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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누구세요? (51/54)


51화. 누구세요?
2023.07.27.



“거기 누구 있어?”

무성하게 우거진 수풀을 헤치고 나아가던 나는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물소리가 들려오는 듯해 와보았는데 맑은 샘이 있었다.

‘버려진 산’의 모든 물이 다 붉은 빛을 띠는 건 아니었다. 산 중턱에 섬뜩하리만큼 붉은 샘이 있는 것일 뿐.

로즈벨리아도 토벌 중에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나 샘을 발견할 때면, 바네사와 함께 간단히 몸을 씻곤 했었다.

그나저나 첨벙거리는 물소리를 들은 것 같았는데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샘 주위를 차분히 둘러보았다. 샘의 가장자리는 수심이 얕아 물속이 투명하게 비치고 있었지만, 한가운데는 수심이 꽤 깊어 보였다.

별다른 기척은 느껴지지 않아 돌아서려는 찰나였다.


“로즈벨리아 경?”

아, 깜짝이야.

가슴을 쓸어내린 나는 재빠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부단장님?”

수풀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건 리나트였다.


“이 시간에 왜 홀로 나와계십니까.”

“그게……. 낮에 본 마수 사체 말이에요. 발견했을 때, 죽은 지 족히 몇 시간은 되어 보였거든요.”

“그래서요?”

“이 산에 우리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거라면 밤이나 새벽에 움직일 거 같아서…….”

나는 말꼬리를 흐리며 리나트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기막혀하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런 거라면 누구에게라도 말을 하고 나왔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마침 잠이 안 와서 조용히 다녀오려던 거였는데……. 제 생각이 짧았어요.”

잠을 제대로 청하지 못한 건 사실이었다. 이안이 감쪽같이 종적을 감춘 뒤로 내내 불면증에 시달렸고, 토벌에 와서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거기에 이 산에 이안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까지 더해지니 더더욱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래서 몰래 나와본 거였는데 하필 리나트에게 들킬 줄이야.


“로즈벨리아 경이 강한 분이라는 건 알지만 단독 행동은 위험합니다.”

“부단장님 말씀이 맞아요. 죄송합니다.”

“오늘 낮에 있었던 일도 그렇고, 동료를 조금 더 의지하시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뜻밖의 말에 머리가 잠시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리나트의 눈에는 내가 동료를 의지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던 건가?

설마 맨트랩을 처치했을 때도 표정이 안 좋았던 게, 그 이유 때문이었나?


“맨트랩 일은 그게 조금 더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건데, 그렇게 비쳤을 수 있겠네요.”

지난 토벌에서도 로즈벨리아가 그렇게 하다가 에드윈에게 혼났었지.

리나트의 말대로 토벌대 인원이 이렇게나 많은데 혼자서 떠안으려고 할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나는 로즈벨리아의 기억을 흡수했을 뿐, 그녀처럼 능숙한 건 아니니까.


“……죄송합니다.”

옅은 한숨을 내쉬던 리나트가 돌연 사과의 말을 건네왔다.


“네? 갑자기 왜 사과를…….”

“로즈벨리아 경에게 화를 낼 일이 아닌데, 괜한 화풀이를 한 것 같습니다. 사실 토벌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저 자신에게 조금 화가 났던 건데…….”

“아니에요. 토벌대에 충분한 도움을 주고 계세요. 다들 이번에 함께 온 수호기사단 기사들은 어느 정도 마수에 대한 이해가 있어서 한결 수월하다고 하던데요.”

고개를 떨구고 있던 리나트가 차츰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는 나를 바라보기만 할 뿐,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괜스레 어색한 웃음을 흘리던 나는 저 멀리 보이는 토벌대 진영을 가리켰다.


“그럼 이만 돌아갈까요?”

 

 

*

이안은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수면 위로 얼굴을 드러냈다. 빌어먹을 저주 때문인지, 물속에서 숨을 참고 있는데도 힘들지 않았다.

샘 밖으로 걸어 나온 그는 누군가 헤집어놓은 듯한 수풀 앞으로 다가섰다.

조금 전까지 이 자리에 로즈벨리아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있던 사람은…….


“리나트겠지.”

거세게 뛰던 심장이 맥없이 가라앉았다. 그 두 사람이 같이 있는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황자님!”

‘그냥 죽여버리면 편할 텐데. 생각보다 간단할걸.’

이안은 제게 말을 걸어오는 환청을 무시하며 대답했다.


“왜.”

“황자님은 아예 목욕을 하신 겁니까?”

머리끝까지 흠뻑 젖은 이안을 위아래로 쳐다보던 네이슨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급히 몸을 숨기다가 이렇게 된 거야.”

“아, 그러고 보니 여기 누가 왔었죠? 말소리가 들렸거든요.”

“그래, 다행히 들키진 않았어.”

“그런데 표정이 왜 그러십니까?”

“……로즈벨리아였어.”

네이슨이 두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로즈벨리아 님이 오셨다고요? 토벌대 진영에서 이곳까지 홀로요? 왜요?”

‘왜 내 가슴이 두근거리지. 두 분이 딱 마주쳤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놀라서 경악한 줄 알았더니. 네이슨의 속마음을 들은 이안이 허탈하다는 듯 웃었다.


“그거야 나도 모르지.”

로즈벨리아라면 적어도 이 산에 오러를 쓰는 누군가가 있다는 건 알 터였다.


‘그게 나라는 건 짐작하지 못하겠지.’

그거면 됐다. 당분간은 그녀와 마주치지 않는 선에서, 로즈벨리아의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어줄 수 있는 걸로 만족했다.

그녀를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게 뭐든 할 수 있었다.


“혼자 돌아가시기에 위험하지 않을까요?”

