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붉은 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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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붉은 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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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붉은 샘
2023.07.31.
‘네이슨’이라는 이름은 원작에서도 본 기억이 없었다.
정말 이 사람이 소드마스터일까?
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남자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러자 목을 한껏 움츠린 남자가 횡설수설하며 말했다.
“그러니까 저는……. 그냥 지나가던 사람인데 여기서 졸고 계시면 안 된다는 말을 전하라고, 아니, 그 말을 하려고 온 거거든요.”
잠깐, 방금 뭐라고 했지?
‘졸고 계시면 안 된다는 말을 전하라고…….’
누군가 말을 전하라고 했다는 건, 이 남자 말고 다른 사람이 또 있다는 거였다.
“그럼 깨어나신 것 같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저기, 잠깐만요!”
“예?”
우뚝 멈춰 선 남자가 내 쪽을 돌아보았다. 축 내려간 눈썹을 보니 이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듯했다.
“혹시 그쪽이 우리 토벌대보다 앞서서 마수를 토벌한 건가요?”
“제가 그런 어마어마한 마수들을요?”
남자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는 듯 몸서리를 쳤다.
반응을 보아하니 역시나 마수를 처치한 건 이 사람이 아니었다.
“그쪽이 아니라고요?”
“저는 그럴 능력도 되지 않지만, 그런 일을 숨어서 할 사람은 더더욱 아닙니다. 저였다면 보란 듯이 사람들 앞에 나서서 멋있게 마수를 처치했을 거예요.”
말에 묘한 가시가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알아달라는 듯한 뉘앙스처럼 느껴졌다고 해야 하나.
이 남자 말고 숨어서 마수를 처치하고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이 네이슨이라는 남자를 보내 나를 깨우라고 한 건가?
그렇다는 건 역시 내 추측대로…….
사고 회로가 자꾸만 멈칫거렸다. 입안은 언제부턴가 바싹 말라 있었다.
“그럼 이곳에는 어떻게 온 거죠?”
“부, 붉은 샘이 궁금해서 와봤어요. 그것만 보고 내려갈 겁니다.”
설마 내가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붉은 샘을 보러 여기까지 왔는데, 마수는 처치하지 않았다면 내 앞에 있는 건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시체였을 터였다.
아니면 일부러 터무니없는 말을 해서 내게 힌트를 주려는 건가?
“그쪽, 여기 혼자 온 거 아니죠?”
네이슨의 눈이 뎅그러니 커졌다. 그는 대답해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혹시 클라인이라는 사람 알아요?”
“예? 그,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그럼 이만 안녕히 계세요.”
거짓말을 못 하는 편인가? 무슨 생각하는지 얼굴에 훤히 다 드러나는데.
네이슨은 행여 내가 붙잡을세라 부리나케 달려갔다. 곧바로 뒤를 쫓을 심산이었는데, 두 다리가 마치 땅에 달라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막상 저주가 발현된 이안을 마주한다고 생각하니 덜컥 겁이라도 난 걸까.
옅은 한숨을 흘린 나는 네이슨이 사라진 쪽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어찌나 재빠른지 벌써 감쪽같이 모습을 감춘 뒤였다.
지금이라도 뒤쫓을까. 작게 중얼거린 나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나무 아래서 자는 척까지 하느라 시간이 꽤 지체됐을 터였다. 불침번들이 한 번씩 막사 안을 살피기도 하니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워둘 순 없었다.
오늘만 날은 아니니까.
애써 마음을 다잡으려는 찰나, 어디선가 웅웅거리는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큰 나무를 훑고 지나온 거센 바람이 이윽고 내게 불어닥쳤다. 어지러이 흩날리던 머리를 쓸어넘기는 때에 재차 한숨이 새어 나왔다.
“……진짜 너였어.”
이안이 이곳에 있다.
내내 함께 있었다.
