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늑대의 품.
그 후로 그와 소녀는 늙은 늑대에게 명령받은 한 늑대에게 그들의 보금자리로 보이는 동굴을 안내받고 있었다. 늑대를 따라 도착한 곳에는 짐승의 가죽들이 깔려있었고 회색 늑대는 그곳의 구석에서 배를 깔고 드러누웠다.
"이거, 여기에서 자라는 거겠지?"
그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 같았지만 확신까지는 하지 못한 어셔가 벨카를 바라보면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모습에 그제야 겨우 안심한 그는 늑대들이 깔아 놓은 것으로 보이는 가죽위에 몸을 뉘었다. 이름 모를 짐승들의 가죽은 별다른 가공이 되어있지는 않았는지 조금 쿱쿱한 냄새가 났다. 평소 그가 덮고 자던 솜 이불보다 얇고 몸을 덮을 수도 없었지만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가죽만으로는 동굴 바닥의 딱딱함을 모두 가릴 수는 없었지만 이미 그가 잠들었어야 했던 시간은 한참이 지난 후였기에 금방이라도 눈꺼풀이 닫혀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오랜 잠기운도 그녀의 옆에 다가와 눕는 기척에 잠시나마 물러났다. 동굴 안으로 희미하게 비쳐 들어오는 달빛에 금빛이 반짝인다.
"벨카."
"응."
소녀의 이름을 부르자 곧바로 들려오는 대답. 평소와 같은 평이한 그녀의 목소리가 동굴 속에서 울리니 잔잔한 노랫소리처럼 들렸다. 그렇다고 한들 그 모든 일들이 그저 하룻밤 사이의 꿈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잠이 한가득 몰려와 눈꺼풀이 너무나 무거웠지만 금빛을 마주 보았다.
"벨카는 정말로 아무렇지 않아?"
대답은 한동안 들려오지 않았지만 그녀의 금빛은 분명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기에 집요하게 마주 보고 있으면 그를 따뜻하게 감싸는 손길과 함께 소녀가 제 품에 그를 끌어안는다.
"어셔는 어떤 대답을 원해?"
얼굴에서 느껴지는 말랑한 감촉과 콧속을 간질이는 달큼한 동백꽃 향에 어셔의 얼굴은 확 달아올랐다. 혹시 붉어진 얼굴이 벨카에게 들키진 않을까. 하는 생각에 어리광을 부리듯 그녀의 품을 더 파고들었다. 동굴의 안은 달빛이 새어 들어와도 그렇게 밝지 않아 서로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을 리가 없을 텐데도.
"치사해. 그렇게 대답하는 게 어디 있어."
하지만 어셔는 알고 있었다. 벨카가 맥에 대해 원망의 말을 쏟아낸다면 그는 지금 당장이라도 맥을 죽이러 돌아가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에 대한 원망의 말을 쏟아내는 대신 그의 손 사이사이에 곱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얽으며 애정이 담뿍 스며든 말을 속삭인다.
"나는 어셔가 아니면 싫어. 그래도 어셔가 힘들어하는 건 더 싫은걸."
그러면서 그의 등을 토닥이는 소녀의 손길에 결국 몰려오는 잠기운을 몰아내지 못한 어셔는 이윽고 눈을 감고 말았다. 그의 의식은 곧 포근함 속에 스며들었다.
"그 에라스가 그리도 소중하십니까? 숲의 주인이시여."
어셔가 막 잠들자 그러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한 여성의 목소리가 동굴 속을 울렸다. 그곳에서 그들을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던 것처럼 그 목소리는 심란함을 담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이 숲의 주인이 아니야."
그 말에 답하는 것은 소녀의 목소리였다.
"하오나 족장 님께선 저희에게 당신을 그에 걸맞게 대하라 명령하셨습니다."
"얼마 머무르지도 않을 텐데. 너무 과해."
그녀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 에라스와 함께 이 숲을 떠나실 생각이신 거군요."
"응."
어둠 속에서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상대가 누구인지 관심이 갈 법한데도 소녀는 누군가를 쳐다보지도 않고 자신의 품 안에서 잠든 어셔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라스와 당신은 다릅니다."
