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화 〉비밀친구. (1/220)



〈 1화 〉비밀친구.

어셔는 천천히 불어오는 바람에 휘날리는 금색 머리카락이 자신의 이마를 간질이는 것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아, 이딴 마을 빨리 떠나고 싶다."

막 성년에 들어선 그는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살고 있었다. 특징이라고 할만한 것이 있다면 또래 중에서도 작은 키일까? 힘이나 체력도 또래에게 그리 밀리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상하리만치 그의 키는 작은 편이었다. 누가 보면 막 성년에  청년이 아닌 소년으로 보일 지경이다. 그런 그가 이런 말을 중얼거리는 것이 예사로운 일이었는지 소년의 곁에 있던또 다른 소년이 핀잔하듯 말했다.

"아직도 무슨 여행이니 모험가니 그런 거나 생각하는 거냐? 꿈 깨. 우리 마을 남자는 몇몇만 제외하면 대대로 나무꾼이라고."
"아 좀! 로버트! 그러니까 나는 그 나무꾼 같은 거 되기 싫다니까!"

그는 괜히  현실을 가르쳐주는 제 악우에게 소리쳤다.  로버트란 소년은 마을 아이들 중에서도 키가  편이라 그의 옆에 다가오면 어셔는 저도 모르게 짜증이 나곤 했다. 그렇게 소리친 그는 잔뜩 힘을준 발걸음으로 땅을 찍듯이 걸어갔다.

"야! 어디 가는데?"
"집에 간다!"

그는 뒤에서 들려오는 소년의 목소리에 신경질적으로 답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기억이  나는 어렸을 때부터 살아온 마을이었지만 그는  마을에 대해 매우 유감이 많았다. 알만한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찾지 않는 한적한 곳이라는 곳이라는 사실부터 나무를 캐고 살면 마을 전체가 그럭저럭 먹고 살 수 있다며 자라난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나무꾼이 되는 이 마을이 그는 정말로 싫었다. 치기 어린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어려서부터 꿈이 있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마을을 나가는 건 단순히 그 꿈의 부차적인 것일 뿐이다. 그의 꿈은 바로 이 답답하고 폐쇄적인 마을을 나가 모험가가 되는 것이었으니까.

마왕이나 드래곤 같은  무찌르는 용사나 기사 같은  기대했다면 미안한 말이지만 모험가라고 딱히 거창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세상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세상을 여행하는 것뿐이다. 소문으로는 위험한 것이 많다는 것 같지만 체력에는 자신 있었으니까. 문제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초라하고 오래된 나무 문 앞이었다. 끼이이익. 기분 나쁜 소리를 내는 초라한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지긋지긋한 적막이 어셔의 숨통을 조여오는 것 같았다. 고작해야  발자국. 자신의 집으로 들어왔을 뿐인데도 대문 밖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 몸을 담그는 것처럼 느껴진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애초에 그에게 가족은 있지도 않으니까. 처음부터 없었던 건 아니었다. 그에게도 가족이라 부를만한 이가 한  정도는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그녀는 이제 이곳에 없다. 스쳐 지나가듯 떠오르는 에메랄드빛 눈동자에 그는 이를 악물면서도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가 향하는 곳은 대문의 안에 있는 작은 집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뒤쪽. 잘 살펴보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는 작은 공간이었다. 무척이나 좁고 어두운 공간이었지만 어셔에게 있어서 그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안에 있는 것을 들키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다행스럽게 여길 정도였다. 어른들이 들어오기엔 비좁은 공간이지만 덩치가 작은 편인 어셔가 들어가기엔 문제가 없는 이곳에는 남들이 알면  되는 비밀이 있었으니까. 다만 유감스러운 점이 있었다면. "끄악! 또 지네냐!" 어둡고 축축한 탓에 여러 가지 벌레나 거미 같은 기분 나쁜 것들이 상당히 많다는 것이었다. 그런 꺼림칙한 것들을 제치고 더 들어가면 커다란 구멍이 나타났다. 이 구멍은 너무 크지도 너무 작지도 않았는데  어셔가 기어서 들어가기에 적당한 크기의 구멍이었다.

사실 그도 이 구멍을 처음 발견했을  많은 고민을 했었다. 다른 건 둘째 치더라도 아무리 들여다봐도 빛 하나 보이지 않는 커다란 구멍은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주기에 충분했으니까. 하지만 그는 언젠가부터 이 구멍을 꾸준히 이용하기 시작했다. 위로 기울어진 이곳을 천천히 기어오르고 있으면 어느 순간부터 빛이 비쳐 들어오는 것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 다다르면. 커다란 나무들이 그를 반겨주었다. 잠깐 뒤를 돌아보면 아까와 똑같은 크기의 구멍이 나있는 벽이 있다. 다름이 아니라  구멍은 거대한 나무들이 자라는 숲으로 이어져 있었던 것이다.

