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오래된 전통.
그와 소녀의 관계는 밤이 깊어가며 어느덧 달이 차오를 때쯤 벨카가 지친 숨을 몰아쉬며 그의 몸 위에 쓰러지면서 끝이 났다. 그의 육욕을 해소한 물건은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소녀와 그를 연결하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 물건이 계속 부풀어 올랐었지만 벨카에겐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더 이상 그럴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어셔가 소녀와 이런 일을 하게 된 건 고작 며칠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를 정도였다. 중독되기라도 한 것처럼.
"벨카, 자?"
그러다 소녀의 붉은 머리카락이 그의 가슴팍을 타고 흘러내리며 흐트러진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소녀의 머리카락에 시선을 집중하면서 물어보면 벨카에게선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정말로 잠들어버린 것 같았다. 하긴 그 행위에 익숙하지 않은 소녀를 그렇게까지 몰아붙였으니까.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어셔는 조심스레 그의 가슴팍을 타고 흘러내리던 소녀의 머리카락 끄트머리를 한 움큼 쥐어보았다. 벨카가 아프지 않게 조심스럽게. 손가락 사이사이로 얽혀오는 소녀의 머리카락은 그 곱고 고운 색만큼이나 연하고 고왔다.
지나치게 고와서 아스라이 흩어질 것 같은 소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면서 어셔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벨카가 이상한 건 아니었다. 이상한 건 바로 그였다. 벨카가 부탁하면 그는 얼마든지 그 부탁을 들어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소녀와 그 일을 할 때 어셔는 아무리 노력해도 스스로를 제어할 수 없었다. 그건 정말로 그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만하자던 벨카를 몇 번이고 부추기며 관계를 맺었기 때문일까? 소녀는 작은 동물처럼 그의 몸 위에서 몸을 웅크린 채 미동도 없이 얕은 숨만을 겨우 내쉬고 있다. 그런 벨카의 모습에 어셔는 더 미안해졌다.
"미안해."
벨카가 들을지 확신하지도 못하면서 중얼거리듯 사과의 말을 입에 담았다. 소녀에게도 익숙하지 않은 행위는 그에게도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그 느낌을 자각한 뒤로 매번 벨카에게 그런 일을 요구하고 말았다. 심지어 이번에는 소녀가 크게 앓기까지 했는데도 무리하게 만들고 말았으니 한숨만 나왔다. 어셔는 그 느낌을 도저히 주체할 수가 없어서 그저 스스로 한계를 맞을 때까지 모든 걸 소녀에게 쏟아부었던 것이다. 그 탓일까? 그의 눈앞이 점점 더 가물가물해졌다. 밤이 되어도 미지근한 공기 때문에 그리 춥지는 않은 밤이다.
시린 달빛마저 따스한 가운데 고요한 방안에 소녀의 달달한 체향은 시간이 흘러도 희미해지지도 않고 여전히 가득해서 마치 벨카의 품 속에 꼭 안겨 있는 듯했다. 따뜻하게 달아오른 벨카의 체온이 그를 더 노곤노곤하게 만들었다. 포근하고 나른한 감각에 몸을 맡기고 잠시 눈을 감았다 떴을 땐 이미 아침이 찾아온 후였다. 꿈을 꿀 틈조차 없었다. 어셔는 멍하니 햇빛이 비쳐 들어와 밝아진 천장을 바라보았다. 여린 달빛이 채 비춰주지 못하던 천장이 햇빛에 비쳐 따스한 빛을 품었다.
짹짹, 새가 지저귀는 소리. 밤 사이의 나른한 감각이 남아있는 아침. 어젯밤의 일들이 모두 꿈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였다. 문득 자신의 물건이 활력을 되찾은 것처럼 단단하다는 것을 느낀 건. 게다가 여전히 축축하지만 따스한 곳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에 아래를 내려다보니 어젯밤 모습 그대로 소녀가 그의 배 위에서 잠들어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자세한 건 확인할 수 없었지만 그대로 잠들었기 때문인지 그의 물건이 아직도 소녀의 몸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았다. 조금 마른 것 같지만 그 끈끈함이 어디 가지 않는지 고간의 주변은 어딘가 미끈거리는 감촉이 남아있다. 그리고 그 느낌이 이른 육욕을 불러와 그가 잠들었던 사이에 활력을 되찾은 자신의 물건에 힘을 주면.
