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오래된 전통.
"어셔. 어셔."
"흐아아암, 벨카?"
깜박 잠이 들어버렸던 것일까? 그의 이름을 부르는 미성에 눈을 뜨고 보니 검붉은 원피스를 입은 벨카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머리 뒤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으로 보아하니 소녀가 그에게 무릎을 내어준 모양이다.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야."
벨카의 말을 듣고 보니 소녀의 뒤로 보이는 느티나무 사이로 산산이 부서진 노을의 조각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 언제 잠이 든거지."
벨카와 지내다 보면 늘 겪는 일이지만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은 아무리 길어도 짧게 느껴졌다. 섹스라는 걸 알게 된 이후로 어쩐지 더 짧아진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그럴 때마다 보이는 소녀의 반응이 좋아서 어쩔 수가 없었다. 아직도 자신의 물건에 끈끈하지만 따스한 고양감이 남아있는 것만 같아 벨카에게 조르듯 그녀의 아랫배에 얼굴을 비벼보지만 소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지금은 안 돼."
"더 있고 싶었는데."
하필이면 벨카와 있을 때 잠들어 버리다니 우울해졌다.
"좀 깨워주지 그랬어."
"하지만 어셔가 피곤해 보였는걸."
생각해보니 오늘은 그가 마을을 떠날 준비를 하기 위해 일을 열심히 하고 온 뒤였다는 것이 떠올랐다. 나무꾼들의 일을 도와서 축제에 사용할 불쏘시개를 가득 짊어지느라 평소보다 피곤했던가. 그는 벨카와 있을 때는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잠드는 것조차 자각하지 못했다.
"무리하면 안 돼."
어셔는 벨카의 걱정스러운 잔소리에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가 소녀에게 이곳을 함께 떠나자고 한다면 어떻게 할까? 어셔는 지금이라도 직접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었지만 결국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그래, 그는 이미 같이 떠나고자 계획까지 전부 세워놓은 주제에 정작 벨카에겐 말조차 꺼내지 않았던 것이다. 혹시라도 소녀가 이곳에 남겠다며 자신과 함께 떠나지 않는다고 할까 봐 그는 아직도 마음속에만 그 말을 담아두고 있었다.
"그럼 이제 가 볼게."
"응."
어셔는 오늘도 그 말을 꺼내지 못하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이었다.
"어셔."
그를 부르는 벨카의 목소리에 돌아본 순간 그의 입술에 부드럽고 촉촉한 것이 닿은 것은.
"좋아해."
그에 어셔는 멍하니 소녀를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로 어셔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집 앞에 서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분명 제 발로 집으로 돌아온 것 같았지만 어떻게 돌아왔는지 자세한 기억은 없었다. 말 그대로 홀린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벨카가 먼저 그에게 좋아한다고 말한 건 처음이었으니까. 그의 비밀친구는 얼마나 부끄러움이 많은지 모르겠다. 어셔는 다음에는 벨카에게 반드시 같이 이곳을 떠나자고 말해보자 결심하며 집 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 안에 있던 인물은 별로 달갑지 않은 상대였다.
"다녀왔니?"
"...맥 아저씨?"
그의 집안에는 맥이 그 바보와 함께 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벨카와 있으면서 좋았던 기분이 한순간에 떨어지는 것 같아 그가 왜 자신의 집에 있는지 의문을 품었다. 맥은 그의 의문을 알아챈 것처럼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돌려주는 시간이 좀 늦어지는 것 같아서 와봤다."
어셔는 곧 그 원인이 여자아이에게 있다는 것을 깨닫고 짜증이 났다. 진작에 돌아가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돌아가지 않더니 결국 꼴도 보기 싫은 맥까지 불러들인 꼴이 되었다. 그가 화가 나서 바보를 노려보니 그녀는 그의 시선을 피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행동이 그를 더 열받게 만든다는 걸 알지 모르겠다.
"그보다 내일모레 마스카피르가 시작된다는 건 알고 있지?"
"매년 하는 거잖아요."