짹짹거리는 이름 모를 새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그는 풀숲을 헤쳐 나갔다. 처음에는 들어가는 것조차 빡빡하고 어려웠지만 그가 자주 드나들면서 이제는 쉽게 그 길을 열어준다. 그리고 나타나는 사람이 다닌 길의 흔적은 어셔 혼자 이곳을 밟고 다니면서 만들어진 길이었다. 처음에는 걷는 것도 힘들었던 곳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그럼에도 나무가 빽빽하고 경사진 이곳은 사람이 쉽게 다닐만한 길이 아니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켁?!"

이렇게 발이 미끄러져 다치곤 했으니까. 아무리 들떠있다고 해도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건 필수였다.

"아이고. 다리야."

살짝 까져 피가 배어 나오는 무릎이지만 어셔의 거침없는 발걸음을 막기에는 무리였다. 그렇게 걷다 보면 커다란 나무에 가려져 희미했던 빛이 어느 순간부터 밝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빛은  그가 목표로 하고 있는 곳에  그녀가 있는 곳에 도착한다는 뜻이기에 그는 다친 다리도 아랑곳하지 않고 경사진 길을 올랐다. 그리고 드디어 빛 너머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커다란 나무들 중에서도 더욱 커다래 보이고 두꺼운 느티나무였다.

그가 지나온 숲을 구성하는 나무들이 보통 곧게 하늘로 뻗어있는 반면 그 느티나무는 보다 두껍고 굵은 줄기가 구불구불 이리저리 마음 가는 대로 자란 듯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나무들보다 커다랗게 자라나 수많은 팔을 뻗어 하늘을 막아서고 두터운 허리로는 뒤의 숲을 지키며 땅속에 파고든 다리로 땅을 매어둔 것 같은 그 모습이 경이롭기까지 했다. 유독 커다랗게 자란 나무 때문일까? 느티나무의 주변은 다른 나무들이 다가오지 못하고 얕은 잔디로만 가득했다. 하지만 어셔가 찾아온 것은 그 느티나무가 아니었다.

그 커다랗고 두터운 느티나무의 밑동에는 어두운색의 나무껍질 위에서 눈에 띄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첫인상은 우선 붉다. 멀리서 보면 꽃이라고 생각되는 붉디붉은 양귀비꽃처럼 선명한 붉은 머리카락, 하얀 들꽃처럼 새하얀 피부가 보이고 조금만 더 다가가면 그 커다란 느티나무에 기대어 책을 읽는 한 소녀가 있었다.

"벨카."

험한 산길을 해쳐오느라 조금은 거칠어진 숨으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면 무엇이 쓰여있는지 모를 책을 들여다보던  금잔화와도 같은 금빛의 눈동자가 어셔에게로 향했다. 그의 모습을 눈에 담자 그 금빛이 선명한 애정을 담고 화려하게 피어났다.

"어셔."

그의 부름에 답하듯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녀의 표정은 무표정해 보였지만 어셔는 알 수 있었다. 저 동화책 속에서 그대로 빠져나온 마녀처럼 신비로운 소녀가 자신을 반기고 있다는걸. 그 절세의 소녀야말로 어셔가 그 꺼림칙한 구멍과 거친 산길도 마다않고 이곳으로 오는 이유였다. 어셔가 이 소녀를 알게  건 꽤 오래된 일이었다. 몇 살쯤이었던가? 마을의 아이들과 숨바꼭질을 하기 위해 숨을 곳을 찾다가 발견한 집의 뒤편, 좁은 틈새를 발견하고 이곳이라면 아무도 찾을 수 없다는 생각에 들어갔던 곳에서 처음으로 그 구멍을 발견했다.

 오래되고 어두운 구멍은 솔직하게 말해서 어렸던 그가 마음먹고 들어가기엔 겁이 나는 것이 사실이었다. 굳이 구멍 속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이곳에 있으면 아이들에게 안 들킬 것이라는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어셔! 어딨냐?"

점점 이쪽으로 다가오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을  있었으니까. 그에 당황한 그는 몸을 숙여 구멍 속에 몸을 집어넣었다. 어렸던 그에겐 제법 커다란 구멍 속은 의외로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먼지가  많은 것이 흠이었지만 물이 흘러서 축축한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어셔, 찾았...! 뭐야, 여기도 없잖아?"

