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4화 〉오래된 전통. (14/220)



〈 14화 〉오래된 전통.

소녀와 함께 골목길에 앉아 있으면 누군가의 신음이 들려왔다. 그 신음이 어디서 들려오는지는 직접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 골목의 안으로 조금만 더 들어간다면 사람과 사람이 얽히고설키는 그 광란으로 가득한 광경을 볼 수 있을 테니까.

"하악!"


직접 들여다보지 않았음에도 들려오는 신음에 어제 보았던 그 광경이 떠올랐다. 역시 역겹다고 생각하면서도 하고 싶은 느낌을 어쩔 수가 없었다. 골목을 빠져나가야 하는데 사람들은 여전히 많았고 그의 귀는 원치 않아도  소리에 집중해버려서 그리 크지 않은 소리였음에도 크게 들려온다. 대체 무엇을 태우는지는  수 없지만 그곳에 가득한 연기는 이 골목으로도 새어 나와서 그의 코를 자극했다. 연기의 냄새는 지독한 것 같으면서도 좋은 향기가 났다.

연기의 냄새를 맡으면 맡을수록 이상한 기분은 강해졌다. 머리는 어지럽지만 몽롱해지는 느낌이 좋았다. 이러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코가 연기를 들이 마시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인파가 아직도 길을 막고 있으니 어쩔 수 없다고 여기면서 계속 연기를 마셨다. 얼마쯤 지나니 세상은 흐릿한 것처럼 보이면서도 뚜렷하게 보이고 사람들의 신음은 더욱 커져서 그의 귀에 대고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그제서야 그는  연기가 이상하다는  알아차리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그는 실패하고 바닥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세상이 지나치게 멀어 보이는가 하면 또 가까워 보여서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골목의 벽이 코앞에 있어서 그곳에 몸을 기대려 손을 뻗으면 닿지 않았고 어지러워서 앞으로 걷는 것조차도 고역이었다. 그럼에도 기분은 들떠서 좀처럼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생전 처음으로 겪어보는 이 감각이 무섭다. 제가 뭘 하는 건지도 알 수 없는, 길을 잃어버린 것만 같은 감각 속에서도  하나 확실한 건 이 골목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벨카, 나, 나가자."


다행스러운 건  와중에도 소녀가 떠올랐다. 그가 뻗은 손을 누군가 잡는 것을 느끼고 어셔는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도 잡지 못했으면서 맹목적으로 골목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걸음을 옮겼다. 중간에 길을 지나가는 사람과 부딪히거나 물건을 차버리기도 한 것 같았지만 그것을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정신없이 걷다 보니 마을의 밖이었고 그제야 가슴속에 스며드는 맑은 공기에 흐려졌던 정신이 조금이나마 돌아왔다.

"뭐야, 대체."


아직도 남아있는 이상한 어지러움에 속이 매스꺼웠다. 매연 같은 건 아니라고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지만 이런 감각을 느끼게 만들 줄은 몰랐다. 이대로 있으면 위험하다는 걸 어셔는 본능적으로 느낄  있었다. 그 연기를 들이마신 그의 상태는 확실하게 위험했다. 몸을 제대로 가누기도 어려워서 누군가 시비를 걸면 싸움은 당연히 무리였고 간단한 생각을 하는 것도 힘들고 귀찮아지니 바보가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이런 상태가 기분이 좋다고 느껴진다는 것이 오히려 더 기분이 나쁘다.


이상하지만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는 괴상한 감각. 어찌어찌 들쭉날쭉하게 늘어지고 줄어들기를 반복하는 광경 속에서 익숙한 길을 찾아 그는 소녀를 이끌고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겨우 도착한 집. 아직도 그 감각이 남아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모든 게 귀찮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옷과 가면을 벗는 것조차 잊고 방안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을 때였다. 스으윽하고 그의 아래에서부터 누군가 기어 올라온 건. 그에 눈을 굴려 아래를 보면 그처럼 가면과 옷을 벗지 않은 소녀가 보였다.