어셔는 그가 왜 그런 걸 물어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마을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게 그 축제였으니까. 매년 이맘때쯤에 하는 축제를 모르는 게 더 이상했다. 하지만 어셔는 그 축제가 정작 무엇을 하는 축제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건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야 그 축제는 성인이 아니면 참가할 수 없으니 말이다. 일단 해가 완전히 저문 밤에만 한다는 것과 불을 크게 피운다는 것, 약 일주일간 계속된다는 것까지는 알고 있었지만 어셔 같은 아이들이 그 이상으로 알만한 방법은 없었다.
"그런데 그걸 왜 저한테."
"그야 올해부터 너도 참여할 수 있으니까."
"네? 정말요?!"
아이들 사이에선 마스카피르가 대체 무슨 일을 축제인지 말이 많았다. 누구는 괴물을 위한 축제니 제물을 바치기 위한 축제니. 축제에서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을 형이나 누나들에게도 물어봤던 아이들이 많았지만 아무도 가르쳐 준 적이 없었다. 규칙이라면서 늘 직접 경험해 보라는 말만 반복하곤 했었는데.
"너도 이제 성인이잖니 축제에도 규칙이 있으니 잘 지켜야 한다?"
맥의 이야기는 이 마을에서 마스카피르가 열리게 된 유래부터 시작되었다. 마을이 자리 잡은 이곳은 원래 커다란 숲의 일부였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마을의 길이 되는 한곳을 제외하고는 사방이 넓은 숲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다른 마을과의 거리도 멀어서 외부인이 찾아오는 일이 거의 없는 곳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런 곳에 마을이 자리 잡게 되었을까? 그건 오래전의 이야기다. 이 숲은 언제부터 있었는지 짐작도 할 수 없는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존재해온 곳으로 그 품에는 헤아릴 수 없는 온갖 동물과 식물들이 자리 잡아 감히 인간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숲의 외곽에서 필요한 나무를 베어 가는 것이 다였던 이 숲에 여느 때처럼 나무꾼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언제나처럼 외곽에서 나무를 베어가고자 하였고 그날도 그들은 순조롭게 나무들을 베어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떤 것을 발견한 누군가가 다급하게 외치는 목소리만 없었다면. "늑대다!"라고 말이다. 그 소리를 들은 그들은 베고 있던 나무는커녕 들고 왔던 도끼와 수레도 팽개치고 도망치려고 하였으나 그들은 이미 숲을 나가는 길목을 늑대들이 가로막고 서있는 모습을 보고 말았다. 마치 그들이 할 행동을 예측하고 길목을 가로막은 듯한 모습에 그제야 그들은 늑대들의 함정에 빠져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로부터 늑대는 교활하다 전해지는 동물들 아마 나무꾼들이 항상 비슷한 곳에서 나무를 가져간다는 것을 눈치채고 벼르고 있었던 것이리라. 결국 돌아갈 길을 잃은 그들이 선택한 것은 오히려 숲의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것이었다. 위험한 도박이었지만 그 자리에서 모두 늑대의 사냥감이 되는 것보다는 좋다고 생각한 그들은 안으로 또 안으로 달려갔다. 모두가 살 수는 없었다. 그들은 하나둘 늑대나 다른 야생동물들에게 사냥 당했고 끝에 남은 것은 오로지 나무꾼 한 명뿐이었다.
그는 달리고 달린 끝에 살아남았지만, 추위와 고독함, 밤의 공포마저 이겨낼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살아남아야 했기 때문에 그는 어디로 향하는지도 알지 못하고 걷고 걷고 또 걸었다. 몸은 천근만근 무겁고 도망치는 도중에 신발도 잃어 맨발을 자꾸 날카로운 돌부리가 괴롭혔지만 그는 계속해서 걸어나갔다. 그나마 다행인 사실이 있었다면 한없이 나약해질 대로 나약해진 그를 숲의 동물들이 습격하는 일이 없었다는 것뿐. 그 걸음의 끝에서 그는 물소리를 듣고 허겁지겁 달렸다. 며칠간 마시지 못한 물 때문에 마른 목이 물소리를 듣자 더욱 타는 것처럼 느껴졌던 그는 끝내 계곡을 발견했고 또한 발견하지 말았어야 할 것을 함께 발견하고 말았으니.