"알고 있어."
"분명 상처받으실 겁니다."
"그렇겠지."
설득이라도 하려는 듯이 계속해서 묻고 묻던 목소리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대답하기를 반복하는 소녀에 할 말을 잃은 듯 침묵했다. 이내 걱정스러운 듯 다시 입을 열었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실 당신께서 그런 선택을 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입니까?"
그러자 계속 그를 향하고 있었던 벨카의 시선이 드디어 어둠 너머에 있을 누군가를 향했다. 이런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금빛은 그 누군가를 정확히 잡아내고 있었다.
"글쎄. 그것이 우리의 숙명이기 때문이 아닐까."
"...숙명입니까?"
"굳이 이해하려 하지 않아도 괜찮아. 너 또한 우리와 다르니까."
소녀는 더 이상 이야기를 할 마음이 없는 것처럼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듯했던 금빛을 감추었다. 누군가 또한 그 뜻을 알아차린 듯 다시 목소리가 들리는 일은 없었다. 약간의 달빛만이 새어드는 동굴은 이내 새근거리는 숨소리들만이 그 자리를 채웠다. 어두컴컴했던 하늘에 빛이 드리운 것은 그들이 잠에든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해가 늦장을 부리는 이른 새벽이었지만 약간이나마 찾아든 빛에 부지런한 새들이 저마다의 소리로 지저귄다. 그 소리가 소녀와 소년이 잠든 동굴의 안쪽까지 닿았던 것일까.
그들의 근처에서 잠든 것처럼 엎드려 누워있던 회색 늑대의 귀가 쫑긋 세워지더니 이내 눈을 뜬다. 그러자 드러나는 녹색 눈동자는 슬그머니 소녀와 소년을 살피고 그들이 깨어날 기색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늑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들의 단잠을 방해할까 조심스럽게 동굴을 빠져나온 회색 늑대는 먼저 앞발을 쭉 뻗고 뒷발로 지탱하다가 다음에는 반대로 앞발을 당겨 몸을 지탱하고 뒷발을 최대한 뒤로 뻗었다.
늑대에게는 단지 기지개를 켜는 행동일 뿐이었지만 그 커다란 덩치로 유연한 곡선을 그리는 늑대의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멋이라고 할만한 것이 있었다. 겨우 해가 뜰 기미가 보이는 하늘을 잠깐 바라보던 늑대는 몸을 한껏 웅크렸고 이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무성하게 자라난 풀들 위에 맺혀있던 아침 이슬들이 놀란 새무리처럼 튀어 올랐다가 뒤늦게 땅으로 떨어져 내리는 모습만이 늑대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달려간 것이라는 걸 짐작하게 해줄 뿐이었다.
사라졌던 늑대가 모습을 드러낸 곳은 어젯밤 소녀들과 늑대들이 마주했던 장소였다. 지금은 그 많던 늑대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질 않았고 단 한 마리의 늑대만이 가장 높은 자리에서 앉아서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바로 늙은 늑대였다.
"어떻게 되었느냐? 힐리스."
어딘가 뜯긴 흔적이 남아 불완전한 한 쪽 귀를 살짝 턴 그가 묻자. 회색 늑대가 입을 열었다. 그러자 그 늑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어젯밤 동굴 속에서 소녀와 대화를 나누었던 한 여성의 목소리다.
"이야기를 해보았습니다만 제대로 설득해보기도 전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런가."
그녀는 혹여 꾸지람을 들을까 노심초사하는 눈치였지만 정작 그는 그저 알고 있던 사실을 들은 것처럼 대답하며 침음을 흘렸다. 혹시나 해서 물었던 것처럼.
"제가 설득하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고 계셨군요."
그런 늙은 늑대의 모습에 회색 늑대는 자신이 그렇게나 못 미더웠나 고민함과 동시에 섭섭함을 느꼈다. 그는 생각에 빠져있다가도 그녀의 기분을 빠르게 알아차리고 자상한 어조로 그녀를 달랜다.
"네가 못 미덥다거나 하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란다."
겉치레라 생각할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그녀는 그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허면?"
"그녀는 원래 그런 존재일 뿐이니."