"꺄읏?!"
아직까지 잠들어있던 벨카가 깜짝 놀라 그의 몸 위에 눕혔던 몸을 파드득 떨며 일으켰다. 그러자 따스한 햇살 속에서 소녀의 나신이 드러났다. 어찌나 놀랐는지 그 가녀린 어깨부터 그의 배 위를 짚은 가냘픈 팔이 후들거린다. 소녀의 봉긋한 가슴부터 잘록한 허리는 눈부신 햇빛 속에서도 제 빛을 잃지 않은 붉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며 아슬아슬하게 가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 어셔는 소녀의 하반신에 자리 잡은 은밀한 균열이 어젯밤 그대로 그의 물건을 삼키고 있는 모습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후으으, 어셔."
아침부터 이상한 방식으로 강제로 깨워진 탓인지 벨카는 화사한 금빛에 작은 원망을 담고 그를 불렀다.
"왜 그래?"
"아읏! 으으."
그가 능청스럽게 대답하며 다시 한번 제 물건에 힘을 주면 소녀는 그에 어쩔 수 없이 반응하고 마는 모습이다. 소녀의 균열을 파고 들어가 뿌리처럼 단단히 자리 잡은 그의 물건 때문일까? 그의 맨살과 맞닿은 소녀의 몸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당연히 소녀의 몸속으로 직접 들어간 그의 물건은 더했다. 끈적하고 따뜻한 소녀의 안이 울렁거리며 자지를 꽉 물다가도 살짝 풀어지기를 반복하니 심장이 두근거리는 감각마저 서로에게 전해지는 기분이다. 이대로 평생 이어져 있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계속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었다. 오늘은 마스카피르가 시작되는 날이고 어셔가 그곳에 참여해야 하는 만큼 밤에 축제가 벌어지기 전에 마을 사람들을 따라서 준비해야 할 일이 있었다. 사실 소녀의 안에 자신의 정을 털어놓고 싶은 것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애매한 경계에서 멈춰 계속 이어지는 쾌락 때문에 자지가 터질 것처럼 욱신거리고 있었으니까.
"하으, 어제 그렇게 했으면서."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그를 참을 수 없게 만드는 건. 애정으로 가득한 소녀의 금빛이었다. 늘 그를 시달리게 만들던 갈증과도 같은 공허함을 해소해주는 그 눈동자. 금방이라도 흘러넘칠 것 같으면서도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벨카가 조심스레 건네주는 애정이었다. 여전히 따스하고 포근한 그 감각을 더 느끼고파 몸을 일으켜 그녀의 몸을 끌어안으면 그의 물건도 소녀의 안쪽으로 더 파고들었다.
"아후으! 어셔."
그의 물건이 안을 파고들면 벨카는 여전히 이 일에 익숙하지 않은 듯 가쁜 숨을 내쉬면서도 꼭 그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들어 그에게 매달리듯 껴안긴다. 그러면 그의 가슴에 뭉그러지는 소녀의 봉긋한 가슴의 감촉이 그대로 느껴졌다. 벨카에게 그런 의도가 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의 육욕을 자극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가 허리를 흔들자 시작되는 소녀의 신음.
"읏! 응! 하읏!"
잠들기 전 같은 행위를 오랫동안 반복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잠들어 있는 동안 계속 연결되어 있었을 그의 물건에 익숙해졌기 때문일까? 소녀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불편한 기색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렇게 이른 아침부터 그의 집에서는 달콤하게 녹아내린 소녀의 신음이 울려 퍼졌다. 소녀의 신음이 멈춘 건 그가 소녀의 안에 제 정을 털어놓았을 때였다.
"아으응."
버거운 듯 그의 위에서 파르르 몸을 떨면서 그의 정을 받아내는 소녀. 그 안쓰러운 몸짓마저 제 물건을 통해 전해지는 것이 어셔는 좋았다. 정말로 벨카와 하나가 된 것 같아서 이 작고 사랑스러운 소녀의 모든 걸 함께 느끼고 싶어서. 그리고 드디어 사정이 끝났을 때. 벨카는 달뜬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 몸을 맡기고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육욕이 끓어오르지는 않았지만 소녀와 맨살을 맞대고 껴안고 있는 것이 좋다. 가만히 그의 가슴팍에 몸을 기댄 소녀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지금까지와는 어딘가 다른 충동이 생겨났다.