훗날 그가 이야기하길 그것은 아름다운 괴물이었다. 아름다운 괴물은 친절하게도 혼자 남은 나무꾼을 치료해주고 돌려보내 주려고 하였으나 숲의 외곽을 맴도는 맹수들에 의해 밖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고 한다. 나무꾼은 결국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게 되었고 이내 아름다운 괴물이 두려워 맹수들이 들어오지 못하는 곳에 자리를 잡게 된다. 그 후로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올 때마다 구해주거나 받아들이게 되었고 점점 규모가 커지면서 지금 어셔와 마을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나무꾼은 커다란 나무가 가득한 이 숲에서도 유독 크게, 그리고 높이 뻗은 느티나무의 모습을 보면서 아름다운 괴물에게 물었다.
"저 나무는 무엇입니까?"
"이 숲이 시작된 곳이자 나의 쐐기."
아름다운 괴물은 그의 질문에 그렇게 답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졌고 나무꾼은 아름다운 괴물을 다시 만나고자 평생 숲을 돌아다녔지만, 다시는 나무꾼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마스카피르는 그 아름다운 괴물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정도의 이야기였다.
"그럼 내일도 잘 부탁하마! 축제에 쓸 좋은 나무도 발견했고 불쏘시개가 많이 필요하거든."
긴 이야기를 끝낸 맥은 그런 말을 남기고 바보와 함께 돌아갔다. 어셔는 또 그놈의 규칙이라 생각하면서도 그의 이야기를 곱씹었다. 유래라고 하니 정말로 있었던 일인지 모르겠지만, 이야기 속에서 나무꾼과 아름다운 괴물의 대화가 자꾸만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느티나무도 그렇지만 아름다운 괴물이라는 건 혹시.
"내일 벨카한테 직접 물어보자."
어셔는 그렇게 다짐하며 잠에 들고자 몸을 눕혔다. 다음날, 어셔는 아침 일찍 나무꾼들과 함께 숲으로 들어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어제처럼 축제에 쓸 나무를 베고 불쏘시개를 찾기 위함이었다. 그러다 여유가 생겨 잠시 주변을 둘러봤을 때였다. 평소보다 사람들이 은근히 많다는 것을 느낀 건. 어차피 조그마한 시골마을, 어셔가 마을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서 산다고 해도 같은 마을에서 사는 사람들을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확 티는 나지 않지만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미묘하게 늘어난 사람들 사이에는 그가 모르는 사람들이 몇몇 확실하게 보였다.
"어째 내가 아는 마을 사람들보다 숫자가 많아진 것 같은데."
"같은 게 아니라 진짜야."
그의 중얼거림에 대답한 건 옆에서 같이 채비를 하던 커너였다.
"우리 마을에서 캐는 나무를 대신 다른 곳에 파는 마을들이 있는 건 알지?"
"그거야 뭐."
어른들 말로는 숲의 입구 쪽에는 다른 마을들이 있었다. 거기서 우리가 캐는 나무를 사고 다른 곳에 팔아준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어셔도 이상한 방식이라 생각하긴 했지만 이 마을의 위치가 워낙 숲에 틀어박혀있는 꼴이라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들었었다.
"이건 나도 얼마 전에 들은 건데. 나무 값을 높게 쳐주는 대신 자기네 마을 사람들을 몇 명 뽑아서 마스카피르에 참여시킨다더라."
"이런 시골에서 하는 축제에?"
어셔는 그의 말에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말을 하기에도 새삼스럽지만 그가 사는 마을은 찾는 사람은커녕 아는 사람도 찾기 힘든 시골이다. 그런데 그런 시골에서 하는 축제에 참여하고 싶어 안달이 난 것처럼 굳이 몇 명을 뽑아서 참여할 수 있게 거래를 한단 말인가? 이제는 어셔도 마스카피르라는 것이 무엇을 하는 축제인지 의문이 들었다. 축제의 유래와 대략적인 규칙은 맥에게 들었지만 직접 참여해 본 적이 없으니 자세한 것은 아직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러게 말이야."
