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늑대의 품.
현재 어셔와 벨카는 밤의 숲을 헤치며 느티나무가 있었던 곳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이미 마을에는 있는 정이고 없는 정이고 다 떨어진 터라 이참에 마을을 떠나기로 했지만 그가 여행을 떠나고자 미리 준비해두었던 철전과 물건을 챙겨놓은 가방을 마을에 두고 온 탓에 마을로 돌아갈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을의 정문으로 들어가기엔 누군가에게 들킬 염려가 있어서 거리가 조금 멀어도 안전하게 마을을 드나들 곳이 있는 느티나무 쪽으로 가기로 한 것이다.
"무겁지 않아?"
"가벼우니까 걱정하지 마."
다만 벨카의 경우 그의 품에 끌어 안겨 있었다. 그녀가 스스로 걸을만한 상태가 아니었기에 그가 끌어안고 가기로 한 것이다. 소녀의 무게가 가볍다는 것이 정말로 다행이었다. 그러나 밤의 숲은 험하고 길도 잘 보이지 않아서 소녀를 안고 가든 그냥 가든 위험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지금 그들이 걷는 길만큼은 어둡지 않다고 말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서있는 이곳을 하늘이라고 착각한 별들이 놀러 내려왔는지 밤하늘의 별들이 그곳에서 헤엄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와, 이것들이 전부 이 숲에서 살고 있는 것들이라는 거지?"
그러나 그것들은 별 같은 것이 아니다.
"응, 모두 이 숲에 살고 있는 아이들이야."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들은 단순한 빛이 아닌 날아다니는 곤충들이었다. 저 하늘 높은 곳에 떠올라 있어 숲을 비추지 못하는 달과 별을 대신해 스스로 빛을 내는 수많은 곤충들이 숲길을 비춰주고 있었다. 대부분이 처음 보는 것들이지만 그중에는 어셔의 눈에도 익숙한 반딧불이가 함께 어우러져 날아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들이 모두 소녀의 부름에 몰려든 것이다. 그렇게 곤충들이 만들어내는 빛의 도움을 받아 걸어가는 길은 마치 밤 하늘을 걷는 듯한 느낌이다.
그러다 그들의 앞에 나서서 어셔를 이끌던 곤충들이 어느 순간 확 흩어졌다. 그리고 앞에 펼쳐진 것은 느티나무가 있었던 언덕이었다. 밤은 어두울 것이라는 편견을 비웃듯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밤 하늘은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별들이 빼곡히 들어차 커다란 은하수를 만들고 그 사이로 커다란 달이 밤을 밝혔다. 숲속에서 그들을 안내해 주었던 스스로 빛을 내던 곤충들이 모방해내는 밤하늘의 모습도 충분히 아름다웠지만 지금처럼 광활한 밤하늘을 도화지 삼아 펼쳐진 웅장함만큼은 따라잡을 수 없었다.
단지 찾아온 시간이 달랐을 뿐인데 그것만으로도 전혀 다른 곳에 와있는 것 같은 기분에 빠져들었던 어셔는 발끝을 스치는 낯선 감촉에 정신을 차렸다. 그것은 느티나무에서 흘러내린 나뭇잎들이었다. 이 언덕을 가득 채운 나뭇잎의 모습은 느티나무가 얼마나 거대했는지를 가르쳐주지만 이미 그 나뭇잎의 주인이었을 나무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노을빛을 받아 붉게 물들었던 나뭇잎들의 모습과 함께 떠오르는 달갑지 않은 얼굴에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벨카, 정말 그대로 두고 나와도 괜찮을까?"
그가 떠올린 것은 지금도 오두막에 쓰러져 있을 맥이었다. 벨카의 부탁만 아니었다면 도끼로 몇 번을 내려찍어도 시원찮았을 그를 그 오두막에 그냥 두고 왔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밧줄로 꽁꽁 묶어 꼼짝도 할 수 없다는 것까지 여러 번 확인한 후였지만 그럼에도 그 남자가 밧줄을 풀고 그들을 쫓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했다.
"괜찮아. 그 남자는 그곳에서 벗어날 수 없을 테니까."
