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뒤로 물러나십시오
(53/54)
53화. 뒤로 물러나십시오
(53/54)
53화. 뒤로 물러나십시오
2023.08.03.
“우리는 그러니까……. 쓰레기를 좀 버리고 있었습니다.”
라일리 가문에서 피에르와 함께 자원해서 온 기사가 대답했다. 이름이 슬로안이었던가.
“쓰레기요?”
내가 되묻자 피에르가 목을 가다듬는 척하며 슬로안의 팔을 툭 건드렸다. 슬로안이 움찔거리며 입을 다문 사이, 이번엔 피에르가 입을 열었다.
“이 친구가 말실수를 좀 한 거 같은데 쓰레기는 아니고…….”
쓰레기라고? 언뜻 붉은색을 본 거 같았는데.
“붉은색이었던 거 같은데 대체 뭘 버린 거죠?”
피에르가 뜨끔한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붉은 게 아니라…….”
“혹시 붉은 샘의 물을 담아가려던 건가요?”
“그럴 리가요. 우리가 이걸 가져가서 뭐에 쓰겠습니까.”
“저 용기에 담아 오신 건 포도주였습니다. 짐이 무거워서 이참에 몰래 버리셨답니다.”
게일이 슬쩍 끼어들어 말했다. 그러자 피에르가 반색하며 맞장구를 쳤다.
“게일의 말이 맞습니다. 사실 포도주를 버린 겁니다. 이게 마지막 남은 포도주였고요.”
“무거우면 다른 사람들한테 맡기면 되지. 기껏 가져온 포도주를 버렸다고요?”
내가 영 수상하다는 눈빛을 하고선 다가가자 두 사람은 손에 들고 있던 용기를 동시에 붉은 샘 위로 내던졌다. 투명한 용기는 잠시 물 위에 뜨는가 싶더니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
“아, 거참 무거우면 버릴 수도 있지. 뭘 그렇게 따지고 듭니까. 어차피 우리 가문에서 별도로 가져온…….”
“피에르, 그냥 죄송하다고 해.”
슬로안이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피에르의 어깨를 감쌌다.
아까부터 서로 눈치를 주고받으면서 말을 아끼는 걸 보니, 무언가를 숨기려는 거 같은데…….
내가 놓친 게 뭘까?
“포도주를 버려서 미안합니다. 됐습니까?”
“죄송합니다, 로즈벨리아 경. 게일의 짐을 들고 가려고 보니까 저희 짐이 너무 무거워서 그만.”
나는 순순히 사과를 건네 오는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정말로 포도주를 버린 거라면 왜 굳이 붉은 샘에다가 버린 걸까?
용기까지 버릴 필요가 있었나?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남은 증거가 없으니 더 따지고 들 수도 없었다.
“게일, 여기 있는 짐꾸러미를 들고 내려가면 되지?”
줄곧 내 눈치를 살피던 슬로안이 게일의 짐꾸러미를 멨다.
“두 분이 드시기에 좀 많을 거예요. 하나는 두고 가세요.”
“됐어, 이런 일은 우리가 해야지. 피에르, 뭐 해. 얼른 가자고.”
슬로안과 피에르가 게일의 짐을 한가득 들고 내려가는 사이, 나는 게일에게 다가갔다. 언덕 아래로 내려가면서 그들이 버린 게 정말 포도주가 맞는지 재차 물어볼 생각이었다.
“어서 내려가죠.”
“알겠습……. 으악!”
재빠르게 바닥을 살펴보니 게일 주위에만 진흙이 있었다.
아까까진 평범한 땅이었을 텐데?
“설마 머드맨?”
그 순간 게일의 다리가 진흙 아래로 빨려 들어갔다.
“사, 살려주십시오!”
게일의 비명에 언덕 아래로 내려가던 피에르와 슬로안이 잠시 멈칫하는 게 보였다. 그들은 우리 쪽에 잠시 시선을 두는가 싶더니 냅다 줄행랑을 쳤다.
“언제는 같은 토벌대끼리 서로 돕는 게 당연하다더니 저렇게 도망칠 줄이야.”
“피에르 경! 슬로안 경!”
목청껏 그들의 이름을 외치던 게일도 황당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어차피 저들은 도움이 안 됩니다. 그러니 움직이지 마세요.”
머드맨은 땅에 스며들어 진흙인 척하고 있다가 불시에 사람을 공격하는 마수였다. 진흙 아래로 사람을 끌고 들어가 질식시키는 마수였다.
죽이기 힘든 마수는 아니지만 약점을 찾아내기가 까다로웠다.
머드맨이 맨 처음 스며든 지점을 찾아야 하는데, 설마 저건가?
“저기! 머드맨의 약점은 저기인 거 같아요!”
마침 게일도 발견한 모양이었다. 나는 게일의 몸을 반쯤 삼킨 진흙과는 다르게 비교적 옅은 색을 띤 곳에 검을 깊숙이 찔러넣었다.
“몸을 움직여 보세요.”
“아까보다는 붙잡는 힘이 약해진 것 같아요.”
“지금 나와야 해요!”
검을 맨땅에 꽂아 넣은 나는 게일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있는 힘껏 나를 붙잡고, 진흙에서 조금씩 빠져나왔다. 간신히 머드맨에게서 벗어난 게일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네요.”
머드맨은 얼마나 빨리 처치하느냐가 관건인 마수였다. 다리와 허리까지는 비교적 천천히 끌고 들어가다가 순식간에 머리까지 집어 삼켜버리니까.
“괜찮으세요?”
“괜찮아요. 내 목소리를 듣고 멈칫한 걸 봤는데 그대로 가 버리다니.”
