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2화 〉오래된 전통. (12/220)



〈 12화 〉오래된 전통.

평소에는 그렇게 빨리 가달라고 빌어도 들어주지 않더니 느리게 가달라 비니 빠르게 저물어 가는 태양의 모습을 보면서 어셔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스카피르가 열리는 동안 낮에는 간단한 먹거리나 약초, 나무로 된 조각품 따위를 판다. 스쳐 지나가던 외부인들의 말을 들어보면 가면을 쓰는 것만 제외한다면 다른 마을의 축제와 그리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모양이다. 그래도  마을에선 외부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약초나 귀한 나무를 구할 수 있다는  같다.

하지만 어셔는 그런  뭐가 특별한지 이해할  없었다. 그런 잡초와 구분하기도 힘든 것들은 숲속을 걷다 보면 저도 모르게 치이는 게 대부분이고 널린 것이 나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몰려드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스카피르의 특별한 점은 밤에 있을 것이다. 실제로 그를 비롯한 아이들은 마스카피르가 열리는 밤에 무엇을 하는지 아무도 몰랐으니까. 어셔도 밤에 무엇을 하는지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고 싶지 않은 이유가 있다면 그건 역시.

"어셔, 시간이야."
"하아, 알았어."

그의 곁에 있는 소녀 때문이리라. 벨카가 축제에 참여하는  불만은 아니었다. 다만 마을 사람들이 문제였다. 느티나무가 그렇게 되면서 어쩔 수 없이 마을로 데려오긴 했지만 지금도 어셔는 사람들에게 소녀의 존재를 들키지 않을까 불안했다. 그러나 그들 때문에 벨카가 그와 함께 축제를 함께 즐기지 못하는 것은  그것대로 짜증이 났다. 그래도 이번에 벨카를 데리고 나올 생각을 할  있었던 건 공교롭게도 그가 싫어하던 마을의 규칙, 정확히는 마스카피르의 규칙 덕분이었다.


여성용 가면은 소녀의 금빛을 감춰 주었고 함께 딸린 불투명한 베일은 꽃과도 같은 붉음을 가려주었다. 하늘거리는 옷은 벨카의 가녀린 체구를 가려주기보다는 강조하는 모습이 되었지만 그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어셔는 되도록이면 그녀를 데리고 가고 싶지 않았지만 그가 의무적으로 이 축제에 참여해야 하는 이상 소녀를 혼자 두는 것도 불안해서 차라리 같이 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내 옆에 꼭 붙어있어야 돼."
"응."
"나랑 절대로 떨어지면  돼."
"응."

벨카가 그의 말을  들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녀는 어딘가 허술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어서 불안한 마음을 도저히 진정시킬 수가 없어 어셔는 구태여 신신당부했다.

"정말로 무슨 일이 있어도..."
"어셔."


그때 소녀가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이러면 안심할 수 있어?"
"그, 그게. 어."


그의 손에서 부드러운 감촉이 그대로 느껴지자 어셔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손을 잡고 있으면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귀가 뜨거워지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게 벨카와 손을 맞잡고 마을로 가는 길. 그의  주변은 축제가 벌어지는 같은 마을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만큼 한산했다. 마을에서 열리는 축제의 기운조차 느끼기 힘든  멀고 먼 거리가 그는 언제나 불편했다. 마을로 가는 것도 오래 걸리고 외로웠으니까.

문득 언제나 같은 시골마을의 풍경이 눈가를 스쳤다. 아직 추수를 할 시기가 오지 않아 파릇파릇한 농작물들이 가득한 모습과  가운데 사람을 대신해 꿋꿋이 서 있는 낡아빠진 옷을 껴입은 외로운 허수아비가 하나. 태양이 저문 후에도 남아 있는 햇빛의 여운 속에 똑같은 풍경. 소녀와 함께 걷고 있으니  지루했던 광경마저 기꺼워지는 건 어째서일까? 그가 이 고요함 속에 소녀와 계속 머물러도 상관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을 무렵.


-쿵쿵쿵쿵!