그럼에도 그는 벨카의 말에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어찌 아느냐 물어도 소녀가 대답하지 않으리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런 벨카의 말들은 이상할 정도로 잘 들어맞았으니까. 느티나무에 도착한 소녀는 어셔를 이끌고 느티나무가 있었던 곳으로 향했다. 그러자 보이는 느티나무의 모습은 참상이라 말하기에 마땅했다. 보통 나무를 베어내면 밑동만이라도 남기기 마련이건만 나무는 밑동조차 얼마 남지 않아서 나무의 단면에 새겨진 나이테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나무가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밑동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한 느티나무를 한참 내려다보던 소녀는 무릎을 굽혀 나무의 단면을 손으로 쓸었다. 그저 아무 말도 없이 평화로워 보일 만큼. 이후에 돌아서서 그를 바라보는 소녀는 눈동자를 본 후에야 어셔는 그녀가 슬퍼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벨카는 제 금빛 속에 슬픔을 가두고 원망마저 가슴에 묻으며 조용히 애도하고 있었다. 어셔는 그녀를 위로하고 싶었지만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단지 그를 어딘가로 이끄는 소녀를 따라 걷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벨카? 여기는 왜?"
그렇게 도달한 곳은 쏴아아 쏟아지는 물소리가 깨끗한 계곡이었다. 느티나무의 뒤쪽에는 이런 곳도 있었던가? 주변을 둘러보면 크고 작은 바위들과 자갈 밭이 이어지는 가운에 비교적 물살이 약해 고여있는 것처럼 보이는 곳에 그들은 서있었다. 언덕에 도착하자마자 흩어졌던 빛을 내는 곤충들 중에서 반딧불들은 이곳에서 왔던 것일까? 연두색과 노란색 사이의 오묘한 불빛을 꼬리에 단 반딧불들이 노니는 광경이 보였다. 아마도 이 장소를 마을 사람들이 알았다면 시도 때도 없이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하려 하지 않았을까?
"미안해. 조금 씻고 싶어서... 안 될까?"
생각해보니 땀에 젖었던 몸은 생각보다 더 찝찝했다. 소녀가 말하니 그까지 씻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그럼 나도 씻을래."
그러자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원피스 위에 걸치듯 입었던 축제용 소복을 벗어 땅 위에 접어 놓으며 그 위에 가면을 놓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 든 의문에 어셔는 물었다.
"그런데 그 옷이랑 가면은 왜 안 버리는 거야?"
그 기분 나쁜 축제에서 사용하던 물품이다. 꺼림칙한 마음에 어셔는 바로 가면들을 부수고 소복을 버리고 싶었지만 벨카가 그를 말렸던 것이다.
"그 축제에서 이 가면과 옷은 원래 그런 용도로 사용되고자 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벨카는 어셔가 대충 팔에 걸쳐 놓았던 그의 가면에서 십자 모양이 그려진 부분을 쓰다듬으며 미소 지었다.
"이건 나와 여서가 함께 있었다는 증거인 걸."
"그런가?"
그녀가 말하는 대로 생각하니 그저 나쁘게 느껴졌던 가면이 조금은 괜찮아 보였다. 잠시 가면의 모습을 바라보다 고개를 드니 소녀가 남아있던 원피스까지 벗는 모습이 보였다. 점점 드러나는 소녀의 하얀 피부에 놀란 어셔는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에 그만 등을 돌리고 말았다. 요즘 들어 자주 보는 소녀의 나신이지만 그는 좀처럼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그것이 벨카가 지나치게 아름답기 때문인지 아니면 자꾸만 솟아오르려 하는 그의 욕구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여셔, 안 씻을 거야?"