게일이 분하다는 눈빛으로 언덕 아래를 쏘아보았다.
“어차피 저 둘은 크게 도움이 안 됐을 거예요. 마수 연구원인 그쪽처럼 머드맨의 약점을 찾을 수도 없었을 거고요.”
“나를 호위하겠다더니……. 제가 아니라 샘물을 지키려던 거였나 보네요.”
“네?”
샘물이라면 ‘붉은 샘’의 물을 지칭하는 걸 텐데.
마수 연구원이 매번 연구 목적으로 가져가던 샘물을 라일리 가문의 기사들이 지킬 이유가 있나?
“……로즈벨리아 경이라고 하셨죠?”
“네, 그렇습니다만.”
끈적끈적한 진흙을 털어내며 내게 다가온 게일이 속삭이듯 말했다.
“라일리 가문을 조심하세요.”
“그게 무슨 뜻이죠?”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은 이것뿐입니다.”
*
‘라일리 가문을 조심하세요.’
가뜩이나 머릿속이 복잡한데, 무슨 뜻으로 내게 그런 말을 한 걸까.
길게 숨을 내쉰 나는 모로 누웠다가 다시 반듯하게 눕길 반복했다.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잠깐 잠이 든 것도 같았다.
‘언제까지 정면 승부를 피할 셈이지?’
‘저는 그저 왕명에 따라 움직일 뿐입니다.’
이안과 로즈벨리아의 목소리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흐릿하지?
눈에 힘을 주려고 노력해보아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암흑처럼 캄캄한 것도 아닌데 시야에 제대로 들어오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여태 꾼 꿈과는 달랐다. 마치 불투명한 무언가가 내 앞을 가리고 있는 것 같았다.
‘네 가문을 멸문시킬 것이다.’
‘윈터스 가를 말하는 거라면, 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저는 그 가문을 떠나온 지 오래니까요.’
윈터스 가를 멸문시킨다고?
등줄기에 소름이 일었다. 그러니까 이 꿈은 레노르 왕국으로 망명해 기사단장이 된 로즈벨리아와 폰네스 제국의 황제가 이안이 전쟁터에서 맞붙는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과연 그럴까?’
‘네. 그러니 폐하 마음대로 하십시오.’
‘어찌 되든 상관없다? 네가 아끼는…….’
드문드문 전해지던 말소리도 끊겼다.
‘죽는 게 그리 소원이십니까?’
한참 뒤에 들려 온 로즈벨리아의 목소리는 이전과 다르게 싸늘했다. 두 사람의 검이 비로소 맞붙었는지 이내 챙그랑, 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 소리에 퍼뜩 깨어난 나는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꿈에서 깨어났는데도 뿌연 안개가 낀 것처럼 머릿속이 흐릿했다. 이안과 로즈벨리아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볼 수 없었고, 그들이 나눈 대화 또한 일부분만 전해졌을 뿐이었다.
지나칠 정도로 생생했던 건 검끼리 맞닿는 소리뿐이었다.
왜 이런 꿈을 꾼 거지? 포르투나가 이 꿈을 통해서 나에게 전하고자 하는 게 있는 건가?
설마 이안과 멀어지면 결국 이런 상황이 되풀이될 거란 뜻은 아니겠지?
“내가 멀어지고 싶어서 멀어진 것도 아닌데.”
저주가 발현되자마자 종적을 감추었고, 지금도 토벌대나 내 앞에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데 뭘 어떻게…….
잠깐?
찰나 번쩍하고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생각이 있었다. 막사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민 나는 불침번의 동태를 살폈다.
한 차례 정찰이 끝났는지 다들 모닥불 앞에 모여앉아 있었다. 나는 슬금슬금 막사 밖으로 나와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몰래 진영에서 빠져나온 나는 어제와 다르게 한 곳에 가만히 있지 않고 주변을 탐색하듯 돌아다녔다. 내가 원하는 바는 단 하나였다.
마수와 마주치는 것.
어제와 같은 상황에서는 이안이 나서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여태 마수를 처치해온 게 이안이라는 건 확실하니, 적어도 마수 앞에는 그가 나타날 터였다.
“한 마리 정도는 있을 법도 한데.”
별안간 지면이 쿵쿵거리며 울리기 시작했다. 언뜻 육중한 체구를 지닌 형체가 보였다.
이윽고 어둠 속에서 흉흉하게 빛나는 붉은 눈이 드러났다. 웨어베어였다.
“이래도 안 나타날 거야?”
낮게 중얼거린 목소리가 바람에 나부꼈다.
꿈속 상황, 그러니까 원작에서 있었던 일을 제대로 목격하진 못했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원작 속 로즈벨리아와 이안은 우리와 다르다는 것.
저주가 발현되었다고 해도 네가 원작 속 그 이안의 모습은 아닐 거라는 거.
토벌대를 걱정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이렇게 쫓아와 마수를 처치하지도 않았겠지.
마음의 준비는 끝났다. 이안이 왜 모습을 숨기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내가 알던 이안의 모습이 남아 있을 거란 믿음이 있었다.
그 믿음 하나로 검집에서 검을 빼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네가 이 근처에 있다면 분명 어디선가 날 보고 있겠지.
너를 마주할 수 있는 방법이 이뿐이라면…….
나는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빛나는 붉은 눈을 똑바로 마주한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웨어베어가 성큼성큼 내게로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뭐 하시는 겁니까!”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처럼 불쑥 나타난 이가 내 앞을 막아섰다. 이윽고 새하얀 달빛 아래로 익숙한 뒷모습이 드러나자 나도 모르게 숨을 삼키었다.
“뒤로 물러나십시오, 선배님.”
이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