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9화 〉늑대의 품 (19/220)



〈 19화 〉늑대의 품

처음으로 마주한 몬스터에 대한 두려움도 잠시. 어셔는 이곳에 온 목적이었던 가방을 챙겨 메었다.

"우선 마을을 나가자."


저런 게 얼마나  있는지 알 수는 없어도  마을에 있는 것이 안전하지 않다는 것 정도는  수 있다. 벨카와 손을 잡은 그는 먼저 놈이 다시 나간 곳으로 보이는 창문을 통해 놈이 아직 있는지 확인해 보았다. 긴장으로 크게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 때문에 놈에게 들키지 않을까 걱정하면서도 유심히 밖을 살폈다. 놈은 정말로 이 집을 떠났는지 조용한 마당의 모습에 안심하고 소녀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윽! 너무 좁잖아."


하지만 그는 예상치 못한 난관을 맞이해야 했다. 이것저것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물건을 챙겨 넣다 보니 커다래진 가방은 등에 메고  뒤의 틈새를 통과하기엔 너무 컸다. 어쩔 수 없이 등에 메는 것을 포기하고 가방을 먼저 밀어 넣어보지만 가방은 틈새에 끼여버렸다. 몸으로 가방을 더 강하게 밀어보지만 가방은 틈새에 들어가기는커녕  끼어버렸다. 결국 초나 옷가지 몇을 덜어낸 뒤에야 가방은 끼지 않고 틈새를 통과했다. 그러나  순간 뒤에서 들려오는 그것의 울음소리.

-카가가가각!

식은땀이 흐르며 굳어버리려 하는 몸을 겨우 움직여 뒤를 돌아보면 아니나 다를까. 아무리 작아도 어셔와 비슷한 덩치의 그것이 담장 너머에서 그들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 모습에 어셔는 머릿속이 새하얘질 뻔했다. 그가 잡고 있는 작은 손의 감촉이 느껴지지 않았다면 그대로 꼼짝도 하지 못했으리라.

"벨카, 먼저 들어가!"


그는 혼자가 아니었으니까. 이대로 저것에게 당한다면 그만이 아니라 벨카마저 당하게 될 테니까. 그는 움직일 수 있었다. 움직여야만 했다.


"어셔는."
"따라갈 테니까!"

소녀의 금빛에 걱정이 스쳐 지나가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아는지 그녀는 그가 가방을 빼면서 생긴 틈새로 들어갔다. 어셔도 소녀가 들어가자마자 틈새에 이젠 여유가 생긴 가방을 구겨 넣는다.


-키기긱!

그리고 점점 다가오는 그것의 소리에 지체하지 않고 그도 몸을 집어넣는다. 틈새로 들어가 부지런히 구멍을 향해 움직이면서도 슬쩍 뒤를 보면 그것이 틈새를 들여다보며 머리를 돌리는 모습이 보였다. 목이 대체 얼마나 유연한 것일까? 머리가 한 바퀴를 돈 것 같은데도 부러지기는커녕 부드럽게 움직이는 모습이 기이했다. 그러다 이곳으로 들어오려는 듯 머리를 들이미는 모습에 그는 가방 너머를 확인했다. 다행히 소녀는 먼저 구멍에 몸을 넣고 있었다.


소녀가 들어간 구멍에 가방을 밀어 넣는다. 다행히 쉽게 구멍 속으로 들어가는 가방에 안심하고 그도 구멍 속에 들어갔다. 머리로 가방을 밀며 올라가고 있으니 평소보다 숨이 벅차게 느껴졌다. 좀처럼 따라오는 기색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소녀의 말대로 놈은 머리가 썩 좋은 편은 아니었는지 그들이 들어온 구멍을 보지 못하고 틈새를 지나간 듯했다. 그래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구멍을 오른다. 평소보다 더 길게 느껴지는 구멍의 길이와 더 짙게 느껴지는 좁은 공간 속을 기어가고 있으니 긴장감을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가 없었다.


-까가가각!