그런 그의 모습이 이상했는지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씨, 씻어야지."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옷을 벗어던졌다. 연거푸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히면 이미 많은 욕구를 해소한 덕분인지 오래지 않아 잠깐 부풀었던 욕구도 다시 줄어들었다. 그렇게 어셔도 알몸이 되어 뒤를 돌아보면 그를 바라보는 소녀가 보였다. 유능한 장인이 공을 들여 빚어낸 새하얀 자기처럼 우아한 곡선을 그리는 소녀의 나신은 이 밤중에도 하얗게 비쳐 보인다. 감히 누가 건드리는 것조차 불경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아름다운 소녀의 나신은 그를 잠시 멍하니 있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러는 중에도 그의 시선이 유독 오래 머무는 곳들은 있었으니. 소녀의 붉은 머리카락과 화사하게 빛나는 금잔화 속에 머물다 아래로 내려가면 보이는 작은 음영을 만들어내는 가슴의 융기와 그 끝의 과실은 여전히 군침을 삼키게 만들었다. 게다가 가녀린 허리와 허벅지의 경계선 아래에 있는 솜털 하나 보이지 않는 작은 도끼 자국은 과연 그의 물건을 삼켰던 곳이 맞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생각하기가 무섭게 부풀어 오르려는 욕구를 느낀 어셔는 그 사실을 소녀에게 들킬세라 계곡물에 몸을 던졌다.
"앗, 차가!?"
어셔는 온몸을 덮쳐오는 찬 기운에 놀라 소리쳤다. 때문에 부풀어 오를 뻔했던 그의 물건이 쪼그라든 것은 다행일까?
"아무리 물이 좋아도 급하게 들어가는 건 좋지 않아."
그런 어셔를 벨카가 핀잔하며 물속으로 걸어들어왔다. 닿는 것만으로 피부가 얼어붙을 듯 차가운 물에 몸을 담그고 있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지 밤이라는 먹물을 풀어놓은 듯 검게 물든 계곡물을 가림막 삼아 가녀린 몸을 절반 정도 감춘 소녀는 익숙한 듯 근처에 동동 떠있던 바가지로 밤을 퍼올려 몸 위로 쏟아낸다. 밤에 물든 물이 그녀의 몸을 더 더럽히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잠시. 달빛이 비치자 물은 투명하게 빛나며 그 몸에서 밤을 지웠다. 어셔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으니 마스카피르의 유래가 되었다는 이야기 중에 하나가 그 위에 겹쳐 보였다.
밤이 찾아온 계곡, 한 소녀가 달빛을 받아 몸을 씻고 있었다. 수많은 반딧불이 춤을 추며 노니는 가운데 달빛으로 몸을 씻는 절세의 소녀. 감히 이르기를 그것은 아름다운 괴물이었다.
"어셔."
벨카가 몸을 씻는 그 광경에 사로잡혀 어셔가 멍하니 있는 사이 그녀가 그에게 다가왔다.
"왜, 왜?"
코앞까지 다가온 소녀의 모습에 그가 깜짝 놀라 대답하면 그녀는 걱정스러운 금빛으로.
"얼른 씻지 않으면 감기에 걸릴 거야."
그는 그제야 물 아래에서부터 올라오는 찬 기운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녀의 말대로 빨리 씻지 않으면 이 여름에 감기에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가 빨리 씻고 나가고자 했을 때 그의 몸에 닿는 작은 손길에 그는 뻣뻣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 손은 물기에 젖어 무척이나 차가운데 그 손길이 닿는 곳은 어찌 이렇게 홧홧한 느낌일까? 그가 아래를 내려다보면 소녀가 그의 몸에 손을 얹고 그를 올려다보는 모습이 보였다.
"혼자 씻기 힘들어? 씻겨줄까?"
두 개의 봉긋한 언덕과 그 끄트머리의 분홍빛 과실들이 그에게 전부 보이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소녀는 그렇게 말했다. 그가 처음으로 여자의 알몸을 보게 된 뒤로 그는 예전만큼 벨카를 쉽게 바라볼 수가 없었다. 자꾸만 살색으로 가득한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괴롭히며 눈을 가려버렸으니까. 지금도 소녀의 부드러운 살갗을 마음껏 만지고 싶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때문인지 애정으로 가득한 소녀 눈길이 조금은 불편하다. 그럼에도 오로지 그만을 바라보는 벨카가 너무 좋아서.
"부탁할게."
그는 그만 속이 까만 어리광을 부리고 말았다. 벨카가 기꺼이 그의 어리광을 받아줄 것을 알기에. 소녀는 곧바로 차가운 계곡물에 손을 담가 적셨다. 그렇게 물을 적신 손으로 그의 몸을 꼼꼼히 닦아내는 부드러운 감촉이 그대로 느껴졌다. 소녀의 입장에선 제법 강한 힘으로 그의 몸을 닦는 것 같지만 그에겐 평소보다 아주 조금 강해졌을 뿐인 느낌이다.