지금까지 육욕과 같은 뜨겁고 질척이는 것에 가려져 미처 느끼지 못했었지만 소녀에게 모든 걸 쏟아내고 나니 그 따스한 느낌이 크게 와닿았다. 지금도 벨카는 버거워하는 것 같은데 과연 이 따스한 느낌까지 소녀에게 넘겨도 괜찮을까? 그의 감정을 너무 많이 받아낸 벨카가 괴로워하지는 않을까? 걱정하면서도 어셔는 그 충동에 몸을 맡기고 소녀의 이마에 조심스레 입술을 맞추었다. 마음 같아선 벨카의 입술에 제 입술을 겹치고 싶었지만 그가 너무 괴롭힌 탓인지 그녀는 그의 정을 받아내느라 버거운 숨을 내쉬고 있었으니까.
"어셔?"
그것을 느꼈는지 그의 품에 기대어있던 벨카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
"아으, 그게. 우읏."
놀란 빛을 머금은 그 금빛이 자신을 바라보자 어셔는 부끄러운 마음에 고개를 돌리며 괜히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벨카가 뒤늦게 그가 한 일을 알아차린 듯 얼굴이 점점 더 붉게 물드는 모습에 어셔는 덩달아 얼굴이 붉어졌다. 어색한 침묵이 방안을 맴돌았다.
"어셔! 준비됐니?"
그때 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어셔는 화들짝 놀라 벗어두었던 옷을 급하게 끼워 입었다. 너무 급해서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평소에도 옷을 빨리 입는 것은 자신이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갈아입은 것은 처음이었다. 벨카도 상황을 파악한 듯 제 옷가지를 챙겨 낡은 옷장 안에 숨었다.
"무슨 일 있었니?"
벌컥 문을 열어젖히며 들어온 것은 맥이었다. 그 모습에 어셔의 얼굴은 팍 굳어졌다.
"아저씨가 웬일이에요?"
그가 주로 자신을 보러 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가 느티나무를 베어냈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좋게 볼 수가 없어서 따지듯이 묻는 그가 있었다. 마스카피르에는 몇 가지 규칙이 있지만 가장 눈에 띄는 규칙은 바로 가면을 쓴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냥 쓰는 것도 아니었다. 우선 남자는 해가 떠오를 무렵부터 해가 지기 전까지 집 밖에서는 가면을 쓰거나 들고 활동해야 하며 여자의 경우 해가 질 즘부터 주어지는 가면과 옷을 입어야 한다. 맥이 어셔에게 찾아온 이유는 바로 가면을 전해주기 위해서였다.
이맘때쯤이면 어른들이 가면을 들고 다니거나 쓰고 다니던 게 그런 이유라 생각하며 어셔는 맥이 가져다준 가면을 바닥에 내버려 두었다.
"그는 갔어?"
"어, 이제 나와도 돼."
맥이 떠나는 소리를 들었는지 옷장 문을 살짝 열고 문틈으로 묻는 벨카에게 대답했다. 바보와 느티나무의 일이 없었다면 좀 더 이야기를 나누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역시 느티나무의 일이 있었기 때문인지 맥은 가면만 전해주고 바로 돌아갔다. 어셔는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다. 그가 버티고 있어봤자 껄끄럽고 짜증이 났을 테니까.
"이건?"
옷장 안에서 옷을 입었는지 원피스를 입은 소녀가 나오며 가면을 발견하고 물었다.
"그냥 가면이야."
어셔의 말에 벨카는 그가 내버려 둔 가면을 주워들었다. 맥이 전해준 가면은 아무런 무늬도 없고 얼굴 전체를 가리는 단순히 새하얀 가면일 뿐이었다. 하얀색이라도 입혔다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단순한 나무 가면. 그런데도 그 가면이 신기한지 소녀는 호기심이 어린 금빛으로 가면을 보았다.
"어디에 쓰는 거야?"