구멍의 존재를 알아차렸는지 들려오기 시작한 놈의 울음소리를 들으면 더욱. 드드드득, 소리와 함께 따닥따닥 부딪히는 놈의 발소리가 들려온다. 좀 더 빠르게 가방을 밀면 갑자기 아래로 꺼지며 드러나는 빛. 먼저 도착해 있던 소녀가 뻗는 손을 잡으며 구멍 속에서 나온 그는 곧바로 가방을 메고 느티나무가 있던 곳을 향해 달렸다. 어째서 그곳으로 향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단지 소녀가 그곳으로 그를 이끌고 있었기에.

-키리릭!

하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놈의 소리는 멀어지기는커녕 점점 더 가까워 온다.

"아읏?!"
"벨카!"

그보다 앞서 달리던 소녀가 넘어지는 모습에 그가 놀라 그녀를 껴안으면 가녀린 다리가 덜덜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소녀는 아직 제대로 달릴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게다가 체력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할  없는 소녀이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카가가가가각!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곧장 뒤에서 들려온 놈의 울음소리에 모든  끝이라고 생각했다. 쿵! 요란하게 사방으로 퍼지는 소리에 벨카를  껴안고 다가올 고통을 기다렸지만.


"어셔, 나  막혀."
"어? 어어?"

아픔은커녕 충격조차 느껴지지 않아 의아해하며 뒤를 돌아본 어셔는 어째서 놈이 그들을 공격하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끼...릭.


놈은 옆에서 튀어나온 거대하고 날카로운 뿔에 찔려 옆에 있던 나무에 처박혀 기분 나쁜 갈색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다. 놈은 공격을 하지 않은 게 아니라 못한 것이었다. 놈을 들이박은  다른 거대한 곤충 때문에. 그 곤충은 마치 사람이 쓰는 투구와도 같은 머리를 가지고 있었고  거체를 갑옷과도 같은 갑각으로 감싸고 있었다. 놈은 발악을 하듯 얇은 다리를 버둥거렸지만 이내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제야 놈에게서 물러서며 뿔을 거두는 곤충의 모습에 어셔는 긴장했다.


비록 그들을 쫓아온 놈을 해치우는 것으로 도움을 준 것처럼 보였지만 방심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이 곤충도 그들을 잡아먹으려는 몬스터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들을 쫓아오던 놈도 나름 단단한 갑옷 같은 갑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녀석은 그 갑각을 쉽게 꿰뚫어 죽여버렸다. 심지어 더 단단해 보이는 갑각까지. 다행히 그만큼 더 둔해 보이니 지금이라도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배웅하러 나와준 거야?"

소녀가 마치 알고 있던 사람을 만난 것처럼 그 곤충에게 말을 건 것은.

"아는 사이야?"

거대한 곤충과 벨카가 마주 보고 가만히 있자 그는 물었다. 말만 들어보면 서로를 알고 있는 것 같은 눈치였는데. 그러면서도 어쩐지 낯선 것을 마주한 듯한 어색함이 느껴져서 애매한 느낌.

"응. 하지만 이렇게 만나는 것은 처음이네."

애매한 말이었다. 알고 있지만 만나는 것은 처음이라니 그는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한지 묻고 싶었으나 그전에 곤충이 움직이는 것이 먼저였다. 그 거체로 어찌나 잽싸게 움직이는지 뿔로 들이받을 듯한 그 기세에 어셔는 지레 놀라버렸지만 다행히 방금 그놈처럼 그들이 들이받히는 일은 없었다. 대신 곤충은 그들에게 등이 보이도록 돌아서서 단단한 갑옷 같은 등판을 들이밀었다. 그에게 곤충의 생각을 읽는 재주 따위는 없었지만 이번에는 그도 그 곤충이 하고 싶은 말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셔는 어떻게 하고 싶어?"
"어? 나?"


벨카는 어셔에게 물어보았지만 그에게 물어본다고 한들 저런 거 부담스러워서 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난 됐어."
"괜찮으니까. 이대로 돌의 영역까지 안내해 줘."