그러기가 무섭게 마을의 축제 소리가 그들에게 성큼 다가왔다. 어셔는 정말로 이 마을과 맞는 구석이 없다고 생각하며 벨카를 보았다.


"가면은 잘 썼지? 답답해도 벗으면 안 돼."

 후에도 그가 소녀의 옷차림을 더 꼼꼼히 살핀 후에야 그들은 마스카피르가 열리는 곳에 들어설 수 있었다. 커다란 북이라도 두드리고 있는지 어디선가 자꾸 쿵쿵거리는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고 그 소리를 배경으로 사람들의 웅성이는 소리가 파고들었다. 낮에는  여러  본 적이 있었던 축제지만 밤의 축제는 낮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그건 아마도 횃불처럼 크게 불을 밝혀주지는 않았지만 은은하게 마을을 비추는 등불들의 색 때문이리라.


언제 준비했는지 모를 등불들이 줄줄이 매달려, 입혀진 종이의 색에 따라 알록달록한 색으로 해가 떨어진 밤의 마을을 밝히고 있었다. 횃불처럼 환하지는 않아도 주변을 과하게 밝히지 않는 등불은 비밀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쉴  없이 들려오는 커다란 북소리와 축제에 들뜬 사람들의 목소리는 낮보다 더 오래 귓가를 맴돈다. 심지어 코끝을 스치는 맛있는 음식의 냄새까지.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축제인데 막상 이렇게 마주하고 보니 그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고작 분위기만 바뀌었을 뿐인데 전혀 다른 축제에 와있는 것만 같아서 어셔는 가슴이 들떴다. 낮이 아닌데도 남자들은 가면을 쓰고 축제를 돌아다니고 여자들도 저마다 몸을 가리는 가면과 베일, 옷을 입고 돌아다닌다. 어느 누구도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축제. 그 모습이 더 비밀스러운 느낌을 부추기는 가운데. 그는 소녀를 데리고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를 거리를 걸었다. 여전히 손은 소녀와 마주 잡은 상태였다.

마스카피르는 마을에서 매년 열리는 것이라 어셔는 마을에서 축제 때 하는 일들은 거의 다 알고 있었다. 적어도 낮에는 아이들도 평범하게 축제를 즐기고 놀러 다닐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축제를 즐기는 것도 한두 번이지 매년 비슷한 주제라면 질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원래 그가 알던 것과는 다른 것들 투성이였다. 매년 어른들이 나오지 못하게 했던 비밀스러운 밤의 축제에 그는 지금 비밀친구와 함께 있는 것이다.


"벨카, 뭔가 하고 싶은 거라도 있어?"


특별한 시간에 특별한 장소, 특별한 친구, 어느 것 하나 특별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원래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축제의 노점상들마저 특별해 보였다. 그렇게 정신없이 축제를 구경하기 바쁜 그를 소녀는 눈동자의 빛조차 보이길 허락하지 않는 가면을 쓴 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때문에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 시선이 호의로 가득하다는 것을 부정할  없었다. 그건 가면 너머로 흘러나오는 소녀의 목소리만 들어도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미안해. 이런 건  모르니까. 가르쳐 줘. 어셔."
"미안할 필요까지는 없지만, 그래!"


평소 그가 묻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척척 가르쳐주는 벨카의 모습을 아는 그는  자그마한 소녀가 정말로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소녀가 그에게 가르침을 청하니 평소와는 역전된 역할과 그 차이에서 오는 위화감에서 비롯된 묘한 희열감은 그를 더욱 들뜨게 만들었기에 어셔는 기꺼이 그녀의 안내인을 자처했다. 그가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저마다 가면을 쓴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며 벨카를 노점상으로 이끌고 있을 때.


"저게 궁금해?"

가장 먼저 소녀의 시선을 잡아끈 곳에는 시골이라지만 썩어도 축제라고 사람이 넘쳐나는 이곳에서 유독 손님 하나 없이 한적한 가게가 있었다. 그곳은 낮에라도 축제를 경험해 보았던 어셔도  한 번도  적이 없던 곳이었다. 그 또한 뭐 하는 곳인지 호기심이 생겨나 다가가니 손님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한가로이 코골이를 하며 잠들어있는 가면을 쓴 주인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주변에는 무엇을 위해 가져왔는지 모를 잉크나 안료 같은 것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다.