그녀의 물음에 돌아오는 것은 뭐라 판단하기 애매한 대답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가장 현명한 자는 허언을 하지 않는다. 아무리 허무맹랑한 말이라도 믿고 따른다. 그것은 경험이 많은 족장에 대한 존경을 바탕으로 하는 늑대들의 신뢰였고 그들의 생존을 위한 규율이다. 더욱이 몸이 불편한 그를 보필해온 그녀는 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 숲에서 가장 많은 세월을 살아온 늑대였고 가장 많은 경험과 지혜를 가지고 있다. 그는 연로하였지만 결코 노약하지는 않았기에 족장인 것이다.
"원래 그러한 존재...입니까?"
"그렇단다."
그녀는 벨카라는 소녀를 떠올렸다. 그 소녀는 그 누가 보아도 에라스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결코 에라스가 아니었다. 그것은 보는 순간 알아차릴 수 있는 본능과도 같았다. 바로 옆에 에라스를 두고 있었으니 비교가 되면서 더 확실하게 느껴졌다. 둘 다 어린 에라스의 모습을 하고 있었음에도.
"아가피아라고 하셨지요."
그 소녀를 향해 그는 에라스가 아닌 아가피아라 칭하였다. 회색 늑대는 동굴에서 마주한 소녀의 금빛을 떠올렸다. 낯선 것에 대한 경계심조차 느낄 수 없게 만드는 무구한 금빛이란. 그것만으로도 이지를 초월한 것 같았다.
"그 에라스는 무엇이 특별하기에 그러한 분에게 사랑받는 것입니까?"
때문에 그 사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그녀의 질문에도 돌아오는 것은 그저 침묵. 그는 흐린 눈동자로 먼 하늘을 바라볼 뿐이었다.
"공기가 습하구나. 더 늦기 전에 돌아가서 곁을 지키거라."
그 끝에도 가장 현명한 자는 질문에 끝내 답하지 않았다.
어셔는 희미하게 떠오르는 정신을 느끼고 자신이 잠들었었다는 것을 뒤늦게 자각하면서 따뜻하고 포근한 감각에 잠겨 이대로 더 누워있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조금만 더 눈을 감고 이 감각에 기댄다면 다시 잠들어버릴 것 같았다. 작은 손길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루만지지 않았다면 말이다. 무척이나 부드럽고 따스해서 무심코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다정함. 깨우고 싶지 않지만 깨어나야 한다 불러보는 듯한 조심스러운 채근에 그는 조금씩 눈을 떴다. 그리고 마주치는 금빛.
"어셔."
그렇게나 상냥하게 그를 깨웠음에도 억지로 깨운 것처럼 작은 죄책감이 담긴 그 눈동자로 그를 부르는 소녀의 모습에 어셔는 비실 웃음을 흘렸다.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물밀듯 몰려오는 사랑스러운 감정들이 톡톡 튀어 다녀서 그는 그녀를 그대로 껴안아버리고 말았다. 그러면 보드라운 감촉이 그의 몸에 맞닿았다.
"잘 잤어?"
"응."
아직도 잠에 취해있던 그는 벨카의 말에 무의식과 의식의 수면을 오르내리면서도 답한다. 그녀의 품에 파고들기를 얼마간.
"어제 그거. 꿈이 아니었구나."
"...응."
지금 자신과 벨카가 함께 있다는 사실이 꿈만 같아 기쁜 어셔였지만 어제의 일들이 모두 떠오른 그는 마냥 기뻐할 수가 없었다. 친근했던 마을 아저씨, 맥이 저항하지 못하는 벨카를 무자비하게 범했던 일과 겉으로나마 평화로웠던 마을의 실체까지. 모든 것이 하룻밤의 악몽이었으면 좋으련만, 그 일들이 모두 거짓이었노라 꿈이었노라는 거짓말조차 하지 못하는 소녀는 씁쓸하게 그의 시선을 피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자, 이제 일어나야지."
군말 없이 그녀를 따라 몸을 일으킨 어셔는 곧 뒤에서 들려오는 늑대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컹!
놀라서 돌아보면 어제 그들의 근처에서 잠들었던 회색 늑대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제도 큰 늑대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바라보니 더욱 커 보인다.