그리고 바로 근처에서 들려오는 술래의 목소리에 어셔는 그곳에 그대로 숨어있었다면 들켰을 것이라는 걸 알  있었다. 자신의 집이니까 처음 발견했다고 생각했는데 이곳을 알고 있는 아이가 있었던 모양이다. 다행히 안쪽으로 들어올 생각은 하지 못했는지 술래는 그를 발견하지 못했고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자 구멍에서 빠져나오려 했지만 문득 호기심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이 이상한 구멍은 어디까지 이어져있는 것일까? 술래도 집의 뒤편이라면 몰라도 이곳에 있는 구멍까지는 알지 못했다.

이 구멍을 정말로 아무도 모른다면 어쩌면 그 끝에는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이어져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을  어셔는 구멍의 안쪽을 보고 있었다. 구멍은  한 점 들어오지 않아 정말로 어두웠다. 그 모습이 무섭기도 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이런 곳이라면 사람이 발견한다고 해도 아무도 들어오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구멍의 끝에 있는 곳은 그만의 비밀 기지가 되는 것이었다. 그만이 알고 있는 비밀 기지라는 것은 소년의 마음에 불을 지피기에 충분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 오로지 그만이 알고 있는 곳이라는 특별한 느낌은 남자들이라면 한 번쯤은 꿈꿔봤을 그런 것이니까. 마을의 아이들도 그런 것을 만들어 보았다가 남들도 다 아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실망하는 모습을 많이 보았던 어셔이기에 다른 아이들은 성공하지 못한 비밀 기지라는 생각에 그의 마음은 부풀어 올랐다. 그렇게 부풀어 오른 마음은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구멍 속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기에 충분했고 그는 위로 경사진 구멍 속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완벽한 원을 그리는 구멍의 안쪽은 물기로 축축하지 않으면서도 자칫하면 미끄러질 것 같았지만 그 이상한 느낌이  마음에 들었다.

다만 그 안의 거미나 징그러운 벌레 같은 것들은 질색이지만 가끔 거미줄에 걸리는 느낌만 제외하면 문제가  것도 없었다. 그렇게 구멍 속을 얼마나 기어올랐을까? 그는 곧 저 구멍의 끝에서 빛이 비쳐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 모습에 그는 환희했다. 처음에는 기대했었지만 구멍 속을 오르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기대감 대신 영원히 이 구멍 속을 빠져나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이 들었는데. 때마침 빛이 비쳐들어온 것이다. 그렇게 완벽한 원을 그리는 벽을 짚고 그 빛을 향해 힘차게 기어가 드디어 그 빛에 닿은 순간.

"와."

어셔는 절로 감탄하며 멍하니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빼곡히 우거진 풀숲과 그가 두 팔을 크게 벌려도 한참을 감싸지 못하는 둘레의 커다란 나무들이 드높이 솟아 있었다. 상쾌함 풀 내음의 그의 코를 스치며 간지럽혔다. 자신이라는 존재가 한없이 작아지게 만드는 나무들의 모습에 그는 홀린 듯이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처음 듣는 새들의 노랫소리와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소리를 따라 그는 앞으로 또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 끝에서 나무들이 자라지 않은 넓은 들판과 그 중심에 자리한 그 어떤 나무들보다도 커다란 느티나무를 발견할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발견한 것이 커다란 느티나무만은 아니었다.

"무슨 생각 해?"
"그냥,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그의 머리를 보드라운 무릎에 베개하고 한없이 깊고 아름다운 금빛으로 조용히 내려다보던 벨카의 물음에 어셔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그래,  느티나무의 아래에서 그는 이 소녀를 처음 만났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어셔는 이 소녀가 요정이나 마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무척이나 상냥하고 아리따운. 왜냐하면 그가 알기로 시골마을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소녀는 어디에서도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다. 양쪽으로 묶어내린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이 바람을 따라 사르륵하고 흘러가듯 흔들리는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어셔는 소녀와의 첫 만남을 감히 잊을 수 없었다. 마을의 남자아이들 중에서도 키가 가장 작은 그보다도 작고 가녀리지만 어디 하나 모난 구석이 보이지 않는 몸과 그에 어울리는 때묻지 않은 하얀 들꽃 같은 피부. 봉숭아 꽃을 베어   말간 입술에 머리카락은 붉디붉은 양귀비꽃처럼 매혹적인 향을 품었으며 그 끝은 금잔화처럼 무언가를 담기 좋은 금빛의 눈동자가 장식했다. 그래, 벨카는 그렇게나 꽃의 곱고 고운 부분으로 고르고 골라서 만들어진 것만 같은 소녀였다. 이 정도로 아름다운 소녀라면 소문이 날 법한데도  적이 없으니 그가 사는 마을의 소녀가 아니라는 것은   있었다.