커너도 그의 생각에 동감하는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다 곧 숲으로 출발한다는 소식에 그들은 딱딱한 지게를 등에 메고 숲으로 향했다. 그렇게 어디로 가는지 모를 나무꾼들을 따라 험한 숲길을 걷고 있을 때 어셔는 자신들이 어제와는 전혀 다른 길로 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제처럼 불규칙한 느낌이 아니라 확실하게 목적을 가지고 마을을 빙 돌아서 한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헥헥, 오늘은 대체 어디까지 가는 거래."
로버트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엄살을 부린다고 타박하기엔 어제는 그나마 평평한 길이 많았는데 지금 그들이 걷는 길은 제법 경사져 있어서 더 많은 체력을 소모하고 있었다. 등에 메고 있는 지게만 내려둔다면 한결 편하게 올라갈 수 있겠지만 일을 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니 어쩔 수 없었다. 주변에 널린 것이 나무인데 굳이 먼 거리까지 이동하는 나무꾼들의 행동에 알게 모르게 짜증이 쌓여갈 무렵이었다. 로버트가 더 이상 못 참겠는지 근처의 나무꾼 하나를 붙잡아 물어보았다.
"아저씨, 오늘은 대체 뭐 하길래 이렇게 멀리 가는 거예요?"
"좋은 나무를 발견해서 말이다."
"좋은 나무요?"
대체 좋은 나무가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일단 그의 말로는 축제에도 쓰기 좋고 외부에 팔면 특히 돈이 되는 나무라고 하니 어셔는 군말 없이 그들을 따르기로 했다.
"너는 지치지도 않냐?"
"돈을 준다잖아."
"네가 언제 그렇게 열심히 일을 했다고."
로버트가 투덜대도 어셔는 꿋꿋이 걸었다. 나무를 파는 값이 높은 만큼 그 또한 많은 철전을 얻을 수 있었으니까. 쉴만한 공간도 있다고 하니 조금만 고생하면 남는 장사였다. 그만큼 빨리 벨카와 함께 이 마을을 떠날 수 있다는 말이었으니까. 그럼에도 그가 조금씩 지쳐갈 무렵.
"도착이다!"
저 앞에서 나무꾼들을 이끌던 누군가 그렇게 외쳤다. 그 목소리를 따라 그들이 언덕을 올랐을 때 어셔는 지친 숨을 고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쉴만한 공간이 있다더니 확실히 나무에 비하면 키가 훨씬 작은 잔디가 자라 있는 것을 보면 확실했다. 하지만 어셔는 이내 느껴지는 기시감에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그가 깔고 앉아 있는 이 잔디의 감촉부터 다른 나무와는 어딘가 다른 향기까지 어디서 많이 느껴보던 것이 아니던가? 그것을 깨달은 순간 그는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왜냐하면 이곳은 그와 소녀만의 비밀 장소였으니까.
착각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착각이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의 눈앞에 보이는 익숙한 느티나무가 착각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종류만 같은 다른 나무라고 말하기엔 모든 게 똑같았다. 사람이 걸어 올라갈 수 있을 만큼 굽어있는 느티나무의 밑동도 그 안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작은 공간도 거대한 크기도 그 향취마저도. 맥이 어제 이야기했던 좋은 나무와 오늘 나무꾼이 말했던 좋은 나무를 발견했다는 것이 머릿속을 스쳤다.
"야! 너 어디 가?"
로버트와 커너가 놀라서 그를 불렀지만 어셔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는 저 앞에서 거대한 느티나무를 재어보는 듯한 맥에게 다가갔다.
"아저씨."
"오, 어셔구나 무슨 일이니?"
"혹시 좋은... 나무라는 게 저 나무예요?"
어셔는 마음속으로는 이미 확신하고 있었으면서도 물었다. 제발 아니길 기대하면서 하지만 그의 기대는 이어지는 맥의 말에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그래, 내가 발견했지. 어때? 저 정도면 떼돈을 벌 수 있을 거란다."