움직이는 것도 귀찮아 그저 보고 있으면 그의 바지 춤에 손을 얹고는 그의 바지를 벗기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에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린 그는 이상하다고 생각할 틈도 없었다. 그 순간부터 이미 부풀어 오르는 욕구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바지 속에서 빠져나온 그의 물건은 자랑이라도 하듯 제 머리를 치켜들고 있었다. 그녀는 그런 물건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가면만을 살짝 올려 제 입술을 드러냈다. 그리고 벌어지는 그 입은 당연하게도 그의 자지를 삼켰다.

"쫍! 츕, 츄웁!"
"흐! 하아!"

그의 자지에서 느껴지는 소녀의 입안이 너무 기분이 좋았다. 그의 것이 정말로 맛있다는 듯 그녀는 섬세하게 그의 물건을 물고 빨고 핥았다. 일말의 애정마저 느껴질 정도로 섬세하고 황홀한 감각이 평소보다 더 크고 확실하게 느껴지며 그의 머릿속을 쾌락으로 절여버렸다. 이내 찾아온 사정감에 그는 참을 새도 없이 정을 토해냈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정액을 삼키는 소녀. 그 순간 그는 이미 몸을 일으켜 소녀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그야말로 참을성을 잃은 짐승과도 같았다.


제 정을 삼켜버린 그녀가 잘못한 것이었다. 한 번 그녀에게 정액을 먹인 후였음에도 그의 물건은 여전히 부풀어있다.  욕구를 참을 필요는 없었다. 그는 자신의 위에 올라가 있던 발칙한 소녀를 밀어 넘어트리고 그녀의 치부에 제 남근을 갖다 대었다. 그렇게 갖다 댄 그녀의 보지에서 느껴지는 끈적하면서도 뜨거운 감촉. 그녀의 보지는 이미 끈적끈적한 군침을 흘리며 그의 물건을 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해야  일은 뻔했다. 원한다면 넣어줘야 하지 않겠는가?

"아아!"


자지를 스치는 뜨끈한 살덩이들의 감촉과 함께 그녀가 쾌락에  신음을 내뱉는다. 마을의 축제에서 들었던 여자들의 신음처럼 쾌락에 가득 찬 음란한 목소리. 그 소리에 그녀의 보지 속에서 그의 자지가  크게 부풀어 올랐다. 찔꺽찔꺽 그의 남근이 그녀의 보지를  깊게 파고들며 질척이는 소리를 내고 음액에 젖은 그와 그녀의 살이 맞부딪히며 철썩이는 소리를 내었다. 소녀와 관계를 맺을 때 느끼던 복잡 미묘한 애정 하나 느껴지지 않는 오로지 쾌락, 음락을 위한 행위.

최소한의 배려조차 없는 오로지 제 물건을 박아 넣은 상대에게 제 씨앗을 털어놓고자 하는 배설을 위한 행위였다. 그녀의 가슴을 쥐어짜듯이 잡고 마구잡이로 주무르며 난폭하게 일그러트렸다. 발정이 난 개와도 같이 허리를 흔들고 피부를 긁기도 하며 난폭하게 행동했지만  모든 것이 흐릿하고 했는지조차 잊어버렸다. 단지 기분이 너무 좋아서 계속 이 감각에 매달려 그녀의 구멍을 쑤시고 또 쑤셨다.


"응! 흐앙!"


그녀의 신음도 멀리서 들려오는 것만 같이 소리가 울렸다. 자신이  하고 있는지도 알  없는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다 찾아온 사정감에 반사적으로 허리를 멈추고 그녀의 보지에 자지를 깊숙이 찔러 넣었다. 그리고 꿀럭꿀럭 흘러들어가는 정액.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그것조차 쾌락의 부산물에 불과했다.  많은 쾌락 더 많은 쾌감이 필요했다. 모든 것이 흐릿하면서도 뚜렷한 세상이 너무나도 좋았다.

구멍 속에 쾌락의 산물을 방출하고도 그의 물건은 도저히 식을 줄 몰랐다. 이대로  행위를 멈추면 이 감각 속에서 추방될까 봐. 더 두려운 사실이 도사리는 현실에 내던져질까 봐. 아직도 멀쩡한 물건을 구멍에 쑤셔 박는다. 정해진 것처럼 허리를 흔들고 정액을 내뱉었다. 지쳐도 상관없이 물건이 줄어들면 부풀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부풀면 또 반복되는 행동. 상대에 대한 것도 자신에 대한 것도 잊은  오로지 씨앗을 심는 생물이 되어 여자의 몸속에 씨앗을 심었다.