"왜 그러는데?"
동굴 안에서 소리를 지른 탓에 귀가 띠잉 울려와 불만스럽게 바라보면 늑대는 킁! 콧바람을 뀌었다.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짖었던 것뿐이었을까? 그러고서는 그냥 동굴 바깥쪽으로 걸어나가는 모습이 퍽 얄미워 보였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단순히 기다리라고 했을 뿐이니까."
어제 늑대들이 잠깐뿐이었지만 자신에게 으르렁거리며 위협하던 모습들을 떠올리고 혹시 미움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가 고민하고 있으니 소녀가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회색 늑대는 커다란 풀잎에 쌓여진 무언가를 물고서 나타났다. 늑대가 일어나 앉은 그들의 사이에 그것을 내려놓고 코로 툭툭 건드리자 자연스럽게 풀잎은 풀어졌다. 그러자 싱그러운 풀잎 향 사이로 달콤한 냄새가 풍겼다. 벨카에게서 나는 은은한 꽃향기와는 다른 진한 향기.
"과일?"
그 풀잎 안에서 나온 건 절대로 늑대들이 먹을 것 같지 않은 알록달록 예쁜 색깔을 뽐내는 열매들이었다. 늑대가 커다란 풀잎에 감싸서 가져온 과일들은 예상대로 그들을 위해 가져온 것이었다. 껍질 같은 것을 벗기지 않았음에도 콧속을 간질이는 달콤한 향기는 이 열매들이 분명 맛있을 것이라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는 작은 알갱이들이 모여 하나가 된 듯한 생소한 열매들의 모습에 먹는 것이 망설여졌다.
알갱이 하나하나의 크기도 무척이나 작아서 껍질을 벗긴다면 먹을 것이 있을까? 싶은 모습에 어셔가 열매들과 한참을 눈 싸움하고 있을 때였다. 작은 손이 그의 시야에 끼어들어 열매 하나를 집어 들었다.
"아."
"?"
그에 놀라 손을 따라가 보면 소녀가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기울이는 모습이 보였다. 이미 열매를 입에 넣은 상태였는지 손으로 입을 가리고 볼을 오물거리고 있다. 어찌 보면 독이라도 있을 법한 열매의 외형에 심각하게 고민하며 먹는 것을 고민하던 그의 고민이 무색하게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듯 무구한 모습이었다. 벨카가 저렇게 먹는 걸 보면 확실히 먹을 수 있는 건 확실하겠지만.
"그거, 맛있어?"
"아마도."
그의 말에 확실하게 단정 짓지 못하는 소녀의 대답에 어셔는 질문을 바꿔보기로 했다.
"달아?"
"응. 하지만 조금 신맛도 나."
"딱딱하진 않지?"
"씨앗을 빼면."
벨카는 많은 것을 알고 있었고 그에게 그만큼 많은 걸 가르쳐주었다. 덕분에 어셔는 웬만한 사람들보다 아는 것이 많을 거라 자부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정작 그에겐 지극히 당연한 부분에서 소녀가 모르는 경우는 꽤나 많아서 이런 식으로 물어보는 것은 그가 그녀와 지내면서 나름대로 터득한 질문 방식이었다.
"생긴 걸 보면 독이라도 있을 것처럼 생겼는데."
생리적인 거부감을 주는 열매의 모습은 아무리 먹어도 괜찮은 것이라 알려주어도 쉽게 극복할만한 것은 아니었다. 열매를 이루는 작은 알갱이들이 전부 작은 가시 같은 것을 달고 있으니 더욱 그랬다. 다소 징그러워 보이기도 했고.
"생긴 것과 독은 딱히 관계가 없어.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니까."
벨카는 역시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열매를 바라보고만 있으니 꼬르륵하고 울리는 뱃고동 소리에 그는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눈을 꼭 감고 열매를 입안에 넣었다. 씹는 것도 망설여져 알갱이 하나를 조심스럽게 씹으면 톡 터지는 식감과 함께 무척이나 달달한 향이 입속을 채웠다.
"생각보다 먹을만하네?"