소녀의 말에 곤충은 어딘가를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따라가자."


어셔는 그녀의 말대로 곤충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런데  곤충은 그들을 대체 어디로 데려가려는 것인지 빽빽한 숲을 한참을 걸었는데도 사방이 거대한 나무들뿐이다.

"우리 어디까지 가는 거야?"

걸어도 걸어도 끝없이 이어지는 수해에 슬슬 걱정이 된 그가 벨카에게 물으면.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그녀의 말을 들으며 걸음을 내디디는 순간 아래로 푹 빠지는 한 쪽 다리.


"조심해."
"어, 어."

벨카가 잡아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넘어졌을 것이 분명했다. 다리가 빠진 곳을 보면 그곳에는  구덩이가 파여있었다. 누군가 일부러 파지 않으면 이런 곳에 구덩이가 있을 리가 없을 텐데도 존재하는 구덩이는 어색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어셔가 그 구덩이가 신경 쓰여 그곳을 바라보고 있자 소녀의 시선도  구덩이로 향했다.


"이건... 철이구나."
"철이라고?"

소녀의 말에 그 구덩이의 안을 더 자세히 보니 확실히 무언가 거대한 것이 그 구덩이 안에 있는 것이 보였다. 달빛이 잘 들어오지 않는 숲인 만큼 그것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희미하게나마 윤곽이 보이는 그건 상당히 커다란 크기였다. 어른과 비슷한 크기에 호기심을 느끼고   자세히 보려고 하면.

"어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녀의 모습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철이라고 해서 잘만 하면 팔아서 여행에 필요한 철전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다.


"조금만 떼어서 가져가면 안 돼?"

어차피 크기가 너무 커서 전부 가져갈 수도 없었지만 아쉬운 마음에 한숨이 나왔다.


"저건 어셔가 생각하는 것과 달라."
"하지만 철이라며?"
"부르기를 철이라 하는 것뿐이야."

벨카의 말은 역시 어셔가 이해하기엔 어려운 구석이 있었다. 그래도 소녀가 이유 없이 그런 말을 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아쉬운 마음을 참으며 계속 곤충의 뒤를 따랐다. 그들이 지나간 뒤. 그 구덩이 속에서 뻗어 나온 검은 손을 보지 못한 채. 새들이 날아오르고 스산한 바람이 숲을 스쳤다.

곤충의 뒤를 따라 걸어가길 얼마간. 어셔는 처음엔 긴가민가했지만 곧 점점  늘어나는 시선을 느끼며 침을 삼키면 곧 그 시선의 주인들을 확인할  있었다. 처음으로 발견한 것은 곤충을 앞세운 그들의 정면에 당당하게 서있는 커다란 은색의 늑대였다. 언뜻 마을에서 키우던 개가 떠오르는 외형이었지만 이 늑대를 직접 보고도 감히 개라고 폄하할 수 있을까? 개의 유순한 인상과는 다르게 인상은 날카로웠고 커다란 몸은 보기만 해도 위협적이다.


그들의 앞에 있는 곤충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크기의 그 늑대를 발견했을 때. 그가 깨달은 것은 그의 옆과 뒤를 가리지 않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수많은 늑대들이었다. 크기는 그들의 앞을 막아선 은색 늑대가 제일 컸지만 그보다 작아도 결코 작지 않은 여러 마리의 늑대들은 확실하게 그들을 포위하고 있었다. 저 어둠 속에서 형형하게 빛나는 눈동자들을 보면 저 수풀 너머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늑대가 아직 많이 남아 있으리라.


늑대들에게 사냥감으로 찍힌듯한 느낌이 든 어셔는 이번에도 도망가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소녀의 손을 꼭 쥐면 그녀는 오히려 앞으로 나섰다. 덩달아 앞으로 나온 어셔는 당황스러웠지만 뒤늦게 늑대들이 사냥을 하기 위해 그들을 포위한 것치고 너무 조용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으르렁거리며 이빨을 드러내고 경계나 위협을 하는 늑대는 어디에도 없었다. 소녀는 자신보다 몇 배는  커 보이는 은색 늑대의 자주색 눈동자와 눈을 마주쳤다.