"축제에 쓰는 거라는데."
맥이 들려주었던 이야기 속 괴물을 기리기 위한 축제라는데 대체 왜 가면을 써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축제?"
소녀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었다. 그건 의미를 모른다기보다는 마치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느낌이었다.
"매년 이때면 하는 축제야. 나도 이번에 처음 참여하는 거라 잘은 몰라."
그러다 그 이야기에 대해서 벨카에게 물어보려 했던 것이 떠올랐다. 소녀가 그 오랜 세월을 살아왔을 리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저 우연이라 치부하기엔 이것저것 겹치는 것이 많았으니까.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말했다.
"저기 있잖아. 이번에 이 축제가 열리는 유래를 들었는데."
그 후에는 간단하게 맥에게 들었던 마스카피르의 유래에 대해 이야기하며 혹시 아는 게 있느냐 물어보면.
"그렇구나 이건 그가..."
벨카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다 그를 보았다.
"어셔, 축제에 대해서 아는 게 더 있어?"
소녀의 말에 어셔는 마스카피르의 규칙에 대해 늘어놓았다. 마스카피르가 시작되는 날부터 끝나는 날까지 낮에는 남자가 가면을, 밤에는 여자가 가면과 옷을 단 한 가지라도 벗거나 몸에서 떼어두면 안 된다. 밤에는 파트너를 정하는데 파트너를 정하는 것은 여자가 우선권을 지니며 파트너를 신청받으면 수락하거나 거부할 수 있다. 파트너와 둘만 있는 공간이라면 예외적으로 마스크나 옷을 벗는 걸 허용한다. 진행 중 남자는 상대가 거부한다면 절대 가면과 옷에 손대지 말 것 같은 규칙이었다.
"어셔도 축제에 참여하는 거야?"
그 이야기를 들은 벨카의 말이었다.
"어? 어."
더 이상 이 마을에 엮이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일단 성인이 된 이상 마을의 축제에 참여하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었고 좀처럼 마을을 벗어날 기회도 없었다. 다행히 축제가 끝나는 직후에는 탈출할 기회가 있었다. 그에 맞춰 마을을 탈출하면 될 것이라 생각하던 그는 곧 굳은 표정의 소녀를 발견했다. 왜 그러는지 물어보려던 찰나.
"꼭 참여해야 하는 거야?"
"그게, 성인이 되면 모두 참여한다니까."
어째선지 알 수는 없지만 축제에 처음 참여하는 사람은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고 한다. 하필이면 그런 규칙이라 축제 기간 중에는 마을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형들 말로는 굳이 그런 규칙이 없어도 그럴 것이라 말하곤 했지만. 그때 소녀가 의외의 말을 꺼냈다.
"그 축제, 나도 같이하고 싶어."
"뭐?"
그리하여 어셔는 지금 소녀가 사용할 축제용 가면과 의상을 구하기 위해 나와 있었다. 물론 가면을 얼굴에 쓴 상태로. 그는 이런 규칙 따위 귀찮고 지키고 싶지 않았지만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들을 어른들의 잔소리가 더 귀찮고 성가셨으니까. 일단은 축제라서 그런지 마을은 잔뜩 들떠있는 분위기였다. 게다가 그가 벨카와 있던 사이 밖에서 더 들어왔는지 사람들의 숫자도 눈에 띄게 늘어났다. 평소 물건을 팔건 아니건 음식이나 물건을 파는 마을 어른도 몇몇 보였다. 그렇게 평소와는 어딘가 다른 마을을 돌아보던 그는 마을의 입구 근처에서 가면과 옷을 파는 어른을 발견했다.
혹시 자신을 알아보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것을 파는 어른은 어셔와 그렇게 잘 아는 사이는 아니었다. 그래도 긴장하면서 물건을 파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면 남자가 쓰는 가면은 철전 10장에 팔리고 있었고 여자가 사용하는 가면과 옷들은 전부 합쳐서 고작 철전 1장에 팔리는 것을 발견했다. 뭔가 이상하다 싶으면서도 마침 잘 됐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줄을 섰다. 그리고 드디어 그의 차례가 되었을 때 그가 쓴 가면을 발견한 주인이 혀를 차며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쯧! 이미 가면도 있으면서 무슨 일이오?"