이미 열매가 달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그 꺼림칙한 외형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달콤한 맛이었다. 그는 이미 낯선 열매를 경계하던 과거를 잊은 후였다. 그야 늑대가 가져온 열매는 어셔가 지금까지 먹었던 어떤 과일들보다 달콤했기 때문이었다. 잠깐이나마 먹기를 망설였던 사실을 후회할 정도로. 결국 늑대가 들고 온 열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잎 위에서 모두 사라졌다. 그는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시며 열매가 올려져 있었던 잎을 바라보았다.
"모자라?"
"어, 배를 채우기에는 양이 부족해."
언제부턴가 가만히 그를 지켜보고 있던 소녀의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열매는 확실히 맛있었지만 배를 채우기엔 열매가 작고 양도 그리 많지 않았다. 특히 빵이나 감자 같은 걸 먹을 때와 같은 포만감이 전혀 없었다.
"빵이라도 꺼내 먹을까?"
"아, 맞다."
어제 메고 온 가방에는 여행에 필요한 여러 가지 물품들이 있었고 그중에는 식량으로 쓸 빵도 있었다. 동굴의 벽에 기대놓았던 가방 속에서 빵을 꺼내면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졌다.
"이거, 먹고 싶어?"
-크응.
그 시선의 주인은 그들에게 과일을 가져다주고는 관심이 없다는 듯이 구석으로 가서 엎드려 있던 회색 늑대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빵을 쥔 손을 늑대가 있는 쪽으로 뻗어보면 늑대도 마음이 동한 듯 몸을 일으키고 천천히 걸어왔다. 늑대의 크기가 보통 크기가 아니라서 그냥 그를 향해 걸어오는 것만으로도 압도될 것 같았지만 그가 손에 쥔 빵에 시선을 집중하는 모습에서 묘하게 마을에서 기르던 강아지와 겹쳐 보여 정말로 무섭지는 않았다.
그의 코앞까지 다가온 회색 늑대는 그가 든 빵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그 행동은 먹이의 냄새를 맡기보다는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을 채우는 모습으로 보였다. 그래서 어셔는 그 늑대가 다음에 할 행동을 예상하지 못했다.
"잠깐만!"
-깨갱!
늑대가 입을 벌리더니 빵을 그대로 깨물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늑대의 날카로운 이빨은 빵을 물어뜯지 못했다. 그야 조금이라도 오래된 빵은 매우 단단해서 그냥 먹을 수 있을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특히나 이 빵은 오래 보관할 수 있게 만든 일부러 딱딱히고 건조하게 만든 빵이다. 당연히 그냥 먹을만한 것이 못되었지만 늑대가 그런 상식을 알 리는 없었으니. 그럼에도 늑대의 이빨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는 빵의 표면에 그는 질린 표정을 지었다. 돌로 힘껏 내려쳐야 겨우 부서지는 빵에 저런 자국을 새기는 걸 보면 늑대들에게 잘못 물리면 뼈도 못 추릴 것 같았다.
"이건 물이나 우유에 적셔 먹어야 그나마 부드러워져서 먹을 수 있어."
고통스러운 듯 끙끙대는 늑대에게 설명하고 나니 우유는커녕 물도 안 보이는 이곳에서 어떻게 이 빵을 먹을 수 있을지 고민할 때였다.
"밖에 비가 오니까. 비에 적시면 되지 않을까."
벨카도 빵이 단단하다는 것은 몰랐는지 그가 건네주었던 다른 빵을 씹지는 못하고 물고만 있다가 열매가 담겨있었던 잎 위에다 올려놓으며 말했다. 그렇게 모두 함께 동굴의 입구에 도착하니 정말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물 냄새가 나긴 했지만 단순히 동굴이 습해서 그런 것이라 여겼는데. 그는 잎 위에 올려놓은 빵들이 비를 맞도록 동굴의 경계를 나누는 입구에 가져다 놓았다. 동굴의 입구는 비가 들이쳐 땅이 축축했지만 크고 작은 바위들이 앉기 좋게 모여 있어서 그들은 그곳에서 빵이 물에 젖어 부드러워질 때까지 비가 내리는 모습을 지켜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