"가장 지혜로운 자에게 데려다줘."


소녀의 목소리가 큰 것은 아니었지만 주위가 너무 조용한 나머지 그녀의 목소리는 주변에 확실하게 전해졌다. 그녀의 말이 늑대들에겐 대단한 일이라도 되는 것일까? 사람들이 웅성이 듯이 늑대들도 서로를 바라보며 웅성인다. 조금은 소란스러워진 늑대들 사이로 은색 늑대가 돌아서서 걷기 시작하자 다른 늑대들도 웅성이는 것을 멈추고 조용히 그들의 주위를 감싸며 함께 걷는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이곳까지 그들을 안내했던 곤충은 더 이상 따라올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자신이 할 일은 여기까지라 이야기하는 것처럼. 제 자리에 서서 늑대들과 같이 걸어가는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기만 하는 모습이 신경이 쓰였지만 곤충은 더 이상 그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자리에서 그들을 배웅했다.

"여기는..."

그들이 늑대들의 호위를 받으며 도착한 곳은 커다란 곡선을 그리는 반원 형태의 계단이었다. 심지어 계단의 중심을 가르는 길과 그 끝에 자리한 작은 동굴의 모습은 투박하고 거대하긴 해도 도저히 자연의 산물이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때문에 위화감이 들었지만 그와 동시에 주변에 자라난 나무들과 너무나  어울리는 모습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들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늑대들이 하나둘 길을 타고 올라 저마다 자리를 잡고 앉는 모습에 그는 이것이 단순한 계단 같은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이곳은 늑대들이 모이는 집회장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치면 지금 유일하게 계단으로 올라가지 않은 은색 늑대와 함께 그들이 서있는 이곳은 단상이나 마찬가지였다. 단상을 중심으로 앉아 있는 늑대들이 그들을 내려다보는 모습에는 엄숙한 느낌마저 들어서 어셔는 위축되었다. 침묵을 유지해야만 할듯한 분위기에 그도 입을 꾹 닫고 있으면 바로 옆에서 울리는 커다란 소리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우~우우우!

그건 늑대가 울부짖는 소리였다.  커다란 몸집에 걸맞게 크게 울리는 하울링은 바로 옆에 있던 어셔의 귀를 뒤흔들면서 멀리까지 퍼져나갔다.

"흐음, 이 소리는... 귀한 손님을 데리고 왔나 보구나."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계단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길의 끝에 있는 동굴의 안쪽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셔가 사람이라고 생각한 순간 동굴의 안쪽에서 걸어 나온 그림자가 달빛을 받아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자 그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늑대가 사람의 말을?"


동굴에서 나온 것은 사람이 아닌 탈색된 것처럼 새하얀 털을 가진 늑대였다. 다른 늑대들의 송곳니가 모두 멀쩡한 것과는 다르게 입 사이로 작게 삐져나온 송곳니 하나가 없었고 군데군데 털이 빠진 흔적마저 선명한 늑대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늑대들이  늑대를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은색의 늑대까지도 말이다. 영락없이 그들을 데리고 왔던 늑대가 우두머리일 것이라 생각했던 어셔에겐 놀라운 광경이었다.

"적어도 나의 세대에서 이렇게 숲의 주인을 직접 마주하게 될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했건만."


 늑대는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혀를 끌끌 차는 것처럼 행동하며 소녀와 눈을 마주쳤다.

"돌이 이미 오래전에 무너졌다는 것쯤은 그대도 알고 있었을 터. 숲의 중심을 지켜야만  터인 그대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은."
"나무는 쓰러졌어."


늑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벨카가 끊어내며 말했다. 그런 소녀의 행동에도 늑대는 아무렇지 않은지 예상하고 있었던 말을 들은 것처럼 이어서 말했다.

"철은 어떻게 되었나?"
"이미 깨어났을 거야. 봉인이 깨져있는 걸 확인했으니까."
"그런가."