다행히 그는 어셔를 못 알아본 것 같다. 어셔는 일부러 목소리를 깔면서 말했다. 성대모사 같은 건 아이들이랑 놀면서 자주 해봐서 익숙해졌던 게 다행이었다.
"여성용 가면을 사려고 하는데요."
그러자 찌푸려져있던 주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철전 한 장이오. 크기는 어느 정도요?"
"저기 저 정도면."
갑작스러울 정도로 달라진 태도에 당황스러우면서도 그는 침착하게 그럭저럭 소녀의 몸에 맞을 법한 크기의 가면과 옷을 가리켰다.
"오호! 아직 어린 편인가?"
어쩐지 즐거워 보이는 그의 모습이 거슬렸지만 그보다는 궁금증이 컸다.
"그나저나 분명 남성용 가면보다 여성용 가면이 더 화려하고 옷도 한 묶음인데 왜 남성용 가면이 10배는 비싼 거예요?"
철전을 아껴야 하는 어셔의 입장에서는 이득이었지만 대체 왜 아무런 특징도 없이 밋밋한 남성용 가면보다 무늬도 제각각에 비교적 화려하고 옷까지 같이 파는 여성용 가면이 훨씬 더 싼지 이해할 수 없었다.
"보아하니 처음 참여하는 거 같은데. 그야 여자가 늘면 선택받을 남자도 많아지니까 그러오."
주인은 그 이후는 직접 경험해보면 된다고 말하고는 그가 고른 옷을 건넸다.
"덩치만큼이나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거 같은데 혹시 기회가 되면 나한테도 붙여주시오!"
그 말을 들은 어셔는 그에게 지독한 거부감을 느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 없어서 가면과 옷만 받고 돌아섰지만 이해할 수 없는 불쾌감은 여전했다. 이 마을은 어떻게 된 게 마음에 드는 것이 드물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벨카가 기다리고 있을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
"이걸 입으면 되는 거야?"
"아직 밤은 아니지만."
해 질 녘 즘에 마을 한가운데서 나무로 쌓은 커다란 제단에 불을 붙이면 그때쯤에 그곳에 모이면 된다고 들었다. 소녀는 그가 건네준 여성용 가면과 옷을 구경했다. 여성용 가면은 남성용 가면과도 달랐다. 남성용 가면은 쓰고 있어도 눈동자 정도는 잘 보이는데 여성용 가면은 쓰고 있으면 앞이 보이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눈 구멍이 희미했다. 절묘하게 무늬에 섞여든 모양이라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 구멍도 뚫려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고 저 가면만 특별한 건 아니었다. 여성용 가면은 모두 저런 식으로 불편하게 되어 있었다. 그것도 혹시 규칙 때문인가 생각하고 있으니 벨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셔, 이거 어울려?"
그에 돌아보니 축제용 옷을 입은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살 때는 몰랐지만 소복처럼 새하얀 그 옷은 어딘가 하늘하늘하고 소녀의 몸에 그럭저럭 맞춰서 샀는데도 품이 넓은 것 같았다. 평소에 어두운 톤의 원피스만 입던 벨카였기 때문에 새하얀 축제용 옷을 입은 소녀의 모습이 색다르다. 하얀 옷 때문인지 벨카의 붉은 머리카락은 더 돋 보였고 어쩐지 인상마저 더 청순해진 소녀의 모습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쳐다보고 있으니 벨카가 불안한 듯 그에게 다시 물었다.
"안, 어울려?"
"아니야! 잘 어울려! 그냥 평소와 느낌이 달라서 그랬어!"
그가 급하게 대답하자 소녀는 그제야 불안한 기색을 지우고 말갛게 웃었다.
"다행이다."
그런 벨카의 모습에 어셔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불안했다. 사람들이 소녀의 모습을 보면 어떻게 될지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몇 년을 그만이 알고 지낸 소중한 비밀친구였다. 오로지 그만이. 그런 소녀를 들킬지도 모른다는 건 생각보다 더 불안한 일이었다. 그래도 가면과 베일까지 쓰면 얼굴은 물론이고 머리카락까지 가려지기 때문에 괜찮을 것이라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