"하응! 아앙!"

심지어 상대도 그 행위를 기뻐하는 것처럼 신음을 내뱉으니 그만둘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그는 정신을 잃기 전까지 육욕에 빠져 여자의 몸을 사용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즘에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나무로 된 익숙한 천장이었다. 그리고 희미하게 떠오르는 어제의 일들에 어셔는 놀란 나머지 손으로 제 눈을 가려버렸다.


'망했다! 어제는 대체 왜 그런 짓을!'

자각하지 못하고 벌였던 그 행동들이 떠올라 괴로웠다. 어제 대체  잘못 먹었으면 상처를 낼 곳도 없는 여린 소녀에게 난폭하게 굴며 심하게 괴롭혔단 말인가? 그는  행동이 어이가 없고 수치스러워서 벨카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었다. 그래도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으니 사과라도 하면서 소녀의 상처를 치료해야겠다고 결심하며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을 때. 그는 얼어붙은  꼼짝도 할  없었다. 왜냐하면 소녀의 흐트러진 가면과 베일의 아래로 동네 바보의 얼굴과 새까만 흑발이 엿보이고 있었으니까.


"새액새액."


그의 옆에 있었던 건 꽃처럼 붉은 머리카락이 아름다운 소녀가 아닌 바보라 불리는 여자아이였다.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할  있을 리가 없었다.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착각이라고 바라면서 소녀의 가면에 덜덜 떨리는 손을 뻗었다. 가면에는 확실하게 그가 어제 벨카와 함께 새겼던 표시가 새겨져 있었다. 아무리 비슷하게 따라 했다고 해도 위화감이 느껴지는, 동네 바보를 소녀라고 착각하게 만든 표시가. 어째서였을까? 이럴 때 어제 만났던 남자의 말이 떠오른 건.

'가끔씩 있거든. 임자 있는 여자가 취향인 인간들이.'

끓어오르는 감정이 그의 머릿속을 휘저었다.


"뭐야."

그의 옆에서 잠들어 있던 바보는 이미 그가 강제로 일으켜 깨운 뒤였다. 그녀는 화가 어린 그의 말에 눈치를 보면서도 아무런 말이 없다.


"너 뭐냐고!"

그녀는 흐트러진 옷을 추스르지도 못해 반쯤 헐벗은 모습이었지만 그 모습을 직접 보고 있음에도 아무렇지 않았다. 아니, 그녀의 맨살에 남아있는, 어젯밤 그와 관계를 맺었던  벨카가 아닌 그녀라는 걸 알려주는 선명한 욕구의 흔적에 더 열이 받았다. 미미하게 남아있던 한 줌의 성욕조차 뜨거운 열기에 불타 사라졌다.


"왜 벨카가 아니라 네가 여기에 있는 건데! 벨카는 어디에 있어!?"


그건 정말로 난생처음으로 느껴보는 선명한 분노였다. 그는 몇 번이고 캐물었지만 바보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런 바보의 행동에 답답한 나머지 소리를 질렀다.


"뭐라고 말이라도 좀 해보라고!!!"
"...."

하지만 그녀는 그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아무것도 말할 생각이 없는 것처럼.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뜨거운 화기에 작은 어지러움마저 느끼던 그는 이럴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바보는 바보일 뿐이다. 좀 더 냉정하게 생각하기 위해 숨을 들이쉬며 머리에 차오른 열을 삭히다가 떠올랐다. 어제 그를 찾아와 가면을 보여달라고 이야기했던 맥의 모습이.

"맥이 시켰냐?"


그가 떠오르는 대로 내뱉은 말에 바보가 몸을 떨었다. 그건 곧 그의 말이 옳다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생각해보면 이 바보는 맥을 아빠라 부르고 있었다. 바보는 그의 말에 따라서 이 마을에 있는 남자들 중에서 한 번이라도 안 해본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중 하나에 자신이 포함되었다는 것에 토하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마저 아까워 그녀에게서 몸을 돌렸다. 어제 맥이 그를 찾아왔을 때부터 수상하게 여겼어야 했는데.

