  쓴 장작불이 아니었다면 동굴의 안쪽도 밖과 같은 어둠 속에 잠기고 말았으리라.


"약속, 시간이네."

그의 중얼거림에 소녀가 흠칫 떠는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잘 것처럼 가만히 엎드려 있던 늑대들도 고개를 들어 이쪽을 바라보았다. 이 자리에서 약속 시간을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이는 없었다. 모두가 침묵하는 가운데. 드디어 벨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갈 생각이구나."
"어."


여느 때처럼 평이한 목소리였지만, 그 목소리가 떨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동굴의 안이기 때문일까. 어셔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위험할지도 몰라."
"그래도 좋아."

벨카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미 확신한 모습이다. 그러니까 늙은 늑대가 그런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녀가 그렇게 화를 냈던 것이겠지. 그는 그것이 기뻤다.

"치를 필요가 없는 시험이야. 치르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어."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어셔는 처음으로 그녀의 말을 부정했다. 벨카를 바라보던 늑대의 시선,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늑대의 시선에서 그는 무언가를 느끼고 그 늑대의 시험을 치러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그의 시험을 치르지 않는다면 평생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다녀올게."
"...응."

벨카가 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금빛에 한가득 걱정을 담아놓고도 뭐라 하지 못하고 단 한마디로 긍정하는 그녀의 모습이 애처로워 자꾸만 눈에 밟혔지만 또 그녀에게 어리광을 부리게 될까 봐 그는 늑대들에게 말했다.

"안내해줘."


그러자 늑대들은 서로를 바라보더니 그를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동굴 밖에서 계속 쏟아질 것처럼 굴던 비는 이미 그친 후였다.

-찰박찰박


비는 그쳤지만 바닥은 아직도 물바다였기 때문에 그가 걸을 때마다 물이 발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비가 어찌나 많이 내렸는지 어떤 곳은 땅이 분명했음에도 발을 디디는 것만으로도 첨벙 소리와 함께 물이 종아리까지 올라올 정도였다. 달빛마저도 먹구름에 가려진 밤이라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그를 안내하는 늑대들에게 안내받아 겨우 걸어가고 있는 상황.


"엇?!"


그러나 그것만으로 부족했는지 그가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한 순간이었다.


"어, 어?"

폭신한 털이 넘어지려던 그를 받쳐주었다. 그 아래로 느껴지는 체온에 어셔는 그것이 자신을 안내하던 회색 늑대라는 것을 깨달았다. 은색 늑대는 체구가 너무 커서 그를 받치는 것은 불가능하고 무릎을 굽히면 그를 받칠 수 있을 정도의 크기는 회색 늑대였으니까. 뿐만이 아니라 그대로 그를 자신의 털이 젖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등에 태워주는 것이 아닌가?


"고마워."

그래도 어셔는 감사 인사를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누구야?!"

그에 대답이 돌아올 것이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탓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혹시 다른 사람이 있었나 하는 마음에 주변을 둘러보지만 온통 어두워서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 그를 비웃듯이 목소리는 어셔의 아래에서 들려왔다.

"족장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봤다면 우리도 말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 것이라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는 않은 건가."


 목소리는 늑대의 목소리라기보다는 성숙한 여성의 미성이었다. 마침 먹구름이 조금이나마 물러나 달빛이 비쳐 주어 늑대가 말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더라면 어셔는 그 목소리가 늑대의 것이라고 믿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에라스의 말을 한다는  그렇게나 놀라운 일이었나?"

어셔가 놀란 나머지 물에 빠지려 하자 균형을 잡아 그가 빠지는 것을 막은 회색 늑대가 물었다.

"그야 동물들이 말을 못 한다는 건 상식이었으니까."

그녀의 말에 답하면서도 어셔는 말 끝을 흐렸다. 사람들은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이렇게 말을 하는 늑대들을 보고 있으니 당연한 것처럼 생각했던 상식들이 힘을 잃었다.


"너희 에라스 또한 엄연한 동물이라는 걸 잊지 말았으면 하는군."
"그건, 그렇지만."

그리고 이어지는 늑대의 말까지. 그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좀 더 많은 것을 아는 이라면 동물들이 어째서 말을 못 하는 것이 상식인지 반박해 주었을 테지만 벨카가 가르쳐주는 것들을 배우기도 급급했던 어셔가 뭐라 할 수는 없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너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잖아."


하지만 지금까지 늙은 늑대를 제외한 다른 늑대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다른 늑대들처럼 울음소리만 내었었다. 때문에 늙은 늑대가 특별히 사람의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그가 착각하는 것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건 우리의 규칙 때문이다."
"규칙?"
"그래, 규칙."

겨우 지긋지긋한 마을의 규칙에서 벗어났나 싶었더니 늑대들에게도 규칙이 있었나? 어셔는 이제 질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대체 무슨 규칙이기에 늑대들이 말을 하는 것을 막았던 건지 궁금했다. 그가 더욱 의문이었던 것은 지금 말을 하는 회색 늑대다.

"그러면 지금은  말을 하는 거...."
"잡담은 그쯤 해 두는 게 좋을 것 같군."


물어보려던 찰나 또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에 어셔의 말은 끊겼다.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회색 늑대의 목소리와는 다르게  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여성의 것이 아닌 남성의 목소리에 그는 살짝 몸을 굳혔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목소리가 은색 늑대의 것임을 알아차렸다.

"숲의 주인도 숲의 주인이지만 에라스,  자신을 위해서라도  시험을 빠르게 통과하는 편이 이로울 테니."


온화하고 부드러운 여성을 떠올리게 만드는 회색 늑대의 목소리와는 다르게 은색 늑대의 목소리는 무겁고 낮았다. 그들을 꾸짖듯이 말하는 목소리가 늙은 늑대의 것처럼 힘이 있어서 어셔는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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