실제로 소녀는 그가 어디서 사냐는 물음에 그저 느티나무를 가리켰고 마을에서 사는 것이 아니냐는 그의 물음에도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으니까. 그리고 그는 그것이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 비밀스러운 공간과 마을의 남자아이들이 본다면 시도 때도 없이 고백을 받았을지도 모르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소녀를 오롯이 그 혼자만 독점할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소녀는 그가 언제 어느 때에 찾아와도 늘 느티나무의 울퉁불퉁한 밑동에 안쪽으로 굽은 공간에 앉아 표지조차 없는 책을 읽고 있었다. 꽤 빨리 오거나 늦게 도착해도 소녀는 늘  자리에 똑같은 모습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윽! 잠깐만, 조금만 덜 아프게는 안돼?"
"오늘도 다쳐온 건 어셔니까. 어쩔 수 없는걸."

현재 소녀는 그의 까진 무릎에 약을 발라주고 있었다. 단호하게 그의 잘못이라 이야기하면서도 소녀의 금빛에는 그에 대한 걱정이 가득 담겨있었다. 소녀가 사용하는 약은 어셔가 알고 있는 약과는 조금 달랐다. 소녀가 말하기를 무미야라는 난생처음 듣는 약초를 건조하고 빻아서 만드는 약으로 이 약을 상처에 바르면 빠르게 나았다. 소녀가 바짝 마른 풀 같은 무미야를 새하얀 자기에 넣고 그와 같은재질의 막대를 돌려 빻아서 가루로 만들고 그 가루를 고운 입술을 모아 후후 불어 상처가 난 그의 무릎에 뿌려주었다. 그렇게 하면.

"앗! 따가!!"

상처가  곳이 엄청나게 아프고 벅벅 긁어 떼어내고 싶을 만큼 따가웠지만 단  초만 지나면.

"자, 이제 괜찮을 거야."

벨카가 말하는 대로 그의 무릎을 보면 아까 오는 길에 났던 상처가 거짓말처럼 사라진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무미야라는 거 정말 신기하단 말이야. 바를  엄청 아프다는 것만 빼면 좋을 텐데."

상처가 치료되기 전에는 바른 직후에 느껴지는 엄청나게 따갑고 쓰라린 감각이 상처를 강제로 후벼파는 것처럼 괴로웠지만 단 몇 초 만에 상처가 없는 것처럼 회복되는 것은 정말로 신기했다. 상처가 있었던 곳을 보면 약초 특유의 쌉싸름한 향과 초록색의 고운 가루만이 그곳에 상처가 있었음을 가르쳐  뿐이다. 약을 뿌린지 얼마나 되었다고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상처는 소문으로만 듣던 마법이라도 보는  같았다. 다만 상처가 완전히 치료되기 전에 느껴지는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만큼은 아무리 해도 적응되지 않는다는 것이 흠이었다.

"다쳐오지만 않는다면 약을 바를 일도 없어. 조금이라도 조심해서 다니면  되는 거야?"

그러자 그에 대한 걱정을 담은 벨카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소녀는 과연 알고 있을까? 이렇게 그를 걱정하는 모습이 좋아서 다치지 않을 수 있었으면서도 일부러 다치는 일이 많다는걸. 무엇보다.

"언제나 벨카를 빨리 만나고 싶으니까 어쩔  없어."

입에 바른 말 같아도 이건 그의 진심이었다. 그의 말에 새하얀 자기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하얀 피부와 무표정한 얼굴 때문에그저 인형 같았던 소녀의 얼굴이 제 머리카락처럼 생기 있는 붉은색으로 물들어 버렸다.

"좋아해. 벨카."

어셔는 이렇게나 사랑스러운 소녀의 귀에 그런 말을 속삭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가볍게 불어오는 바람 소리에도 묻힐 정도로 정말로 자그맣게 들려오는 소녀의 대답은 그의 귓가에 간신히 닿았다. 아마도 그것이 이 부끄러움 많은 소녀의 최선이었으리라. 빽빽한 나뭇잎 사이를 용케도 뚫고 들어온 가느다란 햇빛이 눈꺼풀을 간질이는 평화로운 오후.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느티나무 아래에서 소년과 소녀는 서로에게 애정을 속삭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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