"차갑지 않아?"
"차갑긴 하지만 참을만해."
그를 씻기면서도 걱정하며 말을 걸어오는 벨카에게 어셔는 꼬박꼬박 대답하면서도 그는 자신의 몸에 가끔씩 닿는 소녀의 몸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간혹 그 언덕과 그 끄트머리의 과실이 스칠 때는 차가운 계곡물속에서도 그의 욕구가 꿈틀거리며 솟아오를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기분도 잠시.
"눈, 감아 줘."
그의 몸을 다 닦아냈다고 생각했는지 자그마한 두 손을 모아 물을 담아올리는 소녀의 모습에 어셔는 아쉬움을 느끼면서도 눈을 감고 차가운 물이 몸에 쏟아지길 기다리면 톡톡 그의 머리를 두드리는 물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계곡물처럼 높은 곳에서 떨어지지만 그 물줄기는 거세지 않았다. 마치 소녀의 애정 어린 손길처럼 그의 몸을 따라 졸졸 흘러내리는 물은 역시 긴장하지 않았다면 기겁할 만큼 차갑다.
"그, 이렇게 하기보다는 차라리 벨카가 했던 것처럼 바가지로 크게 한 번 떠서 물을 쏟아내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차갑지 않아?"
그녀가 그를 걱정하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역시 한 번에 하는 게 빨리 끝나고 좋을 것 같아."
이러고 있다가는 꽤 오랫동안 차가운 물을 맞아야 할 것 같았다. 다행히 벨카는 고개를 끄덕이며 바가지에 물을 담았다. 그와의 키 차이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머리 위로 손을 들어 올리느라 소녀의 몸은 더욱 무방비하게 드러난다. 그가 자신의 몸에 한 눈을 파는 것을 이제야 눈치챈 것일까? 얼굴을 붉힌 소녀가 그에게 차가운 물을 쏟아냈다. 그렇게 목욕을 끝낸 그들이 지금 서있는 곳은 어셔가 자주 드나들던 구멍의 앞이었다. 어느새 말라버린 그와 소녀의 머리카락이 신기해 만지작거리면서도 그녀에게 물었다.
"그냥 가방만 들고 나오는 건데 정말로 따라올 거야?"
그래, 어차피 그는 가방만 빠르게 챙겨서 벨카와 함께 이 마을을 떠날 생각이었다.
"지금은 혼자 가면 안 돼."
하지만 그녀는 고집스레 그와 함께 가겠다고 하는 것이다. 결국 그는 소녀의 고집을 이기지 못해 함께 구멍을 타고 내려가야 했다. 그리고 누군가 있는지 틈새 밖을 엿본 그는 오늘따라 유독 어두칙칙한 밤의 마을에 인상을 찌푸렸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환하던 달과 별을 구름이 전부 가려버렸는지 앞이 새까매서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아무래도 달조차 이 기분 나쁜 마을을 외면해 버린 모양이었다. 앞을 볼 수 없으니 어셔는 집 벽을 천천히 짚어가며 문을 찾기로 했다.
"내 손 꼭 잡고 있어."
"응."
소녀에게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벽을 짚고 걷고 있으니 그의 집이 평소보다 크게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벽을 얼마나 더듬었을까? 어셔는 드디어 옆으로 꺾이는 벽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는 문이 어디에 있는지 감이 왔다. 다만 마루를 깜박하고 말았던 게 문제였다.
"끄으으!"
"어셔?"
"아, 아무것도 아니야.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마루의 모서리에 정강이를 부딪혀 앓으면서도 방 안으로 들어간 그는 가장 먼저 불을 밝힐 초를 찾았다. 가방을 빠르게 들고 마을을 벗어나고 싶지만 이래서야 그가 꽁꽁 숨겨 놓은 가방을 찾기도 힘들었다. 초가 있었던 곳 근처를 더듬대다 보면 손에 부딪히는 무언가. 그것이 그가 사용하던 초임을 깨닫고 바로 근처에 놓아둔 부싯돌을 찾았다. 몇 번의 실수와 헛손질 끝에 겨우 초에 불을 붙이는 것에 성공한 어셔는 바로 가방을 찾으려 했지만, 이내 들려오는 소름 끼치는 소리에 그만 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까가가가가각!