"저기."


그때 바보가 처음으로 먼저 입을 열었지만 어셔는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한시라도 빨리 벨카를 찾아야 했다. 그가 저 바보를 소녀로 착각하고 그 일을 하던 사이에 소녀가 어떻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이미 안 좋은 일을 당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애써 외면하며 벨카를 찾아 집을 박차고 뛰쳐나왔다. 바보를 내버려 두고.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당연하지만 맥의 집이었다. 아무리 그의 집이 마을과 거리가 있는 편이라도 결국에는 같은 마을이다.

최근의 일이 있기 전까지는 나름대로 친하게 지내던 어른이었으니 어셔가 그의 집을 모를 리가 없었다. 먼 거리를 쉴 새 없이 달려온 탓에 숨이 가득 차올라 숨을 쉬는 것도 어려웠지만 그는 숨을 고르지도 못하고 그의 집 문을 쾅쾅 두드렸다. 당연한 이야기 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무리 그가 부서져라 문을 두드려도 맥은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강제로라도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문을 잡아당기면 거짓말처럼 열리는 문. 그에 어셔는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곧바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가는  별로 좋지 않은 일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물불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그렇게 들어간 맥의 집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차피 그리 크지도 않은 집이라 거실부터 안방, 창고, 화장실까지 다 둘러보았는데도 소녀와 맥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화가 난 나머지 맥이 아끼던 것이라 기억하는 물건들을 마구잡이로 내던져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이러고 있어도 시간 낭비라는 건 알지만 화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 양반아! 아침부터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시끄럽게 굴어?!"


그러던 그때 그의 옆집에서 창문을 열고 남자가 튀어나와 소리쳤다. 마을 사람들의 집과 그의 집 구조는 전혀 달라서 그의 집에는 대문을 열고 들어가야 자신의 집이 나오는 반면 마을 사람들의 집은 집만 크게 지어져 문만 열면 복도와 방이 나오는 구조다. 게다가 다른 집들과 옹기종기 붙어있으니 그가 물건을 내던지며 집을 엉망으로 만드는 소리가 다 들렸으리라. 평소라면 어른인 그가 소리치는 것에 바짝 굳어 아무것도 못했겠지만 지금 그는 눈이 돌아가 뵈는 게 없는 상태였다.


"맥 어딨어!!"
"케엑?!"


그는 곧바로 창문을 열고 나가 그의 멱살을 붙잡아 몸을 끌어냈다. 설마 그도 어셔가 갑자기 뛰쳐나와 다짜고짜 멱살을 잡을 줄은 몰랐던 것 같은 눈치다. 그는 아직도 어제의 그 연기에 취한 상태였는지 눈의 초점은 흐려져 있었고 그의 행동에 얼떨떨한 모습으로 제대로 말도 하지 못했다.


"맥 어디 있냐고!?"
"모, 몰라! 나도 방금 일어났다고!"


그 말에 어셔는 그를 내팽개치듯이 놓았다. 그리 높은 곳도 아니었지만 그에게 멱살을 잡혀 강제로 끌려 나왔던 만큼 그 남자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가 멱살을 놓자마자 창문 아래로 떨어졌다.

"아이고! 허리야."


그는 그 남자도 뒤로하고 맥과 소녀를 찾아서 온 마을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그 어느 곳을 둘러봐도 소녀의 붉은색은커녕  커다란 맥의 덩치 하나 보이지 않았다. 마을 구석구석 안 찾아본 곳이 없었는데도.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어셔가 하루 종일 소녀와 맥을 찾아 돌아다니다 지친 나머지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해는 피처럼 섬뜩한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러다 그는 아직 마을 밖까지 살핀 적이 없었다는  깨닫고 시선이 집 뒤편으로 향했다. 이런 시간에 마을로 나가는 건 처음이었지만 그는 곧바로 집의 뒤편에 몸을 구겨 넣었을 때. 누군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또 왜?"

그를 붙잡은  바보였다.  붙잡는 것일까? 아무리 본의가 아니라지만 그런 일이 있었으면서 돌아가지 않은 그녀가 짜증  노려보았다. 그러자 바보는 자신이 없는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면서도 중얼거리듯 말했다.