"저기요! 장사 안 해요?!"


소녀가 왜 이곳을 보았는지 모르겠지만 잠들어있는 그를 깨우고자 소리치니 화들짝 놀라며 깨어나는 그. 손님이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한 듯한 그 모습에 어셔는 점점 더 이곳이 뭘 하는 곳인지 궁금해졌지만 이어지는 그의 말과 목소리에 아차 했다.

"으응?! 웬일로 이런 곳에 손님이... 아니, 오늘 낮에 봤던 그 총각 아니오?"


다름이 아니라 그는 오늘 낮에 벨카의 가면과 옷을 샀던 곳의 주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그의 시선은 어셔와 함께 있던 소녀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기분 나쁜 목소리.

"흐흐, 하필이면 당번이라 지루했는데. 소개해주려고 온 거요? 생각보다 더 작은 거 같은데. 이건 이것대로."


가면을 쓰고 있었음에도 여과 없이 쏟아지는 진득한 욕망이 묻어나는 시선과 말에 벨카는 흠칫 몸을 떨었다.


"크, 역시 부끄러움도 많은 편이었나? 따먹을만하겠소?"
"신경 꺼요!"


어셔는 그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느낌상 좋지 않은 말이라는  정도는 알 수 있었다. 특히 소녀의 몸을 훑는  시선이 소름이 끼쳤다. 벨카를 자신의 등 뒤에 숨긴 어셔가 날카롭게 반응하자 그는 킥킥 웃었다. 축제의 분위기에 들뜬 마음이 얼마나 되었다고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그는 정말로 이 마을이 싫었다.


"보아하니 여자나 소개해주려고 온 건 아니고 무슨 일이오?"

어셔는 당장이라도 이곳에서 뒤돌아 가고 싶었지만 그보다는 벨카가 이곳을 궁금해 한다는  중요했다. 일단 당번이라는 것을 보면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은 아닌  같고 인기는 없는 거 같아도 궁금한 건 궁금한 것이었으니까.


"여기는 뭘 하는 곳이기에 이렇게 사람이 없어요?"


치밀어 오르는 혐오감을 무시하고 일단은 그가 운영하고 있는 것 같은 이곳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그는 김이 팍 샌 표정이 되었다. 누가 봐도 이곳에 있는 게 정말 지루하고 귀찮다는 모습이다.


"그냥 가면을 꾸미는 곳이오."
"가면을요?"

생각해보면 남성용 가면은 지나치게 밋밋했다. 여성용 가면은 아무리 화려하지 않은 것이라도 벨카가 쓴 것처럼 적당한 무늬 정도는 새겨져 있는데 남성용은 그런 것조차 없었으니. 그걸 생각하면 가면을 꾸미는  이상한 건 아닌 것 같지만 이렇게 손님이 없는 건 이상했다.

"손님이 없는 것도 정상이오. 이런 축제에서 누가 제 짝을 정해두고 싶겠소?"

가면을 꾸미는 것과 제 짝을 정하는 게 대체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걸까? 어셔가 의문을 말하기도 전에 그는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규칙 때문에 없앨 수도 없으니 당번을 정해서 운영하는데 하필이면 내가 당번이 된 거요."

아무리 당번  버는 돈은 당번의 몫이라도 찾아오는 손님이 없으니 그냥 손해만 보는 자리라며 투덜대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었을 때였다. 문득 그의 옷자락을 작게 잡아당기는 손길이 느껴진 것은. 그런 일을 할만한 건 그와 함께 축제에  소녀밖에 없었다.

"하고 싶어?"

혹시나 해서 물어보니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소녀. 그에 어셔는 따로 생각할 필요도 없이 그에게 물었다.


"얼마예요?"
"읭?"

그러자 전혀 생각도  했던 말을 들은 것처럼 그를 보는 남자.

"얼마냐고요."
"정말로 하려는 거요?"