그건 철처럼 단단한 무언가가 빠르게 부딪히는 소리였다. 소리는 이 방에서 하나뿐인 창문에서 들려오고 있었으며 운이 없게도 어셔가 가방을 찾기 위해 돌아본 곳 또한 그곳이었다. 그것은 거대한 가면과도 같은 머리를 하고 있었고 긴 더듬이를 지휘봉처럼 더듬고 있었으며 커다란 눈을 뒤룩뒤룩 굴리면서 날카로운 턱을 빠르게 부딪히고 있었다. 그것은 거대한 곤충의 머리였다. 거대한 귀뚜라미 혹은 여치처럼 보이는 그것은 분명 기뻐하고 있었다.
턱을 부딪히면서 내는 저 소리가 웃음소리처럼 들린다. 무엇보다 그건 정확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셔는 그것을 마주하고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비명이 나오기도 전에 목이 쉬어버린 기분이다. 그 끔찍하고 공포스러운 모습에 어셔의 다리는 이미 풀려버렸다. 이윽고 그것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을 때.
"어셔!!"
벨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숨이 멎을 듯한 침묵과 어둠이 방안을 채웠다. 그가 켰던 촛불은 사그라들어 미미한 향만을 남겼을 뿐이다.
"방금! 방금!"
"조용히."
-카가각
어셔는 공포에 질려 같은 말을 반복했지만 벨카의 말과 함께 돌아오는 그것의 턱을 가는 소리에 곧바로 헛숨을 삼켰다. 촛불을 꺼트린 탓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그것은 아직도 이 방안에 있었던 것이다. 이미 그들의 소리를 들은 것일까?
-끼긱?
드르륵드르륵, 단단한 갑옷 같은 몸을 바닥에 질질 끌면서 기어 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전력을 다해 달린 것처럼 심장이 너무 빨리 뛴다. 두려움에 공기마저 무겁게 느껴져서 몸이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그가 숨 쉬는 것을 잊었을 때. 흐르는 시간마저 잊었던 것일까? 정신을 차리고 보면 창밖에서 들어온 달빛을 받아 희미하게 빛나는 금빛 눈동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 살아있는 거지?"
그 상냥한 빛에 정신을 차린 어셔는 멍하니 입을 열었다.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그것의 모습을 보았다면 단순히 큰 곤충에 불과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무언가 달랐다. 생긴 것이 징그럽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의 눈에 담겨있던 것은 숲에서 가끔 마주하던 야생동물 같은 경계도 적의조차도 아니었다. 그 속에 있던 것은 단순한 악의와 즐거움. 인간의 눈도 아닌 무기질적인 곤충의 눈에서 그런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는 것이 어셔를 더욱 공포에 질리게 만들었다. 아직도 공포에 질려있는 그에게 벨카는 차분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머리가 좋은 편은 아니었으니까. 아슬아슬하게 들키지 않은 것 같아."
벨카의 시선이 그가 그것과 마주쳤던 창문을 향했다. 그 시선을 따라가보자 그것과 마주쳤던 창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이 그에게 달려들었을 때 벨카는 그를 붙잡아 자신의 품으로 당기고는 촛불을 꺼트렸다. 그리고 어디론가 올라갔었는데 이제 보니 가끔씩 밥을 먹을 때 쓰던 상이었다. 귀찮아서 정리해두지 않았던 것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지만, 높이가 그리 높은 편은 아니었는데. 그것을 피하기엔 충분했던 모양이다.
"그것도 이 숲에 사는 거야?"
그러나 벨카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나의 말을 듣지 않아. 아마 평범한 아이들과는 근본부터가 다른 것일 거야."
"...몬스터를 말하는 거야?"
몬스터, 기준은 제멋대로지만 대체로 유독 인간에게 적대적이고 해를 끼치는 생물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마을에 찾아왔던 모험가도 그런 위험한 생물이 많다곤 했지만 처음으로 대면한 몬스터라는 존재는 생각 이상으로 두렵고 무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