늑대는 안타까운  한숨을 흘리며 하늘을 바라보더니 이내 어셔를 바라보았다.

"그대가 데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하니. 그 어린 에라스가 예언의 아이인가."


예언이라니 어셔는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알 수는 없었지만 그의 말은 분명 그를 가리키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묻는 것이네만, 설마 그때 우리가 놓쳤던 에라스의 후손은 아니겠지? 아가피아여."


그가 그렇게 이야기하며 그를 노려보자 늑대들이 일제히 그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노려보았다. 에라스니 아가피아니 그가 전혀 모르는 단어들을 말하다 갑자기 영문을 알 수 없는 적의를 풍기니 어셔는 겁을 먹고 말았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 아이는 그의 후손이 아니니까."


벨카가 그런 그를 토닥이며 이야기하자 늑대들의 적의는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때문에 그가 의아해하며 주변을 살피면 안심한 기색의 늑대들이 여기저기서 한숨을 내쉬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정말로 다행이군."

우두머리로 보이는 늑대도 마찬가지인 듯 눈에 띄게 안심한 목소리였다. 그러다 그는 코를 몇 번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는 듯하더니 벨카와 어셔의 모습을 흐린 눈으로 바라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끙. 설마."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천천히 경사진 길을 내려와 그들의 앞에선 그는 은색 늑대처럼 특별한 모습은 아니었다. 크기는 다른 늑대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고 털이 빠져 드러난 피부는  늘어져 오히려 볼품이 없기까지 했다. 하지만 뭐랄까. 예외적으로 그 흐릿한 푸른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현묘함은 위압감마저 주었다. 그가 다시 한번 천천히 그들을 살펴보더니 못마땅한 목소리로 말했다.

"냄새가 짙군.  에라스에게 몸을 허락한 것인가?"
"응."


벨카가 거리낄 것이 없다는 듯이 대답하니 늙은 늑대는 한숨을 내쉬었다. 소녀의 그런 모습은 기꺼웠지만 괜히 그가 눈치가 보였다.


"언젠가는 이리 될 것을 알고 있었건만."

늙은 늑대는 어쩔  없다는  중얼거리면서도 소녀를 걱정스럽게 바라본다. 그러면서도 날카롭게 눈을 뜨며.


"하지만 그대의 몸에서 이 에라스가 아닌 다른 자의 냄새도 나는군. 그대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 자에게도 몸을 허락한 것은 아닐 터."


그 목소리에 소녀의 몸이 움찔 떨린다.

"누가 감히 그런 짓을 했나!"

어셔는 화를 내는 그의 모습에 인상을 찌푸리며 맥의 모습을 떠올렸다. 늙은 늑대는 소녀에게 그런 짓을 한 맥을 만나기라도 하면 해코지라도 하려는 듯이 화를 냈다. 자신의 딸이 누군가에게 강제로 범해진 사실을 알아버린 것처럼. 그 목소리는 볼품없는 늙은 늑대의 모습과는 다른 사나운 기세가 있어서 그를 향해 화를 내고 있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어셔는 기가 죽었다. 그렇지만 그가 화를 내는 것을 말리는 이가 있었다.

"그렇게 화내지 않아도 돼."

다름 아닌 벨카였다.

"그대는 그런 일을 겪고도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가?!"
"일단 진정해."


벨카는 화를 내는 늑대에게 차분하게 말했다.


"어셔가 힘들어하니까.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자."

확실히 오늘은 힘든 일이 많았고 늦은 밤이기까지 했으니 어셔도 피곤했지만 그래도 소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심한 일을 당했던 건 그가 아닌 소녀였음에도 정작 자신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벨카는 그를 걱정했다. 그런 그녀의 말에 늙은 늑대는 기세를 잃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소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어셔를 쳐다보더니 어쩔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후우, 그래, 그대는 그러한 존재였지. 하지만 어떤 놈이 감히 그대를 건드렸는지 나중에라도 반드시 말해주게."
"...알았어."


그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며 늙은 늑대가 이야기하자. 벨카는 그제야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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