그 말에 어셔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맥은 그가 갑자기 달려들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는지 당황하며 쓰러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어셔가 맥에게 달려드는 것을 본 어른들이 다가와 그를 붙잡았고 이내 제압당하고 말았다.
"얘가 갑자기 왜 이래?"
"몰라! 일단 붙잡아!"
그럼에도 분을 삭이지 못한 어셔가 씩씩거리고 있었지만 정작 맥은 몸을 일으키며 그가 왜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얻어맞은 볼을 문질렀다.
"대체 왜 그러는 거니?"
"아저씨야말로 이상해요! 왜 하필이면 저 나무인 건데요?!"
그래, 이상한 건 어셔가 아닌 맥이었다. 그 또한 규칙을 운운하던 어른 중에 한 명이면서 왜 모른단 말인가?
"저 느티나무는 딱 봐도 아저씨가 했던 이야기에 나오는 나무잖아요!"
모르는 게 더 이상했다. 그토록 규칙을 운운하던 어른이라면 마스카피르라는 축제가 무엇을 위해 이어져왔는지 설명한 본인이라면 저 나무가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자 맥은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지겹다는 듯이 말했다.
"너도 촌장 님과 같은 말을 하는구나."
촌장 님이 그와 같은 말을 했다면 설득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 나무를 베지 말라는 규칙은 없잖니?"
"뭐라... 고요?"
확실히 그랬다. 마을의 규칙 중에는 확실히 어떤 나무를 베지 말라는 규칙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너는 어려서 모르겠지만 그건 어차피 전해내려오는 이야기에 불과하단다."
"그건 그렇지. 까짓것 고작 나무일 뿐이고."
"이 숲에서도 보기 드문 나무 같고 저 정도면 이 마을 사람들 모두가 떼돈을 벌 수 있겠지."
심지어 다른 어른들마저 맥의 말에 동의하는 기색이니 어셔는 무력하기만 했다. 결국 그가 일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한 어른들 때문에 어셔는 혼자서 마을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그는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순순히 마을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들이 자신을 잘 볼 수 없는 숲과 잔디밭의 경계에서 나무꾼들을 노려보고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느티나무에 개미 떼처럼 달라붙어 도끼로 내려찍는 모습이 보였다.
"젠장!"
그 모습을 그저 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현실에 어셔는 이를 갈면서도 숲 주변을 뒤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이곳은 분명 그와 소녀만의 비밀 장소였다. 토끼처럼 겁 많고 예민한 소녀가 사람들 때문에 놀라 숨어서 떨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도저히 혼자서 마을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몇 시간 정도를 이 근처를 이잡듯이 뒤져보았지만 소녀의 모습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그는 자신이 이곳으로 올 때 이용하던 통로가 떠올랐다.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혹시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급하게 그 통로를 향해 내려가면.
"벨카!!"
그는 통로 앞에 있는 소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상태가 이상했다.
"으으읏, 어셔."
벨카는 그가 온 것을 알아차린 듯 가쁜 숨을 몰아쉬며 금방이라도 끊어질듯한 목소리로 겨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소녀의 몸에는 힘이 없어 등을 통로가 있는 벽에 기대어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있었고 한 손으로는 가슴 부근을 부여잡고 식은땀을 잔뜩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그와 만나면서 단 한 번도 병에 걸려 아픈 적이 없었던 소녀가 괴로워하는 모습에 어셔는 나무꾼들이 느티나무를 베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다시 돌아가 그들을 막으려고 했을 때 소녀가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벨카?"
"가지 말아 줘."
그의 옷자락을 붙잡은 벨카는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힘을 주고 있는 것 같았지만, 정작 그곳에서 느껴지는 힘은 그가 조금만 힘을 주어도 쉽게 떨어져 나갈 것처럼 미약했다. 어셔는 당장이라도 나무꾼들을 말리러 가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이 손을 뿌리쳤다간 영원히 벨카를 만나지 못할 것만 같아서 소녀의 곁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