그는 신기한 것을 보는 것처럼 그들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뭐, 한다니 말리지는 않겠소만  번에 철전 세 닢이니 여섯 닢인데 다섯 닢만 주시오."

철전 다섯 닢이라면 크게 무리가 가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적은 돈은 아니었다. 어셔가 나무꾼 일을 도왔을 때 열다섯 닢을 받았지만 보통 심부름 값으로  푼에서 두  정도를 받았으니까. 그가 고민하는 것을 알았을까? 벨카가 다시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속삭였다.

"힘들면 무리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인 소녀가 다른 곳으로 가자는 듯 움직이려 했을 때 그는 그녀를 붙잡았다.

"아니, 그렇게까지 아낄 정도는 아니니까."

혹시 몰라서 되도록이면 아끼려던 것이지 지나치게 구두쇠처럼 굴 필요는 없었다. 그동안 마을을 벗어난다는 걸 목표로 적은 돈이라도 최대한 아껴서 상당한 양을 모았으니까. 들고 나온 철전 20개 정도는 다 써버려도 괜찮았다. 철전 다섯 닢을 그에게 내밀었다.


"그래서 보통 어떻게 꾸미는데요?"
"꾸민다기보다는 짝이 있으니 건드리지 말라는 뜻이라 보통은 간단하게 같은 문양을 서로에게 그려주면 된다오."


가면을 꾸민다더니 고작 그런 걸 그리기 위해서 철전을 다섯 닢이나 줬다고 생각하니 억울했지만 그런 뜻이 있다니 어셔는 순순히 그가 내미는 검은 잉크와 이름 모를 새의 깃털을 받아들었다. 잉크는 수액으로 만들어진 듯 희미하지만 달달한 냄새가 났다.


"모양은 어떻게 할 거야?"

그의 물음에 소녀는 그의  손을 들고는 검지로 그의 손바닥에 위에서 아래로 한 번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한  움직였다.  작은 움직임이 간지러웠지만 벨카가 원하는 모양은  수 있었다. 먼저 소녀가 깃 펜을 들어 먹빛의 잉크가 묻은 깃의 뿌리를 그의 가면에 갖다 대었다. 벨카는 단순한 모양을 그리는 것뿐인데도 잘못하면 그가 상처라도 입을 것처럼 조심스럽게 그의 가면에 그림을 그려 넣었다. 가면 때문에 집중하는 소녀의 표정을 직접  수 없다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다음은 그가 소녀에게 해줄 차례였다. 그 또한 벨카가 알려준 모양대로 그녀가 쓴 가면의 미간에 그림을 그려주었다. 다르륵 다르륵 나무로 된 가면에  펜이 닿아 살짝 긁히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소녀가 했을 때는 아무 소리도 없이 부드럽게 움직였는데. 그가 하니 마감을 하지 않은 거친 나무판을 긁는  마냥 거슬리는 소리가 났다. 소녀는 딱히 신경 쓰는 기색은 아니었지만 그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그림을 그려 넣었다.

깃펜으로는 그림을 그려 넣기 힘든 딱딱하고 밋밋한 가면이었지만 잉크는 제법 좋은 물건이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원래부터 가면에 새겨져 있던 무늬처럼 잘 말라붙었다. 아마  잉크는 단순한 수액이 아니라 송진을 사용한 것 같았다. 그렇게 만든 잉크는 제법 비싼 값에 팔린다는 걸 들었던 거 같은데. 이런 곳에서 써도 되나 싶었지만 그런 잉크가 아니면 가면에 그림이 그려지지도 않았으리라.

"쩝, 설마 이걸 하러 오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그가 아깝다는 듯이 잉크병을 보고 입맛을 다셨다. 볼일도 끝났으니 그의 말을 무시하고 그들이 이곳을 떠나려고 하자 그는 어셔에게 손짓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그를 보면.


"그렇게까지 하는 거 보니까 상당히 아끼는 아가씨인 거 같은데 조심하는 게 좋을 거요. 가끔씩 있거든. 임자 있는 여자가 취향인 인간들이."

