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미치도록 두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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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미치도록 두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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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미치도록 두렵습니다
2023.08.07.
서재 문이 벌컥 열리자 칼리스토가 멈칫하며 책을 내려놓았다. 그 사이로 당당히 모습을 드러낸 이는 폰네스 제국의 황후, 이블린이었다.
“황후가 이리 야심한 시각에 무슨 일이오.”
“잠이 오지 않아 차를 한 잔 가져오라 했는데, 폐하의 서재에도 아직 불이 꺼지지 않았다고 들어서요.”
이블린의 눈짓에 하녀가 트레이를 들고 왔다. 테이블 위에 두 개의 찻잔이 세팅되자 이블린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따뜻한 차예요. 어서 와서 드세요.”
“알겠소.”
느릿한 걸음으로 다가온 칼리스토가 맞은편에 앉자 이블린이 찻잔을 손에 쥐었다.
“그나저나 이안이 요새 통 안 보이는 거 같던데…….”
“몸이 안 좋은 것 같아 잠시 편히 쉬다 오라고 했소.”
“흐음, 그랬군요.”
칼리스토의 눈매가 흠칫 굳었다.
“내게 무슨 할 말이 있는 거라면 바로 하시오.”
“이제 슬슬 때가 된 거 같아서요.”
칼리스토가 무슨 말이냐는 듯 미간을 좁혔다.
“에녹 말이에요. 올해가 가기 전에 황태자로 책봉하시는 게…….”
“에녹을 황태자로 올릴 순 없을 거 같소.”
“네?”
이블린이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들은 사람처럼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이안을 황태자로 책봉할 거니 그리 아시오.”
“폐하!”
“나도 이안을 황태자로 올리고 싶지 않았소. 하지만…….”
의자 팔걸이를 쥔 이블린의 팔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잘근 깨문 채로 칼리스토를 쏘아보았다.
“지금 그걸 저보고 믿으라고요? 차기 황제가 되는 건 에녹이라고 하셨잖아요. 제게 약조하셨잖아요.”
이블린은 믿지 않겠지만 칼리스토는 지금 제가 앉은 황위에도 그다지 미련이 없었다.
사랑하는 여자도 제대로 지키지 못했으면서, 사랑하지 않는 여자를 품어야 하는 자리 따위 몇 번이나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바이올렛과 한 약속이 있었다.
‘칼리스토, 이안만은 황제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당신이 우리 아이를 끝까지 지켜줘요.’
그저 사랑하는 사람과 평범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말하면서 죽어가는 바이올렛 앞에서 칼리스토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러겠노라고 약속의 말을 하는 것뿐이었다.
이 손으로 이안에게 황위를 물려줄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상황이 달라졌다.
이안에게 저주가 발현되었다.
황제가 되어 처음 금기의 방에 들어가 기록물을 읽어 보았을 때, 칼리스토는 다짐했다.
내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저주가 발현된다면 꼭 황제를 시키겠노라고.
아이러니하게도 그게 최선이었다.
저주가 발현된 모든 이는 하나같이 말했다.
이런 몸으로 살 바엔 그냥 일찍 죽고 싶다고. 그런데 자의로는 죽을 수 없고 내내 고통받을 수밖에 없기에 더욱더 끔찍한 저주인 셈이었다.
‘그래, 이안을 미치광이로 만들 바엔 차라리 황제로 만드는 게 낫겠지.’
“조만간 책봉식을 치를 거요.”
“제게 이러실 순 없습니다, 폐하.”
요란한 발소리가 멎어 들고 이내 서재 문이 굳게 닫혔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칼리스토가 잇새로 긴 한숨을 흘렸다.
*
“뒤로 물러나십시오, 선배님.”
이안이 내 앞을 막아선 채로 검을 빼 들었다. 코앞까지 다가온 웨어베어가 사람의 몸통보다 두꺼워 보이는 팔을 치켜들었다.
그 순간 이안의 검이 파랗게 빛났다.
오러였다.
제자리에서 가볍게 뛰어오른 이안이 푸른빛이 감도는 검을 휘둘렀다. 이안이 멈칫한 웨어베어를 한 번 더 베어내자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크게 울렸다.
맥없이 쓰러진 웨어베어를 보니 차츰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지금 내 앞에 있는 게……. 소드마스터가 된 이안이라는 거지?
나는 일렁이는 가슴을 내리누른 채 이안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클라인.”
작은 부름에 이안의 어깨가 크게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다가오지 마십시오.”
내 쪽으로 몸을 돌린 이안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뭐?”
“저는 선배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이안은 대답 대신 내게서 조금씩 뒷걸음질 쳤다.
여기까지 와놓고 이대로 가겠다고?
“기다려! 무슨 말인지 제대로 설명이라도 해 줘야 할 거 아니야. 다짜고짜 내 앞에 설 수 없다면서 가 버리면…….”
“저는……. 괴물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선배님 앞에 다가설 수 없습니다. 제발 더는 다가오지 마십시오.”
“네가 왜…….”
‘선배님께 모든 걸 털어놓을 수는 없지만, 황가에 은밀히 내려오는 저주가 있습니다. 그 저주가 제게 발현됐고, 저는 이 저주를 안고 살아갈 자신이 없습니다.’
설마 저주가 발현된 것 때문에 자신을 괴물이라고 지칭하는 건가?
대체 그 저주가 뭐길래.