“아마 괜찮을 거야.”

돌아갈 때는 그래도 리나트가 함께 있으니까.

가슴이 욱신거렸다. 내가 갈 수 없는 그녀의 옆자리에 다른 사람이 서 있다.

나는 설 수 없는 걸까?

네이슨을 뒤따라 걷던 이안이 잠시 멈춰 선다.

잠깐.

여차하면 그녀의 속마음이 들릴 정도로 가까웠는데, 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던 거지?

물속에 있어서 그랬다기엔 리나트의 속마음은 몇 번 전해진 것도 같았다.

그냥 하는 말과 속마음은 결이 조금 다르다. 말소리는 귀에 들리고, 속마음으로 하는 말은 전해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저는 경에게 의지되지 않는 존재입니까?’

‘토벌대가 아닌 경에게 도움을 드리고 싶었던 겁니다.’

그래, 이건 리나트가 밖으로 내뱉은 말이 아니었다. 그의 속마음이 전해진 것이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더 오랜 시간 있었던 로즈벨리아의 속마음은 한 번도 전해지지 않은 거지?


‘로즈벨리아가 속으로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아서?’

고개를 갸웃하던 이안은 네이슨의 채근에 마지못해 걸음을 떼었다.

*



“대체 누군지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싶네.”

“토벌대와 함께 다니면 좋을 텐데 말이에요.”

“엄청난 실력자인 건 확실해요. 어쩌면 소드마스터일지도 몰라요.”

수색이 끝나고 한자리에 모여들면, 다들 마수를 죽인 사람에 대한 추측을 늘어놓기 바빴다.

나는 유독 신이 난 듯한 피에르를 흘긋 보곤 평평한 바위에 걸터앉았다.

맑은 샘을 발견했던 밤. 그날 이후로 삼 일이라는 시간이 흐른 만큼 산의 중턱에 부쩍 가까워졌다. 마수의 사체는 꾸준히 발견되었다.

누군가 토벌대에 앞서 마수를 죽이는 터라, 토벌이 한결 수월해진 건 사실이었다. 아직까진 크게 다친 이도 없었다.


‘로즈벨리아, 여기 이거 발자국 같지 않아?’

‘맞네요, 발자국.’

맑은 샘을 발견했던 날, 리나트와 함께 돌아갔다가 동이 트기 전에 바네사와 그곳을 다시 찾았었다.

그때 나와 바네사가 발견한 건 토벌대 진영 쪽이 아닌 반대편으로 나 있던 발자국이었다. 샘 주변 진흙에만 몇 개 찍혀있던 거라 은신처까진 추적할 수 없었다.

토벌대 진영에서 샘까지 그리 멀지 않았으니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토벌대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을 텐데.

여태 그러지 않았다는 건, 적어도 토벌대를 위협할 생각은 없다는 거였다.


“왜 굳이 토벌대에 좋은 일을…….”

토벌대에 앞서 마수는 죽이되 토벌대 앞에는 나서지 않는 사람.

거기에 오러를 쓸 수 있는 사람.

이틀 전에는 몰래 나갔다가 토벌대 진영 근처에서 갓 죽은 마수의 사체를 목격하기도 했었다.

이 근방에 있다는 건 확실한데, 일부러 몸을 숨기는 게 아니고서야 이렇게까지 마주치지 않을 수 있나?

생각에 잠긴 사이 하늘이 부쩍 어두워졌다. 어느새 달빛만이 선명하게 빛나는 밤이 되었다. 불침번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간신히 몸만 눕힐 수 있는 아담한 크기의 임시 막사였다. 나는 곤히 잠든 바네사를 힐긋 살피곤 나갈 틈을 살폈다.


“피에르 경, 눈을 뜨십시오.”

“어차피 마수도 안 나오는데 조금 눈 붙이고 있는다고 큰일이 난답니까?”

“태평한 소리 하지 말고 제대로 하십시오.”

오늘 피에르와 루카스가 같이 불침번인가 보네.

두 사람의 목소리가 적당한 소음을 만들어주는 사이에 수풀 속으로 몸을 숨겼다.

내 짐작대로 이안이든, 이안이 아니든 이 산에 있는 다른 소드마스터의 정체를 확인할 때까지는 멈출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이곳에 있는 게 정말 너라면.

토벌대 근처를 맴돌기만 하는 게 너라면.


“나타나겠지.”

나는 토벌대 진영에서 조금 떨어져나와 큰 나무 밑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곤 나무에 등을 기댔다.

네가 내 앞에 나타날 때까지 여기서 한 발짝도 안 움직일 거야.

굳은 다짐을 한 채 눈꺼풀을 지그시 내리눌렀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다소 서늘한 바람이 다가와 머리칼을 흩트려주던 그때였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차츰 가까워졌다. 일정한 속도감이 느껴지는 걸 보니 사람의 발소리였다.

누굴까. 정말 이안 네가 여기 있는 거야?

왜인지 가슴이 콩콩 뛰었다. 드디어 얼굴을 확인할 수 있다는 기대감과 묘한 불안감이 섞여들었다.

이윽고 내 앞으로 다가오던 발소리가 멎었다. 나는 덥석 다리부터 부여잡았다.


“잡았다.”

“흐억! 왜, 왜 그러세요.”

잠깐? 이안의 목소리가 아니잖아.

즉시 몸을 일으킨 나는 남자의 얼굴부터 살폈다.

말도 안 돼. 낮게 중얼거린 나는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고개를 작게 내저어봐도 남자의 얼굴은 바뀌지 않았다.

내 앞에 나타난 사람은 이안이 아니었다. 로즈벨리아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얼굴도 아니었다.


“누구세요?”

“저, 저는 네이슨이라고 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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