"가지 마."


들어볼 가치도 없는 말이었다. 그는 자신을 붙잡는 그녀의 팔을 내치고 숨겨진 구멍을 타고 올라갔다. 이윽고 그가  소녀와 만났던 느티나무가 있는 곳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 있던 느티나무는 이미 그가 알던 모습이 아니었다. 하늘을 떠받치던 그 많던 가지는 어디로 갔는지 붉은 하늘이 땅으로 내려앉았고 나뭇잎은 피가 되어 힘없이 땅을 뒤덮었다. 그 사이사이에는 널브러진 느티나무 꽃이 힘없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느티나무의 얼마 없는 밑동만이 자신이 이곳에 있었노라고 처참한 모습으로 주장하는 가운데. 마을 사람들이 모아둔 나무토막들이 차곡차곡 쌓여있는 모습은 불쾌감마저 주었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지만 이렇게 직접 보니 충격이 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소리쳤다.

"벨카! 벨카! 어디에 있어?!"

어셔는 소녀가 무사하기를 빌었다.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면 도와달라 답해주기를 바라면서 그는 벨카를 찾아 숲을 헤치며 소리치고 또 소리쳤으나.

"벨...!?"


돌아오는 건 소녀의 대답이 아닌 둔탁한 충격이었다. 그 충격에 어셔는 몸에 힘이 풀려버렸고 이내 어둠에 모든 감각을 빼앗기고 말았다. 아무런 방비도 되지 않은 그의 머리를 뒤에서 무자비하게 후려친 괴한은 노을을 등지고 있어 역광으로 인해  그림자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이런 일이 익숙한 것처럼 긴장과 흥분으로 숨조차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숲 바닥에 쓰러져있는 그를 내려다보며 만족스럽게 중얼거렸다.


"이 녀석만 있으면 그 마녀도 순순히  말을 듣겠지."


그렇게 말하는 그는 어셔를 후려칠 때 사용한 각목을 버리듯이 바닥에 던져 놓고 짐짝을 드는 것처럼 그를 둘러메었다. 사람을 때려 기절시켜 놓고도 죄책감이라고는 전혀 없는  콧노래마저 흥얼거리는 모습이 오히려 즐거운 기색이 가득해 보였다. 그러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는 곧 나무줄기에 깊게 꽂혀있는 도끼를 발견하고 옳거니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도끼를 뽑아들었다. 그리고 그가 그곳을 가리고 있던 풀숲을 들춰내자 나타나는 것은 확실한 길이다.


그곳은 느티나무의 크기가 너무 큰 나머지 한 번에 들고 갈 수가 없어 왔다 갔다 하며 마을로 가져가기 위해 나무꾼들이 미리 다져 놓은 길이었다. 그 길을  외워놓기라도 했는지 험한 숲길을 성큼성큼 내디디며 한 손으로 쥔 도끼를 난폭하게 휘둘러 길의 곁에 나있는 나무들을 찍어댄다. 이미 표식을 새겨 놓은 자리에 다시 표식을 새기는 것만큼 무의미한 일은 없을 텐데도 나무에 여러 번 도끼를 내려찍는다. 화들짝 놀라 달아나던 반딧불 몇 마리가 애꿎은 도끼질에 휘말려 빛을 잃었다.

숲에 내려앉은 어둠이 이 폭악한 침략자의 발목을 조금이라도 붙잡았다면 좋았으련만 그는 이미 제 목적지에 도착한 듯 즐거운 표정이다. 그가 도착한 곳은 어셔가 마을의 아이들과 함께 안을 들여다본 적이 있었던 오두막이었다. 괴물이 산다는 이야기에 아이들이 다가가는 것조차 두려워하며 벌벌 떨었던 것과는 다르게 그는 망설임 없이 오두막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그 오두막 안에는 밧줄에 꽁꽁 묶여 힘 없이 바닥에 몸을 눕힌 한 소녀가 있었다.

"으읏."

꽃처럼 붉은 머리카락을 바닥에 흩뿌린 채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에도 간신히 여린 숨을 내쉬는 그녀는 어셔가 그토록 애타게 찾아다니던 소녀, 벨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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