나는 기묘하게 울렁이는 가슴께를 꾹 누른 채, 토벌 진영이 있는 곳으로 애써 발걸음을 돌렸다.
*
“레이디?”
에드윈의 부름에 데이지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네?”
“집중하셔야죠. 목검이라도 떨어뜨리면 발을 다칠 수 있습니다.”
데이지는 양손으로 쥐고 있던 목검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에드윈이 제 몫으로 가져온 목검은 에드윈이 들고 있는 목검에 비해 훨씬 작고 가늘었다.
“이렇게 작은 목검인데 얼마나 다치겠어요. 로즈벨리아 님은 이보다 훨씬 무거운 검을 들고 싸우고 계실 텐데…….”
“레이디의 관심은 언제나 로즈에게 쏠려 있군요.”
“그거야 걱정되니까 그렇죠. 로즈벨리아 님은 괜찮으시겠죠?”
공작저에 들를 때마다 데이지는 로즈벨리아에 대한 걱정을 늘어놓곤 했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에드윈이 입꼬리를 가볍게 들어 올리며 대꾸했다.
“그럼요, 로즈는 정말 강합니다. 토벌에도 능숙하고요.”
“당연히 그렇겠죠! 로즈벨리아 님이니까요.”
간혹 예기치 못한 행동을 해서 보는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때도 있지만, 늘 든든한 동료였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였다.
“이건 레이디께만 알려드리는 건데, 사실 로즈는 저보다도 강하답니다.”
“음, 그럴 거 같았어요. 에드윈 님은 마수 토벌에 못 가셨는데 우리 로즈벨리아 님은 가셨으니까요.”
“저도 명단에는 뽑혔습니다. 발목을 다쳐서 가지 못한 것뿐이라고요.”
발끈하는 에드윈의 반응에 풋 하고 웃음을 터뜨리던 데이지가 눈치껏 입가를 가렸다.
“다치셨어요? 그런데 이렇게 제 훈련을 도와주셔도 되는 건가요?”
동그래진 눈을 마주한 에드윈의 입매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사실 이 정도론 훈련이랄 것도 없었다.
양손으로 목검을 쥐게 하고 그대로 위로 올렸다가 아래로 내리는 동작만 반복하고 있었으니까.
“네. 레이디의 기쁨이 제 기쁨이니까요.”
싱긋 웃고 있는 에드윈을 힐긋 올려다본 데이지가 뺨을 붉혔다.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이런 말을 잘도 한다니까.’
“제 기쁨이 어째서 에드윈 님의 기쁨이 되는 걸까요?”
“그거야…….”
에드윈이 말끝을 흐리자 데이지가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됐어요, 로즈벨리아 님 얘기나 더 들려주세요. 로즈벨리아 님은 기사단 내에서도 인기가 많으시죠?”
“그렇죠. 실력자라 기사단 내에서도 로즈를 동경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런 거 말고요. 기사로서도 뛰어나지만 로즈벨리아 님은 정말 아름다우시니까…….”
“로즈도 물론 아름답지만, 제 눈에는 데이지 양이 더 아름다우십니다.”
놀란 듯 손끝을 움츠리던 데이지의 얼굴 위로 혼란스러운 기색이 번져 나갔다.
“에드윈 님, 솔직히 말씀해 보세요.”
“말씀하십시오.”
에드윈 앞에 다가선 데이지가 가자미눈을 하고선 그를 올려다보았다.
“바람둥이죠?”
“……예?”
*
“로즈벨리아 경, 얼마나 더 가야 ‘붉은 샘’이 나옵니까?”
“이 근방이에요.”
“확실히 붉은 샘 근처라 그런지 마수가 많이 나오긴 하네요.”
붉은 샘 근처라 토벌대가 함께 이동하는 중인데도 곳곳에서 마수가 튀어나오는 탓에 이동이 몇 번이나 지체되었다.
곧 날이 저물 듯한데.
“설마 저게 붉은 샘입니까?”