“다시는 이런 위험을 무릅쓰지 마십시오.”
“그래서 계속 이렇게 도망치겠다고?”
내 물음에 이안이 잠시 멈춰 섰다.
“…….”
“앞으로는 나 안 볼 생각이야?”
이안의 미간이 한껏 일그러졌다. 그가 느끼는 고통이 그의 얼굴 위로 선연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저는…….”
한없이 낮아진 음성에 긴장감이 훅 끼쳐 왔다.
“두렵습니다.”
“……뭐가 그렇게 두려운데?”
“당신에게 다가가는 게 미치도록 두렵습니다.”
떨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전해지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분명 내 눈앞에 이안이 서 있는데도, 눈 깜빡할 새에 아스라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머릿속엔 그를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이대로 놓치면 후회할 거 같았다.
나는 자꾸만 움찔거리는 손끝을 세게 그러쥐며 말했다.
“그럼 너는 거기 가만히 있어. 내가 갈 테니까.”
*
이안은 뒤로 물러서려다가 본능적으로 멈칫했다. 로즈벨리아가 가까워질 때마다 그녀의 얼굴이 점차 선명해졌다.
이윽고 떨리는 눈동자에 그녀의 얼굴이 가득 찬 순간, 환청이 들려왔다.
‘저런 것보다 사람 피가 더 좋은데.’
제발 조용히 해! 그 입 다물어!
두 눈을 질끈 감은 그가 제 얼굴을 감싸 쥐려는 찰나였다.
“클라인, 너 괜찮은 거야? 안색이…….”
그대로 시간이 멈춘 듯했다. 믿기지 않게도 모든 것이 고요해졌다.
근처에 있는 네이슨의 속마음과 환청으로 시끄러웠던 그의 세상에 정적이 찾아들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환청이 들려올 때마다 불쾌한 감각이 몸을 감싸곤 하는데, 어디선가 청량한 기운이 스며들고 있었다.
빠르게 시선을 내린 이안의 눈동자가 커졌다. 제 착각이 아니라면 이 기운은 로즈벨리에게 붙잡힌 팔에서 전해지는 것이었다.
‘이 기운은 대체 뭐지? 왜 갑자기 조용해진 거지?’
그러고 보니 로즈벨리아와 같이 있는 동안 그녀의 속마음은 단 한 번도 들려오지 않았다. 퍼뜩 그 사실을 떠올린 이안이 조급한 얼굴로 로즈벨리아를 불렀다.
“선배님.”
“어?”
“제게 속으로 무슨 말이라도 해보십시오.”
로즈벨리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뭐?”
“얼른요.”
그녀는 도통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듯 눈썹을 찌푸리면서도 입을 굳게 다물었다. 정말 속으로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눈으로는 이안을 빤히 바라보았다.
“했어.”
“뭐라고 하셨습니까?”
“……얼굴이 좀 야윈 거 같다고.”
이안의 눈동자가 애틋하게 가라앉았다. 못 본 사이에 얼굴이 해쓱해진 건 로즈벨리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그의 눈에는 한없이 아름다웠지만.
“정말 속으로 생각하셨습니까?”
“그래.”
그런데 왜 들리지 않는 거지?
로즈벨리아가 흩날리는 머리를 쓸어넘기는 사이 다시 환청이 들려왔다.
‘죽이고 싶은 거야?’
주춤거리며 물러나려는데, 대뜸 다가온 로즈벨리아의 손이 이번엔 이마 위로 내려앉았다.
“어디 아픈 건 아니지?”
그녀의 손이 닿자마자 청량한 기운이 전해 들었다. 환청도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설마 로즈벨리아가 닿으면 고요해지는 건가?’
로즈벨리아가 손을 떼어 내려 하자 이안이 다급히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이건 말이 안 되는데…….”
정말 믿기지 않지만, 그녀와 닿아있으면 정적이 찾아왔다.
허탈한 웃음을 흘리던 이안은 로즈벨리아의 팔을 부여잡은 채 그대로 무너져내렸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게 아니라면…….
혹 누군가 나의 간절한 바람을 들어주기라도 한 걸까.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린 이안이 로즈벨리아의 얼굴을 더듬거리듯 보았다.
그는 거세게 뛰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눈꺼풀을 지그시 내리눌렀다. 이제야 살아 있는 것 같았다.
“클라인 너 괜찮아?”
감히 이 사람을 안 보고 살아갈 생각을 했다니.
불쑥 치미는 감정 탓인지 목울대가 뜨거워졌다.
“제가 당신을…….”
멋대로 움직이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 뒤편에서 인기척이 느껴진 탓이었다.
로즈벨리아의 팔을 놓자마자 누군가의 생각이 전해졌다.
‘막사에 없었는데 대체 어디로 간 거지?’
리나트였다.
“누군가 오고 있습니다.”
“또 도망가려는 거야?”
이안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로즈벨리아가 그의 팔을 덥석 붙잡아왔다. 걱정 어린 눈을 마주한 이안이 부드러이 웃어 보였다.
“아뇨, 이젠 도망치지 않겠습니다.”
“정말이지?”
“선배님 근처에 있겠습니다. 그러니 오늘처럼 위험을 감수하진 마십시오.”
그대로 돌아서는 듯하던 이안은 다시 로즈벨리아 앞에 섰다. 그러곤 로즈벨리아의 손등에 입술을 내렸다.
“내일 밤, 진영 근처에서 기다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