끝까지 기분 나쁜 남자였다. 그렇게 벨카를 데리고 돌아다니게 된 밤의 축제는 역시 여러 가지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빛들이 만들어 내는 분위기가 처음에는 그저 비밀스러워서 좋았는데 그의 말을 들은 지금은 어쩐지 꺼림칙하게 느껴졌다. 이 마을이 숨기고 있는  대체 얼마나 많은 것일까? 이 축제도 이상했다. 분명 규칙에는 남자는 낮에만 가면을 쓰는 것이었을 텐데 모두가 상관없다는 듯이 가면을 쓰고 밤의 거리를 걷고 있다. 그토록 규칙에 깐깐하게 굴던 사람들이 맞기는 한 것일까?


사람들이 많기 때문인지 부쩍 말수가 적어진 소녀와 함께 한동안 마을을 돌아다니며 한참을 둘러봐도 그나 다른 남자들에게 규칙을 어겼다며 노발대발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자신들도 가면을 쓴  마음껏 축제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규칙을 하나라도 어기면 큰일이 일어날 것처럼 굴며 길길이 날뛰던 어른들은 모두 새하얀 가면에 가려져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다. 대체 어떻게 되먹은 노릇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럴 거면 어른들은 뭣하러 규칙에 그리도 깐깐히 굴었는가?

심지어 축제에 뭔가 특별한 점도 보이지 않는다. 낮과 다른 점이 있다면 단지 모두가 가면을 쓰고 다닌다는 것뿐이다. 등불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만 아니라면 낮과 다름이 없었다. 그렇다면 대체 어째서 이런 축제에 처음으로 참여한다면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하는가? 어셔가 점점   축제에 대한 의구심을 키워나가고 있을 때. 문득 그의 귓가에 이상한 소리가 스쳤다.


"무슨 소리지?"


쿵쿵! 마을 전체를 울리는 커다란 북소리의 텀에서 그는 다른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마치 짐승의 하악질과도 같았으나 어딘가 달랐다. 좀  끈적끈적하고 불쾌한, 일방적으로 갈구하는 듯한 욕망의 소리. 처음으로 듣는 소리였음에도 그 괴이한 소리는 북소리가 끊어졌던  아주 짧은 텀 속에서도 그의 귓속에 확실하게 박혀 들었다. 그가 걷는 것을 멈추자 함께 손을 잡고 걷던 소녀가 그에게 의아한 시선을 보내는 중에도 그의 귀는 그 희미한 소리를 쫓고 있었다.

어디서 들려온 소리인지 그 소리의 주인은 누구이며 무엇으로 인해 그런 소리가 났는지 호기심을 떨쳐내지 못한 그는 길 한가운데서 가만히 그 소리가 남겨놓은 꼬리를 쫓았다. 길가에 가만히 서있는 그와 소녀를 지나가는 이들이 가끔 이상하게 쳐다보곤 했지만 딱히 건드리는 이들은 없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북소리의 텀이 길어졌던 그 순간.

"~!"


확실하게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과는 다르게 더 뚜렷한 소리는 분명 어두컴컴한 골목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그는 그 소리의 원인이 무엇인지 확인하고자  골목의 안을 들여다보았다. 골목길은 어른 두 명이 간신히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좁았지만 덩치가 작은 그와 소녀가 들어가기엔 무리가 없었다. 은은한 등불조차 닿지 않는 어두컴컴한 골목의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잘못 들은 것이라 생각했지만.


"하아아!"


그의 생각을 부정하는 것처럼 확실하게 들려왔다. 여성의 새된 목소리가. 그 소리는 언뜻 들으면 비명과도 같았지만 달랐다. 저것이 만일 비명이었다면 저 목소리에 끈적하면서도 질척이는 쾌락이 깊게 스며들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 소리는 골목길 너머 등불의 빛이 새어들어오는 또 다른 길에서 들려왔다. 소녀가 불안한 듯 그와 맞잡은 손을 꼼지락거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는 저도 모르게 무언가에 이끌리는 것처럼 골목길의 안쪽으로 점점  깊게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고개를 내밀어 그 너머를 확인했을 때.

그의 눈에 비친 것은 광란의 도가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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