곧게 뻗은 검지가 가리킨 건 로즈벨리아의 기억 속에서 봤던 그 ‘붉은 샘’이었다.
“맞아요.”
“생각보다 작네요.”
“오면서 봤던 다른 샘은 이렇지 않았는데 정말 붉다는 말밖엔……. 꼭 피 같습니다.”
누군가 중얼거린 말처럼 섬뜩하리만큼 붉은색이었다.
샘이라는 호칭이 붙은 걸 보면 어디선가 물이 나오고 있다는 건데.
흘러들어오는 물길도, 흘러나가는 물길도 보이지 않았다. 꼭 샘이 아니라 큰 웅덩이에 고여 있는 물 같았다.
“만져봐도 됩니까?”
“아뇨, 안 됩니다. 독성이 있거든요.”
붉은 샘 근처에 다가선 마수 연구원이 단호히 말했다.
“그런데 이 물을 어떻게 가져간다는 겁니까?”
“특수하게 만든 용기가 있습니다.”
마수 연구원인 게일은 익숙하다는 듯 짐꾸러미를 풀었다. 그 안에 투명한 용기가 제법 많았다.
“이것도 여기에 내려놓으면 되겠소?”
“예. 감사합니다.”
게일의 짐을 나누어 들어주던 몇몇 기사들이 붉은 샘 근방에 짐꾸러미를 내려놓았다. 분주히 샘물을 담는 게일을 뒤로한 채, 가브리엘은 주황빛으로 물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곧 해가 질 듯하군.”
“흩어져서 진을 칠 만한 곳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수염을 매만지던 가브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 샘에서 조금이라도 더 떨어지는 게 좋을 듯하네.”
“알겠습니다.”
리나트가 수호기사단 기사들을 이끌고 내려가는 사이, 가브리엘은 게일에게 다가갔다.
“게일, 시간이 얼마나 더 소요될 거 같은가.”
“조금 걸릴 듯합니다. 단장님.”
“이분은 저희 둘이서 호위할 테니 먼저들 내려가십시오.”
게일을 호위하겠다고 나선 이들은 뜻밖에도 라일리 가문의 기사 둘이었다.
“셋만 남겠다고요?”
루카스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묻자 피에르가 태연하게 대꾸했다.
“잠깐 샘물만 뜨는 거고, 짐은 저희가 들고 가면 되니까 어서들 내려가시죠.”
“그럼 피에르 경에게 맡기고 가겠습니다. 자자, 다들 내려가죠.”
루카스의 채근에 남은 토벌대 인원이 아래로 몸을 움직였다. 그들의 뒤를 따라 몇 발자국 떼었을까.
“로즈벨리아, 거기서 뭐 해. 얼른 와.”
“좀 이상하지 않아?”
“뭐가?”
평소 같았으면 어떻게든 더 많은 인원을 남게 했을 터였다.
짐을 같이 들어달라고 해도 모자랄 판에 자기들이 들 테니 어서들 가라고?
평소에 보였던 행실을 생각하면 그런 말을 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피에르는 더더욱 그럴 위인이 아니었다.
“나 잠깐 붉은 샘에 다녀올게.”
“놔둬. 고생을 자처하겠다는데.”
“그게 이상하다는 거야. 원래 안 그러던 사람들이 그러니까.”
그런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는 루카스를 남겨둔 채 붉은 샘이 있는 언덕으로 다시 올라갔다.
발소리를 죽이며 조심스레 다가간 내 눈에 들어온 광경은…….
저 두 사람 뭐 하는 거지?
마수 연구원은 붉은 샘에서 살짝 떨어져 있었고, 오히려 샘 가까이에 있는 건 라일리 가문에서 온 기사 둘이었다.
두 사람의 손에는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게일이 가져온 그 용기와 비슷한 거 같은데?
더욱 이상한 건, 게일처럼 그 안에 샘물을 담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버리는 듯한 모양새라는 거였다.
“지금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